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마왕성 근무기 1권(21화)
9장 접견! 언데드의 마왕(4)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시지요.”
“사실, 지금부터란 건 거짓말이야. 진짜 검사는 사흘 후지. 명색이 전 약혼자였는데, 약간의 친절을 베푼 거라고.”
“그런 친절, 받고 싶지 않군요.”
“이런, 이런!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나는 기회를 주려는 거야. 사실 지금 이 성은 텅 비었잖아? 죽어 버린 누구누구 때문에 말이지. 기껏해야 너하고 엘런, 그리고 아까 봤던 빗자루 든 스켈레톤들이 전부일 텐데, 이런 상태에서 심사에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은 너도 알잖아?”
돌아가신 아버지를 비하하는 그의 말에, 엘레나는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현재 칼자루를 들고 있는 것은 원통하게도 상대. 그녀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요?”
그 말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레이몬드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지어졌다.
“간단한 제안이야. 내 청혼을 받아들이도록 해. 그러면 도와주도록 하지.”
“거절합니다.”
“잘 생각해 봐. 내 아내가 된다면, 로티온 가의 병력과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야. 너의 한마디면 수천의 병력이 당장이라도 이곳으로 달려올 거고, 거기다 내가 평가의원이니까 훨씬 유리해지는 거지. 너도 이 성에서 쫓겨나고 싶지는 않잖아? 나름대로 추억도 있을…….”
“거절한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그의 제안에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답했다. 설사 평가에서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그의 아내가 될 마음 따위는 없었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서 당장 미소가 지워졌다. 싸늘해진 표정, 하지만 그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래? 텅 빈 성에서 마왕놀이 한다고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나 본데…….”
그의 손과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위험했다. 그녀는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기운을 조심스럽게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척척척.
갑자기 들려오는 시끄러운 발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아까 그녀가 돌려보냈던 스켈레톤들이 다시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같이, 침입자에 대응하듯 청소 용구를 무기 삼아 들고는 경계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를 맞이하듯, 편안하고 어딘가 모르게 절도가 있는 모습이었다.
“네놈들은 또 뭐야?”
바로 그때였다. 그들 앞에 푸른색의 빛과 함께, 포탈이 열렸다.
“엘레나 님, 돌아왔습니다!”
“카지한!”
반가운 목소리에 그녀는 레이몬드의 존재도 잊고는 그에게로 달려갔다. 레이몬드는 처음 보는 엘레나의 그런 모습에 순간 뒤로 주춤한 채 멈춰 서 버렸다.
“카지한! 잘 다녀왔어요? 어디 다치지는 않았고요?”
“예,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엘레나 님, 저분은…….”
그녀의 환대에 기쁘게 답하려던 카지한의 눈에 낯선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색의 정장과 붉은 머리카락.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피로 물든 듯한 모습.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 저자는…….”
“누나, 우리도 왔어!”
“에, 엘런?! 너 대체 언제, 아니, 어떻게……?!”
갑작스런 엘런의 등장에, 엘레나는 머리가 멍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도대체, 왜, 아니, 어떻게 엘런이 카지한과 함께 포탈에서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포탈은 아직 닫힌 것이 아니었다.
“엘레나 님, 별고 없으셨습니까?”
“다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알렉스, 제나스, 거기다 로나스까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물론, 그들의 뒤를 따라 하나둘 들어서는 데스나이트들의 모습도 그녀의 눈에 띄어 여전히 정리는 되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다시 보게 된 그리운 자들의 모습에 지금은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그들은 누가 뭐래도, 과거 외로웠던 마왕성에서 자신들을 진심으로 걱정한 자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오랜만의 해후에 누군가 찬물을 끼얹었다.
“후후, 그래, 완전히 텅 빈 것은 아니었나 보군. 하지만.”
“오랜만이군요, 레이몬드 경.”
빈정거리는 듯하며 앞으로 나서는 레이몬드의 앞을, 알렉스가 먼저 막아섰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알렉스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의 붉은색의 눈은 카지한을 향하고 있었다.
“누구더라? 나는 스켈레톤 따위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할 만큼 미련하지는 않거든. 이제 비켜서…….”
“알렉스입니다. 예전에 제가 잠시 무례를 범했었지요.”
“…….”
