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뷰어

망나니의 잔인한 꽃

1화



사람을 무릎 꿇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퍽!

바로 폭력이다. 무릎을 차인 소년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상당한 고통에도 입술을 사리물고 신음 하나 흘리지 않은 소년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날카로운 시선에도 금발 고수머리의 소년은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네가 아직 덜 맞았지.”

“에드먼드.”

드라이칸이 이를 갈았다.

“내 이름 부르지 마렴.”

에드먼드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소매를 접어 올렸다. 드라이칸은 그가 때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몸이 굳었지만 억지로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긴장으로 굳었을 때 잘못 맞으면 뼈가 어디 하나 부러지는 수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최악이다.

“내가 분명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 나타나지 말라고 그랬을 텐데.”

벽에 기대 놓았던 지팡이를 든 에드먼드가 아무렇지 않게 드라이칸을 내리쳤다. 어깨를 때리는 타격감이 좋은지 에드먼드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드라이칸은 한쪽 어깨를 손으로 붙잡고 입술을 비틀었다. 불행히 제대로 맞았다.

“누군 네 친구 놈들에게 인사하고 싶은 줄 아냐?”

“드라이칸, 네놈은 온몸으로 천한 태생임을 알리고 다니는구나.”

퍽!

“바로!”

퍽!

“네 천박한!”

퍽!

“말투 때문에 말이다!”

지팡이에는 눈이 없다. 여기저기 내리치는 지팡이가 여린 피육을 뭉개는 소리를 냈다.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드라이칸은 진작 몸을 둥글게 말고 고통을 최소화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고작 대여섯 살 정도 많은 에드먼드는 그의 얼굴에는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평판을 중요시하는 탓에 혈육으로 알려진 자신과 엮여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영악하고 잔인한 나의 형, 에드먼드 하우어.

드라이칸은 바닥에 엎드린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에드먼드의 분이 풀릴 때까지 사정없이 내려치던 지팡이가 우뚝 멈추었다. 에드먼드가 지팡이를 바닥에 내던지고 구겨진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곧 완벽한 어린 신사의 모습을 갖춘 에드먼드가 마지막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기분이 풀렸는지 후, 가볍게 숨을 내쉬며 싱긋 웃는다.

에드먼드는 드라이칸의 좁은 방을 나서기 전, 쓰레기처럼 누워 있다 간신히 일어나려고 노력하는 드라이칸에게 툭 말을 던졌다.

“아버지가 오늘은 너도 파티에 데려간다 하셨으니 준비해.”

“……하, 나도?”

“그래. 아버지가 너도 필요하다고 하시더군. 그러니 창피스러운 꼴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

웬일이냐며 비웃는 드라이칸을 일별하는 에드먼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원했으면서 아닌 척하지 마라. 더 하찮아 보이니까.”

선명한 비웃음에 마음을 들킨 드라이칸의 한쪽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왔다. 우뚝 선 채 먼지로 범벅이 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밤 온몸에 피멍이 꽃처럼 필 테지만, 자신은 겉으로나마 멀쩡한 옷을 입고 하우어 가의 내놓은 삼남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신랄하게 비웃던 드라이칸은 곧 주먹을 쥐었다.

“……제길.”

무엇보다도 열 받는 것은 에드먼드의 말처럼 아버지가 자신을 찾는다는 것이 내심 기쁘다는 사실이다.



***



파티장은 뻔하다. 에드먼드는 아버지의 후계자로서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파티장을 활보할 것이고, 자신은 벽에 기대 선 채 아버지가 자신을 부르기만을 기다린다. 에드먼드는 하우어 가의 후계자로 인맥 관리가 필요하다고 치고, 자신은 왜 필요로 하시는 걸까? 벌써 몇 번 파티장에 따라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 에드먼드처럼 데리고 다니면서 다른 귀족들에게 인사를 시키는 것도 아닌데.

