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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비타민을 보고 있던 아이는 낯익은 목소리에 뒤로 고개를 돌려 진욱을 발견하곤 제 아빠에게로 가기 위해 팔을 벌려 버둥거렸다. 그 바람에 연주가 살짝 휘청거리자 놀란 진욱은 재빠르게 연주의 팔을 잡아 그녀에게서 한을 받아들었다.
“최한!”
아이를 안자마자 눈을 맞추곤 엄한 목소리를 내는 진욱이었다.
“그렇게 움직이면 위험하잖아. 선생님이 넘어지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응?”
“아빠아.”
“절대 그러면 안 돼. 이건 네가 잘못한 거야. 알겠니?”
“네에.”
“선생님께도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선생니임, 잘못했어요.”
“아니야, 선생님은 괜찮아.”
“잘했어, 우리 아들. 앞으로는 조심해야 해. 알겠니?”
제 아빠에게 혼나는 것이 서러운지 아이의 큰 눈에 물기가 가득했다. 그럼에도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아이였다.
“저희 아이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에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정중히 감사 인사를 하는 진욱에 연주가 연신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다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대뜸 약을 건넸다.
먼저 약국을 나서는 연주를 따라 진욱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유치원에 한이 데리러 갔었는데 없어서 원장 선생님께 여쭤보니 여기에 있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아아. 그럼 아이 가방도 챙겨 오셨어요?”
“네. 원장 선생님께서 챙겨 주셨습니다.”
“그러셨구나. 그럼 여기서 바로 가시면 될 것 같아요.”
말을 마친 뒤 제 품에 안긴 한의 손을 잡고 살짝 흔들면서 인사를 하는 연주에 진욱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선…….”
“저는 유치원에 들렀다가 가야 해서요.”
“그럼 괜찮으시다면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저희 집이 조금 멀거든요. 그냥 한이랑 같이 들어가셔도 돼요.”
분명 유치원까지 태워 준다는 말했는데 잘못 이해했는지 난리라도 난 듯 손사래를 치며 말하는 연주의 반응에 진욱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면 연주의 목소리가 점점 커질 것 같아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저, 선생님…….”
“네?”
“저는 유치원까지를 말씀드린 겁니다.”
“네?”
“유치원까지도 안 되십니까?”
“아, 저는…….”
“선생니임! 같이 가요! 네? 우리 아빠 운전 엄청 잘하세요!”
혼자 넘치게 반응한 것 같아 창피한 나머지 얼른 거절하고 가려는데 진욱의 품에 안긴 한이 눈을 반짝이며 연주의 팔을 잡아 왔다. 연주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진욱은 피식 웃고 먼저 한을 뒷좌석 카시트에 앉혔다. 그리고서 연주에게 조수석 쪽 문을 열어 주었다.
“저 뒤에 타도 되는데…….”
조용한 목소리로 제 의견을 말했지만 진욱은 아무런 반응 없이 조수석 문을 잡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연주는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연주가 앉은 걸 보자마자 진욱이 조심히 조수석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연주는 학부모와 한 차를 타는 것, 아니 일단 학부모이기 이전에 남자랑 차를 탄 적이 처음인지라 어색해서 연신 창밖만 보며 얼른 유치원에 도착하기를 바랐다.
바람이 이뤄진 듯 몇 분 흐르지 않아서 차는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 연주는 차가 멈추자 감사하다고 말하며 튕겨지듯 빠르게 밖으로 나왔고 진욱 역시 운전석 문을 열고 나왔다.
“안 나오셔도 되는데. 어쨌든 오늘 감사했습니다. 차도 태워 주시고…….”
“아닙니다. 저 때문에 안 해도 될 고생까지 하셨는데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고생은요, 무슨.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연주가 얼른 들어가려 빠르게 인사를 하는데 마주친 진욱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 보였다.
“어어. 저기 아버님, 안색이…….”
연주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식은땀을 흘리며 미간을 찌푸리는 진욱에 연주가 당황한 듯 물었다.
