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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25화)
11장 짊어진 마음(1)(3)
꽈지직, 쾅!
자신의 영지에 돌아온 레이몬드가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부수는 것이었다. 고급 도자기와 마계의 최고급 목재로 만들고 상아로 멋을 낸 가구들은 레이몬드의 주먹이 닿는 순간 그저 단순한 쓰레기로 변해 버렸다.
“시종장님, 그만두십시오.”
“놔라. 주인께서 저리 화를 내고 계시는데 가서 모셔야 할 것이 아니냐!”
그가 어렸을 때부터 바로 옆에서 보필해 오던 시종 한 명이 다른 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나서 보기도 했지만, 채 입을 떼기도 전에 머리가 뜯겨져 다른 쓰레기들 위로 던져졌다. 남아 있던 이들은 서둘러 저택 구석구석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가구들은 몇 개 되지 않았고, 잘못하다간 자신들이 가구의 대용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아, 하아…….”
그렇게 한참 후, 방 안의 모든 가구와 장식품들을 부수고 결국은 두 개의 벽까지 무너뜨린 뒤에서야 그는 잠시 멈춰서 숨을 골랐다. 하지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내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화염이 무서운 기세로 방 안에 남은 잔해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감히…… 감히 네까짓 놈들 따위가 나를 능멸해……?”
얼마나 강렬했던지, 방 안을 가득 메운 화염은 잔해들을 한순간에 태워 버렸고 이제는 그를 완전히 둘러싸 버렸지만, 레이몬드 자신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듯 스스로의 마기마저 태워 가며 온몸으로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다.
온 방을 태우고 있는 검은 화염들 사이에서 새빨간 불꽃에 휩싸인 그의 모습은, 그 상황과는 반대로 오히려 오싹하고 또 소름 끼쳤다.
그렇게 불꽃은 한참을 타올랐다. 레이몬드가 뿜어내고 있는 것은 돌이나 금속조차 흔적 없이 녹여 버리는 마염(魔炎)이었지만, 다행히 저택의 벽이나 바닥 등을 이루고 있는 마계의 산석(珊石)들은 마법으로 특수 처리되었기 때문에 불꽃이 다른 곳으로 번져 가거나 그 열기로 다른 집 안의 물건들이 상하는 일은 없었다.
화가 조금은 가라앉아서일까, 아니면 그저 쏟아 낼 마기가 떨어진 것일까. 레이몬드의 마기 공급이 끊기고, 그 순간 더 이상 태울 것을 잃은 화염은 사라졌다. 재조차 남지 않은 방 안, 단지 방 안에 남은 열기와 그을음들만이 조금 전의 상황을 증명할 뿐, 이제 방 안에는 레이몬드를 제외한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후후후, 좋아. 뭐 상관없어. 어차피, 어차피 이틀 후면 더 이상 지상계에 있지도 못할 테니까. 자, 그럼 오랜만에 형 얼굴이나 볼까?”
자신에게 방해된다는 이유로 가족들 전부를 죽이고 스스로 가주의 자리에 오른 레이몬드의 입에서 놀랍게도 살아 있을 리 없는 형의 존재가 언급되었다. 단순히 너무 화가 나, 그저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일까. 아니, 적어도 그럴 리는 없었다.
“아누스, 레이윈, 샤틀렌, 메메드 에펜!”
고대의 문을 지키던 옛 신의 이름, 그 신을 따르던 사제의 이름, 그리고 고대의 열쇠와 최고의 문지기의 이름. 본래 이름이란, 그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주문이라고 했다.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그 자체의 힘을 속박하기도, 또한 해방하기도 하며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에 따라 주문의 힘은 달라진다.
레이몬드의 앞에 적색의 포탈이 열렸다.
방금 전 레이몬드가 외친 이름들은 모두 문에 관련된 것들. 거기다 그 이름들 중에서도 안에 있는 것을 가두고 밖에 있는 것들로부터 지킨다는 의미에서는 가장 최상위에 속하는 이름들. 이것만 본다 해도 이 적색의 포탈과 포탈 반대편에 있을 ‘어떤 것’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레이몬드는 붉은 포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포탈을 지나 도착한 곳은 어두운 감옥이었다. 아니, 분명 감옥이긴 했지만 이미 버려진 지 오래인 듯 바닥에는 썩은 물이 고여 있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낡은 조명용 수정 하나만이 희미한 빛을 뿜어내며 있을 뿐 미약한 생명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형! 잘 지내고 있어?”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대답 없는 감옥의 깊숙한 곳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 희미한 수정구의 불빛조차 닿지 않는 곳,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선 레이몬드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라이트.”
