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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공주 이야기
1화
서막
하늘과 땅의 교류가 끊어지고 긴 세월이 흐른 어느 날의 일이다. 천계의 불라국. 그곳을 다스리는 오구대왕이 아름다운 길대부인에게 반하여 혼인을 약속했다. 위대한 왕과 아름다운 여인은 뜨겁게 사랑하였고 하루빨리 그 사랑의 형태를 이루고 싶었던 왕은 어서 길대부인과 혼인을 올려 행복한 나날을 보내려 했다.
“어서 빨리 좋은 날을 잡아 식을 올리자. 나는 하루도 더 참을 수 없다.”
그렇게 길대부인을 사랑한 오구대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혼인에는 한 가지 귀찮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그가 위대한 대왕이라는 이유.
“대왕께서 혼인을 올리시는 경사스러운 날이 아닙니까? 무턱대고 아무 날이나 잡을 수는 없습니다. 길일을 잡아야 하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천계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의 경사스러운 날이라며 반드시 좋은 날에 식을 올려야 한다는 주위의 참견.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마웠고 그 말도 이해는 하나 오구대왕은 조바심이 났다. 그래도 결국 자신과 길대부인을 위한 일이니 애써 욕망을 억누르며 점쟁이가 찾아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을 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구대왕은 천계 제일이라 불리는 용한 점쟁이 갈이 박사를 불러들여 길일을 물었다.
“내가 곧 혼인을 올릴 것이다. 어떤 날에 혼인을 올리면 길대부인과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느냐?”
날만 잡으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며 기대와 함께 그렇게 물은 오구대왕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듣게 되었다. 바로 내일이든 모레든 좋은 날을 말해 줄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갈이 박사의 입에서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곤란한 소리가 튀어나온 것이다.
“대왕께서 올해 혼인을 올리신다면 일곱 딸을 볼 것이며, 내년에 혼인을 올리시면 일곱 아들을 보게 되실 겁니다.”
“뭐라고?”
기대했던 대답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갈이 박사의 대답을 들은 오구대왕은 차마 기뻐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는 어서 빨리 사랑하는 여인과 혼례를 치르고 부부가 되고 싶었지만 아들이 생기지 않는다면 곤란하다고 생각하여. 공주만 태어난다 하여도 왕위는 물려줄 수 있지만 사람들의 눈총을 받을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는 아들이나 딸이나 차별하지 않고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뿌리 깊게 박힌 차별의 인식은 실로 무서운 것이라.
‘아무리 그래도 딸만 일곱을 낳을 순 없지.’
무엇보다, 아마도 오구대왕 자신도 마음속으로는 아들을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골고루 태어난다면 몰라도 전부 딸이라니.
‘평생 무리라는 것도 아니고 딱 1년이니까. 그래, 1년만 참자. 공주만 태어나면 그걸로 트집을 잡는 사람도 있을 거고 차라리 아들을 많이 낳는 게 좋겠지.’
어쩔 수 없이 오구대왕은 앞으로 1년만 참아 보자 결심하고 혼인을 뒤로 미루었다. 하지만 식을 미룬다고 하여 사랑이 식을 리가 있나. 오히려 늦어진 혼인으로 애가 탄 오구대왕은 전보다 빈번하게 길대부인을 찾아갔고 결국 그들은 그 1년이 지나 식을 올리기도 전에 아이를 가지고 말았다. 이 일을 어찌하느냐 불안해하는 길대부인이었지만 오구대왕은 괜찮을 거라며 그녀를 위로했다.
“괜찮다. 식을 올리는 것이 다음 해라고 하였지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는 상관없을 거다. 아마도…….”
이미 생겨 버린 것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아이가 생긴 것이 식을 올리기 고작 2달 전이었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괜찮을 거라며 마음을 달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화려한, 이 땅 어디에도 없을 웅장하고 아름다운 식을 올렸다. 그러나 식을 올리고 8달이 지났을 때, 혼인 전에 이미 왕의 아이를 품고 있던 길대부인은 딸을 낳고 말았다. 결국 갈이 박사의 말대로 딸이 태어나고 말자 오구대왕은 탄식했다.
