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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청대왕자는 아주 어린 시절에 주위 사람들에게서 헤어진 누이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녀가 딸이라는 이유로 하계에 거의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것도. 그랬기에 청대왕자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는 이미 아들인 자신과 동생인 홍대, 황대, 녹대까지 태어난 뒤였으니까. 얼마나 아이를 더 낳아야 만족할 생각인지 대왕은 버려둔 딸을 데려올 생각은 않고 또 아들을 낳았다. 젊은 혈기를 억누를 수 없는 건지 그는 아들을 6명이나 낳은 다음에야 부인의 청을 듣고 바리공주를 데려왔다.
“나는 가끔 누님의 뻔뻔함이 아버지를 닮은 게 아닌가 생각해.”
“동감이야.”
자식을 자그마치 12년이나 내버려 둔 대왕은 제 딸을 보고 실로 뻔뻔한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그래도 어머니는 진심으로 행복한 건지 딸을 안고 눈물을 흘렸지만. 그래서 청대왕자는 가끔 그때의 아버지가 과연 어떤 마음이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조금은 죄책감이라는 걸 느꼈을까? 아니면 정말 그녀가 한 점의 원망도 없이 기뻐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마 후자라고 생각한다. 죄책감이 있었다면 그녀를 비리공덕 부부의 아들과 이어 준다는 말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지금 그가 공주의 행실을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힘이 두려워서겠지. 사실 이런 것만 봐도 이미 그녀가 왕위를 차지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임이 맞다. 그러나 그녀는 일부러 막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말미를 줬다. 자비로움 따위가 아닌 그녀가 싫어하는 자들이 좀 더 괴로워하고 발버둥 치는 꼴을 즐기기 위해.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형제는 누이의 추잡한 생각을 혐오하며 숨김없이 감정을 입에 올렸다.
“홍대야. 나는 정말 진심으로 누님이 싫다.”
남에게는 차마 보일 수 없는 왕자답지 않은 추악한 표정으로 청대왕자는 피를 나눈 형제 중 가장 가까운 둘 중 하나에게 나머지 하나를 싫어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 표정은 그가 그렇게 싫어하는 누이와 아주 많이 닮았다.
버려진 공주
“바리 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름다운 바리 님.”
조금 미숙한 듯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행복에 넘치는 표정으로 웃는 남자. 끈적한 분위기가 가득 찬 방은 알 수 없는 향기와 뜨거운 공기로 가득하다. 남녀의 정사로 인한 땀을 흘리며 바리공주의 몸을 탐하는 자는 아직 소년다운 모습이 남아 있는 얼굴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입을 맞춘다. 이 남자는 저승을 다스리는 염라대왕의 둘째 아들. 그리고 그를 유혹한 천계의 공주는 아름답게 웃으며 땀을 흘리는 남자의 뺨을 닦아 줬다.
“고귀하신 분께 그런 고백을 받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무장승의 이름을 받으신 분께 사랑한다는 말을 듣다니.”
“무장승이 아닙니다. 이름을 불러 주세요.”
남자는 아이가 어머니에게 매달리는 듯한 표정으로 제 아래에 누워 있는 여자의 품에 파고들며 하반신을 딱 붙였다. 남자와 여자의 성기가 겹쳐지고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뜨거운 숨을 토해 내는 남자. 그는 바리공주에게 이름을 불러 달라 요구했다. 그게 훨씬 기분이 좋다면서. 지금 이 후끈한 공기 속에서 내 이름을 불러 준다면 정말 행복할 거라고. 아주 간단하기 짝이 없는 요구였기에 공주는 다정하게 웃어 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라메. 당신은 아직도 아이처럼 어리광이 심하네요.”
그리고 다시 농밀하게 입을 맞추지만 이름을 불린 남자는 아이가 아니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상반신을 들었다.
“아이가 아닙니다. 전 이제 성인입니다. 물론 당신보다는 어리지만.”
아이 취급을 받는 게 불만스럽지만 그래도 아름답게 웃으며 저를 올려다보는 여인이 사랑스러워 그는 정신을 놓고 허리를 움직인다. 활짝 웃는 남자의 새빨갛게 붉은 눈동자에는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자가 황홀한 듯이 웃는 게 비친다.