레이몬드는 말을 멈췄다. 카지한을 향하고 있던 시선도 알렉스에게로 옮겨졌다. 무표정하게 있던 그의 표정이, 입꼬리가 올라가며 비릿한 미소로 변했다. 하지만 상대를 깔보는 듯한 표정과는 달리 그의 몸은 약간 굳어 있는 듯 보였다.
“그래, 예전에 그런 일도 있었지. 근데 좀 비켜 주지 않겠어?”
“제가 다시 무례를 범하지는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알렉스는 길을 터 주었다. 레이몬드는 그런 알렉스를 지나서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지한의 앞으로 가 섰다. 마주 선 둘의 키는 카지한 쪽이 약간 더 작은 듯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한쪽이 다른 한쪽을 내려다본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내 이름은 레이몬드 겔 로티온. 마계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작이자, 마계 중앙 회의소의 13의원들 중 제8의원이다. 무릎을 꿇어라.”
고압적인 태도. 카지한은 고개를 돌려 슬쩍 엘레나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향하는 그의 그 말없는 물음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하지만, 후작님. 저는 엘레나 님과 엘런 님의 신하. 두 분의 허락이 없는 한, 다른 분께 무릎을 굽힐 수는 없습니다.”
그가 비록 마계의 귀족이고 그 기세 또한 남다르기는 했지만, 조금 전까지 언데드의 마왕을 만나고 온 카지한이었다. 그의 기세 따위에 눌릴 리가 없었다. 강한 자는 굳이 위협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 이미 그 존재 자체로 모든 것을 말할 뿐이다.
평소라면 또 모르지만 하늘, 마치 그 자체와 같은 느낌의 월운이란 존재를 알게 된 지금의 카지한에게 레이몬드의 위협은, 오히려 레이몬드 그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호오, 그래? 그래. 뭐 그렇다면…….”
레이몬드는 강경한 카지한의 태도에도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 듯했다. 그는 발길을 돌려, 다시 알렉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 맞다. 이걸 잊었군.”
“카지한!”
이내 그가 다시 몸을 튼 그 순간, 누가 어찌할 사이도 없이 그의 손끝에서 한 줄기의 검은 빛이 카지한의 양미간 사이로 날아들었다.



10장 추대, 총사령관?!(1)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그 검은 빛을 바라보면서, 그는 세상이 느려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시간이 멈추는 듯 날아드는 빛도 움직임을 멈춰 갔지만, 불행인지 아니면 마지막 행운인지, 의식만은 더욱 뚜렷해져 가는 것 같았다.
‘결국, 이건가.’
그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이것이 끝이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를 뿐이었다. 너무 강렬한 충격 때문에 작은 충격에 둔감해져 버린 것이었다. 설사 그가 월운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자신과 비교했을 때 충분히 위험한 존재였거늘 너무 방심했다.
‘엘레나 님.’
어째서 마지막으로 떠오른 이름이 평생 행복이라고는 몰랐던 가련한 어머니도, 자신의 손으로 묻어야 했던 첫 경험의 여인도, 그렇다고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친우나 스승도 아닌 그녀의 이름인지는 카지한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다만 지금은 그저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이 들 뿐이었다.
창!
그때였다. 멈춰져 가던 시간이 돌아왔다. 하지만 시각을 뒤덮는 죽음의 그림자도, 갑자기 조용해지는 마지막 정적도 그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대신 청아한 소리와 함께, 새하얀 두 개의 검날이 교차된 채 그의 미간을 막아서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교차된 검 중 하나를 쥐고 있는 로나스, 아니, 제나스의 물음에 카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처음 전쟁터에 나온 신참 병사처럼 죽음의 공포 앞에 육체와 정신이 굴복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을 실감하기도 전에 의연한 척 입을 떼기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뭐야, 재미없게. 나름대로 편하게 보내 주려…….”
척.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가려던 레이몬드의 목에 뭔가 차가운 것이 닿았다. 레이몬드는 오싹한 무언가에, 차마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곁눈질로 옆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곳에는 어느새 바짝 다가온 알렉스가 그의 검날을 세워 자신의 목에 갖다 대고 있었다.
“뭐, 뭐야? 알렉스, 지금 내 몸에 검을 갖다 댄 거야?”