“하아, 이걸 어쩌면 좋으냐? 일부러 1년이나 식을 뒤로 미룬 건데 결국 딸이 태어나다니. 앞으로 계속 아들이 태어나지 않으면 이런 문제로 시비를 걸어오는 자가 틀림없이 생길 텐데.”
태어난 아이는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천인보다 강한 신통력을 품었으며 태어난 순간 천계의 다양한 동물과 신수가 모여들어 축복을 내려 주는 듯했지만 오구대왕의 눈에는 그런 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사랑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아이에게 도저히 사랑을 줄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사랑하는 길대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아이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왕자를 볼 수 없다는 걱정이 더해졌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 아이는 혼례를 올리기 전에 생겼을 뿐이야. 그러니까 다른 아이는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갈이 박사의 말을 듣지 않은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그는 태어난 딸을 눈엣가시로 여기기 시작했다. 다음에 아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짜증이 겹친 탓이었을까? 결국 오구대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 아이를 하계에 버리라고 명령해 버렸다.
“꼴도 보기 싫으니 어서 그 아이를 바다에 던져 버리거라!”
“안 됩니다! 폐하와 저의 아이입니다! 어찌 이 어린 것을 버리라고 하십니까?! 제발 생각을 고쳐 주십시오!”
길대부인이 애타게 말리자 오구대왕은 다음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공주를 보기 싫은 마음은 변치 않아 첫째 아이의 이름을 버린 아이란 의미의 바리라 짓고 다음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라며 천상과 하계의 입구인 주도섬을 지키는 비리공덕 부부에게 보내 버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불행일까? 행운일까?
오구대왕의 바람대로 두 번째 아이는 아들이 태어났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아이에게 청대왕자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하지만 바리공주를 데려오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 길대부인은 다섯 명의 왕자를 더 낳았고 그들은 모두 7명의 자식을 보았다.
첫째인 바리공주.
둘째인 청대왕자.
셋째인 홍대왕자.
넷째인 황대왕자.
다섯째인 녹대왕자.
여섯째인 흑대왕자.
일곱째인 백대왕자.
공주 하나와 왕자 여섯.
점쟁이의 말대로 일곱 아이가 태어나자 오구대왕은 그제야 잊고 있던 바리공주를 천상으로 데려왔으며 길대부인과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나 이제 첫째인 바리공주는 아주 아름다운 아가씨로, 둘째인 청대왕자는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청대왕자와 버려진 아이
오구대왕과 길대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7명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나 모두가 아름답고 뛰어난 천인으로 성장했다. 길대부인을 닮아 타고난 아름다움, 오구대왕을 닮아 타고난 뛰어난 신통력, 그렇게 7명의 아이는 부모를 뛰어넘은 거대한 힘을 드러냈고 그 존재는 바로 천계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왕위를 이을 청대왕자 역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하였으니 이들에게 무슨 걱정이 있을까? 대왕을 뛰어넘는 더욱 위대한 대왕이 될 거라며 입을 모아 말하는데 이들의 앞날에 대체 무슨 걱정이 있으려고.
“지금 뭐라고 했느냐?”
아니, 걱정이 있다면 있다. 아무 걱정도 없을 거 같은 배경과 능력을 타고났으면서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었으니까.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의 두 번째 자식이자 첫 번째 왕자인 청대왕자는 아름다운 푸른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차가운 목소리로 종자를 다그쳤다.
“그것이……. 왕자님의 신수가.”
두려운 기색을 드러내며 떨고 있는 종자가 고개를 조아리고 불편한 사실을 보고하자 청대왕자는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인상을 썼다. 그는 이 천상에서 오구대왕 다음으로 가장 신분이 높은 왕자이며 아름다운 외모, 건강한 신체, 그리고 타고난 뛰어난 신통력으로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대체 무슨 문제가 있을까? 그 당사자에게는 문제가 없을 거다. 그 주위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그것도 아주 불편하고 커다란 문제가.
