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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19화)
9장 접견! 언데드의 마왕(2)


“저런, 많이 놀랐나 보군.”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유심히 살피더니 이내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마음을 편히 가지시게나.”
그의 손길이 내 어깨에 닿은 순간, 그제야 지금 내가 얼마나 경직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분명 어깨를 매만지고 있었지만, 어깨는 마치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흡사 무슨 갑옷을 입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풀어 볼까 하여 어깨를 움직이려는데 그가 나를 제지했다.
“흐르는 물살의 한가운데에서 물살을 거부하면 어찌 되겠나.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그것에 몸을 맡겨 보게나.”
한 편의 시를 읊는 듯한, 그러나 기교 섞인 낭송 따위가 아닌 자연스러운 목소리. 그의 목소리는 귓가가 아닌 가슴으로 먼저 흘러 들어와 있었다.
무언가 딱딱한 것이 스르륵 녹아 버리는 느낌. 그와 함께 몸이 갑자기 따뜻해지면서 마치 거짓말처럼 나무토막같이 힘이 잔뜩 들어 있던 어깨에서도 힘이 빠졌다.
“그래, 이제 좀 괜찮은 것 같군. 자네는 좀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야 할 필요가 있어. 안 그러면 언젠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거에 먹혀 땅으로 떨어져 일어설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는 여전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감에 온몸이 굳어 버릴 듯했는데, 이제는 몸도 마음도 편안해졌다. 아마도 조금 전의 일로 경계의 끈을 부여잡으며 불안에 떨던 마음이 완전히 뿌리 뽑힌 것 같았다.
처음부터 내가 그의 앞에서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내가 이곳에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부터가 그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설사 그의 마음이 바뀌어 갑자기 내 목을 챈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이다.
경계도, 잔재주를 부리려는 시도도 완전히 사라진 지금에서야 나는 그가 허락하고 있는 이 편안함을 아무 사심 없이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리라.
“아, 그래. 아까의 일이라면 데나텔과 자네에게 미안하게 여기고 있다네. 특히 데나텔 자네한테는 말이야.”
다시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손짓을 하자, 탁자 위에 있던 찻잔과 청색 도자기가 약간 떠올랐고, 마치 누가 직접 따르기라도 하듯 도자기에서 찻잔으로 차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가 다시 손짓을 하자, 연갈색의 차 한 잔이 조심스럽게 내 앞에 놓였다.
“마시게나. 자네도 차를 꽤 즐기지 않나. 아, 데나텔 자네는 내 권하지 않아도 이해해 줄 거라 믿네. 사실, 속이려는 생각은 아니었어. 성안에 이런 공간을 만든 건, 삭막한 이 성에 약간의 운치를 더하고 싶었을 뿐이라네.”
또 다른 찻잔 하나가 그에게로 천천히 날아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찻잔은 허공을 지나, 조금의 실수도 없이 그대로 그의 손에 안착되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작은 잔이었기에 작은 흔들림에도 민감할 텐데 찻잔 안의 수면은 고요하기만 했다.
“사실 환영 마법은 아니라네. 정확히 말하자면 결계지. 또 다른 차원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단순히 다른 공간을 만드는 마법이라면 제가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데나텔은 급히 말을 멈췄다. 아마도 급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하긴 했지만, 아차 싶었나 보다.
“엄밀히 말하면 마법은 아니라네. 마법과는 그 운영 방법이 조금 차이가 있으니까. 괜히 자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싶어, 아니, 솔직히 하지. 자네가 필사적으로 원리를 찾으려 하는 모습을 보는 게 꽤 재밌었다네.”
그렇게 말해 놓고 스스로도 재밌는지 웃는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의 자상한 형 같던 모습과는 또 달리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모습과도 같았다.
“……그러셨습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에 와서 사실을 밝히신 것인지요.”
데나텔의 그 물음에는 누가 들어도 감정이 잔뜩 묻어 있었지만, 월운은 마치 그런 것은 모르기라도 하는 듯 능청스럽게 차 맛까지 천천히 음미하면서 답했다.
“그야, 데나텔 자네가 이제는 포기한다는 식으로 말했으니까.”
그런 그의 말에 데나텔은 황당한 듯, 그저 가만히 그 푸른색 눈동자로 그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는 것 말고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판단이나 계산 같은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알지만,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떨 때는 자상한 형과 같다가도 지금은 장난기 많은 소년 같고, 마치 한 명의 성인(聖人) 같은데도 모든 죽은 자들의 왕이자 서열 2위의 마왕이라니……. 단순히 연기나 위선 따위라면 모르겠지만, 그건 또 아닌 듯하고 도저히 알 수 없는 분이었다.