“아버님, 괜찮으세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위염이 있어서 가끔 이렇게…….”
“위염이요? 잠시만요!”
사실 운전을 하면서부터 조금씩 통증을 느꼈던 진욱은 연주를 빨리 내려 주고 얼른 집에 가려 했었다. 그런데 하필 연주에게 인사하던 중 갑자기 가위로 위를 찢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말았다. 연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 안심시키려 괜찮다고 대답했다.
결국 연주가 헐레벌떡 유치원 안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진욱이 제 가슴 쪽에 손을 대고 쓱쓱 문질렀다. 등 역시 쓰다듬듯 한 번 쭉 두드렸다. 조금이나마 통증이 수그러든 진욱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때마침 연주 역시 유치원에서 뛰어나왔다. 급하게 다녀왔는지 숨을 채 고르지도 못한 연주가 팩 하나를 건넸다.
“이거 드세요.”
“전, 괜찮습니다.”
“그래도 얼른 이거 드세요!”
“이게 뭔데 그러십니까?”
“양배추 즙이에요. 위염, 위경련에 효과가 직통이래요!”
“아아…….”
“사실 저도 오늘 낮에 위경련이 왔었거든요. 앞자리 선생님이 하나 주셨어요.”
“그럼 선생님께서 드셔야 할 텐데 왜 저한테…….”
“저는 이제 괜찮아요. 저보단 아버님이 심하신 것 같은데, 얼른 드세요.”
자기는 괜찮다며 얼른 마시라는 연주의 말에 진욱이 제 손에 들린 양배추 즙 귀퉁이를 찢어 입을 대지 않고 반을 마셨다. 그리고서 즙이 반이나 남은 팩을 연주에게 건넸다.
“선생님도 드십시오. 입 안 댔습니다.”
연주는 자신에게 팩을 쥐여 주고 저를 쳐다보고 있는 진욱이 부담스러워 얼른 고개를 돌려 남아 있는 즙을 마셨다. 그러자 진욱은 다시 팩을 건네받아 유치원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팩을 버리고 다시 제 앞으로 다가오는 진욱에 연주는 왠지 모르게 다시금 그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분명 아침에 만났을 때만해도 진욱을 학부모처럼 대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
연주의 생각을 알리 없는 진욱은 멍하니 서 있는 연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퇴근하시는 겁니까?”
“네? 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타고 가십시오.”
“아니요. 그러지 않으셔도…….”
“오늘 여러모로 감사해서 그럽니다.”
“아니, 저…….”
연주의 말을 뒤로하고 까딱 고개를 숙인 뒤 운전석 문을 열고 들어가 앉는 진욱에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다 작게 한숨을 쉬곤 다시 유치원으로 들어갔다.
진욱은 어디 죽으러 가는 듯 천천히 유치원으로 들어가는 연주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선생님이 아니라 유치원생 같네.
처음 한을 데리러 왔을 때 진욱은 연주를 보고 선생님이 아닌 줄 알았다. 연주가 메고 있던 앞치마만 아니었다면 선생님 좀 불러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화장을 안 했음에도 잡티 하나 없는 말간 피부와 작은 체구, 어깨에서 찰랑이는 결 좋은 머릿결까지. 흡사 고등학생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 모습에 진욱은 작게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굉장히 어려 보이는데, 과연 애들은 잘 가르칠까 하는.
하지만 집으로 와 한의 몸 상태를 체크해 써 준 원아 수첩을 봤을 때 진욱은 의구심을 지울 수 있었다.
꽤 괜찮은 선생님 같아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방금 자신까지 챙기는 행동에 연주에 대한 인식은 좋은 쪽으로 굳혀졌다.
양배추 즙이라니. 처음 연주가 내민 걸 받아 들었을 때 뭐지 싶었지만 생각보다 효과가 있는 것인지 아까보다 속이 한결 편해졌다. 그 답례로 진욱은 연주를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자꾸 연주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피곤하긴 해도 오늘 연주를 집에 데려다 줌으로써 제가 받은 호의를 갚는 셈 치기로 했다.