“누님은 어디 계시느냐?”
종자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는 험악한 표정을 숨기지도 않은 채 같은 피를 나눈 누이를 찾았다. 범인이 누구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으니까. 왕자는 아무리 피를 나눈 남매라고는 하나 허락도 받지 않고 다 큰 여인인 공주의 처소로 들이닥치더니 시종들의 안 된다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신통력을 사용하여 순식간에 높은 건물 위로 뛰어올라 제일 위층 끝에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청대왕자는 무작정 처소에 찾아왔으나 어렵지 않게 누이가 있는 장소를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도착한 방 안에서 차마 이런 한낮에 듣기 부끄러운 이상한 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는 그 이상한 소리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기에 아주 무례하게 그 문을 벌컥 열며 누이를 불렀다.
“누님!”
신통력이 약하거나 거의 없는 시종들은 일일이 아래층부터 뛰어 올라와야 하니 왕자의 행동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막을 사람이 올 때까지 가만히 있을 생각이었다면 일부러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청대왕자는 그를 막을 사람이 올라오기 전에 누이의 방문을 활짝 연 것도 모자라 그 방에 발을 들이기까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닫혀 있던 방 안은 후덥지근한 공기와 이상한 향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어머나. 네가 무슨 일이니? 그것도 이렇게 예의 없게 손님이 와 계시는데 허락도 없이 말이야.”
어두운 방 속, 희미한 연기와 함께 보이는 희미한 그림자. 청대왕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노려보았다. 마치 귀신처럼 흐릿한 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아름다운 여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며 그 앞에 나타났는데 그녀는 아무리 형제의 앞이라고는 하나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나체를 드러낸 채 청대왕자의 앞에 섰다. 잘 보면 그녀의 몸은 땀에 젖어 있고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어 그가 들어온 순간까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청대왕자는 눈동자를 살짝 돌려 방 깊숙한 곳에 누워 있는 남자가 서둘러 옷을 걸치는 걸 보았다.
“누님이 이런 시간에 누구랑 뭘 하고 있었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그보다 알고 계셨죠? 또 제 신수를 멋대로 데려갔다고요.”
종자가 덜덜 떨면서 보고했던 이야기. 왕위를 이을 자는 그에 걸맞은 신수를 거느려야 한다. 청대왕자는 성인이 된 19살 때부터 자신에게 어울리는 강한 신수를 찾아 그의 처소에 두었는데 정작 그들은 데려오기만 하면 청대왕자의 처소를 빠져나가고는 했다. 그리고 그 범인은 바로.
“또 그 소리니?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이렇게 난리를 치면서 들어오다니. 내가 전에도 말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난 네 신수를 가져가지 않았어.”
왕자의 앞에 선 아름다운 여인은 옷을 걸칠 생각도 없이 날아오를 듯한 걸음걸이로 사뿐히 피를 나눈 형제의 앞에 다가갔다. 마치 유혹이라도 하는 듯한 요염한 자태가 실로 아름다우나 청대왕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며 아름다운 선녀의 나체를 보고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왕자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공주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청년의 뺨에 손을 올려 다정하게 얼굴을 매만지더니 그의 귓가에 입을 갖다 대고 매혹적인 자태로 속삭였다.
“네 신수가 멋대로 나를 따라오는 거지.”
그 순간 공주의 처소 꼭대기에서 엄청난 소리와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규모 자체는 작았지만 건물 끝이 조금 떨어져 나갔고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본 사람들은 아름다운 왕자의 푸른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언제나 말하고 있잖니? 네 능력이 부족한 걸 가지고 내게 시비를 걸지 말아 주렴.”
잿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무너진 난간에 동생을 떠밀고 있는 공주. 그녀는 건물이 무너진 것이 무섭지도 않은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자들의 시선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청대왕자의 머리를 짓밟고 있었다. 그 동생이라는 자는 조금만 더 뒤로 밀려나면 부러진 난간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으나 아무도 그가 추락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왕자님! 그만두십시오!”
