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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23화)
10장 추대, 총사령관?!(3)
혼자밖에 없던 연구실에서 들려온 타인의 목소리, 그리고 그와 함께 천천히 그림자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색 인영. 갑작스런 낯선 존재의 등장이었지만 엔타 카일리에게서 긴장이나 경계의 태도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짜증이 묻어 있는 어투로 이렇게 대꾸할 뿐이었다.
“하먼 형님, 왜 또 오셨습니까? 바질리스크의 알이라면 저번에 드린 것들이 다라니까요!”
“이거, 이거. 자네는 맨날 내가 물건 얻어 가려고만 오는 줄 아나? 거기다 내가 가져가 봤자 얼마나 가져간다고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검은색 로브. 하지만 왠지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그와는 다르게 턱밑 가득 탐스러운 하얀 수염을 기른 푸근한 인상, 마치 옆집 할아버지 같은 모습의 그가 바로 파멸의 현자 하먼 보로스였다.
“형님이 가져간 피닉스의 깃털, 바질리스크의 알, 코카트리스의 부리 수만 해도 몇 개인데 그런 말씀이십니까. 가격이 너무 비싸서 일부러 고생, 고생 하며 채집해 온 걸 사람 좋은 얼굴로 날름 가져가신 게 어디 한두 번이십니까? 거기다가 저번에는…….”
그동안 쌓인 게 많았었는지 얼굴에 독기마저 품고 그간의 한을 쏟아 내는 그였지만, 그를 마주하고 있는 하먼은 너무도 태연히, 흡사 ‘허허, 그랬던가?’라는 얼굴로 그저 가만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거기다 가끔씩 ‘정말 내가 그랬나?’라며 정색하여 되묻기까지 하니, 엔타 카일리로서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이후로도 한참을 더 쏟아 낸 엔타 카일리였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제풀에 지쳐 스스로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하아, 내가 말해 봤자 뭐하겠습니까? 그래, 진짜 오늘은 왜 온 겁니까?”
그제야 하먼 보로스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지금까지의 시종일관 지속하던 ‘나는 모르는 일이다’라는 태도를 벗어던졌다.
“무슨 일이기는, 벌써 몇 년째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고 있어서 안부차 찾아온 거지.”
“그럼 이제 봤으니 아시겠군요. 전 괜찮으니 돌아가십시오.”
“허어, 이 사람, 매정하게 이러긴가? 뭐, 물론 자네가 잘못될 거라고는 모임의 누구도 생각지 않았네만, 뭐 그래도 자네는…….”
“하먼 형님, 오늘은 느긋하게 형님 장단 맞출 시간 없습니다.”
“아, 그런가?”
날카롭게 말꼬리를 자르며 들어오는 그의 말에, 지금껏 능청스럽던 하먼이 이번에는 웬일인지 순순히 물러서는 듯했다.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검은색 그림자가 다시 그를 감싸 안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자네 제자를 만난 일도 있었지.”
“……!!”
“하지만 자네가 가랬으니까…….”
“자, 잠깐만요! 형님!”
그림자에 그의 몸이 완전히 감싸이기 직전, 다급한 그의 외침에 기다렸다는 듯 그림자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응? 왜 그러는가?”
마치 정말로 무슨 일인지 모르는 듯한 그의 능청스런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마나를 끌어올린 엔타 카일리였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상대의 흐름에 말려들어 버린 것을.
“죄송……합니다.”
“응? 요즘 귀가 좀 안 좋아서…… 뭐라고?”
어금니마저 꽉 깨물며 겨우 내뱉은 말이었거늘, 상대는 얄밉게도 못 들은 척, 한 번 더 말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의 성격이라면 조금 답답해도 이쯤이면 소리라도 지르며 자리를 떠났겠지만, 역시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앞으로 마음 내키실 때마다 오셔서 원하는 만큼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엔타 카일리는 속으로 집요한 늙은이라고 생각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언제나 경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가? 자네가 그렇게 나를 생각해 주는데, 내가 모른 척할 수는 없겠군그래. 하하하!”
‘개뿔, 꺼져 버려!’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이제 와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거기다, 실제로 그랬다가 자신이 손해 봤던 일이 또 얼마나 많았던가.
“후후, 아무리 그래도 자네 성질도 많이 죽었군그래. 뭐, 그만큼 제자가 소중하다는 건가? 정말 놀랐다니까. ‘파멸의 속박’이라는 별호를 가진 자네가 제자를 온전히 떠나보내다니! 내가 알기로는 마지막 수업에서 실험 재료로 생을 마감시키는 게 자네가 제자를 가르치는 방식이었을 텐데 말이야.”