그동안 한을 신경 써 준 걸 생각해 여차하면 어머니께 조그마한 선물을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지.
“아빠아.”
“어? 한이 왜?”
챙길 것이 많은지 아직 나오지 않은 연주에 유치원 문 쪽을 바라보고 있던 진욱의 귀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욱은 아이를 제대로 보기 위해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아이는 약국에서부터 방금 전까지 잠들었던 탓에 뺨이 발그레한 채 열이 올라 있었다.
“잘 잤니, 우리 아들?”
카시트가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한 진욱이 벨트를 풀어내고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러자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아이는 진욱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안겼다. 진욱이 아이의 등을 슬슬 쓸어내렸다.
“한이 피곤하면 더 잘까? 아니, 배고프지 않아?”
“으음.”
확실히 잠에서 덜 깬 것 같은 반응이었다. 진욱은 아이를 좀 더 재워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등을 토닥였다.
그때 유치원에서 연주가 걸어 나왔다. 연주는 차 안에 있어야 할 진욱이 유치원 앞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에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다가왔다.
“혹시 한이 아픈가요?”
“아닙니다. 잠깐 깨서 다시 재우려고 그럽니다.”
“그럼 얼른 들어가 보세요.”
“그래도…….”
“저까지 데려다주시면 아이가 차 안에서 불편하게 자야 하잖아요. 저는 상관없으니까 얼른 들어가셔서 편하게 재워 주세요.”
살짝 떨어지려는 한의 고개를 다시 진욱의 어깨 위로 살짝 올려 준 연주가 얼른 들어가라며 인사했다. 진욱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 한을 뒷좌석에 눕혔다.
“그럼 오늘 감사했던 일은 다음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진짜 안 그러셔도 돼요. 선생님으로서 당연하게 해야 하는 일인걸요. 오히려 아버님께서 자꾸 그런 말씀하시니까 조금 민망하네요.”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네, 안녕히 들어가세요!”
진욱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빠르게 유치원 골목을 벗어났다. 차가 유치원 골목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연주가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불편하게 저 차에 타고 갔어야 했는데 때마침 한이 깨어나 다행이었다.
다시금 살았다는 안도의 숨을 내쉰 연주는 빠른 걸음으로 유치원을 벗어났다.
부랴부랴 걸음을 재촉한 보람이 있는지 다행히 연주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바로 탈 수 있었다. 빈자리에 앉은 연주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와 함께 메시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부재중 전화는 어차피 주인아저씨가 분명하기에 메시지를 먼저 확인한 연주는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다름 아닌 돈이 입금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낮에 전화가 왔을 때 설마 했는데 이 정도로 빠르게 돈을 입금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연주였다. 이걸로 꼼짝없이 집에서 쫓겨날 일이 분명해졌다. 연주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끼며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렸음에도 주인집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연주는 막막함에 몇 번이고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주인집은 끝내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이렇게 쫓겨나는 건가. 앞으로는 어디서 지내야 하는 거지?
끊임없이 드는 생각에 연주는 하마터면 집 앞 정류장을 지나칠 뻔했다.
급하게 버스에서 내린 연주는 얼른 집으로 향했다. 혹시나 주인집 아저씨가 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다분했다. 하지만 매일 같이 앉아 있던 평상엔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계셨다면 직접 이야기를 할 텐데. 이렇게 돈만 입금하고 얼굴은 보여 주지도 않는 바람에 연주는 더욱 막막함을 느꼈다. 연주는 얼른 집 안에 가방을 내려 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저씨, 아주머니! 안 계세요? 저 윗집이에요!”
초인종도 누르고 문도 두드렸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는지 어떤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시끄럽게 굴다가 그만뒀다. 혹시 저를 만나는 게 싫어서 그러시는 건가 싶은 생각에 연주는 어쩔 수 없이 대문 밖으로 나왔다.
터덜터덜 걸어 동네 아래에 있는 부동산으로 향했다. 당장 막막함을 없애기 위해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루 빨리 집을 구하는 수밖엔 없었다.