1화
서막
하늘과 땅의 교류가 끊어지고 긴 세월이 흐른 어느 날의 일이다. 천계의 불라국. 그곳을 다스리는 오구대왕이 아름다운 길대부인에게 반하여 혼인을 약속했다. 위대한 왕과 아름다운 여인은 뜨겁게 사랑하였고 하루빨리 그 사랑의 형태를 이루고 싶었던 왕은 어서 길대부인과 혼인을 올려 행복한 나날을 보내려 했다.
“어서 빨리 좋은 날을 잡아 식을 올리자. 나는 하루도 더 참을 수 없다.”
그렇게 길대부인을 사랑한 오구대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혼인에는 한 가지 귀찮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그가 위대한 대왕이라는 이유.
“대왕께서 혼인을 올리시는 경사스러운 날이 아닙니까? 무턱대고 아무 날이나 잡을 수는 없습니다. 길일을 잡아야 하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천계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의 경사스러운 날이라며 반드시 좋은 날에 식을 올려야 한다는 주위의 참견.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마웠고 그 말도 이해는 하나 오구대왕은 조바심이 났다. 그래도 결국 자신과 길대부인을 위한 일이니 애써 욕망을 억누르며 점쟁이가 찾아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을 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구대왕은 천계 제일이라 불리는 용한 점쟁이 갈이 박사를 불러들여 길일을 물었다.
“내가 곧 혼인을 올릴 것이다. 어떤 날에 혼인을 올리면 길대부인과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느냐?”
날만 잡으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며 기대와 함께 그렇게 물은 오구대왕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듣게 되었다. 바로 내일이든 모레든 좋은 날을 말해 줄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갈이 박사의 입에서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곤란한 소리가 튀어나온 것이다.
“대왕께서 올해 혼인을 올리신다면 일곱 딸을 볼 것이며, 내년에 혼인을 올리시면 일곱 아들을 보게 되실 겁니다.”
“뭐라고?”
기대했던 대답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갈이 박사의 대답을 들은 오구대왕은 차마 기뻐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는 어서 빨리 사랑하는 여인과 혼례를 치르고 부부가 되고 싶었지만 아들이 생기지 않는다면 곤란하다고 생각하여. 공주만 태어난다 하여도 왕위는 물려줄 수 있지만 사람들의 눈총을 받을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는 아들이나 딸이나 차별하지 않고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뿌리 깊게 박힌 차별의 인식은 실로 무서운 것이라.
‘아무리 그래도 딸만 일곱을 낳을 순 없지.’
무엇보다, 아마도 오구대왕 자신도 마음속으로는 아들을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골고루 태어난다면 몰라도 전부 딸이라니.
‘평생 무리라는 것도 아니고 딱 1년이니까. 그래, 1년만 참자. 공주만 태어나면 그걸로 트집을 잡는 사람도 있을 거고 차라리 아들을 많이 낳는 게 좋겠지.’
어쩔 수 없이 오구대왕은 앞으로 1년만 참아 보자 결심하고 혼인을 뒤로 미루었다. 하지만 식을 미룬다고 하여 사랑이 식을 리가 있나. 오히려 늦어진 혼인으로 애가 탄 오구대왕은 전보다 빈번하게 길대부인을 찾아갔고 결국 그들은 그 1년이 지나 식을 올리기도 전에 아이를 가지고 말았다. 이 일을 어찌하느냐 불안해하는 길대부인이었지만 오구대왕은 괜찮을 거라며 그녀를 위로했다.
“괜찮다. 식을 올리는 것이 다음 해라고 하였지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는 상관없을 거다. 아마도…….”
이미 생겨 버린 것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아이가 생긴 것이 식을 올리기 고작 2달 전이었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괜찮을 거라며 마음을 달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화려한, 이 땅 어디에도 없을 웅장하고 아름다운 식을 올렸다. 그러나 식을 올리고 8달이 지났을 때, 혼인 전에 이미 왕의 아이를 품고 있던 길대부인은 딸을 낳고 말았다. 결국 갈이 박사의 말대로 딸이 태어나고 말자 오구대왕은 탄식했다.
