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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20화)
9장 접견! 언데드의 마왕(3)


‘아마도 일행 분은 접대실에 계실 겁니다.’
월운의 공간에서 빠져나온 뒤, 나는 먼저 엘런을 만나기 위해 데나텔이 알려 준 대로 접대실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공간에서 느껴진 편안함에 익숙해졌던 것인지,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느껴지는 이 무거운 기운이 영 거북했다.
그 공간과 이곳의 기운 차이가 이 정도였다니……. 그저 성안의 분위기가 무겁다고 느꼈을 뿐인 처음과는 달리, 지금은 마치 검은 안개에 둘러싸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제외하고는 참 멋진 성이군.”
섬세한 아름다움의 백색마궁과는 달리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성은 또 다른 멋을 지니고 있었다. 상대를 압도하는 분위기랄까, 비록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진짜 성에 들어가 본 적은 이곳과 백색마궁을 합쳐 세 번 정도밖에 안 되지만, 역시 성이라고 한다면 이런 곳이 먼저 떠오르는 법이었다.
척, 척, 척!
저 끝에서 스켈레톤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는 스켈레톤이구나 하고 있는데, 그가 아는 척을 해 오는 것이었다.
“아, 카지한 씨. 일은 잘되셨습니까?”
“아, 네. 다행히……. 근데 혹시 로나스 씨……?”
“네, 맞습니다. 다행히 알아봐 주시는군요.”
뜻밖의 아는 척에 놀라 그냥 두서없이 삼 분의 일 확률로 찍은 거였는데, 다행히 맞았나 보다.
“안 그래도 찾으러 가려고 했습니다. 엘런 님은 잠이 드셨거든요. 많이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피곤할 만하지. 익숙하지도 않은 마법으로 고등 마법에 해당하는 포탈을, 그것도 정식 단계를 거치지도 않고 무작정으로 열었으니, 어찌 안 피곤하겠는가.
“겨우 두 시간밖에 안 놀아 드렸는데 잠이 드셔서, 다른 녀석들은 혹여 몸이 아프신 건 아닌지 걱정도 하고 있습니다.”
겨우 두 시간이라, 과연 스켈레톤이라 피곤함이 없다는 건가? 아니, 스켈레톤이라도 감정이 있다면 정신적 피곤함은 느낄 텐데. 나름 스스로 엘런을 잘 보살피고 있다고 여겼는데, 지금 이들을 보니 내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이왕 만난 거, 데나텔이 전할 때까지 가만히 있어도 되겠지만 미리 말하는 게 좋겠지.
“그런데 알아 두셔야 할 일이 좀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혹시 안 좋은 일인가요?”
“여러분께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세 분은 백색마궁에서 일하시게 될 것 같습니다. 마왕님께서 이제부터 세 분은 백색마궁의 소속이라고…….”
어어? 근데 갑자기 왜 뒤로 돌아서는…….
“미리 가서 알려 놓겠습니다!”
그 외마디를 던져 놓곤 왔던 방향으로 뛰어가는데, 원래 뼈밖에 안 남은 언데드들이 더 빠른 건가? 흡사 단거리 연속 텔레포트를 하고 있는 것과 필적할 만한 속도로 뛰어가는데……. 설마 요즘 언데드들은 만들 때 자동 헤이스트가 옵션으로 미리 달려 있는 건가?
“로, 로나스 씨! 같이 가요!”
그렇게 이제는 잘 보이지도 않는 그의 잔영을 따라 뛰어 보았지만, 무리였나 보다. 내가 복도 코너를 돌았을 때는 이미 로나스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후후, 그렇게 좋은 건가.”
그건 그렇고,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성과였다. 감정을 가진 최상급 스켈레톤 세 명과 열두 기의 데스나이트라니…….
하지만 일의 성과에 대한 만족감보다는 안도감이 컸다.
비록 용병 인생이라 사는 것보다는 팔려 가는 데 익숙했기에, 물론 그것을 떠나서 언데드 거래를 할 만한 기회가 무슨 시장에서 사과 사는 것과 같을 수가 있겠느냐만.
이러한 거래를 해 본 적도 없었고, 데스나이트 한 기당 정확한 가격이 얼마인지, 하물며 최상급 스켈레톤과의 계약 금액이 얼마인지 들어 본 적도 없고, 또 직접 들고 왔던 만드라고라조차 그 값어치가 어느 정도인지조차 몰랐지만, 이 모든 건 상대가 한참 배려해 준 덕분이란 건 분명했다. 설사 그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어찌 배려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배려인데…….
