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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생각할수록 재밌는 관계
“이건 솔직히 저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긴 한데요…….”
여주가 잠시 말을 골랐다. 조금 난감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곧 예쁜 얼굴을 당당하게 들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사실대로 얘기해야 현을 설득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이미 아시겠지만 전 이무기 아저씨들 같은 존재들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안을 가지고 태어났어요.”
여주의 큰 눈이 유난스레 반짝였다.
그녀의 시선이 이룡과 현의 머리 위쪽 어디쯤을 훑었다.
“제 눈에는 아저씨들의 오라가 아주 선명하게 보여요. 음, 옆에 아저씨는 하얗고 매끈한 커다란 뱀이고, 아저씨는…….”
여주가 슬핏 고개를 갸우뚱 하며 이마를 구겼다. 뭔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참 신기하네요. 그쪽 아저씬 생긴 건 잘생겼는데 어째…….”
말끝을 흐리는 여주를 보며 현의 이마도 구겨진다.
스스로도 여주의 말끝이 어떤 내용을 숨기고 있는지 짐작됐기 때문이었다.
“거 되게 괴팍해 보이네. 시꺼멓고 시뻘겋고. 뭐 이리 험악하게 생겼데요? 이렇게 못돼 먹어 보이기도 힘들겠다.”
여주가 현의 오라를 보며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이룡은 여주의 얘기에 ‘푸흡’하고 웃음을 터트리다 현의 눈치에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현이 썩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여주의 얘기를 독촉했다. 으름장도 잊지 않았다.
“쓸데없는 얘긴 그만두시고 본론이나 마무리하시죠? 진심으로 바라 건데 제가 아가씨를 한 입에 삼켜 버릴 수도 있다는 점 제발 머리 한쪽에 각인을 좀 하고 계셨으면 합니다.”
“아유! 까칠하시긴. 성격이 딱이네. 저 오라랑.”
여주의 핀잔에 현의 한쪽 눈썹이 치솟았다. 이룡은 알고 있었다. 저건 위험 신호였다. 현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신호.
이룡이 다급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야! 너, 그거, 그거! 너 내 얼굴 한 번 만져 보고는 내가 뭘 찾고 싶어 하는지 딱 알아냈잖아. 그건 뭐야! 그것도 신안으로 보이는 거야?”
“아뇨. 그건 보이는 게 아니라 느껴지는 거예요. 저희 할아버지께선 그 능력을 거울 감(鑑)자를 써서 신감(神鑑)이라고 부르셨죠.”
다행히도 이룡의 처방은 적절했던 듯했다.
현이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듯 몸을 앞으로 내밀고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룡이 이에 쐐기를 박고자 되물었다.
“신감이라고?”
“말 그대로 거울을 통해 보는 것처럼 상대방의 심상이 제 마음에 맺혀드는 거예요.”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여주를 보다 말을 이었다.
“단 우선 신체 접촉이 있어야 해요. 손을 잡는다거나 뺨을 만진다거나. 그러면 상대방의 바라는 바 혹은 찾고 있는 것 등이 이미지화 돼서 제 마음에 맺혀요. 처음부터 제가 그것을 원하고 찾고 있었던 것처럼 전 그 마음에 동화되고요.”
“신감이라……. 들어 본 적 있습니다. 단순히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바라는 물건의 본질을 알아낼 수도 있다 하던데…….”
현이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현의 그 삐뚜룸한 표정은 금세 다시 돌아와 여주의 기를 팍팍 깎아내렸다.
“신안에 이어서 신감이라. 대단하군요.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그 진귀한 능력을 두 가지나…….”
현의 냉소적인 어투가 자신을 비꼬는 것으로 느껴졌는지 여주가 발끈 목소리를 높였다.
“뭐예요? 못 믿겠다는 건가요? 손 이리 내 봐요. 당장 증명해 드릴게요.”
여주가 불쑥 손을 뻗어 식탁 위에 올려 두었던 현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미수로 그치고 말았다. 현이 재빠르게 피했기 때문이다.
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여주의 눈에 현의 위협적인 검은 오라가 더욱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화염을 흘리는 게 보였다. 현의 목소리가 나직이 이어졌다.
“말씀하신 그 능력이 진짜든 가짜든 아가씨와 손을 잡는 일은 별로 유쾌할 것 같지 않군요. 일단 얘기를 계속해 보시죠. 그래서 어떻다는 거죠?”