“아이는 이런 걸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찔꺽하는 소리가 울린다. 쾌감에서 우러나오는 탄성과 뜨거운 공기, 살이 부딪칠 때마다 느껴지는 아찔함,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매혹적인 육체. 표정만은 아이가 아니라는 듯이 단호한 표정으로 바리공주를 내려다본 남자는 저승의 하늘처럼 새까만 긴 머리카락으로 그녀의 몸을 가뒀다. 그의 어둠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 누워 있는 여인의 잿빛 머리카락과 얽히며 몸과 몸이 섞인다. 누구의 체액인지 알 수 없는 땀이 부딪치고,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를 신음이 섞이고, 누구의 그림자인지도 모를 만큼 뒤엉켜 조금도 비밀스럽지 않은 정사를 이어 간다. 정신없이 쾌락을 탐한 뒤 욕구를 해소하고 나면 무장승은 다음을 기약하며 사랑하는 여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저승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사랑하는 바리 님. 다음에 다시 만나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꺼이 그 날을 기다리겠다며 남자의 머리카락을 집어 그곳에 입을 맞춰 준 바리공주는 무장승이 떠나자마자 준비되어 있던 욕실로 들어가 몸을 담갔다. 천상에서 가장 향기롭기로 소문난 복숭아를 가득 담근 뜨거운 탕에 들어가니 지독한 땀 냄새가 사라진다. 그리고 넓고 향기로운 나무 욕조에 들어가 있던 공주는 느긋하게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며 수증기 속의 누군가에게 물었다.
“무장승은 무사히 돌아가셨나?”
“네. 경계의 입구까지 지켜보았으나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 그대로 넘어가셨습니다.”
“다행이네.”
저승의 왕자가 아닌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공주의 처소, 그것도 입욕 중인 공간에 함께 있다. 수증기 속에서 언뜻 보이는 실체는 체격이 다부진 성인 남성. 그는 욕실의 입구 근처에서 더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그의 모습이 성인 남자라는 것밖에 추정할 수 없다. 그러나 공주는 그의 모습을 보지도 않고 첨벙 소리를 내며 물장구를 치고는 대화를 이어 나간다.
“청대 쪽에서는 어쩌고 있지?”
“아무래도 용왕의 후계자와 접촉하려는 모양입니다. 조만간 초대를 보내지 않을까요?”
“용왕이라? 머리 좀 굴렸군. 후계 자리랑 상관도 없는 무장승과 비교하면 세력 싸움에서는 밀리겠어.”
그러나 어차피 큰 문제는 아니라며 그녀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향기로운 물에 담그며 씻어 낸다. 수증기 속으로 보이는 여인의 몸은 실로 요염하기 짝이 없어 남자는 이성을 잃으면 그녀를 덮쳐 버리는 게 아닐까 했다. 아마 그렇게 행동했다가는 그녀의 몸에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머리가 깨져 버리겠지만.
“정말 무장승과 혼인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설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바리공주는 아까 그 남자의 앞에서 보인 사랑스러워 보이는 가면을 벗어던졌다.
“말 잘 듣는 아이는 좋지만 멍청한 애는 필요 없거든. 그 꼬맹이는 어디까지나 저승 세력을 내 편으로 만들었다고 과시하기 위한 장식일 뿐이야. 물론 계승권과 거리가 먼 위치이니 데릴사위로 들이기 딱 좋은 건 사실이지만 진짜로 옆에 둘 놈은 머리가 좀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그녀는 수증기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살며시 웃는다.
“그게 내가 너와의 약혼을 취소하지 않는 이유지. 괜히 여지를 줘서는 안 되거든.”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아가씨가 당당하게 남자의 앞에서 알몸을 보이는 건 그만큼 그녀에게 수치심이 없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자신의 몸이 자랑스럽다는 의미일까? 그것도 아니면 앞에 있는 남자에게는 부끄러워할 가치도 없다는 의미일까? 바리공주는 나무로 만든 욕조에서 일어나 물을 뚝뚝 흘리며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몸을 타고 흐르는 향기로운 물방울에 절로 성욕이 끓어오르지만 남자는 감히 그녀의 몸을 허락 없이 만질 수 없다. 가까이서 보면 그는 공주보다 훨씬 키가 크고, 먼저 왔던 무장승보다 훨씬 다부지며 남자다운 얼굴을 한 청년이다.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한 그는 앞에 있는 여자를 어찌 생각할까?
“물론 너도 기대해서는 안 되지만.”