다른 이가 듣는다면 소름이 끼칠 내용이었지만, 하먼은 마치 그것이 그저 조금 색다른 교육 방식 정도밖에 안 된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그러한 하먼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린 쪽은 엔타 카일리였다.
“모함하지 마십시오. 그놈들은 자기 재능만 믿고 정도에서 너무 벗어났거나, 처음부터 추잡한 속셈으로 제자로 들어왔던 자들이라 그랬을 뿐이지, 저도 제자를 아끼는 스승입니다.”
“하지만 자네의 제자들은 이번 한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마지막에 실험 재료행이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 때문에 ‘파멸의 속박’이라는, 자네가 그렇게 끔찍하게 싫어하는 명호가 붙은 거고.”
“제자 놈들이 하나같이 인간 실격인 놈들이었던 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글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혹시 자네 교육 방법이 잘못된 거라고 여기지는 않는 건가?”
“어둠을 걸을 자로서 그 어둠을 모른다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거기다 도리어 어둠에 휩쓸려 버리다니, 그런 놈들은 흑마도의 길을 걸을 자격이 없습니다.”
엔타 카일리의 태도는 단호했다. 흑마도사들은 어둠의 길을 걷는 자.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어둠이라는 또 하나의 힘을 따라 걸으며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 어둠에 물들어 진정한 어둠을 보지 못하고, 그 허상에만 쫓기며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자들을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엔타 카일리를 보며 하먼은 잠시 침묵했다.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그의 욕심이었다.
‘그러나 자네는 너무 성급해. 불완전한 인간이, 어찌 그것을 마주하고 방황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아직 그 발걸음도 채 다 떼지 못한 이들이……. 헤매며 방황하지 않도록 곁에서 잡아 주는 것이 스승이건만…….’
하지만 하먼은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것 또한 그의 길, 자신이 참견할 자격은 없었다.
“그런데…… 그 녀석은 어떻던가요? 잘 지내는 것 같던가요?”
“아, 좋아 보이더군. 예의도 바른 것 같았고. 다만 그동안 오래 떠돌아다녔는지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고 있더라고.”
“녀석, 전쟁터에서도 꽤 활약했다기에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뭐, 도움을 받은 상황이었고 거기다 자네 제자라기에 일자리도 하나 소개시켜 주면서 내 친절히 거기까지 보내 주었다네.”
엔타 카일리는 내심 조금 전 하먼에게 쌀쌀맞게 대했던 것이나 늘 짜증을 내던 것이 미안해졌다. 그러고 보니 이렇든 저렇든 서로 알고 지낸 세월만 놓고 봐도 벌써 40년 아닌가. 그 일자리가 어디든 파멸의 칭호를 가진 마도사의 추천으로 간 거라면, 이제 적어도 배를 곯을 일은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형님. 못난 스승이 해 주지 못한 걸 형님이 대신 해 주셨군요.”
“그럼 흑마도사 총지부에도 자주 올 거지?”
“물론이지요.”
지난 40년을 통틀어 보아도 이런 일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일이지만, 어느새 둘 사이에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근데 자네 코카트리스의 부리 좀 더 빌려 갈 수 있겠나? 마계에서 사 오는 최고급품들조차 자네가 손질한 것보다 못하더군.”
“하하, 암요! 드려야지요. 형님께서 만드시는 약품들이야말로 마계, 아니, 세계 최고 수준이니까요.”
좋은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향한 소소한 덕담들이 그렇게 한참을 오고 가고 있었는데…….
“근데, 그 일자리가 어디인가요?”
“아? 아, 마왕성.”
갑자기 어디선가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
“……이, 빌어먹을 늙은이가!”
지금껏 겨우겨우 억누르고 있던 것이 기어코 터져 버리고 말았다. 훈훈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일갈과 함께 뿜어져 나온 새까만 불꽃이 순식간에 하먼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었는지 하먼이 재빨리 만들어 낸 투명한 벽 덕분에 다행히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어쩐 일로 이 늙은이가 착한 일 했나 했다, 이 빌어먹을 늙은이야! 그 녀석을 마왕성으로 보내면 어쩌겠다는 거야! 마족 놈들을 걔가 어떻게 견뎌 내! 앙?! 어서 어딘지 말해! 이제 다 상관없어. 당장 데려와야……!”
“이보게, 걱정 말게나. 지상계에 있는 백색마궁이고, 또 지금 거기 사정이…….”