현의 으르렁거림에 무안하기도 하고 동시에 겁이 나기도 하는 여주였다. 하지만 자신이 겁먹었다는 걸 드러낼 수는 없었다.
“겁내하시기는. 좋아요. 일단 계약부터 마무리해야 하니까. 아까 이 아저씨를 스캔했을 때, 아! 전 이 능력을 스캔이라고 불러요. 신안이니 신감이니 너무 딱딱해서. 여튼, 아까 이 아저씨 스캔했을 때 세 가지가 떠오르더라고요. 달항아리, 망할 놈, 여의주.”
여주의 말에 이룡이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렸다. 소위 만신(萬神)을 대하는 듯했다.
신기(神氣) 제대로 오른 점쟁이를 마주하고 앉아, 딱딱 맞아떨어지는 점괘에 소름 돋아하는, 그러면서도 박수까지 쳐대며 열렬히 호응하는 아줌마가 따로 없었다.
“그중 도자기와 망할 놈에 대한 이미지는 자세하게 떠오르는데 여의주는 글자 말고는 더 이상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더란 말이죠. 찾고자 하는 열망은 ‘여의주’에서 가장 크게 느껴지는데 말이죠.”
이룡이 또다시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현이 그런 이룡을 슬깃 흘겨보았다. 이무기 체통은 저 999살 노땅 이무기가 다 말아 먹는 듯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어요. 스캔 후에 여의주가 어디 있는지, 그것을 찾는 ‘길’을 물어봤죠.”
현의 눈이 의아함으로 가늘어졌다. 그건 이룡도 마찬가지였다.
“물어본다고요? 누구에게?”
현의 질문에 여주가 ‘아차!’ 싶은 듯 흠칫거렸다. 이어 말하기 난감한지 눈꼬리를 내리고 비긋이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망설임이 묻어났다.
여주는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그게……. 제겐 아주 유능한 친구가 하나 있어요. ‘길’을 아주 잘 알려 주는 친구가요.”
현이 그 망설임의 기운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 친구에 대해 자세히 묻기도 전에 여주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하여튼 그 친구에게 아저씨의 여의주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 친구가 미출(未出)이라 답하더군요. 다시 말해 아직 세상에 나타나질 않은 거죠.”
여주가 말을 멈추고 잠시 뜸을 들였다. 이룡은 여주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인상을 구겼다.
“뭐야? 그럼 내 여의주는 찾을 수가 없는 거야? 1000년이 지나도 2000년이 지나도?”
“저희 할아버지께 들은 얘기가 있어요. 여의주는 존재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태어나서는 또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라 하셨어요. 그래서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고요. 모든 이무기가 여의주를 찾는 것도 아니고, 또 그 기회를 얻는다 하더라도 일생에 한 번뿐일 거라고요.”
순간 이룡이 현의 얼굴을 흘깃 쳐다봤다. 현은 무표정하게 여주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현은 여의주를 얻을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자신 때문에 그 귀한 기회를 놓쳤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룡은 새삼스레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여주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결국 지금 당장은 아저씨의 여의주를 찾을 수가 없는 거죠. 또 다른 문제는 이 시간 이후 아저씨의 여의주가 나타난다 해도 스캔 내용이 업그레이드되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찾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입력하는 자료가 똑같으니 결국 답은 미출로 나오겠죠.”
이룡의 고개가 또다시 갸우뚱 기울었다. 뭔가 생각나는 게 있어서였다.
그러더니 이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물이 들었다.
“그럼 여의주를 찾기 위해선 계속 내 손을 잡고 있어야 하는 거야? 잘 때도 계속?”
여주가 갸름한 눈으로 이룡을 째려봤다.
지금까지 자기가 설명한 대로라면 저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지만,
이룡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이 영 엉큼해 보여서 맘에 안 들었다.
“아쉽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네요. 한 번 입력된 스캔 자료를 업그레이드 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해요. 그냥 아저씨 주변에 머물기만 해도 되거든요.”
엉큼한 생각 말라는 눈빛을 담아 여주가 이룡을 슬쩍 흘겨보았다.