“하아, 이걸 어쩌면 좋으냐? 일부러 1년이나 식을 뒤로 미룬 건데 결국 딸이 태어나다니. 앞으로 계속 아들이 태어나지 않으면 이런 문제로 시비를 걸어오는 자가 틀림없이 생길 텐데.”
태어난 아이는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천인보다 강한 신통력을 품었으며 태어난 순간 천계의 다양한 동물과 신수가 모여들어 축복을 내려 주는 듯했지만 오구대왕의 눈에는 그런 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사랑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아이에게 도저히 사랑을 줄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사랑하는 길대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아이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왕자를 볼 수 없다는 걱정이 더해졌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 아이는 혼례를 올리기 전에 생겼을 뿐이야. 그러니까 다른 아이는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갈이 박사의 말을 듣지 않은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그는 태어난 딸을 눈엣가시로 여기기 시작했다. 다음에 아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짜증이 겹친 탓이었을까? 결국 오구대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 아이를 하계에 버리라고 명령해 버렸다.
“꼴도 보기 싫으니 어서 그 아이를 바다에 던져 버리거라!”
“안 됩니다! 폐하와 저의 아이입니다! 어찌 이 어린 것을 버리라고 하십니까?! 제발 생각을 고쳐 주십시오!”
길대부인이 애타게 말리자 오구대왕은 다음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공주를 보기 싫은 마음은 변치 않아 첫째 아이의 이름을 버린 아이란 의미의 바리라 짓고 다음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라며 천상과 하계의 입구인 주도섬을 지키는 비리공덕 부부에게 보내 버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불행일까? 행운일까?
오구대왕의 바람대로 두 번째 아이는 아들이 태어났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아이에게 청대왕자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하지만 바리공주를 데려오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 길대부인은 다섯 명의 왕자를 더 낳았고 그들은 모두 7명의 자식을 보았다.
첫째인 바리공주.
둘째인 청대왕자.
셋째인 홍대왕자.
넷째인 황대왕자.
다섯째인 녹대왕자.
여섯째인 흑대왕자.
일곱째인 백대왕자.
공주 하나와 왕자 여섯.
점쟁이의 말대로 일곱 아이가 태어나자 오구대왕은 그제야 잊고 있던 바리공주를 천상으로 데려왔으며 길대부인과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나 이제 첫째인 바리공주는 아주 아름다운 아가씨로, 둘째인 청대왕자는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청대왕자와 버려진 아이
오구대왕과 길대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7명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나 모두가 아름답고 뛰어난 천인으로 성장했다. 길대부인을 닮아 타고난 아름다움, 오구대왕을 닮아 타고난 뛰어난 신통력, 그렇게 7명의 아이는 부모를 뛰어넘은 거대한 힘을 드러냈고 그 존재는 바로 천계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왕위를 이을 청대왕자 역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하였으니 이들에게 무슨 걱정이 있을까? 대왕을 뛰어넘는 더욱 위대한 대왕이 될 거라며 입을 모아 말하는데 이들의 앞날에 대체 무슨 걱정이 있으려고.
“지금 뭐라고 했느냐?”
아니, 걱정이 있다면 있다. 아무 걱정도 없을 거 같은 배경과 능력을 타고났으면서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었으니까.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의 두 번째 자식이자 첫 번째 왕자인 청대왕자는 아름다운 푸른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차가운 목소리로 종자를 다그쳤다.
“그것이……. 왕자님의 신수가.”
두려운 기색을 드러내며 떨고 있는 종자가 고개를 조아리고 불편한 사실을 보고하자 청대왕자는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인상을 썼다. 그는 이 천상에서 오구대왕 다음으로 가장 신분이 높은 왕자이며 아름다운 외모, 건강한 신체, 그리고 타고난 뛰어난 신통력으로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대체 무슨 문제가 있을까? 그 당사자에게는 문제가 없을 거다. 그 주위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그것도 아주 불편하고 커다란 문제가.
