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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리고 아래에서 시종들이 말리는 대상은 위협하는 공주가 아닌 당하는 왕자. 그러나 아무도 함부로 그들의 싸움을 말리려 끼어들지 않는다. 실수로 끼어들었다가 죽어 버리면 누가 책임져 주겠나. 하지만 유일하게 이 둘의 싸움에 다가와 공주의 몸에 겉옷을 걸쳐 주는 남자가 하나 있다.

“바리 님. 그런 모습으로 밖에 나오셨다가 몸이 상하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아, 고마워요. 사라메. 나도 참.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민망한 꼴을 보였네요.”

그러나 동생의 머리를 밟고 있는 발은 치우지 않는다. 오히려 더 꾹 밟아 누르더니 발을 치우는 척했다가 화려하게 머리를 걷어찬다. 얼굴은 옷을 걸쳐 준 남자와 대화를 나누며 상쾌하기 그지없게 웃고 있는데 행동은 조금도 상쾌하지 않게 움직이는 사람. 그녀는 겉옷으로 몸을 가린 뒤에 천천히 쓰러진 동생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아, 불쌍해라.”

천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왕자가 이렇게 무력하게 짓밟히다니. 그녀는 사랑스러운 동생이라며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누가 듣든 말든 상관없는지 속내를 까발렸다.

“너무 불쌍해서 웃음이 다 나오잖니. 그러니까 까불고 싶으면 나보다 더 강해진 다음에나 까불어. 이 얼간아. 상대도 안 되고 깨질 걸 알면서 뭐하러 바보같이 찾아오니?”

청대왕자는 자신이 불라국의 다음 왕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날을 보내 왔다. 자신의 누이인 바리공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멋대로 신수를 데려가 놓고 잘도 그런 말을…….”

이를 갈며 따져도 신통력으로 찍어 누르니 반항할 수 없다. 아무리 신수가 그녀를 마음대로 따라왔다고는 해도 그녀는 다시 돌려보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알아서 가져가 보라며 놀리기만 했지. 신수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새로운 것을 찾기도 힘드나 발견한다고 해도 데려오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간신히 구할 때마다 이 일이 반복되니 화를 내며 찾아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게다가 저 남자는 뭡니까? 약혼자까지 멀쩡히 계신 분이 절조도 없습니까?”

힘이 통하지 않으니 행실을 두고 비아냥이라도 해야 속이 시원할까? 그러나 바리공주는 제 옆에 있는 저보다 조금 어린 남자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사죄하더니 당당하고 뻔뻔하게 대꾸했다.

“무장승께서 불편해하시니 동생은 이만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버릇없는 아우님. 함부로 내 미래를 논하지 말아 주면 좋겠군.”

그녀는 아주 뻔뻔하게 웃으면서 청대왕자의 멱살을 쥐고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목은 아무리 봐도 가냘프기 짝이 없어 무거운 물건도 똑바로 들 수 없을 것 같은데 자기 몸보다 훨씬 더 무게가 나갈 남자의 몸을 들어 올리는 행동에 주저함이 보이지 않는다. 틀림없이 그 힘은 손목에서 나오는 순수한 힘이 아닌 그녀가 가진 신통력의 힘이리라.

“내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죄인의 후손과 연을 맺어야 하니? 멋대로 정한 그런 관계에 날 억지로 떠밀지 말아 주렴. 나는 나보다 덜떨어진 것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일이 제일 싫단다.”

청대왕자는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막내인 백대왕자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지. 갑자기 모든 형제를 불러 모은 대왕은 너희의 누이가 돌아왔다는 뜬금없는 소리와 함께 바리공주를 소개했다. 그날 그는 소문으로만 존재를 들어왔던 자신의 누이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고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절대로 그녀를 좋아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12살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바리공주는 그녀의 부모, 형제, 주위의 모든 것을 아주 불만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지금까지 남들 이상으로 뛰어난 신통력을 지녔다고 칭찬을 들어온 청대왕자를 가볍게 압도할 힘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네가 내 첫 번째 동생이구나.”

그렇게 말하며 청대왕자를 바라보던 바리공주는 무서운 위압감을 뿜어내며 그의 숨통을 조였다. 대왕의 일곱 아이는 모두 뛰어난 신통력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청대왕자는 그중 가장 뛰어나다는 소리를 들어왔으며 그 역시 자신보다 뛰어난 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한 누이는 그런 그의 신통력이 어린아이의 장난으로 취급될 만큼 어마무시한 힘을 뿜어내고 있어서.

‘마음에 안 들어.’