“아저씬 못 느끼시겠지만 처음 스캔을 했을 때 아저씨와 저 사이에 심상 연결선이 만들어졌어요. 그 연결선이 아저씨의 심상을 지속적으로 알려 줄 거예요. 지금껏 시험해 본 바로는 1리(里), 그러니까 400m 정도까지는 심상 연결선이 이어지더라고요.”
이룡이 아쉬움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현은 그런 이룡을 보며 피식 웃어보이고는 여주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제가 여기서, 아저씨 옆에서 상시 대기하겠다는 거예요. 아저씨의 심상이 변하는 순간 바로 길을 찾아낼 수 있게요.”
현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현의 입장에서는 여주의 말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지만 여주에게는 그 모습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그게 ‘여기서 먹고 자고’라는 말로 표현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찰나에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여의주를 찾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란 걸 감안한다면 좋은 투자라고 생각해요.”
여주가 말을 끝내고 방긋 웃었다. 잘 봐주십사 아부 섞인 인사치레였다.
현은 현대로, 이룡은 이룡대로 생각에 잠겨 들었다. 현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생각할수록 재밌는 관계군요.”
“네?”
여주가 되물었다.
“아가씨가 신안과 신감을 이용해 스캔을 하는 행위가 ‘자료를 입력’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아가씨의 친구가 ‘길을 알려 준다’고 하니……. 마치 친구분이 아가씨와 일심동체인 컴퓨터나 되는 것 같잖아요.”
현의 말에 여주의 얼굴이 당황함으로 붉게 물들었다.
“지,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해서 내가 여기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조항은 어떻게 할 거냐고요?”
여주가 당황함을 감추고자 목소리를 높였다. 현이 느긋하게 몸을 뒤로 기대며 입을 열었다. 현의 느긋함이 여주를 더욱 조바심 나게 했다.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엥? 두 가지나 있어? 그냥 여기서 같이 살면 안 되는 거야?”
이룡이었다.
“도련님은 좀 빠져 계시지요. 이 모든 사달이 도련님의 칠칠치 못함 때문이거든요.”
현의 타박에 이룡은 찍 소리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라고 딱히 부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이 여주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아가씨의 능력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우리를 알아봤으니 신안도 진짜, 도련님의 심상을 읽어 냈으니 신감이라는 능력도 진짜인 듯한데, 과연 물건을 찾는 능력, 그러니까 친구분의 능력도 진짜냐 이거죠.”
현의 말에 여주가 발끈하여 뭔가 반박을 하려다가 입 다물고 들으라는 듯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바로 말을 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문제는 저희의 재정 상태가 아가씨를 먹여 살릴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는 겁니다.”
말을 끝내지 못하고 현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이룡을 한 번 째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정말 창피한 일이긴 합니다만, 저희 도련님이 아주 귀하디귀하다는, 인간에게 사기당하는 몇 안 되는 이무기라서 말입니다.”
“야, 현! 거기서 그 얘기는 왜 나오는데?”
얼굴이 새빨개진 이룡이 벌떡 일어나 현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주는 이건 또 무슨 얘긴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기울였다. 아까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무기를 상대로 사기를 치겠어요?’라고 말한 게 무색해지는 참이었다.
현은 이룡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건 말건, 그에 대한 건 깔끔히 무시한 채 한풀이하듯 말을 이어 쏟아 냈다.
“일해 주고 돈 못 받은 건 부지기수고. 투자 사기에 증권 사기에 심지어는 수십 건의 보이스피싱까지. 허당도 이런 허당이 없으시니. 통장에 0원 찍힌 건 벌써 오래 전이고 요즘은 거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수준이…….”
“혀어언!”
현의 느닷없는 폭로전에 이룡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침통한 어조는 물론이고 눈물 찍어 내는 연기까지 선보이는 현. 벌게진 얼굴로 씩씩대는 이룡.
여주는 이 둘을 보면서 ‘이 두 사람 참 재미있게 사는구나’라는 생각에 난감한 미소를 흘렸다.
잠시 후, 현이 이쯤하면 됐다 싶었는지 마지막으로 약 올리듯 이룡에게 한 번 씨익 웃어 주고는 다시 여주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니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제안을 하는 현의 표정이 매우 의뭉해 보였다. 뭔가 꿍꿍이가 가득한 표정이다.
절로 긴장이 되었지만 여주로서는 현의 의뭉한 제안을 들어 볼 수밖에 없었다.
“네? 어떻게요?”
