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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18화)
8장 만드라고라, 주문 폭주? NO, 주문 제로!(3)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물어오는 데나텔의 모습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걷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왠지 그 모습에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말했다.
“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옆의 나무들은 뭔가요? 이런 형태도 처음 보지만, 끝이 보이지가 않는 높이라니…….”
“마왕님께서 심으신 것인데, 아쉽게도 저도 이것이 어떤 식물인지, 어떻게 이렇게 높이까지 자라는지는 알지 못한답니다. 언젠가 제가 한번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마왕께서는 그저 이 세계의 것이 아니라고만 답해 주셨지요.”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나도 모르게 납득이 갔다. 이미 내가 서 있는 이곳조차, 모르긴 몰라도 정령계나 중간계, 천계나 마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것 같은 별세계인 느낌이니까.
“죄송하지만 잠시만 쉬었다 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발걸음을 멈추길 그에게 청하자,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몇 계단 앞서 오르던 그는 일부러 계단을 내려와 내 옆에 와 섰다. 그런 그의 작은 친절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 정신적 피로 때문인지 그러한 감정을 온전히 느끼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듯했다.
만드라고라들이 들어 있는 가방을 옆에 조심스럽게 눕히고는 그에게 앉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의 반응을 살피지도 않은 채 재빨리 계단에 걸터앉았다. 계단은 폭이 일정치는 않았지만 대부분이 폭이 넓고, 또 굴곡도 그리 심하지 않아서 오히려 각을 세워 정교히 조각해 놓은 계단보다 앉기가 더 편했다.
“하아, 그런데 정말 아찔하군요.”
하지만 폭이 넓든 짧든, 다시 내려다본 밑쪽은 마치 절벽 끝에라도 선 듯 아찔한 느낌을 주기 충분했다.
“근데 이 계단들은 어떻게 만든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는 일부러 이렇게 바위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것 같은데…….”
경이로움과 약간의 짜증이 뒤섞인 물음이었지만, 그는 그저 무덤덤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죄송하게도 그 질문에도 만족스런 답을 드리기는 힘들답니다. 사실 이곳은 설계 때만 해도, 아니, 완성되었을 때까지도 평범한 알현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데드의 마왕께서 이 성에 오신 이후로 갑자기 이렇게 변했다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구조상 이러한 공간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데도 말이지요.”
이곳이 평범한 알현실이었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몇 번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냥 처음부터 산이었다라고 하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이 평범한 성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변했다니.
“그렇다면 혹시 환영 마법이 아닙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긴 있었지만, 이 정도의 환영 마법이 계속 지속되려면 시전자의 역량뿐만 아니라 찾아볼 수 있는 특정한 조건들이 있어야 합니다.”
순간 아차 싶었다. 그는 리치다. 그것도 생전에는 고위급 마도사만이 할 수 있다는 금색의 수를 허락받았던 마도사였다. 이것이 환영 마법이라면 그가 모를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아, 어쨌든,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으니 언제 이 계단을 다 오를지 걱정이군요.”
막막한 현실 앞에 내가 한숨을 쉬자, 그 또한 조금 불쌍해 보였는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러면 부유 마법이라도 써 드릴까요?”
그런데 왜일까, 자존심에라도 걸렸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허례였던 것일까. 평소 때라면 당연히 받아들였을 그의 제안에, 내 입에서 나온 것은 거절이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끝까지 제 힘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런데 착각일까, 변할 리 없는 그의 표정이 내 대답에 왠지 한층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자, 가시죠. 마왕님께서 기다리시겠습니다.”
조금 더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고 혼자 일어나 걸어가 버리는 그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옆에 두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럼 가방이라도 들어 달라고 할 걸 그랬나.”
곧바로 때늦은 후회도 들었지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벌써 몇 계단이나 앞서 걷고 있었다.
“후우, 어쩔 수 없겠지.”
