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마왕성 근무기 1권(24화)
11장 짊어진 마음(1)(2)
‘나는 어째서 이래야만 하지? 죽어야 해. 죽어 버려야 해. 어째서 나는 버려지는 거지? 어째서 나는, 어째서 나는…… 믿음 따위, 희망 따위…….’
“닥쳐! 닥쳐!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이미 알고 있어. 알고 있으니까, 구태여 다시 그딴 것에 상처 입을 리가 없잖아! 그래,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건 그냥 현실이야. 변하지 않고, 아무런 감정을 느낄 필요 없는, 그저 당연한 현실.”
그렇게,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서는 미친 듯 고함을 질러 댔다. 마음을 죽여야 한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감정을 죽여야 한다. 그것만이 나를 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래, 그딴 것에 대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다시 이런 고통을 받을 만큼 나약하고 멍청하지 않게 되었단 말이야……. 하아, 하아…….”
다행히 발작은 천천히 진정되어 가고 있었다. 고통은 서서히 사라지고 가슴에 막혀 있던 무엇인가도 스르륵 풀려져 갔다. 여전히 정신은 약간 몽롱했지만, 일단 천천히 바닥과 침대를 짚으며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거울을 보지는 않았지만 내 모습은 만신창이였다. 눈은 풀린 듯 초점이 잘 맞지 않고 있으며 옷뿐만 아니라 턱과 얼굴이 침과 위액이 뒤섞인 체액으로 흥건했다.
상의를 벗어 최대한 젖지 않은 부분으로 대충 턱과 얼굴을 닦고는,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었다. 이 불쾌한 감정과 고통.
처음, 이 발작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그것의 그림자는 내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었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나는 지금과 같은 혹은 더 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발작이 일어나는 스위치는 바로 절망, 그리고 슬픔과 괴로움. 그 작은 자극이 내 마음을 건드리면, 가슴속 그림자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는 온몸을 덮쳐 왔다.
처음 치료법, 아니, 억제법을 찾아낸 것은 십 년 전이었다. 고통 속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생각했을 때 오히려 발작이 멈췄다. 그때 깨달았다. 발작이 몸을 덮칠 때, 오히려 마음을 완전한 절망에 물들이고 심장을 차갑게 식혀 버리면 발작은 이내 사라진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발작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 먼저 타인의 슬픔이나 괴로움이 내게 닿지 않게 막아 내는 것을, 무시하는 것을 익혔다. 마음의 고통이, 절망이 새어 나오지 않게 깊고 깊은 곳에 묻어 버리는 연습을 했다. 일어서려는 그것을, 억누르는 법을 익혔다. 세상의 고통에, 세상의 부조리에 납득하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어째서!”
지난 일이 년 동안 더 위험한 순간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발작이 일어난 적은 없었는데. 대체 어째서 다시 발작이……?
‘그건 제가 알아서 해 볼게요.’
“설마……?”
웃기지 마라.
“내가…… 고작 그 한마디에 상처라도 입었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 그래, 괜히 죽음이니 뭐니 하면서 새삼 감성적이게 된 것에 불과하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라 나도 모르게 스스로 어둠을 깨웠을 뿐이다. 엘레나와는 관계없다.
“……근데, 정말 가관이군. 이걸 다 어떻게 치우지?”
옷은 그렇다 쳐도, 이 바닥이랑 침대는 정말 감당이 안 된다. 거기다 이 역겨운 냄새. 바닥이나 침대뿐만 아니라 묻었던 얼굴이나 몸에서도 나고 있으니, 아무리 내 스스로 한 짓이라지만 참고 자기는 좀 어려울 듯하다.
“스켈레톤들을 불러서 치우게 할까?”
똑똑!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머리는 갑자기 바빠져 뭘 먼저 해결해야 할지를 판단하려 애를 썼고, 손과 발은 그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어쨌든 내 신체 중에서 가장 판단이 빨랐던 것은 입, 그리고 혀였다.
“네, 누구십니까?”
“예, 알렉스입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알렉스가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리는 없으니 우선순위가 한 번에 정해진 것이다.
“아, 알렉스,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일단 여벌의 옷을 꺼내 대충 입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후각은 일단 신경 안 써도 된다면 남은 것은 시각뿐, 안으로 들이지 않고 내가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한다면 이 꼴사나운 행동을 들키지는 않을 것이다.
얼굴 표정과 머리를 대충 정리한 다음, 문을 열었다. 거울을 보지는 않았기에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 잠깐 상의 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자고 제안할까 싶어 재빨리 문밖으로 나가 문을 닫아 버렸다. 조금 어색한 행동일 수는 있으나, 운이 좋다면 알렉스는 그냥 자신의 제안에 바로 응했다는 정도로 받아들일 것이다.
