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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0살, 신안(神眼) 서여주
긴 머리의 그녀는 분명 ‘사람’이었다.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봐도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른 손목에 매달고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납작한 패가 조금 신경에 거슬리긴 했지만 딱히 다른 기운이 보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여자가 자신의 본 모습을 한눈에 알아봤다!
아주 드물게 가끔 알아보는 눈을 가진 이들이 있으니 알아볼 수는 있다 쳐. 그런데 알아보는 인간이 도망가기는커녕 이무기에게 말을 걸고 손을 내민다?
999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이룡에게 있어 인간이란 딱 두 부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 ‘알아보는 사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에 속했다.
이룡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말하는 대로, 혹은 보여 주는 대로 믿었고 자기들 편한 대로 그를 규정했다.
결국 그들이 보는 이룡의 모습은 진짜가 아닌 그의 가면이었다.
숨김은 거리를 만들었다.
수많은 날 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떠들고, 혹은 싸움도 했지만 이룡은 그 어느 누구와도 진정한 소통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룡은 홀로 떨어진 섬이었다. 이룡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감지한 사람들이 그를 밀어내기도 했거니와 스스로도 그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항상 가면을 써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알아보는 사람’, 다시 말해 ‘신안(神眼)’을 가진 사람은 좀 다르지 않을까 했다.
굳이 그 앞에선 가면을 쓰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아니, 그 앞에선 가면을 쓴다는 게 불가능했으니까. 가면 없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룡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주지 않았다.
‘알아보는 자’에게 이룡은 그저 인간이 아닌, 괴물일 뿐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 건 이무기들이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모든 이무기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드물게 인신을 제물로 받던 이무기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결국 신안을 가진 사람들은 이룡을 너무도 두려워한 나머지 최대한 그에게서 멀리 도망쳤고, 그 거리를 좁힐라 치면 창을 던지고 살을 겨눴다.
그들의 창과 살이 감히 이룡의 살갗에 상처를 내지는 못했지만 숨겨진 마음에는 아주 깊은 상처를 남겼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이룡은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이들이 있으면 모른 척 내버려 두었다. 그들에 대한 배려였으며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뭐란 말인가.
자신을 콕 짚어 이무기라고 했다. 분명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손을 내민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이룡은 잔뜩 긴장한 채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여실이 느껴졌다.
“야! 꼬마! 너 뭐야? 신안이라도 가진 거야?”
‘꼬마’라는 소리에 여자의 이마가 한순간 구겨지는 듯했으나 금세 다시 활짝 웃어 보인다. 자세가 너무 깍듯하여 억지웃음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선, 그 웃음이 자연스러운 것이든 억지웃음이든 간에 그것이 아주 그로테스크하다는 건 이견이 없을 듯했다.
캄캄한 밤, 인적 없는 달동네, 깜박이는 가로등, 그리고 그 아래 서 있는 긴 머리의 여자.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지 않느냔 말이지.
절로 하얀 소복에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니, 이룡으로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서여주라고 합니다. 꼬마는 아니고요. 제가 좀 어려 보이기는 합니다만, 방년 20세. 확실한 성인이랍니다.”
역시 꼬마라는 소리에 욱했던 게 분명하다.
“저도 아저씨처럼 ‘찾아 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동종 업계의 분을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그리고선 꾸벅 허리 숙여 인사를 하는 여자. 긴 머리가 와르르 쏟아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 밤에 자꾸 그러지 말라고.
‘잠깐, 서여주? 여주? 설마……?’
장황하게 이어지는 여자의 소개에서 유독 여자의 이름이 박혀 들었다.
“잠깐 잠깐!”
이룡이 갑자기 손을 내저으며 여자의 말을 잘랐다.
“너 설마, ‘여주가 찾아드립니다’의 그…?”
“어머! 제 블로그 보셨어요? 아저씨도 보셨구나. 그럼 아저씨도 제게 의뢰하시겠어요?”