“글쎄, 그 말은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걸.”
“무슨…… 말씀이십니까?”
“잠자는 거북이의 등 위에 카드를 쌓아 위태로운 성을 지었구나. 재워 놓은 지금이야 괜찮지만, 후에 눈이라도 뜨면 어찌할까.”
다시 그렇게 읊조리는 그의 말투에는 더 이상 장난기도, 그렇다고 처음의 자상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혼잣말 같은 읊조림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애달픔. 그의 그 고요한 눈동자는 가만히 내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그려지고, 그의 목소리에도 자상함이 돌아왔다.
“후후, 뭐 그것은 조금 더 인과의 수레바퀴가 굴러야 알 수 있겠지. 데나텔.”
“예.”
“답례로 2급 데스나이트 12기와 알렉스, 제나스, 로나스 세 명을 오늘부터 푸른 지혜의 마왕의 수하로서 보내도록 하겠네. 그렇게 준비해 주게나. 어때, 그 정도면 괜찮겠지?”
월운은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윙크까지 날렸다. 조금 전의 잔영이 아직 다 지워지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그런 행동이라니. 마치 꿈이라도 꾼 느낌이었다.
“하, 하지만 폐하, 2급 데스나이트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그들 세 명은 우수한 인재들입니다. 그래서 전대의 푸른 지혜의 마왕께서 청하셨을 때도 단지 시간제 계약으로…….”
“인연이 끝나고, 새로운 인연에 닿아 떠나려 하는 걸 억지로 잡고 있어 봤자라네. 후후, 꼬마 손님께서도 기뻐하겠군. 아, 그리고 포탈은 자네가 떠나려고 할 때 이쪽에서 내가 알아서 열어 주겠네.”
과연, 설마 했지만 이곳을 찾아온 목적, 거기다 엘런의 존재까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이제는 식어 버렸을 찻잔을 들었다. 그의 행동은 이제 내게 허락된 시간이 끝나 감을 알리는 것,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응?”
이미 식어 버렸을 거라 여긴 차는 놀랍게도 여전히 따뜻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그 차 맛 또한 일품이었다. 처음에는 약간 진한 듯하다가 이내 부드럽게 입안을 스치는 그 느낌과 끝에 아주 약간 느껴지는 단맛은 너무 빨리 비어 버린 찻잔에 다시 눈이 가게 만들었다. 그런 내 모습에 그는 조용히 웃음 지으며 말했다.
“조금 아쉽지? 하지만 어쩌겠나, 지금은 그 정도의 인연인 것을…….”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이곳에서 떠나야 하는 시간이었다. 조용히 그에게 인사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특별한 말없이 그냥 조용히 앉아 우리를 배웅했다.
“잘 가게나. 사제.”
문을 닫을 때쯤, 그가 처음 들어 보는 언어로 무어라고 말해 왔지만, 그 뜻을 알 수는 없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방에서 나왔다.

한편, 엘런이 카지한을 따라갔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성안에 홀로 남아 있는 엘레나는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평소와 다른 적막감에 낯설어하고 있었다.
“혹시 엘런 못 봤어?”
절레절레.
청소를 하고 있던 스켈레톤에게 물었지만, 모른다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어디선가 놀고 있겠지 싶긴 했지만, 이 왠지 모를 적막감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평소라면 카지한이 엘런을 돌봐 주고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카지한은 마계로 가고 없는 상황이었다.
“카지한도 없는데, 혼자 뭘 하고 있는 건지. 그리고 카지한은 괜찮은 걸까.”
서열 2위의 마왕, 네케로니크 샌 데아스. 모든 마왕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마왕이자 모든 언데드의 왕으로서 마계 전역에 영향력을 끼치는 그였지만, 그는 한 번도 정기적으로 열리는 마왕들 간의 모임에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으며, 그 모습을 직접 본 자도 거의 없는 수수께끼의 마왕.
마계의 주요 행사 등에도 서찰이나 수하를 파견하는 것으로 대신하기에, 혹자들은 이미 그 스스로가 언데드가 되었거나 너무 노쇠하여 도전자가 찾아올까 두려워 몸을 숨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하기도 하지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엘레나 스스로도 다른 마왕의 사자 자격으로 찾아갔기에 큰일은 없을 거라 생각은 하지만, 워낙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에 섣부른 추측은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혹시나 잘못되지는 않을지…….”
순간, 성안에게 포탈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카지한이 돌아온 것이라면 다행이었지만, 그런 것치고는 뭔가 낯선 기운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느낀 대로라면 포탈이 열린 곳은 알현실 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얀 무엇인가가 그녀를 추월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알현실 방향으로 뛰어갔다. 자세히 보니 조금 전까지 청소를 하고 있던 스켈레톤이었다.