갑자기 환한 빛이 어둠을 내쫓았다. 어둠은 측은하게 사물의 뒤로 숨어 그림자가 되고, 그렇지 못한 어둠은 저 멀리로 도망쳤다. 그런데 도망치는 어둠들 사이로 낯선 형상 하나가 보였다.
“뭐야, 깨어 있었으면서 대답도 안 해 준 거야?”
이번에는 천진난만한 목소리, 거기다 다정한 눈동자. 보통의 레이몬드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이 행동이 그의 진심이라고 믿을 자는 없을 것이다. 그의 살가운 태도와는 상반되게, 물음을 받고 있는 자는 쇠사슬로 묶여 벽에 걸려 있었고, 입고 있는 옷은 모진 고문 때문인지 완전히 누더기로 변해 있었다. 그는 레이몬드를 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너무 작은 소리라 들리지는 않았다.
“응? 뭐라고? 형,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크게 말해야지. 그래야 내가 알지, 안 그래?”
그 또한 마족인 듯,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것은 매끄러운 피부뿐 흉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쇠사슬에 묶여 있고 누더기를 걸쳤다는 사실만 아니라면, 그가 이곳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믿지 못할 정도로, 그는 멀쩡해 보였다.
고개를 쭉 늘어뜨리고 있어 헤쳐진 머리카락들에 얼굴이 가려지긴 했지만 힐끗힐끗 보이는 뺨은 백옥처럼 희고, 비록 산발이 되긴 했지만 눈처럼 아름다운 그의 백발은 먼지와 오물들이 가득한 이 감옥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
“응? 뭐야, 형? 말을 해, 내게 들리게.”
그러나 그러한 그의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지쳐 있었다. 고작 작은 한마디의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몸은 약해져 있었다. 레이몬드는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듯, 그런 그에게 다가가 그의 입 쪽으로 자신의 귀를 바짝 갖다 대며 말했다.
“응? 형, 이제 말해 봐. 내가 들리도록.”
그러나 지금까지의 다정한 목소리도, 천진난만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상대를 깔보던 평소의 자신만만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상대에 대한 분노뿐인 음성.
조금 전 방 안을 태워 버리던 그때의 음성으로 레이몬드는 돌아가 있었다.
“……그녀를…… 괴롭히지…… 마……!”
그런 레이몬드를 향해 마치 필사의 힘을 다하듯, 간신히 그렇게 내뱉는 그의 모습은 처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든 것인지, 레이몬드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후, 그래, 그렇게 자기 의사를 확실히 해야지. 그게 형이 늘상 나한테 하던 말이잖아? 그런데…….”
“윽……!”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레이몬드가 돌연 그의 머리채를 쥐고 들어 올렸다. 처음부터 저항 따위 가능한 상태도 아니었기에 그의 머리는 힘없이 들렸고, 그 순간 지금껏 보이지 않던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미안하지만 난 형처럼 부탁을 들어줄 만큼 멍청하지 않거든?”
드러난 그의 얼굴은 레이몬드와 똑같았다. 차이라고는 오직 하나, 레이몬드는 적발인데 비해 그는 새하얀 백발이라는 것뿐. 그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똑같은 둘의 눈동자에 서로의 모습이 비춰졌다.
레이몬드는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놓았다. 그의 고개는 다시 힘없이 떨어뜨려졌고, 그 얼굴 또한 다시 머리카락에 가려졌다.
“바로 그 멍청함이, 우리 둘의 자리를 바꾼 거니까.”
“하하하……. 내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고 했던 거지?”
방 앞에 도착한 뒤에는 마치 술에 취한 이처럼 떠오르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 그 일은, 그 말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발작의 영향인가? 아니면 그의 ‘진심’이라는 것에 필요 이상으로 동조라도 했단 말인가? 또다시 떠오르는 그 해골 때문에 짜증이 치민다.
‘당신께서, 저희와 같기 때문입니다.’
표정조차 없는 얼굴 주제에 그런 단호한 눈빛이라니, 그런 진실한 태도라니!