그렇게 다시 한 계단을 오르려 하는데, 갑자기 눈앞의 풍경이 변했다. 끝이 없는 듯 이어져 있던 계단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까의 것들과 같은 품종인 듯 보였지만 하늘에라도 닿을 듯하던 좀 전의 그것들에 비해 비교적 낮아 보이는 나무들과 처음 보는 자색의 꽃들로 둘러싸인, 검은색 지붕의 특이한 형태의 건물 한 채.
거기다 뒤를 돌아보니, 지금까지 힘들게 올랐던 계단은 온데간데없고, 처음 우리가 들어왔던 커다란 문이 몇 미터 되지 않을 거리에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데나텔을 쳐다보았지만, 그 또한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 표정 없을 그 해골에조차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이건 대체……?”



9장 접견! 언데드의 마왕(1)


“이, 이건 대체……?”
갑작스레 변해 버린 상황에, 데나텔은 벌어진 턱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계단들과 바뀌어 버린 주변 풍경. 하지만 단지 갑작스런 주변의 변화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이 환영 마법의 작은 낌새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에 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과연, 환영 마법이 아니라면 단순한 알현실이던 곳에 이런 곳이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금색의 수를 허락받았던 리치조차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대체 언데드의 마왕이란 자의 능력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들어가시죠. 마왕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도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데나텔은 침착하게 앞장서서 나를 안내했다. 하지만 아직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왠지 조금 어색해 보였다.
하얀색 돌길을 따라 걷다 보니,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문 하나가 있었다. 검은색 벽돌 같은 것으로 위쪽을 특이하게 장식한 그 문은 아마도 상징적인 의미인 듯, 벽은커녕 울타리조차 없이 그곳에 서 있었다.
데나텔이 조심스럽게 닫혀 있는 문을 밀자, 문은 약간의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어서 오게, 카지한.”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흡사 드레스 같아 보이기도 하는 처음 보는 형태의 의복을 입은 청년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하늘하늘한 느낌의 새하얀 의복,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검은색 눈동자와 검은 머리카락.
분명 그가 이곳의 주인 언데드의 마왕이리라.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며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푸른 지혜의 마왕님의 사자 카지한, 언데드의 마왕님을 뵈옵니다.”
“후후, 용케 알아차렸군. 아, 하긴 이 검은 눈동자와 머리카락 때문인가? 이쪽에서는 이런 완전한 검은색은 흔하지 않은 편이니까.”
서열 2위의 마왕, 죽은 자들의 신이라고까지 말해지는 그였지만, 이토록 가까이 있는데도 그에게서 위압감이나 그런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위압감만이라면 데나텔이나 처음 맞이했던 그 데스나이트 쪽이 훨씬 더 컸던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위압감이나 공포감 따위가 아니라 선량함, 그리고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듯한 편안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자, 들어가세.”
건물은 생각보다 작은 편이었다. 방 몇 개 정도 크기의 그 건물은 검은 벽돌 같은 것을 올려놓은 듯한 지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구조 또한 특이했다.
아무래도 아까 전에 들어섰던 문이 현관문인 듯 집 안으로 들어서는 데에는 따로 문이 없었는데, 방문들은 마치 그것 자체가 장식품들처럼 처음 보는 아름다운 문양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나무가 아닌 부분은 하얀 양피지 같은 것이었는데, 그 사이사이마다 처음 보는 화법으로 아까 전 보았던 그 창과 같은 나무들이 그려 넣어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의 풍경 또한 굉장히 아름다웠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 같은 가구들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의 곡선을 중요시하는 듯 보였는데, 몇몇 부분들은 마치 보석들을 얇게 펴서 붙이기라도 한 듯 여러 색의 아름다운 빛깔을 동시에 내고 있었다.
한동안 이 신비한 기분에 취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자,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앉기를 권했다.
“거기 앉으면 된다네.”
그는 작은 탁자 주변에 있는 두 개의 의자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비록 내가 정상적인 상황에서 마왕, 아니, 왕을 만난 경우조차 없긴 했지만 뭔가 보통의 상황과는 달라도 꽤 다를 것 같은 이 상황에 이제는 약간의 혼란감이 오는 듯했다.