하다못해 그녀가 조금만 고분고분한 여성이었다면, 혹은 진심으로 형제를 생각하는 다정하고 자애로운 누이였다면 그들은 평범한 남매처럼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태어난 순서가 먼저라고 해도, 계승권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도, 그런 건 상관없다며 조용히 흘러가는 물처럼 지냈다면 좋았을 텐데.

“이상하군요? 왕이라는 건 고작 그런 능력만으로도 차지할 수 있는 거였습니까?”

바리공주의 성인식 날. 그녀는 역대의 어느 왕보다 무시무시한 신통력을 보이며 떠도는 신수 여럿을 이끌고 왕의 명을 거역했다. 그 명이란 과거 그녀를 돌보았던 비리공덕 부부의 아들과 혼인하여 경계의 입구에서 지내라는 것. 그러나 바리공주는 부모와 6명의 동생을 앞에 두고 그런 명은 받을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런 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아주 당당하고 무시무시하게, 그녀는 자신이 불라국의 왕좌를 차지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무너진 성의 지붕 아래에서 신수가 춤을 추며 하늘이 요동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공주는 그 무서운 배경을 뒤에 두고 자신을 낳아 준 대왕을 위협했다.

“나는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의 첫 번째 자식이며 다른 왕자들보다 강한 신통력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를 ‘저보다 뒤떨어지는 자’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는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동생’을 향해 물었다. 그 동생을 바라보는 시선은 틀림없는 승자의 표정으로.

“그렇지 않으냐? 사랑하는 동생아.”

그녀는 활짝 웃으며 자신을 낳아 준 부모와 피를 나눈 형제를 찍어 눌렀다. 나라를 생각하고 그만한 능력이 있다면 왕이 되는 건 그 누구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비교할 대상이 너무나도 거대하다. 차마 비교할 가치도 없는 무지막지한 능력으로 상대를 짓누르며 자신의 의지를 주장하는 공주를 그곳의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었으니.

“그러니 약속해 주시지요? 저의 사랑하는 6명의 동생 중 누구라도 좋으니 저를 이기고 나서 그 자격을 얻을 수 있기를. 막내인 백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아무도 저를 이길 수 없다면 왕의 자리는 제가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무시무시한 배경 속에서 공주는 환하게 웃으며 그 자리에 모인 모두를 향해 선포했다. 그 자리는 내가 가지겠다고. 그러니 그 사이 열심히 발버둥 치며 노력해 보라는 조롱. 그것이 전쟁의 시작이었다.

“다시 떠올릴 때마다 기분 나쁘다니까.”

바리공주의 성인식 날. 19살의 공주는 아래 여섯 왕자를 철저히 짓밟아 버릴 생각으로 그런 의견을 꺼냈다. 어차피 거부할 수 있는 자가 없으니까. 그녀의 능력만 있으면 충분히 아비를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일부러 동생들의 성장을 기다린다는 귀찮은 방법을 선택했다. 왜 바로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두고 그런 귀찮은 방법을 제시했을까?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이유를 아는 청대왕자는 자신의 처소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중얼거렸다.

“누님이 아버지와 우리를 싫어하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우리가 괴로워하는 꼴을 보고 싶은 거겠지. 오늘처럼 뻔뻔하게 우리 능력이 부족하다고 비웃으면서 말이야.”

“덕분에 우리는 시간을 벌 수 있잖아? 뭐 막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아무도 못 이길 거 같다는 게 문제라서 그렇지. 심지어 황대 녀석은 진작 누님 편에 붙어 버렸고.”

또 신수를 빼앗긴 청대왕자가 바리공주의 처소에 쳐들어갔다가 완전히 박살이 나서 돌아온 저녁. 그는 자신과 많이 닮은 아름다운 얼굴에, 자신과 반대로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청년과 함께 심기가 불편한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주먹을 쥐었다. 두 사람 앞에는 술잔이 준비되어 있지만 취할 분위기가 아니어서 그런지 누구도 잔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청대왕자의 몸에는 과하지 않은 자잘한 긁힌 상처가 많았는데 그것은 오늘 생긴 것과 더불어 조금 시간이 지난 것처럼 보이는 것까지 있어 아마 이 남자가 누이와 싸우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는 증거이리라.

“애초에 누님은 왕이 되고 싶은 게 아니야. 능력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앉고 싶어서 우리와 싸우는 게 아니잖아. 그게 더 짜증 나.”

“알고 있어. 하지만 어쩌겠어?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우리가 열심히 발버둥 치는 걸 보다가 질려서 물러나 주기를 바라는 게 제일인가?”

그녀가 성인식을 치르고 벌써 2년이 지났다. 그녀는 21살이 되었고 그 아래 두 명의 동생은 벌써 성인이 되었다. 청대왕자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턱을 괬다.