비타민을 보고 있던 아이는 낯익은 목소리에 뒤로 고개를 돌려 진욱을 발견하곤 제 아빠에게로 가기 위해 팔을 벌려 버둥거렸다. 그 바람에 연주가 살짝 휘청거리자 놀란 진욱은 재빠르게 연주의 팔을 잡아 그녀에게서 한을 받아들었다.
“최한!”
아이를 안자마자 눈을 맞추곤 엄한 목소리를 내는 진욱이었다.
“그렇게 움직이면 위험하잖아. 선생님이 넘어지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응?”
“아빠아.”
“절대 그러면 안 돼. 이건 네가 잘못한 거야. 알겠니?”
“네에.”
“선생님께도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선생니임, 잘못했어요.”
“아니야, 선생님은 괜찮아.”
“잘했어, 우리 아들. 앞으로는 조심해야 해. 알겠니?”
제 아빠에게 혼나는 것이 서러운지 아이의 큰 눈에 물기가 가득했다. 그럼에도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아이였다.
“저희 아이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에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정중히 감사 인사를 하는 진욱에 연주가 연신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다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대뜸 약을 건넸다.
먼저 약국을 나서는 연주를 따라 진욱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유치원에 한이 데리러 갔었는데 없어서 원장 선생님께 여쭤보니 여기에 있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아아. 그럼 아이 가방도 챙겨 오셨어요?”
“네. 원장 선생님께서 챙겨 주셨습니다.”
“그러셨구나. 그럼 여기서 바로 가시면 될 것 같아요.”
말을 마친 뒤 제 품에 안긴 한의 손을 잡고 살짝 흔들면서 인사를 하는 연주에 진욱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선…….”
“저는 유치원에 들렀다가 가야 해서요.”
“그럼 괜찮으시다면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저희 집이 조금 멀거든요. 그냥 한이랑 같이 들어가셔도 돼요.”
분명 유치원까지 태워 준다는 말했는데 잘못 이해했는지 난리라도 난 듯 손사래를 치며 말하는 연주의 반응에 진욱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면 연주의 목소리가 점점 커질 것 같아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저, 선생님…….”
“네?”
“저는 유치원까지를 말씀드린 겁니다.”
“네?”
“유치원까지도 안 되십니까?”
“아, 저는…….”
“선생니임! 같이 가요! 네? 우리 아빠 운전 엄청 잘하세요!”
혼자 넘치게 반응한 것 같아 창피한 나머지 얼른 거절하고 가려는데 진욱의 품에 안긴 한이 눈을 반짝이며 연주의 팔을 잡아 왔다. 연주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진욱은 피식 웃고 먼저 한을 뒷좌석 카시트에 앉혔다. 그리고서 연주에게 조수석 쪽 문을 열어 주었다.
“저 뒤에 타도 되는데…….”
조용한 목소리로 제 의견을 말했지만 진욱은 아무런 반응 없이 조수석 문을 잡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연주는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연주가 앉은 걸 보자마자 진욱이 조심히 조수석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연주는 학부모와 한 차를 타는 것, 아니 일단 학부모이기 이전에 남자랑 차를 탄 적이 처음인지라 어색해서 연신 창밖만 보며 얼른 유치원에 도착하기를 바랐다.
바람이 이뤄진 듯 몇 분 흐르지 않아서 차는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 연주는 차가 멈추자 감사하다고 말하며 튕겨지듯 빠르게 밖으로 나왔고 진욱 역시 운전석 문을 열고 나왔다.
“안 나오셔도 되는데. 어쨌든 오늘 감사했습니다. 차도 태워 주시고…….”
“아닙니다. 저 때문에 안 해도 될 고생까지 하셨는데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고생은요, 무슨.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연주가 얼른 들어가려 빠르게 인사를 하는데 마주친 진욱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 보였다.
“어어. 저기 아버님, 안색이…….”
연주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식은땀을 흘리며 미간을 찌푸리는 진욱에 연주가 당황한 듯 물었다.