마왕성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간이 붓고 감각은 무뎌졌나 보다. 마왕과 직접 협상을 하겠다고 찾아오다니, 정말 스스로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확실히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협상이나 타협이 가능하다고 믿었다니, 이미 처음부터 나라는 존재 그 자체가, 그의 배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데.
거기다 단순히 마왕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월운 그는 뭔가 특별했다. 그게 뭔지, 어떤 것인지 짚어 낼 능력은 내겐 없었지만, 그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뭔가 특별하다. 지금까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사람 아닌 자들, 그리고 그중 ‘진짜’라고 느꼈던 이들과 그런 진짜 중에서도 특히 남달랐던 자들보다도 더.
질풍왕 테리오.
이웃나라와의 번번한 전쟁에, 평민 출신이면서도 스스로 군대를 모아 지휘, 결국 그 공로로 한 영지의 영주가 된 그는 시원스런 별호와는 달리 냉철한 지략가였다.
당시 내가 속했던 용병단은 그저 간단한 의뢰로 알고 그의 의뢰를 수락했다가, 함정에 빠져 그의 숙적과 함께 동멸(同滅)하다시피 했었다.
신성제국군 제1성기사단장 성휘(聖揮)의 글리저.
거의 맹목에 가까운 믿음을 가진 자. 그 검술 실력이나 신성력은 둘째 치더라도, 그의 그 순수한 믿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광전사에 흡사했다.
그리고 마지막 마도왕국 엔트라스의 궁정 마법사인 광(狂)법사 제다인.
엔트라스의 병사로서 참전해 다행이지, 적군을 향해 쏟아지는 하늘을 가득 메우는 불덩이들은 적이든 아군이든 지옥의 풍경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들의 뒤에 몇 십, 몇 백의 대군이 있다 해도, 그들은 단지 하나의 존재였다. 높은 곳에 서 있는 그러한 존재.
하지만 월운은 달랐다. 그는 하늘 그 자체였다. 하늘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그 자체인 어떤 거대한 무엇 같았다.
“하늘이 맑아서 다행이었지, 만약 천둥이라도 쳤다면…….”
온몸이 오싹했다.
“카지한 씨! 그 말이 진짜인가요?”
“진짜야, 카지한?”
갑자기 들려오는 알렉스와 엘런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한참 상념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깨닫지 못했지만, 벌써 접대실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안에서 기다려도 될 걸 밖에 나와서 기다리다니, 그만큼 궁금하다는 걸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 시간을 많이 지체했던 것일까.
“진짜야, 카지한? 알렉스, 제나스, 로나스도 앞으로 같이 사는 거야?”
분명 좀 전에 자고 있다고 했던 엘런의 눈에는 졸음의 흔적 같은 것은 없었다. 내가 선물 꾸러미라도 든 것처럼,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재촉해 왔다.
그런 엘런의 모습이 귀여워, 일부러 말없이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런데 정작 엘런보다 알렉스들 쪽이 오히려 더 난리였다.
“카지한 씨, 애태우지 말고 가르쳐 주십시오.”
“네, 어서 가르쳐 주십시오. 로나스 이 녀석이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요?”
후후,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이렇게 보니 해골들도 꽤나 귀여운 면이 있었다. 표정은 당연히 변화가 없었지만, 목소리만으로도 감정이 다 드러나고 있었다.
“네. 앞으로 세 분은 푸른 지혜의 마왕의 수하로서, 백색마궁에서 기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와아!”
“엘런 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확답이 떨어지자마자 엘런과 제나스, 로나스는 서로를 바라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조용한 성 복도에 그들의 환호가 울렸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성 복도를 타고 멀리 퍼져 간 그들의 환호성을 듣고 머리를 갸웃거릴 언데드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후후…….”
그렇게 재미난 상상을 하고 있는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던 알렉스가 홀로 조용히 내게 다가오더니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카지한 씨,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엘런 님은 태양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 제가 특별히 한 일은…….”
“정말 감사합니다.”
“크흠!”
갑작스런 헛기침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뒤에는 어느새 데나텔이 서 있었다. 갑작스런 데나텔의 등장에 알렉스 등은 방금 전의 모습들을 지운 채 그의 앞에 똑바로 정렬했다.
“데나텔 집사님, 오셨습니까.”