드라이칸은 목이 답답하여 셔츠의 반듯한 카라만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음울한 시선이 화려한 파티장으로 향했다. 다른 때와 달리 유독 젊은 청년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그중에는 드라이칸 또래의 어린 소년들도 있었다.

‘오늘이 무슨 파티랬지?’

“클로이트 백작은 어디 계시나?”

“곧 모습을 드러내실 겁니다.”

“백작께서 아주 흡족하시겠어. 레이디 클로이트가 벌써부터 뛰어난 기량을 보이고 있다니.”

근처에서 껄껄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귀족들의 모습에 드라이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클로이트.’

왜 젊은 남자들이 이렇게 많이 보이는지 알겠다.

데뷔탕트인 것이다.

“여러 대륙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고 합니다. 게다가 륜의 언어까지 공부하고 있다니, 능력이야 나무랄 데가 없죠.”

“역시 선조처럼 뛰어난 마법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겠군.”

“아직 마법적 능력은 보인 바 없다고 합니다만.”

“그래? 흠, 늦기는 하군. 그래도 마법으로 유명한 클로이트 가문이 아닌가! 본인도 마법사가 되길 희망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죠. 언젠가는 소식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렇겠지. 아, 마침 저기 보이는군.”

드라이칸은 무심코 귀족들이 가리키는 대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누군가 서 있었다. 클로이트의 직계를 위한 2층의 단상. 아마도 레이디 클로이트일 소녀가 오연히 선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라이칸은 저도 모르게 소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고작 몇 살이 많을 뿐이겠지만, 앳되어 보이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전혀 앳되지 않았다. 바닥에 끌리는 은색의 긴 드레스 자락과 하얀 얼굴, 날카로운 얼굴선. 드라이칸은 눈을 깜박였다. 소녀의 눈가가 부드러워졌다. 누군가와 인사하는 붉은 입술이 둥글게 휘어졌다. 그 순간, 어떤 충격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가 이름도 모르는 그녀를 눈에 담은 것은 찰나였다.

“드라이칸!”

하우어 백작이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정신을 차린 드라이칸은 자신의 발이 앞에 나가 있음을 확인했다. 뭐하려던 건가. 저 여자에게 다가가고 싶었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시선을 들자, 하우어 백작이 엄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어디 있었니. 찾았지 않느냐.”

“아버지.”

뜻밖의 반응에 드라이칸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버지가 자신을 이렇게 환대했던 적이 있었던가?

“소개할 사람이 있다.”

하우어 백작의 손에 끌려가며 드라이칸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터라 소녀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에 대해 궁금한데. 에드먼드와 또래인 것처럼 보이니, 그에게 물어볼까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에드먼드가 퍽이나 알려 주겠다. 아버지를 흘끔 보았다. 정말 클로이트라면 아버지는 알지 않을까.

“아버지…….”

“부인. 내 아들입니다.”

어느덧 두 사람은 목적지에 다다라 있었다. 드라이칸은 입을 다물었다. 백작이 그의 손을 끌고 온 곳에는 백작보다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이는 귀부인이 벨벳 소파에 앉아 있었다. 드라이칸은 영문을 몰라 백작의 뒤에 시립했다. 귀부인과 알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주고받던 백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드라이칸, 이리로 와라.”

보기 힘든 백작의 상냥한 미소에 드라이칸의 눈이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백작의 말을 거부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할 거야.

드라이칸은 답지 않게 얌전히 그의 말에 따랐다. 귀부인 앞에 서자, 그녀의 갈색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경험이 많은 사람들 특유의 깊은 눈동자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집요했다. 드라이칸은 순간적으로 어깨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불쾌해졌다.

“어떻습니까?”

알 수 없는 대화.

물건을 보는 것처럼 자신을 흘끗거리는 귀부인의 시선.

