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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16화)
8장 만드라고라, 주문 폭주? NO, 주문 제로!(2)


그는 천천히 카지한을 향해 걸어오더니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고, 그런 그의 태도에 카지한도 급히 고개를 숙였다. 상대는 분명 정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들어설 때부터 눈에 보이는 그의 높은 자부심과 기세 때문인지 카지한은 이미 그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집사 데나텔이라 합니다.”
“푸른 지혜의 마왕님의 사자인 카지한입니다.”
인사가 끝나고 고개를 든 데나텔은 오래전 아직 그가 살아 있을 때 눈동자가 있었을 그 자리에 지금은 그 진짜를 대신하여 떠 있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푸른색 구체를 빛내며 눈앞의 상대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마지막으로 그가 들고 있는 상자에 시선이 닿았다.
“실례지만, 방문 이유를 여쭤 보아도 되겠는지요?”
“예, 마계의 수많은 지배자 분들 중에서도 그 위명이 높으신 언데드의 마왕님께 예를 표하고, 또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데나텔은 역시 예상했던 바라고 생각했다. 신입 마왕이 고위 서열의 마왕에게 예를 올리거나 선물을 보내 자신들의 입지를 높여 보려 하는 행동은 흔한 일이었고, 특히나 이곳은 서열 2위인 언데드의 마왕성. 그 눈에 띄어 보려 찾아오는 방문자나 보내지는 선물들 따위는 이제는 오히려 귀찮을 정도였다. 약간이나마 있던 흥미조차 잃어서인지 그는 약간 퉁명스런 말투로, 평소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하고 말았다.
“무엇을 가져오셨는지 제가 봐도 되겠습니까?”
데나텔은 무심코 말을 내뱉고는 아차 싶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다른 마왕의 사자, 마왕이 보내 온 선물을 주인보다 자신이 먼저 보겠다고 말하다니, 이 얼마나 무례하고 교만한 말인가!
너무나 빤한 대답 때문에 짜증이라도 났다는 말인가. 아니면 신입 마왕이 보낸 인간 사자라고 내심 자신도 모르게 깔보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는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저도 모르게 허언을, 부디 못 들으신 걸로 해 주십시오.”
불찰이었다. 주인의 명성을 믿고, 거만한 마음이라도 생겼었단 말인가.
왜 주인의 손님을 자신이 먼저 맞이하겠는가. 집사라 함은 주인의 뜻을 대신하는 자. 주인을 대신하여 손님을 접대하고, 예를 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주인의 손님에게 무례를 범하다니, 이것이야말로 주인의 명예에 먹칠을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약 이 일이 상대 마왕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정식으로 이 문제에 대해 추궁을 한다면 주인께 무슨 얼굴로 똑바로 설 수 있으랴.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니, 괜찮습니다.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고개를 드시지요.”
조금의 불쾌감도 없는 어투, 혹시 자신을 비웃고 있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들어 보니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오히려 들고 있던 가방을 자신에게 내밀었다.
“혹여 위험한 물건이거나 언데드의 마왕께서 싫어하시는 물건일까, 주인에 대한 충정과 저희 주인님에 대한 호의로 하신 제안이실 텐데, 제가 어찌 이해하지 않겠습니까. 열어 보시지요.”
그가 어떤 마음에서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이고, 또 왜 저렇게까지 필사적이었는지 카지한이라고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 용병 시절 때 귀족이나 귀족가의 하인들에게 겪었던 수모에 비한다면 그 정도의 행동은 불쾌하기는커녕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오히려 곧 이어진 정중한 사과에 호감마저 드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사정을 알 길 없는 데나텔로서는 카지한이 어째서 자신을 감싸 주는 건지, 또 왜 이렇게 순순히 가방을 넘겨주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아, 그럼 실례지만 제가…….”
카지한이 가방을 건네자 그가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조금 전부터 알고 있던 거지만, 가방 자체는 그다지 고급 품질의 것은 아니었다. 검은색을 칠한 네모난 나무 가방에 열고 닫기 손쉽게 만들어진 구조. 보통 포장이 간소한 이런 경우에는 화폐 대신 사용되는 보석이나 마법 약품같이 가방에서 꺼내서 바치는 부피가 작은 선물인 경우가 많았는데, 무게도 가벼운 것을 보아 아마도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데나텔은 확신했다.
‘근데 여기서 독특한 마나가 느껴진단 말이야.’
아까부터 은연중에 느껴지던 독특한 마나의 존재. 어쩌면 아까 그런 말을 한 것에 이 느낌도 한몫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는 가방을 열었다.
