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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17화)
8장 만드라고라, 주문 폭주? NO, 주문 제로!(3)
“어쨌든 다행이야. 누나 말로는 카지한이 아주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거든. 카지한은 이제 걱정 마. 내가 지켜 줄게.”
지금 이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 엘런은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나는 일단 엘런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문제는 나중에 천천히 엘레나와 함께 상의할 문제였다. 어쨌든 포탈이 열린 것이니, 새로운 방문자에 대한 사실이 알려질 것이다. 일단은 마스터키를 숨기는 것이 먼저였다. 잘못하면 마왕이 직접 방문했다고 알려져 일이 복잡해질 가능성도 있으니까.
“저, 엘런 님, 일단 그 수정구를 저에게 주시지요.”
“어. 여기.”
일단 엘런에게서 수정구를 건네받기는 했지만 그다음의 일도 문제였다. 이걸 숨길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이게 주머니 안에 들어갈 리도 없을뿐더러 곧 바쳐야 하는 가방 안에 넣을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이 방 안에 숨겼다가 나중에 못 가져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예 사실을 밝히는 방법도 있었지만, 왠지 본능적으로 그것만은 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그저 엘런과 수정구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
답이 없었다. 지금 내게 주어진 환경으로서는 답이 없다.
예전처럼 그저 돈에 좌우되는 용병이었으면 최악의 경우에는 도망가면 되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생각해라, 카지한 렐 제르네오. 생각해라!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이런 다급한 상황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저,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아…… 예. 들어오십시오!”
아무리 급해도 이곳에서 자신들은 손님이니, 들어오겠다는 자를 막을 권리는 없었다. 거기다 십중팔구 좀 전의 포탈의 반응을 읽고 방문자를 확인하기 위함일 터, 괜히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간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가능성도 있었다.
“백색마궁에서 오셨…… 엘런 님?”
문이 열리고 조심스럽게 들어온 것은 한 무리의 스켈레톤들이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엘런을 보자마자 그의 이름을 외치며 하나같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 알렉스, 제나스, 로나스!”
거기다 엘런은 스켈레톤들 각각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그들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었다.
“엘런 님!”
스켈레톤들과 엘런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서로를 얼싸안았다.
“엘런 님, 잘 지내셨습니까? 엘레나 님도 건강하시고요?”
“엘런 님, 혹여 힘드신 점은 없으셨습니까?”
“엘런 님, 찾아뵙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스켈레톤들의 표정을 읽는 재주까지 배운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를 봐서는 좀 있으면 스켈레톤들의 눈에서 눈물마저 흘러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괜찮아. 누나랑 나는 잘 지냈어. 거기다 카지한이 많이 도와줬는걸.”
엘런의 입에서 내 이름이 거론되고 나서야, 내 존재를 다시 기억해 낸 듯 스켈레톤들은 서로 얼싸안고 있던 팔을 거두고 나를 향해 점잖게 걸어왔다. 스켈레톤 중 한 명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저는 알렉스라고 합니다. 여기 둘은 제나스와 로나스, 예전에 엘런 님을 모셨었죠.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 저는 카지한이라고 합니다.”
과연, 이런 스켈레톤들과 함께 있었으니 엘런이 스켈레톤은 다 이런 줄 알 만했다. 그가 내민 뼈밖에 없는 손을 마주 잡으며 옆의 다른 두 명에게도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내 다른 손에는 마스터키가 들려 있었지만, 다행히 그들은 큰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 백색마궁에서 오셨다기에 두 분의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하고 찾아왔는데, 설마 엘런 님께서 직접 오셨을 줄이야……. 정말 놀랐습니다.”
“근데 정말 놀랍군요. 엘레나 님이 엘런 님이 이런 곳에 오는 것을 허락하시다니요.”
비록 다섯 명 중 세 명이 스켈레톤이긴 했지만 화기애애하던 방 분위기가, 제나스 혹은 로나스일 스켈레톤이 던진 그 말과 함께 순간 얼어붙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 멈춰 선 그 모습으로 가만히 있더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엘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그래. 엘레나 님이 허락 안 하셨으면, 엘런 님이 혼자 어떻게 왔겠어?”
“마, 맞는 말이야.”
“그럼!”