긴 머리의 소녀, 아니지 20살이면 소녀라고 할 수는 없다. 여튼 긴 머리의 여자, 서여주가 방긋 웃어 보였다.
이룡은 이 어이없는 상황이 말도 안 되게 혼란스러웠다.
아침에 식탁에서 현이 말하던 경쟁 업체의 운영자가 지금 바로 앞에 서 있는 여자란다.
게다가, 뭐? 의뢰를 해?
지금 이 여자가 하는 짓이란 게 나○키 매장 사장에게 아○다스 운동화 사라고 하는 황망한 짓과 다를 게 무어냔 말이다.
“뭘 해? 내가 왜 그딴 짓을…….”
“그야 당연히 제가 아저씨의 여의주를 찾아드릴 수 있으니까요.”
이룡의 말을 산뜻하게 잘라낸 여주가 다시 빙긋 웃음을 흘렸다.
놀란 이룡이 헛숨을 들이켰다. 여의주라고? 이룡은 잘못 들은 건가하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여의주란 소리에 이룡이 잔뜩 날을 세우고 물어뜯을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뭐? 여의주? 너 내가 누군지 알고 말도 안 되는…….”
“이름 고이룡, ‘URIUK’이라는 회사의 사장님이시고, 이룡(螭龍)이라는 이름 그대로 이무기이시고, 여의주를 찾고 있다는 것까진 알고 있어요. 잠깐만요.”
그러더니 대뜸 손을 뻗어 이룡의 뺨 위에 손을 올렸다.
허걱! 이건 또 뭐? 얼굴은 왜?
사람이 너무 놀라면 몸이 돌처럼 굳는다더니, 이룡도 너무 놀란 나머지 꼼짝 못하고 어이없게도 고스란히 뺨을 내주고 말았다.
곧바로 여자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음……, 지금은 도자기를 하나 찾고 계시네요. 그리고 이상한 사이트 운영자도 못 찾아서 열 받아 하시구요.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여의주를 가장 찾고 싶어 하세요. 맞죠?”
“너, 너……. 어떻게?”
이룡이 자기도 모르게 여주의 손을 탁 쳐내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휘둥그레진 두 눈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쯤 되니 여자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무기가 인간을 두려워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너 정말 정체가 뭐야?”
“말씀드렸잖아요. 제 이름은 서여주라고. 제가 아저씨의 여의주 찾아드릴게요.”
긴 머리의 여자, 아니 이름이 서여주라고 하는 여자가 다시 비긋이 웃는다.
이룡은 세상에 태어나 999년 동안 살면서 이렇게 정신없고 어지러운 밤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쳤다. 이 밤은 놀람의 연속이었다.
날은 어느새 12시를 넘겨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시겠어요. 뭐가 어떻게 된 거라고요?”
도시의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동쪽 하늘이 여명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5시 30분. 이른 아침일 수도, 꼭두새벽일 수도 있는 이 시각에 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러대며 식탁 건너편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되물었다.
잠옷 바람에 부스스한 머리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침대 속에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그의 두통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이룡과 여주였다.
이룡은 현의 눈치를 살피느라 안절부절, 여주는 그 무엇도 상관없다는 듯 천하태평. 두 사람의 분위기가 달라도 이리 다를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나 했는데…….”
이룡이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랬는데요?”
날 선 현의 목소리에 이룡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 여자가 내 여의주를 찾아 준다고 해서…….”
“그런데요?”
“대신 소원을 들어 달라고……. 그리고 여의주를 찾으려면 여기서 먹고 자고 해야 한다고…….”
이룡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현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이 상황에 대해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답답할 뿐이었다.
여의주를 찾아 주는 대가로 소원을 들어주고 먹고 잘 수 있게 해 달라고?
결코, 여의주는 찾는다고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현이 잘 알고 있었다.
현이 여주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현이랑 눈이 마주치자 여주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씨구! 넉살이 예술이네!’
