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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빠, 빨리요!”

“응, 나갈게.”

현관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진욱이 얼른 서류를 챙겼다. 보통날 같으면 진욱의 어머니인 윤 여사가 한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겠지만 아쉽게도 어제부터 모임에 가고 없는 터였다. 모임이 4박 5일 일정의 친목 여행이라고 했으니 앞으로 적어도 사흘은 진욱이 한을 유치원에 데려다줘야 했다.

물론 한을 아침에 챙겨 본 적도 없는 진욱은 아침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그는 평소에 한이 아침을 먹는지, 먹는다면 무엇을 먹는지, 옷은 어느 것을 입혀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윤 여사가 잘 가르친 탓인지 한은 우왕좌왕하는 진욱을 두고 혼자 씻고 나와 야무지게 시리얼을 그릇에 담아 먹었다. 그러고는 설거지통에 다 먹은 그릇을 넣고 제 방 옷장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서랍을 열어 잘 개켜진 옷을 꺼내 입었다. 결국 진욱은 아이가 스스로 준비하는 걸 멀뚱히 보다 한이 중간중간 도와 달라고 하는 부분만 거드는 것으로 아침 준비를 끝냈다.

진욱은 얼른 자신의 가방을 챙겨현관으로 갔다. 한은 이미 신발을 신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진욱 역시 빠르게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다.

한은 안아 달라는 말 한마디 없이 부지런히 조그만 발을 놀려 걸었다. 진욱은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당신을 많이 닮았어요.”



한이 태어나던 날 난희가 했던 말이었다. 그날 자신은 오늘처럼 갓 태어난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었다.

아직 주름이 많은 손을 꼬물꼬물 움직이던 아이였다. 사내아이가 눈은 어찌나 큰지 그 눈으로 저를 쳐다볼 때 진욱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딱히 정이 없던 난희에게 난생처음으로 고마움을 느꼈었다. 이대로라면 남들처럼 가정이란 것을 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아이가 태어난 다음 날 산산 조각나 버렸다.



“저기 죄송한데, 여기 708호 산, 산모 어디 갔습니까?”

“어? 아까 잠깐 나가시는 것 같던데요. 왜 그러세요? 저기요!”




잠깐 옷을 가지고 온다고 했더니 알겠다고 다녀오라고 대답하던 그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처음에 그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병원 측에 난리를 쳤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확인한 CCTV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홀로 병원을 나서는 그녀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같이 CCTV를 보던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에 술렁거렸다. 그는 주변의 반응에 그때서야 제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녀는 스스로 도망친 것이라는 걸.

사실 난희와 만난 건 술집이었다. 진욱의 사법고시 3차 시험 합격 날, 동기와 선배들이 축하해 주겠다고 갔던 술집에서 만난 것이 인연의 전부였다. 그날 진욱은 축하주를 받느라 인사불성이 되었기에 잘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다음 날 깨어나 보니 침대엔 나체인 난희와 자신이 있었다. 진욱은 당황스러움에 제 전화번호를 적어 두고 모텔을 빠져나왔었다.

그러나 일주일, 한 달이 다 지나도록 연락이 없어 진욱은 그녀를 까맣게 잊었다. 그렇게 그가 바쁜 나날을 보낸 지 8개월이 다 되어 갈 무렵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난희였다.



-당신의 아이를 낳을 곳이 필요해요.



난희는 거두절미하고 딱 이 말 한마디를 했고 진욱은 아무런 말없이 난희를 데리러 갔다. 기억이 잘 나진 않았지만 제가 저지른 일이기에 진욱은 그녀를 책임지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제집의 남는 방에 난희의 짐을 풀고 출산을 도왔다.

하지만 둘은 한집에 살면서도 아무런 이야기조차 나누지 않았다. 진욱이 바쁜 탓도 있었지만 난희 역시 진욱에게 이렇다 할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둘은 그저 다가오는 예정일에 맞춰 아이를 낳을 준비를 할 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 아이의 부모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타인처럼 생활하며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한의 생물학적 어머니는 도망갔다. 하지만 진욱의 곁엔 아이가 남았다.

CCTV를 본 후 어느 정도 상황 판단을 한 진욱은 무표정한 얼굴로 소란을 피워 죄송하다며 병원 관계자들에게 사과했다. 물론 사과를 받는 관계자들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그를 동정하는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진욱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은 중요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아이였다.

아이는 진욱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교통사고로 부모를 여읜 진욱은 보육원에 보내졌고 일주일 만에 지금의 어머니인 윤 여사의 집으로 입양되었다. 윤 여사는 처음부터 진욱을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

그 결과 진욱 역시 윤 여사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고 지금까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무한한 사랑과는 별개로 진욱의 가슴 한편엔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그와 같은 피를 나눈 생명체가 생겼다. 이제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존재가 생긴 것이다. 진욱은 난희가 도망갔다고 우울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난희가 도망친 것을 안 윤 여사가 진욱보다 더 분개했다.

당사자인 진욱은 아이를 신경 쓰기 바빴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집으로 온 아이에게 진욱은 ‘한’이라는 이름을 지어 줬고 곧장 출생신고를 하려 했다.

하지만 미혼부의 출생 신고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법원 판례로 있는 사례도 아주 소수, 극히 일부였다. 어쩔 수 없이 진욱은 재판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진욱은 대학 동기이자 자신보다 먼저 사법 시험에 통과해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상호의 도움으로 재판을 진행했다. 그렇게 꼬박 1년이 흘렀다.