“……미리 말했지요. 제가 무례를 범하지 않게 부탁드린다고.”
“엘레나! 어서 알렉스한테 이 검을 내리라고…….”
그가 목소리를 높이자 알렉스는 검날을 더 바짝 갖다 대었지만, 실제로 레이몬드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알렉스의 검이 아니었다.
“뭐, 뭐야? 그건 대체 무슨 뜻이지, 엘레나?”
검은색 기운이 옆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엘레나의 짙고 순수한 마기가 일렁이며 레이몬드 그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그 또한 마계의 후작, 그것도 수많은 형제자매들과 아버지마저 힘으로 누르고 스스로 자리에 오른 자. 마왕의 마기를 마주했다 하여 주눅 들 이유 따위는 없었지만, 지금의 레이몬드의 이마에서는 어느덧 식은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를 정말로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 엘레나의 눈동자 속에서 보이는 분노, 그리고 그 분노를 머금은 차가움.
“자, 잠깐, 엘레나, 왜 이러는 건데? 겨우 인간 한 명이잖아. 안 그래? 거기다 나는 이번 평가의 심사 의원이야. 이런 행동은 앞으로의 심사에…….”
“조용히 하시지요.”
알렉스의 경고와 함께 그의 목에 옅은 선혈이 그어지고, 붉은색 피 한 방울이 검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카지한 님은 앞으로 저희를 통솔하는 지휘관이 되실 분. 거기다 지금 당신의 행동은 명백한 적대 행위. 당장이라도 목을 베어 버리고 싶지만, 엘레나 님 앞인지라 참고 있는 것입니다.”
“무, 무슨 말이야? 저 인간이 지휘관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릴! 저자가 누구기에 마계의 고명한 팬텀 나이트들이 겨우 인간 따위의 명을 듣겠다는 거냐!”
“레이몬드.”
무감정한 목소리. 그러나 그녀를 휘감고 있는 마기는 아까보다 훨씬 짙어져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대가 아무리 마계의 후작이라지만 마왕성에서, 그것도 마왕의 앞에서 그 신하 된 자에게 위해를 가하려 하다니. 마신 베카드 님과 32마왕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따위 만행을 뭐라 설명할 생각이지?”
“…….”
레이몬드는 입을 다물었다. 마왕의 권위. 그녀의 입을 통해 전해진 그 한마디의 의미, 그리고 지금 그녀의 태도가 뜻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비록 힘이 많은 것을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는 마계지만, 마계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루고 있다. 이성이나 규칙이 없을 리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성이나 그로 인해 생겨나는 규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마족이라 해도 세상의 반이라 할 수 있는 이만한 영향력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진작 자멸하거나 다른 종족에게 정복당했으리라.
그 규칙의 핵심은 바로 철저한 복종.
마신 베카드와 그 대리자인 32인의 마왕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이다. 물론 그에 합당한 다른 규칙들이 존재하며, 마왕과는 별도로 귀족 가문들, 마계 중앙 회의소의 존재가 마왕들의 절대 권력이나 횡포를 허락하지는 않지만, 마왕의 권위는 어디까지나 그것이 바로 마계를 이루고 유지시키는 힘인 것이다.
레이몬드의 안색이 창백히 변해 갔다. 너무 경솔했다. 사실 자신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상대의 수하를 죽이는 것은, 물론 서로 간의 관계, 힘의 균형 등 여러 가지의 것들에 의해 유동적으로 달라지겠지만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일종의 흔한 일이었다.
거기다 현재는 마계의 귀족 가문들과 마왕들 간의 미묘한 대립이 이루어지고 있고 자신은 현재 마계 중앙 회의소의 의원으로 방문한 상황이다.
어쩌면 사소한 일로서 덮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엘레나는 이 행동을 마왕의 권위에 반하는 행동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마계의 후작이자 마계 중앙 회의소의 의원이라 할지라도, 마계의 모든 것이라 말할 수 있는 마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결코 허락 받지 못할 일이다.
만약 엘레나가 그런 식으로 계속 몰고 가, 결국 정식으로 마계에 처벌을 요청이라도 한다면, 일이 잘못될 경우 자신의 목숨도 장담할 수는 없다. 레이몬드의 얼굴은 이제 사색이 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