치솟는 짜증을 내리누르고 현이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련님!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여의주는요, 찾는다고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아니야, 이 여자 정말 뭔가 있는 것 같아. 현이 몰라서 그러는데…….”
이룡의 다급한 해명을 현이 깊은 한숨으로 잘라 내었다.
“하아! 도련님, 제발 나잇값 좀 하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하, 하지만…….”
이룡이 어떻게든 설명을 이어 보려 했으나 현은 가차 없이 그 말끝을 잘라 버렸다.
“솔직히 인간에게 사기당한 게 한두 번도 아니시고. 지금까지야 돈 날린 게 다라고 하지만 이번은 이게 뭡니까? 어떻게 모르는 사람을 집까지 데리고 오실 생각을 해요?”
“그래도 한 번…….”
시작은 조곤조곤했던 현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자꾸 말을 자르려는 이룡이 화를 돋우었기 때문이었다.
“아! 정말! 이게 진짜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 여자 죽여요, 살려요?”
마지막에는 기어이 한 톤 높여 버럭 하는 현의 말에 지금껏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여주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이 아저씨 말 한 번 살벌하게 하시네. 사기는 무슨 사기요. 날 뭐로 보고.”
여주가 목소리를 슬쩍 높였다가 그래도 초면에 예는 갖추자 싶어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입가에 어렵게 미소를 실어 보았다.
“그러니까 제 말은 너무 멋대로 짐작해서 말씀 하지 마시고 얘기의 전후를 좀 잘 들어보시라는 거죠! 제가 여기 온 건 어디까지나…….”
“아가씨는 닥치고 가만히 좀 있지! 지금 아가씨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야.”
현의 으름장에 여주는 울화가 치밀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천만한 칼날 위에 있다는 건.
하지만 이대로 입 다물고 얌전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에겐 이 계약을 무조건 성사시켜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여주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현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이것 보세요. 닥치고 들으셔야 하는 건 아저씨네요.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실 텐데?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무기를 상대로 사기를 치겠어요? 이무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흔해요? 알아본다 한들 잡아먹히는 거 무서워 도망가기 바쁠 텐데?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여기 온 건 어디까지나 내 힘으로 찾아온 거지, 저 아저씨가 데려온 거 아니거든요. 모르나 본데 나 지금 목숨 걸고 여기 찾아온 거예요. 내가 무슨 소풍 가는 기분으로 온 줄 알아요? 제대로 알고나 지껄이라고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다다 쏟아 내는 여주의 기세가 어찌나 드센지 옆에서 듣고 있던 이룡은 물론이고 현 마저도 입을 딱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주가 씩씩거리며 현을 노려봤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지만 현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이무기 둘을 앞에 놓고도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여주가 예사 사람은 아니라고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이리 대차게 자신에 덤빌 줄은 예상 못하고 있었던 탓에 현은 적잖이 당혹스러운 참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넋이 반쯤 나가 있는 이룡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어쩌면’이라는 생각이 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이 여자라면 이룡의 여의주를 탄생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가 현의 입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편 이룡은 여주의 대범함에 완전히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결연하게 빛나는 커다란 두 눈, 당돌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도톰한 붉은 입술, 온몸에서 흘러넘치는 배짱과 투지. 이룡은 여주가 신비로웠다.
그녀는 지금껏 이룡이 겪었던 인간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봐 준다. 심지어 저 무시무시한 현마저도.
잠시 후 현이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목숨을 거셨다, 좋습니다. 아가씨가 이렇게 나오시겠다면야. 일단 그 계약서라는 거 한 번 볼까요?”
여주는 현의 요구에 왈가왈부하지 않고 곧바로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서 현 앞에 탁 펼쳐놓았다.