천진난만한 얼굴. 엘런의 그런 표정에서 스켈레톤들은 무엇인가를 읽어 버린 것인지 애써 침착하려는 듯 자기 세뇌까지 하며 노력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스터키는…….”
그때 이 상황을 넋 놓고 바라만 보다가 스켈레톤 한 명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그리고 스켈레톤의 시선이 마스터키가 들려 있는 내 손 쪽으로 향했다.
“…….”
“…….”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그저 조용히 침묵할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분위기를 보고 이후 따라 시선을 옮긴 다른 두 명의 스켈레톤도 마찬가지로 침묵할 뿐이었다.
우리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것이 몇 초, 아니, 몇 분 동안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짐작하건대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그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을 것임은 분명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왕님께서 만나 뵙겠다고……. 응?”
그러던 중 문이 열리고 데나텔이 돌아왔다. 조금 전의 모습에 비해 지금은 흥분이 많이 가라앉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많이 변해 있는 방의 분위기 때문인지 그 또한 들어오다 그 모습 그대로 잠시 멈춰서 그 정적에 동참했다.
“저, 무슨 일 있으셨는지?”
한참 만에 그가 입을 떼자, 그제야 정적은 사라졌다. 그리고 정적이 깨짐과 동시에 알렉스가 재빨리 내 손에서 마스터키를 뺏어서는 자신의 갑옷 속에 숨기자, 다른 두 명은 데나텔을 향해 태연하게 말했다.
“아, 백색마궁에서 일행 분이 도착하셔서 저희가 접대 중이었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저분이…….”
데나텔은 낯선 소년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어린애가 추가로 왔는지는 모르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추가 인원 정도야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자, 어쨌든 카지한 씨는 저와 함께 마왕님께 가도록 하시지요. 그런데 일행 분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나도 카지한이랑…….”
“아,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이분들과 계시게 하고 싶은데 괜찮으신지요?”
“데나텔 집사님, 저희가 잘 접대하고 있겠습니다.”
따라오겠다고 말하려는 엘런을 알렉스와 내가 거의 동시에 저지했다. 그리고 혹시나 엘런이 기분 나빠할까 봐 뒤를 돌아봤는데…….
“엘런 님, 저기 사탕이 있는데 가서 드시지요.”
“저희랑 가서 과자 드셔야죠? 다 드시면 저희가 예전처럼 놀아 드릴게요.”
“와, 진짜?”
다른 두 명의 스켈레톤이 벌써 엘런을 능숙한 솜씨로 달래고 있었다. 이 사람들, 아니 이 스켈레톤들, 과연 엘런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일이 다 끝나면 저희들 초소로 오시지요.”
알렉스는 그렇게 엘런과 함께 나가면서 눈이 마주치자, 자기 배 부분에 살짝 손을 갖다 대었다. 아마도 마스터키를 잘 보관하고 있다는 신호이리라.
“예, 물론이지요. 엘런 님, 나중에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응!”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지만, 최대한 태연하게 웃어 보이려 노력하며 엘런과 그들을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성에 엘런을 알고, 또 도와줄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지, 저들이 없었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했을지 생각만 해도 눈앞이 막막하다.
‘하지만, 이건 왠지 탁아소에 아이를 맡긴 부모 같은데…….’
“자아, 그럼 저를 따라오시죠.”
데나텔의 안내에 따라 걷는 성의 내부는 백색마궁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백색마궁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섬세함이나 부드러움이라면, 이곳에서 느껴지는 것은 중후함이랄까. 특별히 색감이 어둡거나 한 그런 것이 아닌데도, 왠지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거기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데스나이트들의 검은 갑옷들이나 스켈레톤들이 그런 엄숙하고 무거운 느낌을 더욱 더하고 있었다.
그때, 앞에서 걷고 있던 데나텔이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아마 지금, 온몸이 무거워진 느낌을 받으시고 계실 겁니다. 이 성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의 수가 극히 적고, 생기 대신 사령력이 이 성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아직 살아 있는 당신에게는 그리 좋은 곳은 아니겠지요.”
이 기분은 성의 실내 장식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인가. 과연 언데드의 마왕성. 이곳의 주인은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군.