생각할수록 재밌는 관계
“이건 솔직히 저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긴 한데요…….”
여주가 잠시 말을 골랐다. 조금 난감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곧 예쁜 얼굴을 당당하게 들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사실대로 얘기해야 현을 설득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이미 아시겠지만 전 이무기 아저씨들 같은 존재들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안을 가지고 태어났어요.”
여주의 큰 눈이 유난스레 반짝였다.
그녀의 시선이 이룡과 현의 머리 위쪽 어디쯤을 훑었다.
“제 눈에는 아저씨들의 오라가 아주 선명하게 보여요. 음, 옆에 아저씨는 하얗고 매끈한 커다란 뱀이고, 아저씨는…….”
여주가 슬핏 고개를 갸우뚱 하며 이마를 구겼다. 뭔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참 신기하네요. 그쪽 아저씬 생긴 건 잘생겼는데 어째…….”
말끝을 흐리는 여주를 보며 현의 이마도 구겨진다.
스스로도 여주의 말끝이 어떤 내용을 숨기고 있는지 짐작됐기 때문이었다.
“거 되게 괴팍해 보이네. 시꺼멓고 시뻘겋고. 뭐 이리 험악하게 생겼데요? 이렇게 못돼 먹어 보이기도 힘들겠다.”
여주가 현의 오라를 보며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이룡은 여주의 얘기에 ‘푸흡’하고 웃음을 터트리다 현의 눈치에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현이 썩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여주의 얘기를 독촉했다. 으름장도 잊지 않았다.
“쓸데없는 얘긴 그만두시고 본론이나 마무리하시죠? 진심으로 바라 건데 제가 아가씨를 한 입에 삼켜 버릴 수도 있다는 점 제발 머리 한쪽에 각인을 좀 하고 계셨으면 합니다.”
“아유! 까칠하시긴. 성격이 딱이네. 저 오라랑.”
여주의 핀잔에 현의 한쪽 눈썹이 치솟았다. 이룡은 알고 있었다. 저건 위험 신호였다. 현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신호.
이룡이 다급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야! 너, 그거, 그거! 너 내 얼굴 한 번 만져 보고는 내가 뭘 찾고 싶어 하는지 딱 알아냈잖아. 그건 뭐야! 그것도 신안으로 보이는 거야?”
“아뇨. 그건 보이는 게 아니라 느껴지는 거예요. 저희 할아버지께선 그 능력을 거울 감(鑑)자를 써서 신감(神鑑)이라고 부르셨죠.”
다행히도 이룡의 처방은 적절했던 듯했다.
현이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듯 몸을 앞으로 내밀고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룡이 이에 쐐기를 박고자 되물었다.
“신감이라고?”
“말 그대로 거울을 통해 보는 것처럼 상대방의 심상이 제 마음에 맺혀드는 거예요.”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여주를 보다 말을 이었다.
“단 우선 신체 접촉이 있어야 해요. 손을 잡는다거나 뺨을 만진다거나. 그러면 상대방의 바라는 바 혹은 찾고 있는 것 등이 이미지화 돼서 제 마음에 맺혀요. 처음부터 제가 그것을 원하고 찾고 있었던 것처럼 전 그 마음에 동화되고요.”
“신감이라……. 들어 본 적 있습니다. 단순히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바라는 물건의 본질을 알아낼 수도 있다 하던데…….”
현이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현의 그 삐뚜룸한 표정은 금세 다시 돌아와 여주의 기를 팍팍 깎아내렸다.
“신안에 이어서 신감이라. 대단하군요.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그 진귀한 능력을 두 가지나…….”
현의 냉소적인 어투가 자신을 비꼬는 것으로 느껴졌는지 여주가 발끈 목소리를 높였다.
“뭐예요? 못 믿겠다는 건가요? 손 이리 내 봐요. 당장 증명해 드릴게요.”
여주가 불쑥 손을 뻗어 식탁 위에 올려 두었던 현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미수로 그치고 말았다. 현이 재빠르게 피했기 때문이다.
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여주의 눈에 현의 위협적인 검은 오라가 더욱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화염을 흘리는 게 보였다. 현의 목소리가 나직이 이어졌다.
“말씀하신 그 능력이 진짜든 가짜든 아가씨와 손을 잡는 일은 별로 유쾌할 것 같지 않군요. 일단 얘기를 계속해 보시죠. 그래서 어떻다는 거죠?”