현이 그 계약서를 집어 들고는 주욱 읽어 내려가더니 ‘쯧쯧’하며 혀를 찾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인가 싶어 여주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다음 순간 현이 종이를 공중으로 휙 던졌다. 동시에 계약서에 화르륵 불이 붙더니 잿더미로 변해 식탁 위로 떨어져 내렸다. 여주의 눈이 놀람과 어이없음으로 커다래졌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여주가 울컥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계약서도 뭣도 아닙니다. 이무기와 계약서란 걸 쓰려면 제대로 갖춰서 써야죠. 목숨 걸고 말이죠.”
현의 안광이 흉흉하게 빛났다. 배짱 좋은 여주도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목숨이야 이미 걸었다. 결국 지금은 밀어붙일 수밖에.
“겁 줘서 내쫓을 생각이라면 포기하세요. 난 이 아저씨 용으로 만들기 전에 이 집에서 안 나갈 생각이니까.”
지지 않겠다는 듯 당차게 맞서는 여주를 보며 현이 피식 웃어 보였다.
“내쫓겠다는 거 아니니 그렇게 날 세우지 말아요. 일단 두 분이 합의한 내용들 먼저 짚어 보죠.”
현의 의도가 계약서를 그냥 없애 버리겠다는 게 아니란 점에서 여주는 일단 한숨 돌리는 참이었다. 그러나 아직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옆에 있는 아저씨는 어리바리한 게 말 몇 마디로 넘어왔는데 앞에 앉아 있는 멀대 같이 큰 남자는 호락호락해 보이질 않는다.
사실 그녀가 찾은 ‘길’에 저 남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여주는 지금 미처 알아보지 못한 존재와 담판을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방금 읽은 계약서를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다면 이룡 도련님의 여의주를 찾아 주겠다. 그러니 대신 여의주를 찾고 승천하게 되면 ‘용의 첫 권능’으로 아가씨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 달라. 이거죠?”
“네 맞아요.”
여주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현이 고개를 슬쩍 꺾으며 잠시 생각을 갈무리했다.
‘용의 첫 권능에 대해서도 아는 걸 보면 그냥 어중이떠중이 사기꾼은 아니야. 진짜 제대로 된 사기꾼이거나 아님 진짜 뭔가 있는 사람이거나.’
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용의 첫 권능은 굉장히 강력해서 죽은 자도 되살릴 수 있습니다. 여의주를 찾아 준 대가치고는 너무 비싼 거 아닌가요?”
여주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튀어 나왔다. 마치 이미 예상했던 질문이라는 듯.
“그거야 이 아저씨의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닌가요?”
여주가 이룡을 슬쩍 가리켰다.
“대가로 첫 권능 행사를 지불할 만큼 여의주를 원하는가, 이거요. 이미 제가 쓴 계약서에 사인하신 걸로 봐서는 그 의지는 충분하다고 보이는데……. 안 그런가요?”
현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동의하시는 거죠, 도련님?”
넋 놓고 여주를 바라보다가 불쑥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이룡이 말을 버벅거렸다.
“으응? 뭐?”
“아가씨께서 여의주를 찾아 주는 대신 ‘용의 첫 권능’으로 아가씨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 점에 동의하시냐고요.”
“아아! 그거! 뭐, 여의주만 찾아 준다면야…….”
이룡이 여주와 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얼버무렸다. 여주가 보란 듯이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현이 비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 왜 우리가 아가씨에게 숙박까지 제공해야 하는 거죠? ‘찾는 일’에 자신 있다면 지금 당장 여의주를 찾아 주시고 아가씨의 소원을 빌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건 아직 이무기 아저씨의 여의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이 의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여자 정말 뭔가 있다. 사실 이 질문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과연 여주가 ‘여의주’라는 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 더불어 찾을 능력이 되는지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확인해야 할 것이 몇 가지 더 있었다. 현은 여주가 한 말의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해 말을 그대로 따라 읊었다.
“존재하지 않는다?”