“닥쳐! 지상계면 더 큰일이지! 좀 있으면 하늘의 빛이 오게 생겼는데 아예 죽으라고 저주를 걸지 그랬냐!”
그날, 엔타 카일리가 어언 십 년 동안 정리를 하는가 안 하는가로 고민해 오다 결국 그냥 놔두기로 결정한 보조 연구실은, 바로 그날 엔타 카일리 스스로 토해 낸 검은 불꽃에 휩싸여 사라졌다.
11장 짊어진 마음(1)(1)
내 방은 알현실에서 그나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편이었다. 알현실에서 한 3∼4분 정도 걸어가면 과거 가신들이 기거했던 것 같은 주거용 복도가 나오는데, 처음 왔을 때 그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잘 꾸며진 것을 골라 내 방으로 삼았다.
끼이익.
나를 반기는 기분 나쁜 문소리를 듣고서는 그제야 아침에 오늘은 기름칠을 하겠다고 결심했던 사실을 기억해 냈다.
과연 삶이란 이런 것이었다. 아침에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저 문에 기름칠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이후에는 기름칠은커녕 자칫했으면 내 방으로 돌아오지도 못할 뻔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지척으로 다가선 죽음 앞에서조차 그것이 자신의 목을 잡아채야지만이 겨우 알아챌 수 있다. 어제까지 웃고 떠들던 동료도, 오늘 아침을 같이 먹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 따위는 없다.
수없이 경험하고, 또한 스스로 되뇌어 왔던 사실이었는데, 오늘따라 새삼스레 마음에 와서 닿았다.
어릴 때 읽었던 책 구절이 떠오른다.
‘지금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만약 내가 죽었다면, 내가 문에 기름칠을 하는 일 따위는 영영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라.’
그 책의 마지막 장에 친필로 적혀 있던 말이다. 그 책을 지은 작가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나중에 적어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아마 그 책이 말하려 했던 핵심일 것이다.
하지만 역시 어렸던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 말은 결코 와 닿지 않는다. 그렇다고 뭐가 어떻단 건가? 열심히 살았든 열심히 살지 않았든, 그것이 무엇이 중요한가. 삶의 흔적 따위, 결국에는 한 줌의 흙조차 되지 못하고 소멸되는 것이 아니던가.
“후우…….”
옷도 벗지 않고 그냥 그대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루 동안 벌써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더니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기자, 마치 침대 밑으로 녹아내리는 느낌과 함께 천천히 눈꺼풀이 닫혀 갔다.
속삭이듯 찾아오는 하룻밤의 휴식, 아니, 깊고 깊은 진실한 안식. 그 뒤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으랴. 남은 자의 슬픔 따위는, 이루지 못한 미련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것이 뭐가 어떻다는 것인가. 그저 버려진 것들일 뿐이다. 잊히는 것들, 결코 영원할 수 없는 것들은 결국 하찮은 것이다.
그리고 버려진 것들 따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래, 얼마나 사랑했건 얼마나 바랬건 결국은 그저 버려졌을 뿐. 버릴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그 정도라는 것. 아무리 잔인하고,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이 현실이고 진실이다.
아버지, 어머니, 전우들, 도나, 그리고…….
‘그건 제가 알아서 해 볼게요.’
엘레나.
그래, 결국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그저 타인에 불과한 것. 그들이 그렇듯, 나 또한 언제든 버려지고, 언제든 잊혀 갈 수 있는…… 그것이 바로…… 나의…… 현……실…….
“헉! 허억! 헉, 헉!”
순간, 갑자기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고통에, 몸이 심하게 요동쳤다.
“허억……! 허억……!”
가슴에서 막혀, 금방이라도 찢고 올라오려는 검은 무엇 때문에 헛구역질이 났다.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점점 몸이 비틀리는 것 같았다. 나는 거칠게 몸을 굴렸다. 부질없는 몸부림이란 걸 알았지만, 머리는 새하얘지고 올라오는 헛구역질만 강해져 갔다.
떨쳐 내고 싶다! 이것을, 이 고통을…….
퍽.
침대에서 떨어졌는지 단단한 바닥이 내 몸을 쳤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속에서 올라온 신물이 어느새 상의를 적시고 있었다.
“헉! 안 돼, 안 돼……. 잊어야 돼. 헉……. 잊어…… 잊어버려! 컥!”
‘이것이 현실이고 진실이다.’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그 한마디. 그 소리에 힘입듯 더욱더 강하게 쳐 올라오고 있는 고통과 사념들이 심장을 찢고 머리를 부숴 오고 있었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