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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22화)
10장 추대, 총사령관?!(2)


그런데…….
“엘레나 님, 알렉스 씨, 저는 괜찮습니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조금 전 그에게 목숨을 위협받았던 카지한이, 이제는 오히려 레이몬드를 돕는 듯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카지한, 조금 전에 당신은 이자 때문에…….”
“예. 하지만 조금 전에 평가가 어떻고 하는 말이 있던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런 사소한 것 때문에 평가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되겠지요. 굳이 지금 이 일을 따지기보다는, 평가가 있은 뒤에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미소에, 그제야 그녀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은 알렉스와 생사의 기로에 서서 변해 가는 상황만을 필사적으로 주시하던 레이몬드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을 알아챈 알렉스가 슬그머니 자신의 검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자신의 목에서 차가운 금속이 사라진 것을 깨닫지 못하기라도 한 듯 불편해 보이는 그 모습 그대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카지한은 넉살 좋게 물어 왔다.
“레이몬드 경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레이몬드는 몰래 이빨을 깨물었다. 심사를 핑계로 협박을 하러 왔다가 오히려 꼬리를 밟힌 격이었다. 상대는 자신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심사 결과에 따라 이 일을 정식으로 항의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묻어 줄 것인지를 선택하겠다는 말이었다.
심사 결과에 대해 청탁을 하는 것은 마계 재판에 올릴 수 있는 명백한 위법. 증명만 할 수 있다면 다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겠지만, 상대는 그것을 염려한 듯 교묘히 그 의도를 가려 가며 말을 꺼내고 있었다.
“인간 주제에…… 제법이군.”
“감사합니다. 그래서 경의 생각은……?”
조금 전에 보이던 강직한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이번에는 갑자기 능글맞아 보이는 태도.
레이몬드는 눈앞의 이 종잡을 수 없는 사내가 앞으로 자신의 방해물이 될 것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그로서는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돌려 엘레나에게 말했다.
“저야, 엘레나 님의 결정에 맡기도록 하지요.”
“자, 그럼 엘레나 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녀는 자신을 감싸고 있던 마기를 거둬들였고, 그때까지 알현실에 가득하던 숨이 막힐 듯 무거운 기운도 사라졌다.
“그렇군요. 중요한 심사를 앞에 두고 당장 결론을 짓기는 어려운 문제네요.”
잠정적인 허락. 그것이 떨어지는 그 순간에 맞춰 레이몬드의 뒤쪽에 푸른색의 포탈이 열렸다. 마치 도망치는 듯한 행동이긴 했지만, 레이몬드로서는 한시바삐 영지로 돌아가 대처 방안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치욕감에 이성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 엘레나 님,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감히 말씀드리지만, 아무리 개개인의 능력이 출중해도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 드리지요.”
아무리 자신이 편의를 봐준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는 완강한 표현.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아주 작은 보험이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 카지한과 알렉스를 한 번씩 노려본 레이몬드는 천천히 포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포탈이 닫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레이몬드의 모습은 백색마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카지한은 참고 있던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겨우겨우 참고는 있었지만 긴장이 풀리는 순간 아무래도 다리도 완전히 풀려 버린 모양이었다.
“후유, 제나스 씨, 로나스 씨. 정말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거기다 알렉스 씨, 그 짧은 순간에 정말 순발력 있는 연기 정말 멋졌습니다.”
“연기라니요?”
“하하, 제가 여러분의 대장이란 것 말입니다.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내심 잠깐은 기뻤었…….”
“거짓말이 아닙니다.”
“네?”
카지한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자신이 어떻게 마계의 후작이라는 자마저 가볍게 제압하는 그의 대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저희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 주신 당신이라면, 저희를 통솔하실 자격이 있습니다.”
“하하, 말씀은 고맙지만 다른 분들 의견도 들어 봐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로나스 씨, 제나스 씨.”