“채취한 지 얼마 안 된 만드라고라군요.”
가방 속에 들어 있던 것은 금방 뽑아 온 것 같은 성숙체의 만드라고라 세 개.
데나텔은 예상보다 단출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만드라고라가 고가의 물품이라고는 하나, 만드라고라 정도라면 이곳 약품 재료 창고에도 꽤 있을뿐더러 필요하다면 그때마다 필요한 만큼 사면 그만이었다.
한 스무 개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고작 세 개라니, 이게 무슨 자연산 만드라고라도 아니고. 아마 신입 마왕이 이런 일에 익숙지 않아서 생긴 실수인 게 분명했다. 데나텔은 잠시 고민했다. 그냥 이대로 올려 보내야 하나, 아니면 실수를 알려 줘야 하나.
이대로 그냥 주인께 보낼 수도 있었지만, 이대로 갔다가 주인께서 이 초라한 선물을 보고는 자칫 상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긴다면 이자나 이자의 주인이 곤란해질 수 있었다. 데나텔로서는 어찌 되었든 상대가 조금 전 자신의 잘못을 감싸 주었는데, 이대로 보내서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일단 오늘은 돌려보내서,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다.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니, 방문 기록이나 주인의 물음 같은 것은 자신의 선에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일이고 말이다.
‘근데 이상하단 말이야, 만드라고라가 이런 느낌이었나?’
영 꺼림칙한 마음을 벗어던질 수 없던 그는, 조금 무례한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아까의 행동도 아무렇지 않게 넘긴 이상 이 정도의 일로 문제 삼을 것 같진 않았고, 또 가방 속의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겠다고 그가 먼저 말하지 않았던가.
“저 카지한 씨, 이 만드라고라는 어느 마계 지역 양식품인가요?”
“자연산입니다. 퀸 만드라고라가 키운 것이지요.”
순간 데나텔은 손에 힘이 빠져들고 있던 가방을 놓칠 뻔했다. 자연산, 그중에서도 퀸 만드라고라의 종이라니!
“서, 설마 만드라고라들 중에서 최고품인 아크란 말입니까?”
데나텔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가며 외치고 있었다. 그 높은 희귀성과 탁월한 효력에, 보통의 만드라고라와는 차별시켜 ‘아크’라 불리는 퀸 만드라고라의 종.
보통의 양식과 자연산 만드라고라들은 각각 3등급으로 나뉜다. 그리고 1등급 양식 만드라고라의 최소 3배 이상의 금전적 가치를 가진 것이 자연산 만드라고라 3등급이며, 그리고 자연산끼리도 1등급 차이마다 가치는 두세 배 이상 뛴다.
그런 자연산 1등급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가치를 가진 것이 ‘아크’다.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퀸 만드라고라에게서만 씨앗이 태어나고, 또 자기들끼리 잡아먹으며 성장하기에 어마어마한 희귀성.
그리고 그 씨앗들에 존재하는, 보통의 만드라고라와의 효과의 차이를 내는 특수한 성분.
이 성분도 신기한 것이 오직 1세대에서만 나타나지 그 후 번식으로 인해 태어나는 만드라고라들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예전에 마계의 학자들이나 마도사들은 그것이 성장시 어미 격인 퀸 만드라고라와 형제 격인 다른 씨앗들을 흡수하면서 자라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몇 백 년 후 기적적으로 성공한 관찰 결과에 의하면, 아크가 성장하는 도중 다른 아크나 퀸 만드라고라를 흡수 시에 그 특별한 성분 외에 다른 영양분만을 흡수하는 것으로 밝혀져, 왜 1세대에서만 그런 성분이 발견되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오직 퀸 만드라고라에게서 태어난 직계 자식인 1세대, 그것도 성숙체들만이 아크라 불리며 차별화되는 것이다.
“아아……. 600년을 넘게 살았지만 아크를 직접 본 적은 없었거늘!”
데나텔은 자신의 뼈밖에 없는 손이 당장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처럼 떨고 있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가방을 카지한에게 넘겼다. 잘못해서 떨어뜨렸다가 상처라도 났다가는 큰일이었다.
“기다리십시오! 제가 언데드의 마왕님께 직접 아뢰고 오겠습니다!”
데나텔은 예를 차리는 것도 잊은 채 그렇게 외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방에 홀로 남은 카지한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자연산 만드라고라가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로서도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 때문에 엘레나를 목숨을 걸고 막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크라니? 퀸 만드라고라가 키운 자연산은, 보통 자연산과는 다르다는 말인가? 아크와 자연산의 차이까지는 몰랐던 카지한으로서는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비록 흑마술을 조금 배웠다 하나, 카지한은 상류 계층이 아니다.