“막내인 백대가 13살이니 앞으로 고작 6년.”

“하지만 우리 형제 6명의 신통력을 다 합쳐도 누님한테는 상대도 안 돼. 게다가 저승까지 끌어들였으니 외부 세력까지 견제해야 하지. 천계 내에서도 누님한테 붙으려는 놈들이 많아. 형 정말 괜찮겠어?”

안 그래도 신통력으로 찍어 누르는 걸 피할 수 없는데 이제는 천계만이 아닌 저승의 세력까지 자기편으로 회유하고 있으니 골치 아픈 건 더 커져만 간다. 방도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청대왕자는 짜증이 솟구쳐 혀를 차며 제 누이의 행실을 욕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염라대왕의 아들까지 몸으로 꼬실 줄은 몰랐어. 제천 녀석만 불쌍하지.”

“그런데 난 그 부분은 이해해. 사실 누님 정도의 신분에 능력이면 제천이랑 결혼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게 사실이잖아. 나라도 경계나 지키는 죄인의 후손이랑 억지로 결혼하라고 하면 마음에 안 들 거야.”

“그렇다고 아주 대놓고 남자를 꼬시고 있잖아. 그건 문제가 아니고?”

바리공주는 어린 시절부터 정해진 약혼자가 있었으나 다른 수많은 남자를 유혹해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진짜 몸을 내준 것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염라대왕의 둘째 아들은 애인이나 정부라 취급해도 될 사이로 발전한 게 틀림없다. 적어도 청대왕자와 홍대왕자가 알기로 그들의 누이가 다른 남자와 동침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 남자가 유일하니까. 홍대왕자는 형과 똑같이 턱을 괴며 저승의 둘째 왕자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15살 때 처음 여기 온 거 맞지? 나랑 동갑이니까.”

“그래, 누님한테 홀딱 반해서 꼬박꼬박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서.”

청대왕자는 기억하고 있다. 밖에서 온 여러 귀빈을 맞이한 연회 중간, 우연히 정원을 거닐다 목격한 장면. 제 누이가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소년에게 젖가슴을 드러내고 찐득하게 유혹을 던지던 장면. 이제 곧 어른이 될 시기를 앞에 뒀던 소년은 미칠 듯한 표정으로 욕망을 참으며 그녀에게 넘어갔다. 아마 그는 15살 때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부터 그녀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을 거다. 4년간 꼬박꼬박 찾아올 때마다 공주를 보며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을 자주 볼 수 있었으니까. 정작 그것을 따졌을 때 바리공주의 말은 실로 뻔뻔하였지만.

“어머? 그걸 다 보고 있었니? 하지만 뭐 어떠니? 난 도덕이라는 걸 지키는 사람이거든. 유혹만 했지 건드리진 않았으니 아무 문제도 없잖아? 아무리 나라고 해도 아직 성인도 안 된 도련님을 억지로 덮치는 짓은 하지 않아.”

그래서 성인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했나? 홍대왕자와 동갑인 저승의 무장승은 올해 성인이 되자마자 뻔뻔할 정도로 빈번하게 천계를 드나들었으며 마치 자기가 공주의 정혼자라도 된 것마냥 정체를 숨기지도 않고 그녀의 처소에 선물을 싸들고 들어가고는 했다. 공주 역시 숨길 생각이 없는 건지 시종들이 그녀의 방에서 무슨 소리가 흘러나오는지 들었다며 천계 내에 벌써 소문이 다 퍼져 버렸을 정도다. 성내를 넘어 성 밖까지 나갔을 소문을 근처에 있는 그녀의 약혼자가 듣지 못했을까? 하지만 어쩌겠나. 누가 감히 그녀의 행동을 막을 수 있을까?

“일단 우리 쪽에서도 다른 세력을 끌어들이긴 해야지. 하계 용왕의 아들을 불러 말을 해 볼 생각이니 잘 풀리기를 바랄 수밖에. 둘째 아들인 무장승과 달리 그쪽은 이제 곧 용왕 자리를 물려받을 사람이니 힘으로만 따지면 우리가 더 유리해.”

“정말 귀찮다니까. 아버지도 뭐하러 누님을 버려둬서. 그냥 둘째인 형이 태어났을 때 바로 데려왔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평범하게 자랐을 텐데 괜히 신경 긁어서 이게 무슨 고생이야? 하긴 나라도 12살 때까지 그런 섬에 처박혀서 지냈으면 원망하긴 했을 거야.”

“이미 저지른 일은 어쩔 수 없지. 그분은 가끔 답답한 일을 저지르시고 나 몰라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