“걸으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오늘 밤하늘은 평소보다 왠지 더 좋아 보이는군요.”
“예, 그러면 훈련장 쪽으로 돌도록 하지요. 아무리 성 전체가 비어 있다고는 해도, 그쪽이라야 엘런 님이나 엘레나 님이 잘 오시지 않을 테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걷고 있는 복도가 알현실이나 엘레나, 엘런의 방과 비교적 가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일단은 말없이 그냥 걷기만 했다. 근데 그냥 핑계 삼아 던진 말이긴 했지만, 복도 창문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은 왠지 정말 다른 때와는 다른 것 같았다.
천천히 성 복도에 스며드는 은은한 달빛. 그리고 마치 무엇이라도 된 듯, 성의 복도를 마음대로 걸어 다니고 있는 나. 옆에 같이 걷고 있는 사람이 아름다운 여인이나 시종이 아닌 스켈레톤이긴 하지만. 그래, 그러고 보니 참으로 꿈결 같군. 어쩌면 이대로 눈을 떠 버리면 또다시 그 텅 빈 오두막이, 아니면 죽음을 향해야 하는 전장이 기다릴지도 모르지.
내 입술에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지만, 왠지 입안에 감도는 것은 달콤함의 여운이 아닌 뱉어 버리고 싶은 씁쓸함이었다.
“이쯤이면 된 것 같군요. 그래요, 알렉스. 무슨 일로 그러시지요?”
“예, 사실은 엘런 님의 이야기입니다.”
알렉스는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것은 아직 이 백색마궁이 마족과 마물, 병사와 하인들로 가득하고, 엘런과 엘레나의 아버지인 전대의 푸른 지혜의 마왕께서 살아 계시던 시절, 그리고 내가, 아니, 내 어머니조차 아직 태어나기 전의 일. 마계의 유서 깊고 신망이 높던 로티온 가의 당주인 메노스 겔 로티온 후작과 그의 넷째 아들 레이몬드가, 혼담을 가지고 백색마궁에 찾아왔을 때였다.
당시 엘레나의 아버지는 이러한 혼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로티온 가의 문장인 백색의 장미가 상징하는 것은 신뢰와 고결함. 그리고 메노스 후작 또한 그 온화한 성품으로 인정받는 위대한 대귀족. 그런 로티온 가의 명망이 어쩌면 정령과 마족의 혼혈, 그리고 정령왕의 저주 때문에 피치 못할 멸시의 눈길을 받아 왔던 엘레나에게 그것을 막아 줄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줄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레이몬드 겔 로티온은 그의 아버지나 가문에는 어울리지 않는 정반대의 성품을 지닌 자였다.
메노스와 마왕 사이에 담소가 이어지던 중 홀로 밖으로 나선 레이몬드가 처음 발견한 것은 엘런이었다. 레이몬드는 한눈에 엘런이 소문의 마왕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엘런을 바라보는 경호 마족의 눈이 자신의 눈과 똑같았으니까. 바로 경멸이 가득 담긴 눈빛.
레이몬드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경호 마족의 목을 뜯어내고는, 갑작스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멈춰 서 버린 엘런의 앞에 그 뜯어낸 머리를 던졌다. 온몸에 튀어 버린 핏방울과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풍경. 그리고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레이몬드의 모습은 어렸던 엘런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충격이었고, 엘런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어버렸다.
다행히 엘런의 정신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때의 기억을 잊어버렸지만, 이후로 한동안 엘런은 기억에서도 지워져 버린 그때의 막연한 공포에 벌벌 떨어야 했다.
그 사건 후 혼담은 완전히 깨져 버렸다. 메노스 후작은 아들의 무례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했으며 선물, 인사라는 명분으로 막대한 양의 보상을 레이몬드를 시켜 몇 번이나 마왕성으로 보냈다.
그것은 레이몬드에게 내려진 벌이기도 했지만 그는 그때마다 언제나 그 오만함과 잔인함을 드러냈고, 결국 메노스 후작은 그를 포기하고 영지 변경에 유폐했다.
“그런 자가 어떻게 지금은 후작의 자리에……?”
“이후 영지 내 반란에 성공한 레이몬드는, 아버지와 여섯 명의 형제, 다섯 명의 누이, 그리고 세 명의 사촌들을 죽이고 스스로 가주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더군요.”
“그럼, 아까 엘런 님이 사라진 이유는…….”
“아마도 그때의 공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그가 엘런 님께 보였던 많은 무례들의 영향도 있었겠지요.”