옆에 서 있는 로나스와 제나스를 본 순간, 카지한은 절대 표정이 존재할 리 없는 그들의 얼굴에서 자신도 모르게 무엇인가를 읽어 버렸다. 아니, 느껴 버렸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들도 알렉스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보답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할지 모르나, 저희의 성의를 받아 주십시오.”
“하지만 저는 보셨다시피 보잘것없고, 또 인사 관련 문제는 엘레나 님께서…….”
카지한으로서도 그들의 제안이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실제로 처음에 마왕성에서의 생활을 시작할 때 세 명밖에 없던 마왕성 내에서 혼자 마왕 보좌관이라는 직책까지 만들어 붙이며 놀지 않았던가. 비록 이름뿐인 서열이지만, 높은 자리라는 것을 누가 어찌 마다할 수 있을까.
거기다 만드라고라 밭을 발견한 뒤부터, 한편으론 내심 새로운 인원의 추가와 인사 문제를 신경 쓰고 있었기에 자신의 위치가 유지됨은 물론이요, 오히려 높아진다는 것은 두 손 벌려 반길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사에 관한 것은 어디까지나 마왕의 권한. 거기다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맡겼을 때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긴다는 것은 카지한으로서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괜한 기대는 그저 실망만을 가져온다는 것 정도는 카지한에게는 이미 오래전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래요. 거기다, 저는 아직 제대로 된 보고를 받지 못했는데요.”
“아,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럼 이것을…….”
알렉스가 내미는 세 장의 양피지를 받아 든 엘레나의 표정이 변했다.
“이, 이것은?!”
엘레나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양피지를 묶고 있던 리본들을 모두 풀었다.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의 리본. 마계의 정규 문서에 그것이 사용되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지만,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펼쳐 본 양피지들에 적혀 있는 것은 계약을 상징하는 수없이 많은 복잡한 문장들, 그리고 알렉스, 로나스, 제나스. 각자의 이름들.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그들의 계약서였다.
보통의 언데드와는 다르게, 알렉스들과 같은 이성을 지닌 고등 언데드나 술사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고등 생명체들에게는 그 탄생과 함께 계약의 인이 새겨진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완전한 소유. 그 존재의 생명도, 죽음도, 그 모든 것이 창조자의 것이라는 증표이자, 영원한 족쇄.
하지만 실제로 술사와 피조물 사이의 계약의 인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형체가 없는 주술로서의 계약. 그렇기에 불과 천 년 전까지만 해도 쉽게 거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주술적 인을 술사에게서 양피지에 옮기는 방법은 지금의 언데드의 마왕이 개발한 것인데, 등극하고 나서 1년도 채 안 걸려 그 혼자 찾아낸 것이라고 한다.
그녀가 한동안 양피지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사이, 알렉스가 다시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것과 12기의 2급 데스나이트. 이것이 이번 방문에서 카지한 씨께서 얻은 결과입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언데드 마왕님의 배려가 있으셨기에 가능했던…….”
그것은 겸손이나 허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카지한의 진심이었지만 알렉스는 그런 그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는 듯, 단칼에 잘라 말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카지한 씨의 능력이며 공이지요.”
완강하고 확고하다 싶은 그의 태도에 카지한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어쨌든 자신을 칭찬하는 말들에 이익이면 이익이 되지 불리할 것 하나 없는 상황. 굳이 더 이상 뭐라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 나 좋으라고 하고 있는데 거기에 자꾸 반박하는 것도 우습지.’
카지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바닥에 눌러앉았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었긴 했지만, 이후 알렉스와 엘레나의 대화에 끼느라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어중간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번에야말로 마음 놓고 바닥에 앉으니 이제는 차분히 주변의 모습들도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근데 엘런은 왜 이리 조용한 거지?’
문득 지금까지 잊고 있던 엘런의 존재를 깨달은 그의 눈은 서둘러 알현실 안에서 엘런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여전히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엘레나와 알렉스, 가만히 서 있는 제나스와 로나스, 그리고 12기의 데스나이트와 그런 그들을 견제라도 하는 것인지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데스나이트들을 바라보고 있는 스켈레톤들.