여주는 고개를 끄덕해 보이고는 조금 난감하다는 듯 인상을 쓰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20살, 신안(神眼) 서여주
긴 머리의 그녀는 분명 ‘사람’이었다.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봐도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른 손목에 매달고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납작한 패가 조금 신경에 거슬리긴 했지만 딱히 다른 기운이 보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여자가 자신의 본 모습을 한눈에 알아봤다!
아주 드물게 가끔 알아보는 눈을 가진 이들이 있으니 알아볼 수는 있다 쳐. 그런데 알아보는 인간이 도망가기는커녕 이무기에게 말을 걸고 손을 내민다?
999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이룡에게 있어 인간이란 딱 두 부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 ‘알아보는 사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에 속했다.
이룡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말하는 대로, 혹은 보여 주는 대로 믿었고 자기들 편한 대로 그를 규정했다.
결국 그들이 보는 이룡의 모습은 진짜가 아닌 그의 가면이었다.
숨김은 거리를 만들었다.
수많은 날 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떠들고, 혹은 싸움도 했지만 이룡은 그 어느 누구와도 진정한 소통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룡은 홀로 떨어진 섬이었다. 이룡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감지한 사람들이 그를 밀어내기도 했거니와 스스로도 그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항상 가면을 써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알아보는 사람’, 다시 말해 ‘신안(神眼)’을 가진 사람은 좀 다르지 않을까 했다.
굳이 그 앞에선 가면을 쓰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아니, 그 앞에선 가면을 쓴다는 게 불가능했으니까. 가면 없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룡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주지 않았다.
‘알아보는 자’에게 이룡은 그저 인간이 아닌, 괴물일 뿐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 건 이무기들이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모든 이무기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드물게 인신을 제물로 받던 이무기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결국 신안을 가진 사람들은 이룡을 너무도 두려워한 나머지 최대한 그에게서 멀리 도망쳤고, 그 거리를 좁힐라 치면 창을 던지고 살을 겨눴다.
그들의 창과 살이 감히 이룡의 살갗에 상처를 내지는 못했지만 숨겨진 마음에는 아주 깊은 상처를 남겼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이룡은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이들이 있으면 모른 척 내버려 두었다. 그들에 대한 배려였으며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뭐란 말인가.
자신을 콕 짚어 이무기라고 했다. 분명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손을 내민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이룡은 잔뜩 긴장한 채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여실이 느껴졌다.
“야! 꼬마! 너 뭐야? 신안이라도 가진 거야?”
‘꼬마’라는 소리에 여자의 이마가 한순간 구겨지는 듯했으나 금세 다시 활짝 웃어 보인다. 자세가 너무 깍듯하여 억지웃음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선, 그 웃음이 자연스러운 것이든 억지웃음이든 간에 그것이 아주 그로테스크하다는 건 이견이 없을 듯했다.
캄캄한 밤, 인적 없는 달동네, 깜박이는 가로등, 그리고 그 아래 서 있는 긴 머리의 여자.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지 않느냔 말이지.
절로 하얀 소복에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니, 이룡으로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서여주라고 합니다. 꼬마는 아니고요. 제가 좀 어려 보이기는 합니다만, 방년 20세. 확실한 성인이랍니다.”
역시 꼬마라는 소리에 욱했던 게 분명하다.
“저도 아저씨처럼 ‘찾아 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동종 업계의 분을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그리고선 꾸벅 허리 숙여 인사를 하는 여자. 긴 머리가 와르르 쏟아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 밤에 자꾸 그러지 말라고.
‘잠깐, 서여주? 여주? 설마……?’
장황하게 이어지는 여자의 소개에서 유독 여자의 이름이 박혀 들었다.
“잠깐 잠깐!”
이룡이 갑자기 손을 내저으며 여자의 말을 잘랐다.
“너 설마, ‘여주가 찾아드립니다’의 그…?”
“어머! 제 블로그 보셨어요? 아저씨도 보셨구나. 그럼 아저씨도 제게 의뢰하시겠어요?”