아주 잠시였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나도 모르게 몸을 피할 뻔했다. 과연 이들은 뭔가 특별했다. 언데드의 마왕, 월운의 명에 데나텔이 보였던 반응. 그의 이름을 듣고 순간 긴장하던 레이몬드의 행동, 그리고 가볍게 그의 공격을 막아 내거나, 순식간에 그의 목을 점하는 실력. 단순히 보통의 언데드보다 뛰어나다는 정도의 말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이런 말을 제게 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카지한 님, 저희가 당신을 대장으로 섬기려는 것은, 단순히 저희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와 주셨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변했다. 밤이라는 주변의 시간과 옛이야기 때문에 단순히 무거워져만 있던 지금까지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그것을 넘어서는 위압감마저 느껴지는 진중함.
“그건 당신께서, 저희와 같기 때문입니다.”
같다, 같다라……. 대충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아직 저는 먹어야 움직일 수 있는 몸입니다.”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해 보기도 했지만, 지금의 분위기 속에서 그러한 시도는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텅 비어 있는 해골 속에서 확실하게 빛나고 있는 두 개의 노란 구체는, 그 자신의 확고한 뜻을 표하며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또한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상대가 이렇게 나온다면 진심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알렉스 씨, 그것은 너무 과대평가이십니다. 저는 그만큼 대단한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알렉스 씨, 저는 단순한 용병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런데 그런 그의 태도가 거슬린다. 마치 그것들이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그의 태도, 그의 눈동자, 그의 목소리 모든 것이 짜증스러워진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돈을 받고 일하는 것뿐입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고함을 쳐 버렸다. 어째서인가. 이런 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인데.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데도 내 입은 멈추지 않고 멋대로 계속해서 지껄여 대고 있었다.
“저는, 저는 그런 대단한 인간이, 진짜가 아닙니다. 전 단지 잠깐 이곳에 고용된 것뿐입니다. 제가 가지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가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내가, 내가 가진 것은…….”
내 귀로 들리는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앞이 초점이 안 맞는 것처럼 흐려졌다. 대신 목소리만은 점점 맑아지더니, 이내 점점 여려졌다. 마치 그때처럼, 그 비참하고 어리석었던, 그 쓸모없던 그때처럼…….
‘뭐지, 내가 대체 뭘 말하고, 뭘 하려는 거지? 안 돼. 닥쳐, 입 닥쳐!’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 몸을 뒤로 뺐다. 뒤에 있던 벽에 등이 부딪치며 꽤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치 홀린 듯 계속 떠들어 대려는 입을 억지로 다물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였나. 이런 것은 내가 아니다.
“하아, 하아. 이거…… 제가 실수를 했군요. 지금 이 일은 못 본 것,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그를 남겨 둔 채 내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가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잠시 쉬고 싶었다. 그런데 등을 돌린 내 발걸음을, 그가 멈춰 세웠다.
“카지한 님, 당신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또 실제로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저나 다른 두 명도 이런 몸으로서 세상에 남아 있는 자들, 사연이 없을 리가 없지요.”
“…….”
“당신은 우리와 같습니다. 우리나 그대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의지할 만한, 그리고 자신을 의지해 줄 만한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것만이 스스로를 지탱해 주니까요. 당신도, 그리고 우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 희생조차 스스로를 위하는 것에 불과하죠. 필요에 의한, 자기만족인 것이지요.”
“…….”
“그러나 같다고는 하나, 사실 당신과 우리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당신이라면 엘런 님, 그리고 엘레나 님을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단지 곁에 있을 뿐인, 결코 그 깊은 곳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우리와는 다르게, 당신은 두 분을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에게서 그 두 분의 행복을, 그리고 그 가능성을 보았고 그렇기에, 당신을 모시려는 겁니다. 우리가 드리지 못하는 것을, 그대는 드릴 수 있으니까요.”
뭔가 차디찬 검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꿰뚫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깊은 물속에라도 있듯 그것의 흐릿한 형상만이 보이고 뭔가로 덮어 놓은 듯 손끝에서 어렴풋이 느껴질 뿐, 뭐라고 설명할 수도 뭐라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마치 오래되어 색이 바래 버린 편지처럼 대강의 뜻은 유추할 수 있었지만, 결코 그것을 제대로 읽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멈춰 서 있었다. 아니, 멈춰 선 것은 나이고, 그런 나를 그는 기다려 주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창문을 통해 스며들던 달빛이 잠시 구름에 가려진 그때가 되어서야 그제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저는 그럴 만한 존재가 못 됩니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그 말만을 남기고 나는 쫓기듯 내 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내 방에 도착할 때까지 들린 발소리는 오직 내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