물에 젖은 손을 들어 올려 새빨갛게 물든 남자의 뺨을 만져 주면 그의 얼굴은 훨씬 더 빨갛게 익어 가지만 남자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다만 시선을 피한 채 침묵을 지킬 뿐이다. 공주의 머리카락과 몸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물은 바닥을 적시고 그녀의 손이 닿은 남자의 뺨에서도 한 줄기 물방울이 흘러내린다.
“제천, 넌 정말 착한 아이야. 비록 신통력은 없지만 써먹을 구석이 참 많아서, 그래서 난 널 좋아해.”
그것은 이성적인 의미의 좋아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애완동물을 아끼는 그런 감정의 좋아함인 걸 알면서도 남자는 그 칭찬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공주의 얼굴을 힐끔 바라봤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요염하게 나체에 달라붙어 색기가 넘치는 여인. 풍만한 가슴을 슬쩍 가린 머리카락이 바로 앞에 있으나 남자는 감히 손을 내밀어서 그것을 치울 수 없다.
“돌아가는 길에 황대, 녹대, 흑대, 백대에게 들러 무장승이 주고 가신 선물을 전해 줄래?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좋아.”
물기가 마르지 않은 손으로 남자의 두꺼운 가슴을 쓸어내린 여자는 내줄 생각도 없는 몸을 바짝 붙이고 애완동물에게 먹이를 던져 준다.
“이건 오늘 일을 잘 끝낸 상이야.”
자기보다 훨씬 큰 남자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기고는 그의 고개를 숙이게 하고 다른 남자와 겹쳤던 입술을 겹친다. 제천은 그제야 떨리는 손으로 자신에게 입을 맞추는 여인의 나체를 두 팔로 꽉 끌어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다. 끌어안은 채 조금 긴 입맞춤을 끝낸 공주는 미련도 없이 제천에게서 떨어졌으며 다시 복숭아가 떠다니는 향기로운 탕 안으로 몸을 숨겼다. 제천 역시 더는 미련을 가지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고 시종 하나 없는 욕실 속에서 바리공주는 조용히 몸을 담근 채 눈을 감았다.
‘피곤하군.’
단순히 유혹하며 놀아 주는 수준이지만 육체의 피로는 남는 법이니까. 하반신의 뻐근함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자니 피로가 풀리는 것과 반대로 이상하게 옛날 일이 떠오른다. 지금은 생각하기도 싫은 과거의 이야기가.
‘왜 자꾸 생각나는 건지. 좋은 일도 아닐 텐데.’
아직 그녀가 진짜 공주로 대접받기 전의 그 시절. 정확히 그녀가 자신이 공주라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던 시절.
“공주님. 바리공주님. 해가 지기 전에 들어오세요. 어두워지면 위험해요.”
제천의 부모는 그녀를 공주님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아들은 그냥 제천이라 부르면서 바리를 부를 때는 항상 공주님이라는 호칭을 붙여서, 그래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공주라 불리는 그 호칭에 의문을 느꼈다. 서책을 보면 공주는 왕과 왕비의 자식이 아닌가?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부모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왜 나를 계속 공주라고 부르는 것이냐?”
천상과 하계를 오갈 수 있는 입구인 주도섬. 그곳에 사는 자는 비리공덕 부부와 그 아들, 그리고 바리공주. 이렇게 4명이 전부였다. 어디에도 왕과 왕비는 없는데 공주라니? 어쩌다 가끔 입구를 오가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보기도 힘든 섬에서 공주라 불리는 호칭에 의문을 품은 것이 5살 때의 일이다. 그리고 비리공덕 부부는 그런 그녀에게 예를 갖추고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공주님은 천상의 불라국을 다스리는 오구대왕님과 길대부인 사이에서 태어나신 첫 번째 아이이십니다.”
그들은 공주의 부모가 아니었기에 바리는 비리공덕 부부에게 아버지나 어머니란 호칭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어린 소녀에게 예를 갖추고 그녀가 특별한 존재임을 알려 줬다. 하지만 왜 공주가 혼자 이런 곳에 있는 건지? 그게 이상하니까.
“그런데 어째서 나는 천상이 아닌 이곳에 있는 것이냐?”
그들은 그 질문에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서책을 찾아보았으며 타고난 신통력은 자라면 자랄수록 함께 성장했지만 바리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입구를 오가는 자들의 알 수 없는 눈빛을 받을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공주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들은 그녀를 볼 때면 신기하다는 눈빛, 불쌍하다는 눈빛, 그리고 아쉽다는 눈빛을 보내왔고 그것은 아주 가끔 비리공덕 부부가 보이는 눈빛과 비슷했다.