긴 머리의 소녀, 아니지 20살이면 소녀라고 할 수는 없다. 여튼 긴 머리의 여자, 서여주가 방긋 웃어 보였다.
이룡은 이 어이없는 상황이 말도 안 되게 혼란스러웠다.
아침에 식탁에서 현이 말하던 경쟁 업체의 운영자가 지금 바로 앞에 서 있는 여자란다.
게다가, 뭐? 의뢰를 해?
지금 이 여자가 하는 짓이란 게 나○키 매장 사장에게 아○다스 운동화 사라고 하는 황망한 짓과 다를 게 무어냔 말이다.
“뭘 해? 내가 왜 그딴 짓을…….”
“그야 당연히 제가 아저씨의 여의주를 찾아드릴 수 있으니까요.”
이룡의 말을 산뜻하게 잘라낸 여주가 다시 빙긋 웃음을 흘렸다.
놀란 이룡이 헛숨을 들이켰다. 여의주라고? 이룡은 잘못 들은 건가하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여의주란 소리에 이룡이 잔뜩 날을 세우고 물어뜯을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뭐? 여의주? 너 내가 누군지 알고 말도 안 되는…….”
“이름 고이룡, ‘URIUK’이라는 회사의 사장님이시고, 이룡(螭龍)이라는 이름 그대로 이무기이시고, 여의주를 찾고 있다는 것까진 알고 있어요. 잠깐만요.”
그러더니 대뜸 손을 뻗어 이룡의 뺨 위에 손을 올렸다.
허걱! 이건 또 뭐? 얼굴은 왜?
사람이 너무 놀라면 몸이 돌처럼 굳는다더니, 이룡도 너무 놀란 나머지 꼼짝 못하고 어이없게도 고스란히 뺨을 내주고 말았다.
곧바로 여자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음……, 지금은 도자기를 하나 찾고 계시네요. 그리고 이상한 사이트 운영자도 못 찾아서 열 받아 하시구요.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여의주를 가장 찾고 싶어 하세요. 맞죠?”
“너, 너……. 어떻게?”
이룡이 자기도 모르게 여주의 손을 탁 쳐내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휘둥그레진 두 눈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쯤 되니 여자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무기가 인간을 두려워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너 정말 정체가 뭐야?”
“말씀드렸잖아요. 제 이름은 서여주라고. 제가 아저씨의 여의주 찾아드릴게요.”
긴 머리의 여자, 아니 이름이 서여주라고 하는 여자가 다시 비긋이 웃는다.
이룡은 세상에 태어나 999년 동안 살면서 이렇게 정신없고 어지러운 밤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쳤다. 이 밤은 놀람의 연속이었다.
날은 어느새 12시를 넘겨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시겠어요. 뭐가 어떻게 된 거라고요?”
도시의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동쪽 하늘이 여명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5시 30분. 이른 아침일 수도, 꼭두새벽일 수도 있는 이 시각에 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러대며 식탁 건너편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되물었다.
잠옷 바람에 부스스한 머리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침대 속에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그의 두통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이룡과 여주였다.
이룡은 현의 눈치를 살피느라 안절부절, 여주는 그 무엇도 상관없다는 듯 천하태평. 두 사람의 분위기가 달라도 이리 다를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나 했는데…….”
이룡이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랬는데요?”
날 선 현의 목소리에 이룡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 여자가 내 여의주를 찾아 준다고 해서…….”
“그런데요?”
“대신 소원을 들어 달라고……. 그리고 여의주를 찾으려면 여기서 먹고 자고 해야 한다고…….”
이룡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현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이 상황에 대해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답답할 뿐이었다.
여의주를 찾아 주는 대가로 소원을 들어주고 먹고 잘 수 있게 해 달라고?
결코, 여의주는 찾는다고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현이 잘 알고 있었다.
현이 여주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현이랑 눈이 마주치자 여주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씨구! 넉살이 예술이네!’