“누님은 어디 계시느냐?”
종자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는 험악한 표정을 숨기지도 않은 채 같은 피를 나눈 누이를 찾았다. 범인이 누구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으니까. 왕자는 아무리 피를 나눈 남매라고는 하나 허락도 받지 않고 다 큰 여인인 공주의 처소로 들이닥치더니 시종들의 안 된다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신통력을 사용하여 순식간에 높은 건물 위로 뛰어올라 제일 위층 끝에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청대왕자는 무작정 처소에 찾아왔으나 어렵지 않게 누이가 있는 장소를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도착한 방 안에서 차마 이런 한낮에 듣기 부끄러운 이상한 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는 그 이상한 소리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기에 아주 무례하게 그 문을 벌컥 열며 누이를 불렀다.
“누님!”
신통력이 약하거나 거의 없는 시종들은 일일이 아래층부터 뛰어 올라와야 하니 왕자의 행동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막을 사람이 올 때까지 가만히 있을 생각이었다면 일부러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청대왕자는 그를 막을 사람이 올라오기 전에 누이의 방문을 활짝 연 것도 모자라 그 방에 발을 들이기까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닫혀 있던 방 안은 후덥지근한 공기와 이상한 향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어머나. 네가 무슨 일이니? 그것도 이렇게 예의 없게 손님이 와 계시는데 허락도 없이 말이야.”
어두운 방 속, 희미한 연기와 함께 보이는 희미한 그림자. 청대왕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노려보았다. 마치 귀신처럼 흐릿한 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아름다운 여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며 그 앞에 나타났는데 그녀는 아무리 형제의 앞이라고는 하나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나체를 드러낸 채 청대왕자의 앞에 섰다. 잘 보면 그녀의 몸은 땀에 젖어 있고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어 그가 들어온 순간까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청대왕자는 눈동자를 살짝 돌려 방 깊숙한 곳에 누워 있는 남자가 서둘러 옷을 걸치는 걸 보았다.
“누님이 이런 시간에 누구랑 뭘 하고 있었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그보다 알고 계셨죠? 또 제 신수를 멋대로 데려갔다고요.”
종자가 덜덜 떨면서 보고했던 이야기. 왕위를 이을 자는 그에 걸맞은 신수를 거느려야 한다. 청대왕자는 성인이 된 19살 때부터 자신에게 어울리는 강한 신수를 찾아 그의 처소에 두었는데 정작 그들은 데려오기만 하면 청대왕자의 처소를 빠져나가고는 했다. 그리고 그 범인은 바로.
“또 그 소리니?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이렇게 난리를 치면서 들어오다니. 내가 전에도 말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난 네 신수를 가져가지 않았어.”
왕자의 앞에 선 아름다운 여인은 옷을 걸칠 생각도 없이 날아오를 듯한 걸음걸이로 사뿐히 피를 나눈 형제의 앞에 다가갔다. 마치 유혹이라도 하는 듯한 요염한 자태가 실로 아름다우나 청대왕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며 아름다운 선녀의 나체를 보고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왕자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공주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청년의 뺨에 손을 올려 다정하게 얼굴을 매만지더니 그의 귓가에 입을 갖다 대고 매혹적인 자태로 속삭였다.
“네 신수가 멋대로 나를 따라오는 거지.”
그 순간 공주의 처소 꼭대기에서 엄청난 소리와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규모 자체는 작았지만 건물 끝이 조금 떨어져 나갔고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본 사람들은 아름다운 왕자의 푸른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언제나 말하고 있잖니? 네 능력이 부족한 걸 가지고 내게 시비를 걸지 말아 주렴.”
잿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무너진 난간에 동생을 떠밀고 있는 공주. 그녀는 건물이 무너진 것이 무섭지도 않은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자들의 시선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청대왕자의 머리를 짓밟고 있었다. 그 동생이라는 자는 조금만 더 뒤로 밀려나면 부러진 난간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으나 아무도 그가 추락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왕자님! 그만두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