청대왕자는 아주 어린 시절에 주위 사람들에게서 헤어진 누이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녀가 딸이라는 이유로 하계에 거의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것도. 그랬기에 청대왕자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는 이미 아들인 자신과 동생인 홍대, 황대, 녹대까지 태어난 뒤였으니까. 얼마나 아이를 더 낳아야 만족할 생각인지 대왕은 버려둔 딸을 데려올 생각은 않고 또 아들을 낳았다. 젊은 혈기를 억누를 수 없는 건지 그는 아들을 6명이나 낳은 다음에야 부인의 청을 듣고 바리공주를 데려왔다.
“나는 가끔 누님의 뻔뻔함이 아버지를 닮은 게 아닌가 생각해.”
“동감이야.”
자식을 자그마치 12년이나 내버려 둔 대왕은 제 딸을 보고 실로 뻔뻔한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그래도 어머니는 진심으로 행복한 건지 딸을 안고 눈물을 흘렸지만. 그래서 청대왕자는 가끔 그때의 아버지가 과연 어떤 마음이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조금은 죄책감이라는 걸 느꼈을까? 아니면 정말 그녀가 한 점의 원망도 없이 기뻐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마 후자라고 생각한다. 죄책감이 있었다면 그녀를 비리공덕 부부의 아들과 이어 준다는 말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지금 그가 공주의 행실을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힘이 두려워서겠지. 사실 이런 것만 봐도 이미 그녀가 왕위를 차지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임이 맞다. 그러나 그녀는 일부러 막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말미를 줬다. 자비로움 따위가 아닌 그녀가 싫어하는 자들이 좀 더 괴로워하고 발버둥 치는 꼴을 즐기기 위해.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형제는 누이의 추잡한 생각을 혐오하며 숨김없이 감정을 입에 올렸다.
“홍대야. 나는 정말 진심으로 누님이 싫다.”
남에게는 차마 보일 수 없는 왕자답지 않은 추악한 표정으로 청대왕자는 피를 나눈 형제 중 가장 가까운 둘 중 하나에게 나머지 하나를 싫어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 표정은 그가 그렇게 싫어하는 누이와 아주 많이 닮았다.
버려진 공주
“바리 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름다운 바리 님.”
조금 미숙한 듯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행복에 넘치는 표정으로 웃는 남자. 끈적한 분위기가 가득 찬 방은 알 수 없는 향기와 뜨거운 공기로 가득하다. 남녀의 정사로 인한 땀을 흘리며 바리공주의 몸을 탐하는 자는 아직 소년다운 모습이 남아 있는 얼굴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입을 맞춘다. 이 남자는 저승을 다스리는 염라대왕의 둘째 아들. 그리고 그를 유혹한 천계의 공주는 아름답게 웃으며 땀을 흘리는 남자의 뺨을 닦아 줬다.
“고귀하신 분께 그런 고백을 받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무장승의 이름을 받으신 분께 사랑한다는 말을 듣다니.”
“무장승이 아닙니다. 이름을 불러 주세요.”
남자는 아이가 어머니에게 매달리는 듯한 표정으로 제 아래에 누워 있는 여자의 품에 파고들며 하반신을 딱 붙였다. 남자와 여자의 성기가 겹쳐지고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뜨거운 숨을 토해 내는 남자. 그는 바리공주에게 이름을 불러 달라 요구했다. 그게 훨씬 기분이 좋다면서. 지금 이 후끈한 공기 속에서 내 이름을 불러 준다면 정말 행복할 거라고. 아주 간단하기 짝이 없는 요구였기에 공주는 다정하게 웃어 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라메. 당신은 아직도 아이처럼 어리광이 심하네요.”
그리고 다시 농밀하게 입을 맞추지만 이름을 불린 남자는 아이가 아니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상반신을 들었다.
“아이가 아닙니다. 전 이제 성인입니다. 물론 당신보다는 어리지만.”
아이 취급을 받는 게 불만스럽지만 그래도 아름답게 웃으며 저를 올려다보는 여인이 사랑스러워 그는 정신을 놓고 허리를 움직인다. 활짝 웃는 남자의 새빨갛게 붉은 눈동자에는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자가 황홀한 듯이 웃는 게 비친다.