“저 그런데, 마왕님을 뵙는 자리에 검을 가지고 있는데도 괜찮겠습니까?”
마왕성으로 오는 포탈을 탈 때 혹시나 몰라서 옆에 차고 오긴 왔지만 서열 2위의 고위 마왕을 알현하는 자리, 작은 실수라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네? 아아, 괜찮습니다.”
왠지 건성인 듯한 그의 대답에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시 물어보았지만…….
“하지만 혹여 무례하게 보이지는 않을지…….”
“당신께서 검을 지니신다 해서, 마왕께 위해가 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냉정한 그의 그 대답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의 대답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설사 무장을 한다 해도, 해를 끼칠 마음이 없다면 혹은 그 능력이 없다면 상관없다.
자잘한 허례란 필요 없고, 오직 진(眞)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새삼 과연 마족들이란 생각을 하며 그를 따라 걷다 마침내 거대한 문 앞에 다다랐다. 성인 남성의 수십 배는 될 듯한 거대한 정문. 새하얀 두 개의 문이 마주 닫혀 있는 중심에는 언데드의 마왕을 상징하는 거대한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아직 멀었으니까요.”
내가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있자 마침내 뒤돌아선 그가 그렇게 말했다. 무슨 말인가 싶어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 있자 왠지 그의 푸른색 마력의 눈동자가 나를 왠지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곧 무슨 말인지 아시게 될 겁니다.”
그가 문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리자, 문이 양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
나는 문 뒤쪽으로 보이는 광경에, 순간 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간 것처럼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 모습 그대로 얼어 버렸다.
그곳은 더 이상 성안이 아니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넓고 커다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을 듯한 긴 계단의 행렬. 거기다 계단이 끝나는 양옆은 처음 보는 푸른색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는데, 마치 창대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그것들은, 계단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고개를 들어 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푸하아……. 하아…….”
한참 동안 멈춰 있던 몸이 다시금 공기를 받아들이기 위해 요동치자, 그제야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마도 그러지 않았다면, 모르긴 몰라도 좀 전의 알렉스들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데나텔은 내 호흡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는 듯 옆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되었다 싶어질 때쯤,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이 계단 끝에 마왕님께서 계십니다. 저 혼자라면 텔레포트가 허용되지만, 지금은 걷는 수밖에 없겠군요.”
솔직히 너무 놀라서 텔레포트라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도 못했고 걸어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실망스럽다 못해 온몸의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이제 더 이상 몸이 무겁거나 하는 느낌은 없으실 겁니다.”
그의 말 그대로였다. 이곳은 조금 전의 성안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회색빛 돌계단들은 정교하게 깎아 내 만든 것들이 아니었다. 비슷한 크기의 돌들을 쌓고 이은 뒤 꼭 필요한 부분만을 다듬은 듯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살려 조금은 투박하면서도 정갈해 보였고, 양옆을 가득 에워싸고 있는 처음 보는 나무들과 그 초록빛 잎사귀들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자, 가시지요.”
대체 이 성은 어떤 구조로 지어져 있는 것이고 어째서 성에 이런 곳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는 굉장히 흥미로웠지만, 역시나 그렇게 말하며 계단을 오르는 데나텔의 모습에 흥미로움이나 궁금증은 사라지고 이걸 어떻게 오르는가 하는 막막함만이 나를 덮쳐 왔다.
“네, 따라가도록 하지요.”
흡사 별세계로 가는 길이라도 되는 듯한 이 높다란 계단 끝에 존재한다는 그의 처소, 마치 자신의 성마저도 자신이 속할 세계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어느새 스스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고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져 갔지만, 아직도 보이지 않는 그곳의 모습과 뒤돌아보면 아찔할 만큼 길게 늘어서 있는 계단의 행렬. 출발 지점은 저 멀리이거늘, 도착점은 보이지도 않다니!
험준한 산을 오르는 것에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싶긴 하지만, 오르고 올라도 변하지 않는 주변 풍경 때문인지 이제는 몸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황폐해져 가고 있었다.
거기다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고 깨달은 사실이지만, 분명 이 높이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당연히 성의 모습이나 마계의 풍경이 보여야 하는데 보이는 것은 저 멀리 이어져 있는 산맥들과 푸른 하늘뿐이라니, 마치 환상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