“아버님, 괜찮으세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위염이 있어서 가끔 이렇게…….”
“위염이요? 잠시만요!”
사실 운전을 하면서부터 조금씩 통증을 느꼈던 진욱은 연주를 빨리 내려 주고 얼른 집에 가려 했었다. 그런데 하필 연주에게 인사하던 중 갑자기 가위로 위를 찢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말았다. 연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 안심시키려 괜찮다고 대답했다.
결국 연주가 헐레벌떡 유치원 안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진욱이 제 가슴 쪽에 손을 대고 쓱쓱 문질렀다. 등 역시 쓰다듬듯 한 번 쭉 두드렸다. 조금이나마 통증이 수그러든 진욱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때마침 연주 역시 유치원에서 뛰어나왔다. 급하게 다녀왔는지 숨을 채 고르지도 못한 연주가 팩 하나를 건넸다.
“이거 드세요.”
“전, 괜찮습니다.”
“그래도 얼른 이거 드세요!”
“이게 뭔데 그러십니까?”
“양배추 즙이에요. 위염, 위경련에 효과가 직통이래요!”
“아아…….”
“사실 저도 오늘 낮에 위경련이 왔었거든요. 앞자리 선생님이 하나 주셨어요.”
“그럼 선생님께서 드셔야 할 텐데 왜 저한테…….”
“저는 이제 괜찮아요. 저보단 아버님이 심하신 것 같은데, 얼른 드세요.”
자기는 괜찮다며 얼른 마시라는 연주의 말에 진욱이 제 손에 들린 양배추 즙 귀퉁이를 찢어 입을 대지 않고 반을 마셨다. 그리고서 즙이 반이나 남은 팩을 연주에게 건넸다.
“선생님도 드십시오. 입 안 댔습니다.”
연주는 자신에게 팩을 쥐여 주고 저를 쳐다보고 있는 진욱이 부담스러워 얼른 고개를 돌려 남아 있는 즙을 마셨다. 그러자 진욱은 다시 팩을 건네받아 유치원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팩을 버리고 다시 제 앞으로 다가오는 진욱에 연주는 왠지 모르게 다시금 그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분명 아침에 만났을 때만해도 진욱을 학부모처럼 대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
연주의 생각을 알리 없는 진욱은 멍하니 서 있는 연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퇴근하시는 겁니까?”
“네? 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타고 가십시오.”
“아니요. 그러지 않으셔도…….”
“오늘 여러모로 감사해서 그럽니다.”
“아니, 저…….”
연주의 말을 뒤로하고 까딱 고개를 숙인 뒤 운전석 문을 열고 들어가 앉는 진욱에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다 작게 한숨을 쉬곤 다시 유치원으로 들어갔다.
진욱은 어디 죽으러 가는 듯 천천히 유치원으로 들어가는 연주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선생님이 아니라 유치원생 같네.
처음 한을 데리러 왔을 때 진욱은 연주를 보고 선생님이 아닌 줄 알았다. 연주가 메고 있던 앞치마만 아니었다면 선생님 좀 불러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화장을 안 했음에도 잡티 하나 없는 말간 피부와 작은 체구, 어깨에서 찰랑이는 결 좋은 머릿결까지. 흡사 고등학생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 모습에 진욱은 작게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굉장히 어려 보이는데, 과연 애들은 잘 가르칠까 하는.
하지만 집으로 와 한의 몸 상태를 체크해 써 준 원아 수첩을 봤을 때 진욱은 의구심을 지울 수 있었다.
꽤 괜찮은 선생님 같아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방금 자신까지 챙기는 행동에 연주에 대한 인식은 좋은 쪽으로 굳혀졌다.
양배추 즙이라니. 처음 연주가 내민 걸 받아 들었을 때 뭐지 싶었지만 생각보다 효과가 있는 것인지 아까보다 속이 한결 편해졌다. 그 답례로 진욱은 연주를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자꾸 연주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피곤하긴 해도 오늘 연주를 집에 데려다 줌으로써 제가 받은 호의를 갚는 셈 치기로 했다.