“아이는 이런 걸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찔꺽하는 소리가 울린다. 쾌감에서 우러나오는 탄성과 뜨거운 공기, 살이 부딪칠 때마다 느껴지는 아찔함,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매혹적인 육체. 표정만은 아이가 아니라는 듯이 단호한 표정으로 바리공주를 내려다본 남자는 저승의 하늘처럼 새까만 긴 머리카락으로 그녀의 몸을 가뒀다. 그의 어둠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 누워 있는 여인의 잿빛 머리카락과 얽히며 몸과 몸이 섞인다. 누구의 체액인지 알 수 없는 땀이 부딪치고,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를 신음이 섞이고, 누구의 그림자인지도 모를 만큼 뒤엉켜 조금도 비밀스럽지 않은 정사를 이어 간다. 정신없이 쾌락을 탐한 뒤 욕구를 해소하고 나면 무장승은 다음을 기약하며 사랑하는 여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저승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사랑하는 바리 님. 다음에 다시 만나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꺼이 그 날을 기다리겠다며 남자의 머리카락을 집어 그곳에 입을 맞춰 준 바리공주는 무장승이 떠나자마자 준비되어 있던 욕실로 들어가 몸을 담갔다. 천상에서 가장 향기롭기로 소문난 복숭아를 가득 담근 뜨거운 탕에 들어가니 지독한 땀 냄새가 사라진다. 그리고 넓고 향기로운 나무 욕조에 들어가 있던 공주는 느긋하게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며 수증기 속의 누군가에게 물었다.
“무장승은 무사히 돌아가셨나?”
“네. 경계의 입구까지 지켜보았으나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 그대로 넘어가셨습니다.”
“다행이네.”
저승의 왕자가 아닌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공주의 처소, 그것도 입욕 중인 공간에 함께 있다. 수증기 속에서 언뜻 보이는 실체는 체격이 다부진 성인 남성. 그는 욕실의 입구 근처에서 더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그의 모습이 성인 남자라는 것밖에 추정할 수 없다. 그러나 공주는 그의 모습을 보지도 않고 첨벙 소리를 내며 물장구를 치고는 대화를 이어 나간다.
“청대 쪽에서는 어쩌고 있지?”
“아무래도 용왕의 후계자와 접촉하려는 모양입니다. 조만간 초대를 보내지 않을까요?”
“용왕이라? 머리 좀 굴렸군. 후계 자리랑 상관도 없는 무장승과 비교하면 세력 싸움에서는 밀리겠어.”
그러나 어차피 큰 문제는 아니라며 그녀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향기로운 물에 담그며 씻어 낸다. 수증기 속으로 보이는 여인의 몸은 실로 요염하기 짝이 없어 남자는 이성을 잃으면 그녀를 덮쳐 버리는 게 아닐까 했다. 아마 그렇게 행동했다가는 그녀의 몸에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머리가 깨져 버리겠지만.
“정말 무장승과 혼인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설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바리공주는 아까 그 남자의 앞에서 보인 사랑스러워 보이는 가면을 벗어던졌다.
“말 잘 듣는 아이는 좋지만 멍청한 애는 필요 없거든. 그 꼬맹이는 어디까지나 저승 세력을 내 편으로 만들었다고 과시하기 위한 장식일 뿐이야. 물론 계승권과 거리가 먼 위치이니 데릴사위로 들이기 딱 좋은 건 사실이지만 진짜로 옆에 둘 놈은 머리가 좀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그녀는 수증기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살며시 웃는다.
“그게 내가 너와의 약혼을 취소하지 않는 이유지. 괜히 여지를 줘서는 안 되거든.”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아가씨가 당당하게 남자의 앞에서 알몸을 보이는 건 그만큼 그녀에게 수치심이 없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자신의 몸이 자랑스럽다는 의미일까? 그것도 아니면 앞에 있는 남자에게는 부끄러워할 가치도 없다는 의미일까? 바리공주는 나무로 만든 욕조에서 일어나 물을 뚝뚝 흘리며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몸을 타고 흐르는 향기로운 물방울에 절로 성욕이 끓어오르지만 남자는 감히 그녀의 몸을 허락 없이 만질 수 없다. 가까이서 보면 그는 공주보다 훨씬 키가 크고, 먼저 왔던 무장승보다 훨씬 다부지며 남자다운 얼굴을 한 청년이다.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한 그는 앞에 있는 여자를 어찌 생각할까?
“물론 너도 기대해서는 안 되지만.”