치솟는 짜증을 내리누르고 현이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련님!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여의주는요, 찾는다고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아니야, 이 여자 정말 뭔가 있는 것 같아. 현이 몰라서 그러는데…….”
이룡의 다급한 해명을 현이 깊은 한숨으로 잘라 내었다.
“하아! 도련님, 제발 나잇값 좀 하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하, 하지만…….”
이룡이 어떻게든 설명을 이어 보려 했으나 현은 가차 없이 그 말끝을 잘라 버렸다.
“솔직히 인간에게 사기당한 게 한두 번도 아니시고. 지금까지야 돈 날린 게 다라고 하지만 이번은 이게 뭡니까? 어떻게 모르는 사람을 집까지 데리고 오실 생각을 해요?”
“그래도 한 번…….”
시작은 조곤조곤했던 현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자꾸 말을 자르려는 이룡이 화를 돋우었기 때문이었다.
“아! 정말! 이게 진짜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 여자 죽여요, 살려요?”
마지막에는 기어이 한 톤 높여 버럭 하는 현의 말에 지금껏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여주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이 아저씨 말 한 번 살벌하게 하시네. 사기는 무슨 사기요. 날 뭐로 보고.”
여주가 목소리를 슬쩍 높였다가 그래도 초면에 예는 갖추자 싶어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입가에 어렵게 미소를 실어 보았다.
“그러니까 제 말은 너무 멋대로 짐작해서 말씀 하지 마시고 얘기의 전후를 좀 잘 들어보시라는 거죠! 제가 여기 온 건 어디까지나…….”
“아가씨는 닥치고 가만히 좀 있지! 지금 아가씨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야.”
현의 으름장에 여주는 울화가 치밀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천만한 칼날 위에 있다는 건.
하지만 이대로 입 다물고 얌전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에겐 이 계약을 무조건 성사시켜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여주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현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이것 보세요. 닥치고 들으셔야 하는 건 아저씨네요.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실 텐데?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무기를 상대로 사기를 치겠어요? 이무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흔해요? 알아본다 한들 잡아먹히는 거 무서워 도망가기 바쁠 텐데?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여기 온 건 어디까지나 내 힘으로 찾아온 거지, 저 아저씨가 데려온 거 아니거든요. 모르나 본데 나 지금 목숨 걸고 여기 찾아온 거예요. 내가 무슨 소풍 가는 기분으로 온 줄 알아요? 제대로 알고나 지껄이라고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다다 쏟아 내는 여주의 기세가 어찌나 드센지 옆에서 듣고 있던 이룡은 물론이고 현 마저도 입을 딱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주가 씩씩거리며 현을 노려봤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지만 현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이무기 둘을 앞에 놓고도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여주가 예사 사람은 아니라고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이리 대차게 자신에 덤빌 줄은 예상 못하고 있었던 탓에 현은 적잖이 당혹스러운 참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넋이 반쯤 나가 있는 이룡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어쩌면’이라는 생각이 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이 여자라면 이룡의 여의주를 탄생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가 현의 입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편 이룡은 여주의 대범함에 완전히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결연하게 빛나는 커다란 두 눈, 당돌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도톰한 붉은 입술, 온몸에서 흘러넘치는 배짱과 투지. 이룡은 여주가 신비로웠다.
그녀는 지금껏 이룡이 겪었던 인간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봐 준다. 심지어 저 무시무시한 현마저도.
잠시 후 현이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목숨을 거셨다, 좋습니다. 아가씨가 이렇게 나오시겠다면야. 일단 그 계약서라는 거 한 번 볼까요?”
여주는 현의 요구에 왈가왈부하지 않고 곧바로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서 현 앞에 탁 펼쳐놓았다.
