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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아닌 사이

2화



그날 밤 11시.

윤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목이 뒤로 꺾일 정도로 아파트를 올려다봤다. 1층, 2층, 3층……. 차곡차곡 눈으로 층수를 셌다. 12층. 분명히 불이 켜져 있다.

“그래, 집에 있으면서 내 연락을 씹었다 이거지? 내가 이대로 포기할 줄 알아?”

코끝과 귀가 빨개질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씨였지만, 속에서 저절로 발열 효과가 나는 중이라 추위 따위 느낄 여력도 없었다. 오히려 더운 느낌이 들어 아랫입술을 길게 빼고 후, 이마로 바람을 날렸다.

그나저나 요새 아파트들은 보안이 얼마나 철저한지 1층에서 보안키나 세대주 호출을 하지 않는 이상 들어갈 수가 없다.

어떻게 들어가지? 호출해 봤자 문 안 열어 줄 텐데.

부아아앙―

때마침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풍기며 노란 머리에 붉은 볏을 단 닭 인형을 뒤집어쓴 배달원이 도착했다. 노란 닭 인형이, 아니 배달원이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네가 들어가면 내가 그냥 쉽게 들어갈 텐데 왜 안 들어가느냐는 눈치였다.

그쪽이 연락하세요, 쌩긋 웃으며 윤진은 두 손으로 공손히 인터폰을 가리킨 후 딴청을 피웠다.

곧이어 1층 문이 열리고 배달원이 들어가자 윤진이 다급하게 뒤따랐다.

“잠깐만요!”

이 사람 뭔가. 노란 닭 얼굴이 주춤하는 사이, 문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를 뛰어가 잡았다.

“타시죠?”

윤진은 나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란 의미로 층수도 물어보고 버튼도 대신 눌려 드렸다.

엘리베이터에 비친 자신을 보며 두피에 손을 넣은 그녀는 잔뜩 파마의 볼륨을 살렸다. 옆에 있는 닭의 붉은 볏과 비슷해진 모양이지만 뭐, 나쁘지 않다. 쌈닭 콘셉트도 괜찮지. 살짝 번진 아이라이너도 새끼손가락으로 정리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닭과 거울을 통해 시선이 마주쳤다.

“열쇠를 잃어버리셨나 봐요?”

인형 탈 안으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런 게 아니고.”

입을 열던 윤진이 잠깐 멈칫했다. 그러고는 곧 환하게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서프라이즈를 좀 해 주려고요.”



* * *



1207호라고 적힌 문을 노려보았다.

며칠 동안 전화 통화도 안 되고, 연락도 안 받아 저를 미치게 한 인간이 지금 저 안에 있다. 삭이지 못한 분에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윤진은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대답이 없다.

“그래, 어차피 한 번에 문 열어 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어. 그런 인간이었으면 진작에 전화를 받았겠지.”

이를 앙다물고, 다시금 손가락에 힘을 줘 벨을 꾹 눌렀다.

띵동― 띵동―

역시 아무런 기척이 없다.

나는 종일 저랑 연락하려고 그 난리를 피웠는데, 지금 내 연락 씹고 불금 보내고 있는 거 아냐? 아니면, 내가 온다는 문자 확인하고 어디로 도망갔거나.

자꾸만 그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려고 이러는 건 아닌지, 의심까지 들 지경이었다.

“내가 왜 이 고생인지, 원!”

윤진이 이번에는 신경질적으로 벨을 눌렀다.

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

어차피 아무도 없는 집. 마음껏 화풀이나 하고 갈 심산이었다. 왕년에 오락실 게임기의 버튼을 누르던 현란한 손놀림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어느새 자신이 여기 왜 와 있는지의 이유 따위는 까맣게 잊고 신나게 벨을 눌렀다. 벨을 누르는 손동작에 어느덧 쌓인 스트레스마저 날아가는 기분이다.

그때, 철컥하며 풀리는 잠금장치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드디어 저 망할 곽남주를 만나는구나, 라는 시원함보다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온몸이 뻣뻣하게 긴장되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마음 단단히 먹고 호랑이 굴 앞까지 쳐들어왔다. 온몸에 잔뜩 촉을 세우고 기다리는 순간, 문이 천천히 열리자 윤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거참 되게 시끄럽네.”