물에 젖은 손을 들어 올려 새빨갛게 물든 남자의 뺨을 만져 주면 그의 얼굴은 훨씬 더 빨갛게 익어 가지만 남자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다만 시선을 피한 채 침묵을 지킬 뿐이다. 공주의 머리카락과 몸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물은 바닥을 적시고 그녀의 손이 닿은 남자의 뺨에서도 한 줄기 물방울이 흘러내린다.
“제천, 넌 정말 착한 아이야. 비록 신통력은 없지만 써먹을 구석이 참 많아서, 그래서 난 널 좋아해.”
그것은 이성적인 의미의 좋아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애완동물을 아끼는 그런 감정의 좋아함인 걸 알면서도 남자는 그 칭찬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공주의 얼굴을 힐끔 바라봤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요염하게 나체에 달라붙어 색기가 넘치는 여인. 풍만한 가슴을 슬쩍 가린 머리카락이 바로 앞에 있으나 남자는 감히 손을 내밀어서 그것을 치울 수 없다.
“돌아가는 길에 황대, 녹대, 흑대, 백대에게 들러 무장승이 주고 가신 선물을 전해 줄래?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좋아.”
물기가 마르지 않은 손으로 남자의 두꺼운 가슴을 쓸어내린 여자는 내줄 생각도 없는 몸을 바짝 붙이고 애완동물에게 먹이를 던져 준다.
“이건 오늘 일을 잘 끝낸 상이야.”
자기보다 훨씬 큰 남자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기고는 그의 고개를 숙이게 하고 다른 남자와 겹쳤던 입술을 겹친다. 제천은 그제야 떨리는 손으로 자신에게 입을 맞추는 여인의 나체를 두 팔로 꽉 끌어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다. 끌어안은 채 조금 긴 입맞춤을 끝낸 공주는 미련도 없이 제천에게서 떨어졌으며 다시 복숭아가 떠다니는 향기로운 탕 안으로 몸을 숨겼다. 제천 역시 더는 미련을 가지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고 시종 하나 없는 욕실 속에서 바리공주는 조용히 몸을 담근 채 눈을 감았다.
‘피곤하군.’
단순히 유혹하며 놀아 주는 수준이지만 육체의 피로는 남는 법이니까. 하반신의 뻐근함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자니 피로가 풀리는 것과 반대로 이상하게 옛날 일이 떠오른다. 지금은 생각하기도 싫은 과거의 이야기가.
‘왜 자꾸 생각나는 건지. 좋은 일도 아닐 텐데.’
아직 그녀가 진짜 공주로 대접받기 전의 그 시절. 정확히 그녀가 자신이 공주라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던 시절.
“공주님. 바리공주님. 해가 지기 전에 들어오세요. 어두워지면 위험해요.”
제천의 부모는 그녀를 공주님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아들은 그냥 제천이라 부르면서 바리를 부를 때는 항상 공주님이라는 호칭을 붙여서, 그래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공주라 불리는 그 호칭에 의문을 느꼈다. 서책을 보면 공주는 왕과 왕비의 자식이 아닌가?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부모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왜 나를 계속 공주라고 부르는 것이냐?”
천상과 하계를 오갈 수 있는 입구인 주도섬. 그곳에 사는 자는 비리공덕 부부와 그 아들, 그리고 바리공주. 이렇게 4명이 전부였다. 어디에도 왕과 왕비는 없는데 공주라니? 어쩌다 가끔 입구를 오가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보기도 힘든 섬에서 공주라 불리는 호칭에 의문을 품은 것이 5살 때의 일이다. 그리고 비리공덕 부부는 그런 그녀에게 예를 갖추고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공주님은 천상의 불라국을 다스리는 오구대왕님과 길대부인 사이에서 태어나신 첫 번째 아이이십니다.”
그들은 공주의 부모가 아니었기에 바리는 비리공덕 부부에게 아버지나 어머니란 호칭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어린 소녀에게 예를 갖추고 그녀가 특별한 존재임을 알려 줬다. 하지만 왜 공주가 혼자 이런 곳에 있는 건지? 그게 이상하니까.
“그런데 어째서 나는 천상이 아닌 이곳에 있는 것이냐?”
그들은 그 질문에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서책을 찾아보았으며 타고난 신통력은 자라면 자랄수록 함께 성장했지만 바리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입구를 오가는 자들의 알 수 없는 눈빛을 받을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공주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들은 그녀를 볼 때면 신기하다는 눈빛, 불쌍하다는 눈빛, 그리고 아쉽다는 눈빛을 보내왔고 그것은 아주 가끔 비리공덕 부부가 보이는 눈빛과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