그동안 아이는 윤 여사와 진욱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리고 돌아온 한의 생일날. 진욱은 드디어 아이를 제 호적에 올릴 수 있었다.



부(父) 최진욱

자(子) 최 한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단지 몇 글자 적힌 종이일 뿐인데, 진욱은 동사무소 직원에게서 건네받은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 한참을 가만히 선 진욱을 동사무소 직원이 몇 차례나 비켜 달라고 말하고서야 그는 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진욱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 주었다. 특히 길고 날카로운 눈을 가진 진욱과는 다른 큰 눈을 하고 방싯방싯 웃으며 여자아이 못지않게 자주 예쁜 짓을 했다.

아이는 윤 여사와 진욱뿐만 아니라 이웃 주민들 사이에서도 예쁨을 받았다. 아이는 어느덧 6살이 되어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다. 유치원에서도 아이는 여전히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아빠! 문 열어 주세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바짓단을 살짝 잡는 아이에 진욱은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오래 생각을 한 건지 어느새 주차장에 와 있었다. 정신을 차린 진욱은 가볍게 웃으며 차 문을 열어 주곤 아이를 카시트에 앉혔다. 아이는 유치원에 가는 것이 좋은지 연신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진욱은 그런 아이가 새삼스레 기특하게 느껴졌다.

아이가 돌을 치루고 나서야 그는 윤 여사의 말에 따라 다시 연수원에 복학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휴학계를 썼던 진욱은 다시 연수원에 들어가자 바빠졌다. 그는 연수원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상호의 아버지가 대표로 있는 대형 로펌에 스카우트되어 변호사로 일하게 되었다.

일을 시작하면서 그는 예전처럼 아이를 챙길 여력이 없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사건에 회사에서 잠드는 건 다반사였다. 그사이 아이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제 대신 할머니인 윤 여사의 보살핌으로 아직 어리지만 자신보다 남을 더 많이 생각할 줄 아는 아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한 번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분명 유치원에 가면 다른 아이들의 엄마를 볼 텐데, 할머니가 어떤 이야기를 한 건지 아이는 투정 한 번 부리지 않았다. 진욱은 그게 안쓰러우면서도 대견스러웠다.



* * *



“선생니임!”

“한아, 안녕?”

조금 이른 시간에 온 건지 진욱과 한이 유치원 앞에 도착했을 땐 등원 중인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한은 평소처럼 친구들이 많이 없어 살짝 시무룩했지만 이내 유치원 안 잔디밭에 있는 꽃에 물을 주고 있는 여자를 보곤 곧장 유치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짧은 다리로 도도도 뛰어가는 한이 걱정된 진욱이 빠르게 뒤쫓아 들어갔다.

“선생님!”

꽃에 물을 주던 연주가 갑자기 들린 아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제게 뛰어오는 한이 보였다.

“어? 한아! 오늘은 일찍 왔네?”

“네! 아빠랑 왔어요!”

“아빠?”

연주가 제 앞으로 온 아이와 대화를 하다가 곧 아이의 뒤를 따라온 진욱을 보곤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아, 네.”

“일찍 오셨네요.”

“할머니께서 여행을 가셔서요. 당분간은 조금 일찍 올 것 같은데, 이 시간에 등원해도 괜찮을는지…….”

“그럼요, 괜찮아요! 한이 일찍 오면 저야 좋죠! 한이도 좋지?”

“네!”

방싯 웃으며 안겨 드는 한을 연주가 번쩍 안아들었다.

“저기, 아버님. 한이 가방 좀…….”

한을 안아 든 손으로 진욱의 손에 들려 있는 가방을 달라 말하는 연주에 그가 곧장 가방을 들고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 당황한 연주가 진욱을 따라 들어가 한을 신발장 옆에 내려 주고 실내화를 꺼내 준 뒤 그에게 가방을 건네받았다.

진욱은 실내화로 갈아 신는 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연주는 자상한 진욱의 모습을 보고서야 그가 학부모처럼 느껴졌다.

어제 본 진욱은 아이의 아버지라기엔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오히려 젊은 삼촌쯤으로 보였다. 게다가 다른 학부형들처럼 푸근하거나 자상한 느낌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다른 학부모님들께 하는 것처럼 말을 건네기는커녕 제대로 눈도 쳐다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누가 봐도 한 아이의 아빠처럼 보였다.

특히 한을 향한 다정함이 한껏 깃든 눈을 보니 구김이 없는 아이의 밝은 성격도 이해됐다.

“저, 선생님.”

“네?”

한창 진욱과 한을 보며 상념에 빠져 있던 연주의 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번뜩 정신을 차린 연주가 진욱을 쳐다봤다.

“어제 적어 주신 글을 보고 집에서 열을 쟀는데 아직 미열이기에 따로 병원에 데려가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죄송하지만 오늘 시간이 되신다면 한이 좀 데리고 병원에 가 주실 수 있으십니까?”

“병원이요?”

“네, 아직 할머니가 돌아오지 않으셔서 아무래도 제가 늦게 데리러 올 것 같은데, 그럼 병원이 문을 닫을 것 같아서…….”

“그럼요! 제가 병원에 데리고 다녀올 테니 아버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미안한 듯 말끝을 흐리는 진욱에 연주가 냉큼 알겠다고 대답했다. 가끔이지만 진욱처럼일이 늦게 끝나는 부모 대신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던 일이 종종 있었던지라 연주는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의 말을 함께 전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연주에 진욱이 한결 마음을 놓으며 고맙다는 감사의 말을 남기고 유치원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