살짝 벌어진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등 뒤로 얼음 조각을 미끄러뜨린 것처럼 소름이 쫙 돋았다.

갑자기 이 상황에 녹음해 놓은 호랑이 울음소리만으로도 동물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는 기사가 생각나는 이유는 뭔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곽남주 목소리만으로 이러면 곤란하지, 이윤진.

그녀는 이를 꽉 깨물었다.

‘정신 차려 이윤진. 이젠 네가 갑이야.’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떴다.

드디어 문이 조금씩 열렸다. 어두운 굴속에서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며 나오듯, 그렇게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185센티가 넘어 보이는 큰 키와 넓은 어깨, 탄탄한 가슴이 열린 문틈 사이를 압도적으로 메웠다. 게다가 부스스한 모습과는 달리 매섭게 빛나는 눈빛은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상대방을 확인한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현관문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아무 말 없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신을 차례로 훑는 시선에 온몸에 콕콕 가시라도 박히는 기분이었다.

에이 씨. 위협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널 진짜 잡아먹는 건 아니잖아?

턱을 살짝 들고 그가 자신을 보았던 그 눈빛 그대로 두 눈에 힘을 줬다. 그러곤 그와 눈을 맞춘 후, 천천히 무시하는 눈빛으로 시선을 내렸다.

무릎 부분이 다 늘어진 회색 트레이닝팬츠와 본래 빈티지는 아니었으나, 지금은 그 어떤 빈티지 티보다 빈티지다운 흰 티.

옆집 워리를 줘도 안 물어 갈 패션, 아니 천 쪼가리. 게다가 팔짱을 끼고 뭐가 불만인지 삐딱하게 눈을 깔고 있는 모습이란.

그래, 이거지! 곽남주, 역시나 달라지지 않았어.

곽남주가 얼마나 하찮은 패션의 소유자인지 깨닫기 시작하자 윤진은 그가 조금은 만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그 표정에 그 역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너 뭐야?”

“그새 날 기억도 못 할 정도면 병원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설마 널 몰라서 이러겠어?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는 뜻이지.”

그가 팔짱을 고쳐 끼며 탐탁지 않게 말했다.

“오빠가 내 연락을 피하기만 하니까 그러잖아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래 봤자 그의 코끝에 닿을락 말락 할 뿐이다.

그 옛날 나오미 캠벨의 목숨을 위협했던 40센티짜리 하이힐이 간절해졌다. 지금 그걸 신고 저 남자를 내려다볼 수만 있다면, 목숨 따위 바칠 수도 있을 텐데. 젠장.

“네가 연락하면 내가 바로바로 받아야 하나?”

“그건 아니지만.”

윤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긴, 일방적으로 찾아오긴 했지. 하지만 꼭 일방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일을 이따위로 만든 건 그의 책임도 크다.

“하여간 자세한 건 들어가서 얘기해요.”

몸부터 들이밀었지만 바위같이 단단한 그의 몸에 튕겨져 나왔다. 이번에는 문을 더 열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꿈적도 하지 않는다.

“열어요.”

“싫은데?”

“열라니까요?”

앙다문 잇새로 최대한 위협적으로 말하며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어허. 어디 다 큰 여자가 오밤중에 외간 남자 집에 출입이야, 출입이.”

하지만 그는 오히려 어린아이 나무라듯 아랫입술을 말아 물며 눈을 치켜떴다. 그 모습에 짜증이 더욱 솟구쳐 올랐다.

“그럼 이 밖에서 얘기해요? 열어요. 지금 당장.”

문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아까보다 더 세게 흔들었다. 하지만 약 오르게 꿈쩍도 안 한다.

“이 씨.”

가방까지 팽개치고 두 손에 온몸의 힘을 실어 흔들었다. 그제야 겨우 흔들리기는 했지만 제가 들어갈 만한 공간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밖에서도, 이 안에서도 나는 너랑 할 얘기 없다. 이만 가라.”

그가 검지로 윤진의 이마를 툭 밀었다.

문손잡이를 잡아당기느라 무게 중심이 뒤로 빠져 있던 몸이 그 작은 손짓에 휘청였다. 결국 그대로 복도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

놀람과 창피함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식의 굴욕은 정말 머리털 나고 처음이다.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치욕스럽다.