“훗, 대체 뭘 안다고……!”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며 온몸이 휘청했다.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은데 아무래도 도망치듯 돌아온다고 무리를 했나 보다. 쓰러지듯 문을 밀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동안 나갔다 온 거였는데도, 어느새 보통의 공기에 익숙해져 있던 코가 방 안 가득 남아 있는 이 토사물들의 역겨움에 새삼스레 반응했다.
“그래, 이것도 치워야 하는군.”
귀찮음과 짜증을 뒤섞어 그렇게 한 번 중얼거리고는, 뭔가 이 상황을 수습할 방법을 찾기 위해 방 안을 둘러보는데, 뭔가 낯선 물체가 눈에 띄었다.
“이제 왔어? 근데 청소 좀 하지……. 냄새가 심해.”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엘런이 방 안 구석에 쭈그려 앉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니 너무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진 건가.
“엘런 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아니, 일단은 저랑 여기서 나가시죠. 엘레나 님도 걱정하고 계실 겁니다.”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던 평소와는 다르게 약간 움츠린 듯한 목소리도 신경이 쓰였지만,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이곳에 엘런을 계속 놔둘 수는 없었다. 엘런에게 다가가 그 작은 손을 잡았다. 그런데,
“싫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엘런의 격한 반응에 일단 손을 놓고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엘런 님?”
“싫어. 나가기 싫어, 나가기 싫다고…….”
막무가내로 싫어를 외치는 엘런의 모습은 많이 불안해 보였다. 기억은 없어도 그만큼 그때의 충격이 컸다는 것일까. 엘런은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었다. 아무리 도망치려 팔다리를 움직이고 숨어 보아도 자신의 마음속 두려움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건만, 엘런은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숨고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일단, 무릎을 굽혀 엘런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다행히 내 행동에 엘런은 좀 전과 같은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바로 옆까지 다가가서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 하는데…….
‘저는 단지 돈을 받고 일하는 것뿐입니다!’
멈칫!
나의 손은 허공에서 멈췄다. 과연, 내가 이 작은 어깨를 안아 토닥여 줄 자격이나 있을까. 그 상황에서 도망치기 위해,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한 내가, 지금 이 어깨를 붙잡고 위로의 말을 해 줄 자격이 있는가.
“…….”
“카지한?”
어금니를 깨물며 내밀었던 손을 다시 거두었다.
“알렉스, 아니면 제나스나 로나스를 불러오겠습니다.”
그렇게 몸을 돌려 일어서려는데 엘런이 뒤에서 내 옷을 잡았다. 뿌리치면 뿌리칠 수 있을 듯한 작고 여린 손으로, 필사적으로 옷자락을 잡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엘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두 눈에 글썽거리고 있는 눈물이 모든 걸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일어서려던 몸을 다시 앉혀, 엘런의 옆에 벽을 기대고 앉았다.
“……알겠습니다. 함께, 함께 있어 드리지요.”
지금의 말은, 내가 한 것이 맞는 건가? 그저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인 것은 아닐까?
“…….”
‘뭐, 상관없나…….’
마음이 가라앉으며, 편안해졌다.
어쩌면 나 또한 그저 스스로의 어둠에서 도망치고, 숨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알렉스의 말에 그런 반응을 한 것도, 그 얼굴과 그 눈빛, 그 말들과 목소리가 짜증났던 것도 그것들 때문에 그러한 나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주 보고 싶지 않은 그것, ‘어둠’을 마주 보게 될까 봐, 마주 봐야 하게 될까 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저 숨고, 숨기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위로의 말을 건넬 자격 따위, 없어도 상관없다. 처음부터 내게는, 엘런에게 해 줄 만한 위로나 해결책 같은 것은 존재치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렇게 옆에 있어 주는 것뿐, 그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뿐.
그리고 그런 사실에,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그 사실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괴로움도 사라져 간다. 그것이, ‘어둠’이 다시금 깊은 곳으로 사라져 간다.
그래, 알렉스의 말이 맞다. 내게는 이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의 이들도 나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가 말한 그들을 행복하게 해 줄 만한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누구나 채울 수 있는 빈자리에 지금의 내가 서 있는 것뿐. 그리고 언젠가 이들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온다면…….
‘그래, 그때가 온다면 나는 사라져야겠지.’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