그 어느 때보다 북적거리고 있는 알현실이긴 했지만, 보여야 할 엘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엘런 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본다거나, 차분히 생각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인식과 동시에, 이해의 단계에 닿기도 전에 먼저 터져 나온 말. 얼마나 다급했으면 이미 카지한은 다리가 풀린 것도 잊은 채 일어서 있었다.
“……!”
그리고 그 한마디에 알현실 안의 분위기는 변했다.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엘런의 모습을 못 본 지 꽤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게 되자, 알현실 안의 분위기는 일순 중심을 잃은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 엘런을 찾아야 해요!”
“너희들, 엘런 님을 찾아라!”
척!
“엘레나 님, 저희도……!”
“잠깐 기다리십시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듯한 기세의 카지한과 스켈레톤들, 그리고 알렉스의 앞을 로나스가 막아섰다. 왠지는 모르지만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침착해 보였다.
“기다리십시오. 엘런 님은…… 지금은 혼자 있게 해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로나스, 무슨 말이야?”
뭔가 아는 듯한 그의 말과 침착함에 방 안의 분위기가 다시 균형을 잡아 갔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은 직후고 너무 갑작스런 상황에 우왕좌왕하기는 했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곳은 백색마궁, 엘런의 집이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큰일이 일어날 이유는 없었다.
로나스는 분위기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느끼고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엘런 님은 아까…… 레이몬드를 본 그때,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
“…….”
갑작스런 침묵, 그리고 여전히 심상치 않은 방 안의 분위기.
뭔가 아는 듯한 알렉스들의 반응과 불안감 대신 엘레나의 표정에 드리워진 흡사 자책감과 같아 보이는 무엇.
카지한은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방 안을 채운 침묵에 자신이 먹혀 버린 것일까,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카지한, 그리고 다들,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들이 많기는 하지만, 지금은 일단 쉬도록 하는 게 좋겠군요.”
꽤 시간이 흐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왠지 카지한은 이미 지나 버린 조금 전의 침묵이 마치 찰나같이 느껴졌다.
그것은 왜일까. 아마도 카지한 스스로가 그 짧은 침묵 속에 담긴 무엇을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은, 자신과는 다른 별개의 무엇이라고 느꼈던 것 때문은 아닐까.
“그러면 엘런 님에 대해서는……?”
“그건 제가 알아서 해 볼게요. 카지한은 일단 푹 쉬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하지요.”
카지한은 엘레나와 알렉스 등에게 간단한 목례 후 알현실을 걸어 나왔다.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나름 가까워졌다 여기고 있던 그로서는 마치 타인에게 하는 것같이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조금 서운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로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법 도구들과 양피지들이 널브러져 있는 작은 연구실.
청소라고는 과연 해 본 적이나 있는지, 창문을 타고 스며 들어오는 새하얀 햇살에 비춰지는 뿌연 먼지들은, 마치 안개가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게 만들고 있었다.
“하아, 여기를 싹 비워야 하기는 하는데…….”
연구실 한구석, 검은색 로브를 걸친 노마도사가 방 안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름은 엔타 카일리. 과거 카지한을 가르쳤던 스승들 중 한 명이자, 현재 열 명의 흑마법사만이 가진 궁극의 흑마법사의 칭호인 ‘파멸’의 소유를 당당히 허락받은 자였다.
“그래, 어차피 떠나보냈는데 뭐…….”
뭔가 결심한 듯 조심스레 손을 올려 보았지만…….
“아냐, 그래도…….”
이내 다시금 들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매년 몇 번이나 큰 결심을 하고 찾아오지만, 끝내 행하지 못하고 돌아가기를 벌써 10년째. ‘올해야말로!’라고 말하며 다시 찾아오기는 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래, 어차피 연습용 연구실. 굳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자주 들르는 것도 아니니까…….”
“허허허, 자네답지 않군그래. 예전 같으면 망설일 것 없이 연구실을 통째로 폭발시켜 버렸을 텐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