드라이칸은 백작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해 버렸다. 말을 듣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거야, 라고 생각했지만 드라이칸은 혐오감에 백작의 손을 뿌리쳤다. 발은 저절로 움직여서 그길로 뒤돌아 도망쳤다. 그 결과로 백작의 암묵적인 동의에 의해 드라이칸은 에드먼드에게 곤죽이 되도록 맞았지만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백작이 파티장에 저를 대동한다고 드라이칸이 기쁘게 생각하게 되는 일은 없었다. 부친에 대한 기대가 배신당한 충격에, 그는 그날 소녀를 보았던 사실도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루지에나.

여왕의 강대한 마법으로 번성할 국가.

오늘도 평화로운 루지에나의 백색 궁에는 여느 날처럼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기사의 정원이라 불리는 쉼터에는 일단의 기사들이 잔디에 드러누워 쉬고 있었는데, 드라이칸도 그중 하나였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검은 머리카락을 휘적거리며 드라이칸은 몸을 뒤척였다. 태양 빛이 눈을 찌르는 것이 영 거슬렸다. 따뜻한 기운은 좋아하면서도, 눈이 부신 것은 싫었다.

‘차양이라도 만들어 줬으면 좋겠군.’

쓸데없이 국고를 낭비할 생각이나 하며 기사들의 복지가 엉망이라고 투덜거린 드라이칸은 결국 나른하다 못해 늘어지는 몸을 일으켜 나무 그늘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몸은 몹시 게을러 보여 수준이 높다고 유명한 루지에나의 기사답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드라이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한낮의 고양이처럼 흩어진 기사들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누운 채로 주둥이만 나불대는 이들이 바로 백색 궁의 제3기사단 소속, 남들이 비웃기를 망나니 기사들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이봐, 그거 들었나?”

한가롭게 분수대의 물을 손으로 떠올리며 장난을 치던 폴이 드라이칸을 돌아보았다.

“뭐가?”

묻기는 물었다만 궁금하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떠들기 좋아하는 수다쟁이 폴은 드라이칸의 심드렁한 표정에도 아랑곳 않았다.

“오벨테가 제대로 된 영주를 맞았다더라고.”

“드디어? 차라리 다른 영지에 복속되었다면 좋았을 것을.”

다른 것은 별 볼 일 없어도 경제력 하나만큼은 좋은 영지가 아니었던가. 오벨테를 탐내는 가문 중에 하우어 가문도 있었다는 것을 상기한 드라이칸은 아쉬워할 에드먼드를 떠올리고 아쉬운 듯 즐거운 듯 모호한 얼굴로 어깨를 떨었다.

“물론 혼란이 계속되었으면 여왕님이 허하셨겠지만, 다행히도 능력 있는 자가 빠르게 영지를 정비 중이라네.”

“아아.”

폴은 그 새로운 영주라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드라이칸은 아니었다. 그곳은 너무 멀었고, 가문과 관련이 있지 않은 이상 오벨테의 상황이 그에게 이득이 되어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드라이칸은 자신과 관련되지 않은 것에까지 관심을 나눠 줄 정도로 세상사에 너그럽지 못했다.

“오벨테에도 이제 마법사들을 배치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전 영주들은 마법사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동태를 살피는 것도 쉽지가 않았잖아. 이제 새 영주가 들어섰으니 교류도 활발해지지 않겠나?”

“폴, 그만 관심 끄지 그러나.”

태양 아래에 드러누워 햇빛을 직격으로 받고 있던 사를로테가 쯧, 혀를 찼다.

“그들이 폐하의 명을 거역한 적은 없었잖아. 그렇지?”

“그건 그렇지만.”

폴이 뭐라고 더 대꾸하려 들자 어허, 못마땅한 얼굴로 말을 막았다.

“그럼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고. 내 평생 오벨테에 천상의 미녀가 나왔다는 소리도 못 들어 봤으니.”

사를로테가 연극이라도 하는 듯이 손을 가슴에, 다른 한 손은 가볍게 하늘로 뻗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