퀸 만드라고라는커녕 일반 양식 만드라고라도 평생에 한 번 구경할까 말까인데, 실거래를 해 봐야지만 알 수 있는 만드라고라의 급수나 종류에 따른 가격을 어떻게 제대로 알겠는가.
그가 만드라고라의 대략적인 가격에 대해 배운 것은, 불같이 화를 내며 스승이 토해 낸 고함들 속에서 당시 스승이 가지고 있던 양식 만드라고라의 가격과 자연산 만드라고라 가격을 단편적으로 주워들었던 게 다였고, 이후에 퀸 만드라고라의 존재는 책에서 읽었다지만 그 자식 격인 아크의 존재들에 대한 것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거기다 아크의 존재를 알고 있던 엘레나는 평소 박학다식하고 다재다능하게 보이는 카지한이었기에 어련히 잘 알까 싶어 따로 언급하지를 않았고, 그 덕분에 카지한은 지금 이곳에 올 때까지도 아크의 존재는 물론이고, 또 그것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조차도 몰랐던 것이었다.
“어쨌든, 이곳의 집사라던 자가 저 정도로 흥분하는 것을 봐서는…….”
보통 이 정도의 거물에게 하는 선물용이라면 자연산 만드라고라 세 개면 알맞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데 이곳에 근무하면서 별의별 진귀하고 희귀한 물품들을 다 접해 봤을 집사라는 자가 저런 반응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자신이 들고 온 것들의 가치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훨씬 상회하는 게 분명했다.
“엘레나 님, 어쩌면 전 제 생각보다 엄청난 공훈을 세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목숨 걸고 말린 보람이 있었다. 그 넓은 밭에 있는 것들 중 겨우 세 개를 뽑아 왔을 뿐인데 서열 2위인 언데드 마왕성에서 이 정도의 반응이라면 다른 곳에선 어떠하겠는가.
어쩌면 굳이 거래를 할 필요조차 없이, 그냥 다른 마왕들한테 선물로 몇 개 주고 원하는 물건을 물물 교환하면 될지도 몰랐다.
“아냐, 그래도 일단 나중에 돌아가서 아크가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알아야지. 거기다 그렇게 귀한 거라면 갑자기 시장에 물량이 많아졌을 때는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신중해야겠어.”
예전에 까다로운 미식가 스승님 아래서 요리사 노릇을 하면서 배웠던 경제학이 이런 데서 도움이 될 줄은 카지한 자신뿐만 아니라 그 스승조차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방 안의 공기가 변하는 듯한 느낌, 그리고 이 진동. 카지한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왜인지는 모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서는 공간이 열리고 있었다. 비록 주먹만 한 작은 구멍이었지만, 아주 천천히 공간에 구멍을 뚫으며 그 크기를 넓혀 가고 있었다.
카지한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가 포탈을 여는 것 같은 고등 마법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저런 것은 제대로 된 포탈 연결 과정이 아니었다.
보통 포탈 연결이 완전하게 끝난 뒤에야 문이 열린다. 그런데 연결이 다 되지도 않았는데, 연결의 진행에 맞춰 문도 열리고 있었다. 어딘가 엉성하고 어설픈 느낌. 그래도 이 언데드 마왕성에 출입할 수 있는 허락을 받은 자일 텐데 뭔가 이상했다.
마침내, 카지한이 이곳에 올 때 이용했던 것과 같은 크기의 푸른색 포탈이 열렸다. 그리고…….
“카지한!”
“에…… 엘런 님?”
“카지한, 이렇게 빨리 만나서 다행이야!”
포탈이 열리고 나온 것은 놀랍게도 엘런이었다. 엘런은 그 작은 이마 가득 송골송골 땀을 달고 있었지만, 나를 보자 활짝 웃어 보였다. 근데, 엘런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저건…….
“엘런 님? 서, 설마 그…… 그건?”
푸른색의 낯익은 수정 구슬, 그것은 분명 마왕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스터키였다.
“이거? 아, 누나가 안 보내 준다고 해서 내가 몰래 가지고 온 거야.”
엘런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이건 단지 어린아이가 엄마 몰래 선반 위의 과자를 훔친 것과는 다르다. 저 마스터키는 마왕 특유의 마력에만 반응한다. 즉 마왕이 아닌 자는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엘런이 엘레나의 도움 없이 혼자 저것을 발동시켰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엘레나뿐만 아니라 엘런도 엘레나와 마찬가지로 마왕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