현의 으르렁거림에 무안하기도 하고 동시에 겁이 나기도 하는 여주였다. 하지만 자신이 겁먹었다는 걸 드러낼 수는 없었다.
“겁내하시기는. 좋아요. 일단 계약부터 마무리해야 하니까. 아까 이 아저씨를 스캔했을 때, 아! 전 이 능력을 스캔이라고 불러요. 신안이니 신감이니 너무 딱딱해서. 여튼, 아까 이 아저씨 스캔했을 때 세 가지가 떠오르더라고요. 달항아리, 망할 놈, 여의주.”
여주의 말에 이룡이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렸다. 소위 만신(萬神)을 대하는 듯했다.
신기(神氣) 제대로 오른 점쟁이를 마주하고 앉아, 딱딱 맞아떨어지는 점괘에 소름 돋아하는, 그러면서도 박수까지 쳐대며 열렬히 호응하는 아줌마가 따로 없었다.
“그중 도자기와 망할 놈에 대한 이미지는 자세하게 떠오르는데 여의주는 글자 말고는 더 이상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더란 말이죠. 찾고자 하는 열망은 ‘여의주’에서 가장 크게 느껴지는데 말이죠.”
이룡이 또다시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현이 그런 이룡을 슬깃 흘겨보았다. 이무기 체통은 저 999살 노땅 이무기가 다 말아 먹는 듯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어요. 스캔 후에 여의주가 어디 있는지, 그것을 찾는 ‘길’을 물어봤죠.”
현의 눈이 의아함으로 가늘어졌다. 그건 이룡도 마찬가지였다.
“물어본다고요? 누구에게?”
현의 질문에 여주가 ‘아차!’ 싶은 듯 흠칫거렸다. 이어 말하기 난감한지 눈꼬리를 내리고 비긋이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망설임이 묻어났다.
여주는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그게……. 제겐 아주 유능한 친구가 하나 있어요. ‘길’을 아주 잘 알려 주는 친구가요.”
현이 그 망설임의 기운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 친구에 대해 자세히 묻기도 전에 여주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하여튼 그 친구에게 아저씨의 여의주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 친구가 미출(未出)이라 답하더군요. 다시 말해 아직 세상에 나타나질 않은 거죠.”
여주가 말을 멈추고 잠시 뜸을 들였다. 이룡은 여주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인상을 구겼다.
“뭐야? 그럼 내 여의주는 찾을 수가 없는 거야? 1000년이 지나도 2000년이 지나도?”
“저희 할아버지께 들은 얘기가 있어요. 여의주는 존재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태어나서는 또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라 하셨어요. 그래서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고요. 모든 이무기가 여의주를 찾는 것도 아니고, 또 그 기회를 얻는다 하더라도 일생에 한 번뿐일 거라고요.”
순간 이룡이 현의 얼굴을 흘깃 쳐다봤다. 현은 무표정하게 여주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현은 여의주를 얻을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자신 때문에 그 귀한 기회를 놓쳤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룡은 새삼스레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여주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결국 지금 당장은 아저씨의 여의주를 찾을 수가 없는 거죠. 또 다른 문제는 이 시간 이후 아저씨의 여의주가 나타난다 해도 스캔 내용이 업그레이드되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찾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입력하는 자료가 똑같으니 결국 답은 미출로 나오겠죠.”
이룡의 고개가 또다시 갸우뚱 기울었다. 뭔가 생각나는 게 있어서였다.
그러더니 이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물이 들었다.
“그럼 여의주를 찾기 위해선 계속 내 손을 잡고 있어야 하는 거야? 잘 때도 계속?”
여주가 갸름한 눈으로 이룡을 째려봤다.
지금까지 자기가 설명한 대로라면 저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지만,
이룡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이 영 엉큼해 보여서 맘에 안 들었다.
“아쉽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네요. 한 번 입력된 스캔 자료를 업그레이드 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해요. 그냥 아저씨 주변에 머물기만 해도 되거든요.”
엉큼한 생각 말라는 눈빛을 담아 여주가 이룡을 슬쩍 흘겨보았다.