엘레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특별한 명령이 없는 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계속 청소를 하고 있어야 하는 스켈레톤들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스켈레톤이 낯선 기운을, 그것도 위치까지 정확히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옆을 지나친 스켈레톤은, 마치 침입자의 출현에 신속히 대비라도 하는 듯 빗자루를 무슨 무기라고 옆에 찬 채 달려가고 있지 않았던가.
“대체 뭐지……?”
거기다 하나가 아니었다. 성 곳곳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는지 대걸레, 빗자루, 먼지떨이 등등의 청소 용구를 든 스켈레톤들이 그녀를 지나쳐 알현실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녀는 이 영문 모를 상황에 어느새 뛰고 있었다. 포탈을 연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목적이 누구인지는 둘째치고라도, 대체 스켈레톤들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야 했다.
복도를 지나서 알현실로 향하는 복도에 다다랐을 때 알현실 문은 스켈레톤들 때문인지, 아니면 방문자 때문인지 열려 있었다. 그녀가 서 있는 길은 정면이 아니라 옆쪽이었기에 아쉽게도 안쪽의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그것도 이제 이 코너만 돌면 알 수 있었다.
“이거 뭐야? 너희들 설마 그걸로 나하고 싸우자는 거야?”
카지한도, 그렇다고 엘런의 것도 아니었지만 엘레나는 이상하게 그 목소리가 생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왠지 모를 익숙함, 설마 하며 알현실로 엘레나가 들어서는 순간 청소 용구들을 든 스켈레톤들에게 둘러싸인 적발의 젊은 남자가 그녀에게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넸다.
“오, 엘레나!”
“레이?”
“그래. 근데 이 스켈레톤들은 뭐야? 마침 네가 와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전부 다 부숴 버릴 뻔했다니까?”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있었지만, 그 말이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모두 됐으니까 물러나.”
척. 척, 척!
엘레나의 명령에 스켈레톤들은 곧 태세를 풀고 원래 있던 자리들로 돌아갔다.
그녀로서도 이 믿을 수 없는 현상에 대한 것이 궁금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는 적어도 그녀가 알기에는 위험한 존재였다.
레이몬드 겔 로티온, 마왕들과는 별개로 그 명맥과 위상을 세습하며 남아 있는 마계의 몇 안 되는 대 귀족 집안 로티온 가의 젊은 가주이자 자신을 반대하던 아버지와 열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을 모두 죽이고 홀로 가주의 자리에 오른 자.
수천 년 동안 자신의 가문을 상징하는 고결함의 백색 장미 문장마저 붉게 바꿔 버린 그는, 새빨간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레이, 여기는 왜 온 거지?”
“저런, 오랜만인데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긴장하는 엘레나와는 다르게 그는 여유가 넘쳤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선 그는 그녀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더니, 이내 손등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명색이 약혼자인데.”
짝.
엘레나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닿은 그의 손을 쳐 냈다.
“그건 로티온 가문에서 멋대로 정한 것. 거기다 이미 예전에 정중히 거절한 걸로 아는데?”
“그렇지. 하지만 그건 내가 가주이기 전의 이야기야.”
발갛게 부어오른 손등을 매만지며 그는 그렇게 말했다.
엘레나는 이런 그의 태도가 예전부터 싫었다. 상대를 장난감 취급하며, 자신 이외의 무엇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태도.
“거기다 지금의 이 백색마궁도 예전의 백색마궁이 아니지.”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마치 먹이를 찾은 늑대처럼, 그녀를 쳐다보는 그 눈은 매섭고 차가워져 있었다. 하지만 엘레나 또한 그런 그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네, 맞습니다. 로티온 공. 이제 제가 이 성의 주인이자 마계 서열 21위인 푸른 지혜의 마왕이지요.”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는 일체의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 그리고 갑작스레 정중해진 태도.
예상치 못했던 그녀의 모습에 레이몬드의 표정이 순간 굳었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의 표정에 다시 여유가 돌아왔다.
“그렇지요. 푸른 지혜의 마왕이시여. 제가 잠시 무례를 범했군요. 그럼 정식으로 하겠습니다. 먼저 이거 받으십시오.”
레이몬드는 품속에서 검은 양피지 한 장을 꺼내 엘레나에게 건넸다. 양피지 겉에 찍혀 있는 인장은 마계 중앙 회의소의 문장이었다.
“마계 중앙 회의소의 뜻을 받들어 13의원들 중 제8의원 레이몬드 겔 로티온 후작, 지금부터 이 백색마궁, 그리고 푸른 지혜의 마왕에 대한 긴급심사를 실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