마치 방금 전 모습은 환상이었다는 듯, 진지한 모습이었다.
엘런은 갑작스런 그들의 변화에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에 반해 데나텔은 그런 그들에게 속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에 너무 좋아하시니……. 저로서는 조금 그렇군요.”
아마도 좀 전의 그들의 모습이 데나텔로서는 조금 언짢았나 보다. 하긴 충성을 바쳐야 하는 병사가 다른 주인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데, 기분이 좋을 수는 없겠지.
“죄송합니다.”
“뭐 괜찮습니다. 자, 이걸 받으시지요.”
데나텔은 알렉스 등에게 붉은색 리본으로 묶인 양피지 세 장을 내밀었다.
“계약서입니다. 푸른 지혜의 마왕님께 드리면 알아서 하실 겁니다. 그리고 카지한 씨, 데스나이트들은 이미 포탈 룸에 집결시켜 놓았습니다.”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포탈 룸으로 가시지요.”



“마계 중앙 회의소의 뜻을 받들어, 13의원들 중 제8의원 레이몬드 겔 로티온 후작. 지금부터 이 백색마궁, 그리고 푸른 지혜의 마왕에 대한 긴급심사를 실시하겠습니다.”
엘레나는 가만히 검은 양피지를 펼쳐 보았다. 갑작스런 심사라는 말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앞의 상대에게 얕보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정말 마계 중앙 회의소에서 결정한 것이라면 일단 따르는 것이 도리였기에,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양피지를 펼치자, 검은 바탕에 하얀색의 정중한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천, 마계의 조약에 의한 곧 다가올 ‘하늘의 빛’을 대비하기 위해, 마계 중앙 회의소의 권한으로 지상계 모든 마왕들에 대한 심사 및 평가를 실시한다. 푸른 지혜의 마왕과 그의 성에 대한 심사는 제8의원 레이몬드 겔 로티온과 제3의원 로져 벤 데브라가 하도록 되었으니, 협조를 바란다. 또한 이 평가에서 부적격으로 판정된다면 지상계의 지배권을 반환, 마계로 다시 송환됨을 밝혀 둔다.

하늘의 빛이 머지않았다. 그것은 마왕을 물리칠 용사들의 등장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마계와 천계는, 서로가 맺은 조약에 의해 각자 천계는 신전들을, 마계는 파견된 다섯 명의 마왕을 다리로 하여 그 영향력을 지상계에 발휘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천계보다는 직접적으로 영지를 다스릴 수 있는 마계가 유리한 것이 사실.
그렇기에 천계는 하나의 조건을 내세웠고, 그것이 바로 하늘의 빛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시기를 나타내는 말인데, 실제로 지상계에 파견된 마왕들이 용사의 손에 죽는 일들은 모두 이 시기에 일어난 것이었다.
물론, 용사들의 마왕성 공격과 군대의 침공 등은 언제나 허용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때는 다르다. 바로 천계에서의 직접적인 간섭이 허락된다는 것.
천계에서는 신전을 통하여, 지상계의 인간들 중 한 명에게 신탁을 내린다. 그리고 신탁을 받은 자는, 용사의 칭호들 중 가장 고결한 ‘빛의 용사’라는 칭호와 함께, 지상계의 모든 나라와 신전들의 협조를 받을 수 있는 권한, 그리고 천계에서 내리는 ‘힘’을 부여받는다.
비록 빛의 용사는 다섯 명 이하의 동료들만이 허락될 뿐 군대를 이끌 수는 없긴 하지만, 그에게 내려지는 ‘힘’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 시기가 지금이라니! 엘레나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었다.
병사나 부하는 고사하고, 이 성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자신과 엘런, 카지한, 그리고 살아 있지는 않지만 스켈레톤들이 전부인 현재.
용사의 출현도 출현이지만, 그 전에 심사 결과에 따라서 이 백색마궁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엘레나는 필사적으로 침착하려 애썼다. 어떻게 해서든 일단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녀는 침착하게 다시 한 번 양피지를 읽어 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에 하나의 문장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레이몬드에게 들고 있던 양피지를 다시 내밀며 말했다.
“이 문서에는 의원 두 명이 심사를 한다고 적혀 있는데, 다른 한 분은 어디 있지요?”
“이런, 조금 더 당황한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벌써 찾은 거야? 하여간 너무 똑똑하다니까.”
능글맞게 대답하는 그의 얼굴이 보기 싫었지만, 그녀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