“아저씬 못 느끼시겠지만 처음 스캔을 했을 때 아저씨와 저 사이에 심상 연결선이 만들어졌어요. 그 연결선이 아저씨의 심상을 지속적으로 알려 줄 거예요. 지금껏 시험해 본 바로는 1리(里), 그러니까 400m 정도까지는 심상 연결선이 이어지더라고요.”
이룡이 아쉬움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현은 그런 이룡을 보며 피식 웃어보이고는 여주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제가 여기서, 아저씨 옆에서 상시 대기하겠다는 거예요. 아저씨의 심상이 변하는 순간 바로 길을 찾아낼 수 있게요.”
현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현의 입장에서는 여주의 말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지만 여주에게는 그 모습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그게 ‘여기서 먹고 자고’라는 말로 표현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찰나에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여의주를 찾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란 걸 감안한다면 좋은 투자라고 생각해요.”
여주가 말을 끝내고 방긋 웃었다. 잘 봐주십사 아부 섞인 인사치레였다.
현은 현대로, 이룡은 이룡대로 생각에 잠겨 들었다. 현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생각할수록 재밌는 관계군요.”
“네?”
여주가 되물었다.
“아가씨가 신안과 신감을 이용해 스캔을 하는 행위가 ‘자료를 입력’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아가씨의 친구가 ‘길을 알려 준다’고 하니……. 마치 친구분이 아가씨와 일심동체인 컴퓨터나 되는 것 같잖아요.”
현의 말에 여주의 얼굴이 당황함으로 붉게 물들었다.
“지,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해서 내가 여기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조항은 어떻게 할 거냐고요?”
여주가 당황함을 감추고자 목소리를 높였다. 현이 느긋하게 몸을 뒤로 기대며 입을 열었다. 현의 느긋함이 여주를 더욱 조바심 나게 했다.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엥? 두 가지나 있어? 그냥 여기서 같이 살면 안 되는 거야?”
이룡이었다.
“도련님은 좀 빠져 계시지요. 이 모든 사달이 도련님의 칠칠치 못함 때문이거든요.”
현의 타박에 이룡은 찍 소리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라고 딱히 부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이 여주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아가씨의 능력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우리를 알아봤으니 신안도 진짜, 도련님의 심상을 읽어 냈으니 신감이라는 능력도 진짜인 듯한데, 과연 물건을 찾는 능력, 그러니까 친구분의 능력도 진짜냐 이거죠.”
현의 말에 여주가 발끈하여 뭔가 반박을 하려다가 입 다물고 들으라는 듯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바로 말을 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문제는 저희의 재정 상태가 아가씨를 먹여 살릴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는 겁니다.”
말을 끝내지 못하고 현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이룡을 한 번 째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정말 창피한 일이긴 합니다만, 저희 도련님이 아주 귀하디귀하다는, 인간에게 사기당하는 몇 안 되는 이무기라서 말입니다.”
“야, 현! 거기서 그 얘기는 왜 나오는데?”
얼굴이 새빨개진 이룡이 벌떡 일어나 현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주는 이건 또 무슨 얘긴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기울였다. 아까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무기를 상대로 사기를 치겠어요?’라고 말한 게 무색해지는 참이었다.
현은 이룡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건 말건, 그에 대한 건 깔끔히 무시한 채 한풀이하듯 말을 이어 쏟아 냈다.
“일해 주고 돈 못 받은 건 부지기수고. 투자 사기에 증권 사기에 심지어는 수십 건의 보이스피싱까지. 허당도 이런 허당이 없으시니. 통장에 0원 찍힌 건 벌써 오래 전이고 요즘은 거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수준이…….”
“혀어언!”
현의 느닷없는 폭로전에 이룡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침통한 어조는 물론이고 눈물 찍어 내는 연기까지 선보이는 현. 벌게진 얼굴로 씩씩대는 이룡.
여주는 이 둘을 보면서 ‘이 두 사람 참 재미있게 사는구나’라는 생각에 난감한 미소를 흘렸다.
잠시 후, 현이 이쯤하면 됐다 싶었는지 마지막으로 약 올리듯 이룡에게 한 번 씨익 웃어 주고는 다시 여주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니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제안을 하는 현의 표정이 매우 의뭉해 보였다. 뭔가 꿍꿍이가 가득한 표정이다.
절로 긴장이 되었지만 여주로서는 현의 의뭉한 제안을 들어 볼 수밖에 없었다.
“네? 어떻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