현이 그 계약서를 집어 들고는 주욱 읽어 내려가더니 ‘쯧쯧’하며 혀를 찾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인가 싶어 여주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다음 순간 현이 종이를 공중으로 휙 던졌다. 동시에 계약서에 화르륵 불이 붙더니 잿더미로 변해 식탁 위로 떨어져 내렸다. 여주의 눈이 놀람과 어이없음으로 커다래졌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여주가 울컥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계약서도 뭣도 아닙니다. 이무기와 계약서란 걸 쓰려면 제대로 갖춰서 써야죠. 목숨 걸고 말이죠.”
현의 안광이 흉흉하게 빛났다. 배짱 좋은 여주도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목숨이야 이미 걸었다. 결국 지금은 밀어붙일 수밖에.
“겁 줘서 내쫓을 생각이라면 포기하세요. 난 이 아저씨 용으로 만들기 전에 이 집에서 안 나갈 생각이니까.”
지지 않겠다는 듯 당차게 맞서는 여주를 보며 현이 피식 웃어 보였다.
“내쫓겠다는 거 아니니 그렇게 날 세우지 말아요. 일단 두 분이 합의한 내용들 먼저 짚어 보죠.”
현의 의도가 계약서를 그냥 없애 버리겠다는 게 아니란 점에서 여주는 일단 한숨 돌리는 참이었다. 그러나 아직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옆에 있는 아저씨는 어리바리한 게 말 몇 마디로 넘어왔는데 앞에 앉아 있는 멀대 같이 큰 남자는 호락호락해 보이질 않는다.
사실 그녀가 찾은 ‘길’에 저 남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여주는 지금 미처 알아보지 못한 존재와 담판을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방금 읽은 계약서를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다면 이룡 도련님의 여의주를 찾아 주겠다. 그러니 대신 여의주를 찾고 승천하게 되면 ‘용의 첫 권능’으로 아가씨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 달라. 이거죠?”
“네 맞아요.”
여주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현이 고개를 슬쩍 꺾으며 잠시 생각을 갈무리했다.
‘용의 첫 권능에 대해서도 아는 걸 보면 그냥 어중이떠중이 사기꾼은 아니야. 진짜 제대로 된 사기꾼이거나 아님 진짜 뭔가 있는 사람이거나.’
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용의 첫 권능은 굉장히 강력해서 죽은 자도 되살릴 수 있습니다. 여의주를 찾아 준 대가치고는 너무 비싼 거 아닌가요?”
여주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튀어 나왔다. 마치 이미 예상했던 질문이라는 듯.
“그거야 이 아저씨의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닌가요?”
여주가 이룡을 슬쩍 가리켰다.
“대가로 첫 권능 행사를 지불할 만큼 여의주를 원하는가, 이거요. 이미 제가 쓴 계약서에 사인하신 걸로 봐서는 그 의지는 충분하다고 보이는데……. 안 그런가요?”
현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동의하시는 거죠, 도련님?”
넋 놓고 여주를 바라보다가 불쑥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이룡이 말을 버벅거렸다.
“으응? 뭐?”
“아가씨께서 여의주를 찾아 주는 대신 ‘용의 첫 권능’으로 아가씨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 점에 동의하시냐고요.”
“아아! 그거! 뭐, 여의주만 찾아 준다면야…….”
이룡이 여주와 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얼버무렸다. 여주가 보란 듯이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현이 비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 왜 우리가 아가씨에게 숙박까지 제공해야 하는 거죠? ‘찾는 일’에 자신 있다면 지금 당장 여의주를 찾아 주시고 아가씨의 소원을 빌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건 아직 이무기 아저씨의 여의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이 의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여자 정말 뭔가 있다. 사실 이 질문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과연 여주가 ‘여의주’라는 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 더불어 찾을 능력이 되는지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확인해야 할 것이 몇 가지 더 있었다. 현은 여주가 한 말의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해 말을 그대로 따라 읊었다.
“존재하지 않는다?”
여주는 고개를 끄덕해 보이고는 조금 난감하다는 듯 인상을 쓰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