내가 있는 곳이 정말 아까의 그 언데드의 마왕성이고, 내 앞에 있는 저분이 진짜 마왕이 맞기는 한 것인가?
어쨌든, 권한 대로 의자 하나를 빼 자리에 앉았는데, 그제야 아직도 내가 가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걸 어떻게 자연스럽게 드려야 하나 고민하려는 순간,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후후, 고맙네.”
갑자기 두둥실 떠오른 가방이 내 손에서 벗어나 그의 앞으로 가 멈춰 섰다. 허공에 떠 있는 가방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그는 이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과연 삼(蔘)의 변종인가 했는데, 그것은 아니었나 보군. 백문이 불여일견, 역시 진짜를 보고 나서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는 거군.”
그러고는 속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가 방 한쪽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가방은 그쪽으로 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근데 데나텔, 자네는 왜 그렇게 놀라고 있는가? 평소의 자네답지 않군. 그리고 거기 서 있지 말고 의자 하나 남았으니 거기 앉게나.”
한참 동안 말없이 옆에서 가만히 서 있던 데나텔은 마지못한 듯 의자를 빼내 앉았다. 그런 그를 보며 마왕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이 사람, 설마 서운해서 그러나?”
“아닙니다.”
“아니긴, 서운하고 분해서 그 가슴속에서 뭐가 올라오려 하고 있으면서. 참지 말고 말해 보게.”
“신하 된 자가 어찌 주인께 그러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왠지 해골 데리고 장난하는 것 같은 이 풍경을 잠시 즐겨 보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나름 같이 고비(?)를 넘어온 사이인데 조금 도와줘도 되겠지.
“마왕님.”
“아, 월운이라 부르게나. 그 호칭은 여전히 영 익숙해지질 않아서 말일세. 뭐 데나텔은 끝까지 그 호칭으로 부르고 있지만.”
음? 언데드의 마왕 이름은 네케로니크 샌 데아스가 아니었던가?
“아, 그건 여기 사람들이 부르기 쉬우라고 만든 이름이네.”
“그럼 월운 님…… 지금 뭐라고 하셨지요?”
“네케로니크 샌 데아스, 그게 내 이름이 아니냐고 묻지 않았나.”
“아니, 그건 저 혼자…….”
“자자,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하려던 말이나 해 보게나.”
“아, 네. 아까 전에 있었던 계단이나 나무들에 대해 감히 여쭈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설마 마음마저 읽는 것인가? 그런데 왜지? 평소 같으면 그 사실에 신경이 곤두서도 열 번은 더 곤두서야 하는데도 이렇게 편안하기만 한 것은…….
“후후, 데나텔. 여기 있는 카지한이 자네 대신 물어 주는군. 검을 신경 쓸 때부터 알았지만, 꽤 예의가 바른 사람이야.”
그 한마디에 내 입속에는 마른침이 고이고 있었다. 일상적인 대화처럼 그 스스로는 한마디 한마디 가볍게 던지고 있었지만, 그 뜻하는 의미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아니했다.
검, 분명 아까 내가 데나텔에게 검을 가져가도 되겠냐고 물었던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나는 편안한 기분에 취해 바닥에 잠들려고 하는 마음을 뾰족한 이성의 창대로 찔러 대며 필사적으로 깨워 댔다. 만약 그가 마음을 읽는 것뿐만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곳의 일조차 훤히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있다면? 그래. 자네는 어찌할 텐가, 카지한?”
순간 온몸에 털이 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두려움이나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약한 동물이 포식자를 만났을 때, 동물은 이성보다 그 이전에 존재하는 본능으로서 그 존재를 느낀다.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따위 때문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원래부터가 그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의 경우도 그것이었다. 이것은 그저 충격일 뿐이었다. 공포, 두려움, 그 이전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충격.
나는 그 거대한 충격에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생각이 끝나기조차 전에 생각을 읽는 상대의 앞에서 판단이나 계산 따위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