그동안 한을 신경 써 준 걸 생각해 여차하면 어머니께 조그마한 선물을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지.
“아빠아.”
“어? 한이 왜?”
챙길 것이 많은지 아직 나오지 않은 연주에 유치원 문 쪽을 바라보고 있던 진욱의 귀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욱은 아이를 제대로 보기 위해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아이는 약국에서부터 방금 전까지 잠들었던 탓에 뺨이 발그레한 채 열이 올라 있었다.
“잘 잤니, 우리 아들?”
카시트가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한 진욱이 벨트를 풀어내고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러자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아이는 진욱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안겼다. 진욱이 아이의 등을 슬슬 쓸어내렸다.
“한이 피곤하면 더 잘까? 아니, 배고프지 않아?”
“으음.”
확실히 잠에서 덜 깬 것 같은 반응이었다. 진욱은 아이를 좀 더 재워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등을 토닥였다.
그때 유치원에서 연주가 걸어 나왔다. 연주는 차 안에 있어야 할 진욱이 유치원 앞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에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다가왔다.
“혹시 한이 아픈가요?”
“아닙니다. 잠깐 깨서 다시 재우려고 그럽니다.”
“그럼 얼른 들어가 보세요.”
“그래도…….”
“저까지 데려다주시면 아이가 차 안에서 불편하게 자야 하잖아요. 저는 상관없으니까 얼른 들어가셔서 편하게 재워 주세요.”
살짝 떨어지려는 한의 고개를 다시 진욱의 어깨 위로 살짝 올려 준 연주가 얼른 들어가라며 인사했다. 진욱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 한을 뒷좌석에 눕혔다.
“그럼 오늘 감사했던 일은 다음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진짜 안 그러셔도 돼요. 선생님으로서 당연하게 해야 하는 일인걸요. 오히려 아버님께서 자꾸 그런 말씀하시니까 조금 민망하네요.”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네, 안녕히 들어가세요!”
진욱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빠르게 유치원 골목을 벗어났다. 차가 유치원 골목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연주가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불편하게 저 차에 타고 갔어야 했는데 때마침 한이 깨어나 다행이었다.
다시금 살았다는 안도의 숨을 내쉰 연주는 빠른 걸음으로 유치원을 벗어났다.
부랴부랴 걸음을 재촉한 보람이 있는지 다행히 연주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바로 탈 수 있었다. 빈자리에 앉은 연주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와 함께 메시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부재중 전화는 어차피 주인아저씨가 분명하기에 메시지를 먼저 확인한 연주는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다름 아닌 돈이 입금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낮에 전화가 왔을 때 설마 했는데 이 정도로 빠르게 돈을 입금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연주였다. 이걸로 꼼짝없이 집에서 쫓겨날 일이 분명해졌다. 연주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끼며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렸음에도 주인집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연주는 막막함에 몇 번이고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주인집은 끝내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이렇게 쫓겨나는 건가. 앞으로는 어디서 지내야 하는 거지?
끊임없이 드는 생각에 연주는 하마터면 집 앞 정류장을 지나칠 뻔했다.
급하게 버스에서 내린 연주는 얼른 집으로 향했다. 혹시나 주인집 아저씨가 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다분했다. 하지만 매일 같이 앉아 있던 평상엔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계셨다면 직접 이야기를 할 텐데. 이렇게 돈만 입금하고 얼굴은 보여 주지도 않는 바람에 연주는 더욱 막막함을 느꼈다. 연주는 얼른 집 안에 가방을 내려 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저씨, 아주머니! 안 계세요? 저 윗집이에요!”
초인종도 누르고 문도 두드렸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는지 어떤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시끄럽게 굴다가 그만뒀다. 혹시 저를 만나는 게 싫어서 그러시는 건가 싶은 생각에 연주는 어쩔 수 없이 대문 밖으로 나왔다.
터덜터덜 걸어 동네 아래에 있는 부동산으로 향했다. 당장 막막함을 없애기 위해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루 빨리 집을 구하는 수밖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