잡고 일어서라며 내미는 그의 손을 툭 쳤다. 그러곤 스스로 일어나 그를 한껏 노려보았다.

“내가 애예요? 이런 장난 하지 말랬죠?”

“애 아냐? 그래, 애 아니니까 멀리 배웅 안 간다. 잘 가라, 이윤진.”

뭐라 대꾸할 사이도 없이 문이 철컥 닫혔다.

뭐야, 진짜 닫은 거야? 그럴 리가! 다급하게 문손잡이를 잡고 당겼지만 꿈적도 안 했다.

철컥철컥. 안에서 안전 장치까지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직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다. 윤진이 문 앞에 바싹 붙었다.

“오빠―아, 얘기 좀 해요오―”

천천히 나긋나긋, 다른 남자들이 껌벅 죽는 콧소리가 잔뜩 들어간 애교 있는 목소리를 냈다.

저 인간에게 이런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게 굴욕스러웠지만, 일단 집 안에 들어가야 뭘 하지.

하지만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다.

“오빠! 남주 오빠! 나 아까 넘어지다가 다친 거 같은데? 아야야.”

한층 목소리를 높여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문 안 열어 주면 폭행으로 신고할 거예요!”

이번엔 반쯤 협박을 했다.

똑똑, 똑똑. 스무 번쯤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다.

설마, 진짜 이따위로 날 밖에 두고 문을 닫은 거야? 진짜 가라고?

분노가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왔다.

“야! 곽남주?! 문 안 열어?”

깨문 아랫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뭉개졌다.

손바닥으로 철문을 쳤다. 이게 철문이 아니라 저 인간 면상이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아픈 건 제 손바닥이요, 이 철문은 타격이 없다. 마치 저 혼자 열받아 발광하고 태평한 저 인간처럼!

약이 올라 미칠 것 같았다.

“Oh Shit! 야 이 나쁜 새끼야 문 열어!”

손으로 쾅쾅, 발로 쿵쿵! 정신까지 놓고 문을 폭행했다.

왈왈, 어디선가 시끄럽다고 동네 개들이 짓기 시작했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윤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때, 다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의 현관문이 아닌 옆집 문이었다.

50대 중반에 요즘 트렌드와는 어울리지 않는 버건디 컬러의 벨벳 홈드레스를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아주머니였다.

“어머, 옆집 총각 애인인가 봐. 사랑싸움하려거든 조용히 좀 해요, 아가씨. 이거야 원, 시끄러워서 쉴 수가 있나.”

주인의 말이 맞는다는 듯, 아주머니의 팔 안에 안겨 있던 작은 치와와가 왈왈거리며 그녀를 나무랐다.

“아, 죄송합니다.”

지금이 늦은 밤 아파트 단지 안이라는 사실을 깜박했다. 목을 움츠리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그런 윤진을 아주머니가 못마땅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남녀 사이에 사귀다 헤어졌으면 쿨하게 헤어지면 되지. 뭐가 그렇게 아쉬워 오밤중에 찾아와 미련을 떨어요. 미련을 떨길. 그렇게 진상 짓을 하면 있던 남자도 다 떨어져 나가겠네.”

90도로 조아리던 허리가 순간 멈칫했다.

남녀 사이라니? 헤어진 사이라니! 미련이라니?! 어디서 누구랑 누구를 엮어 대시는 건가요?

“저, 아주머니 그런 게 아니라…….”

그딴 오해를 지구상의 생명체 그 누구에게라도 받고 싶지는 않다.

‘그건 절대 아니거든요.’ 말하려고 몸을 일으키던 찰나, 아줌마는 쏙 현관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이건 잡지사 편집장이 나잇값도 못 하고 젊은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던 50대의 애 둘 딸린 잡지사 건물주를 자신에게 찍어다 붙였을 때보다도 더 열받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일을 이따위로 만들어 버린 일주일 전 자신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 자신의 주둥이를 콱 재봉틀로 박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에게는 타임머신이 없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전쟁의 끝은 반드시 자신의 승리여야만 했다.

“두고 봐. 곽남똥!”

1207호 번호판을 바라보는 눈에 불꽃이 일었다.

꽉 주먹 쥔 손 사이로 이틀 전 10만 원이나 주고 받은 젤 네일의 파츠가 똑, 하고 부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