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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미녀가 나지 않는 땅, 절대로 이로운 땅이 될 수 없으리니.”
드라이칸이 킬킬대며 명언이라고 허벅지를 쳤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폴이 말이 안 통하는 친구들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폴도 여자라면 정신을 못 차리고 주머니까지 통째로 털리는 인종이었다. 드라이칸이 나른한 얼굴로 얌전한 체하는 그를 비웃었다.
“이참에 폴 네 여자 얘기나 해 봐.”
“무슨 여자?”
“또 모르는 척하려는 건가?”
사를로테가 누워 있던 자세 그대로 고개를 틀어 폴을 바라보았다. 빤한 시선에 폴이 움찔한 얼굴로 딴청을 피웠다.
“누가 네 여자를 건들기라도 한다나.”
“너, 너 이 자식.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냐!”
역시 여자 얘기에는 점잖은 척하던 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새가슴이라고 이죽거리는 사를로테에게 돌이라도 던질 요량으로 폴이 분개했다. 양심에 찔리는 기색도 없이 사를로테가 어깨를 으쓱였다.
“뭘?”
“마를리나를 달의 마지막 날에 네놈의 더러운 집에 데려갔다는 것을 모를 줄 알아?”
“폴. 너무 쩨쩨하게 굴지 말라고. 그 여자 입으로 직전 너랑 별 사이 아니라는 확답을 받아 냈단 말일세.”
“침대에서 받아 냈겠지!”
씨근덕거리는 폴이 한참이 지나도 수그러들 기색을 보이지 않자 사를로테가 한발 물러섰다.
“더 묻지 않을 테니 돌은 그만 찾게. 정말로 내 머리를 깨려고 그러나?”
소란에 잠을 자는 것을 포기한 드라이칸은 폴이 고민하다가 돌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 피식거렸다. 마를리나 전에는, 제시라는 여자였던가? 그 여자도 사를로테의 꾐에 넘어갔던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여자였던 것 같기도 하고. 확실한 것은 다 폴의 여자였다는 것이다.
돌을 내려놓은 것을 후회할 텐데, 드라이칸은 폴이 알았다면 더 격분할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망나니라 불리는 그라도 기사의 정원에 피가 흩뿌려지는 꼴은 피하고 싶었다. 비린내를 맡으며 편히 쉴 수는 없을 테니.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드라이칸은 코를 실룩이며 바람에 섞여 흘러들어 오는 향기를 맡았다. 곧이어 꺄르르,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드레스를 입은 한 무리의 시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짜 맞춘 것처럼 하얀 계통의 드레스를 입은 시녀들은 고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는지 왕궁에서의 엄격한 얼굴보다는 다소 풀어진 표정이었다.
“뭐야.”
“누구야?”
기가 막히게 여자 냄새를 맡은 기사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다. 드라이칸들의 떠드는 소리에도 코를 도롱도롱 골던 마켈라 단장은 아예 완전히 일어날 기세였다.
한편 시녀들은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곳에서 기사들이 튀어나오자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을 했다. 땅에 붙어 있던 기사들이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에 아무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기도 했고, 본래 이 시간은 기사들의 훈련 시간인지라 으레 아무도 없겠거니 생각했던 탓이다.
“엘레나다.”
드라이칸은 폴이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꼴이 누가 들으면 애인이라도 만난 것 같겠다. 빈정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엘레나 클로이트.
하얀 여왕을 모시는 가장 아름다운 수석 시녀. 왕궁의 시녀들은 다른 귀족 가문들의 시녀들과는 그 의미가 달랐다. 모두들 고위 귀족의 영애들인지라 기사들이 함부로 수작을 걸 수도 없는 대상이었다. 그중에서도 수석 시녀인 엘레나 클로이트는 클로이트 백작 가의 금지옥엽 장녀다.
다른 딸들도 아니고 첫째 딸이 어째서 왕궁의 시녀로 있냐는 것은 그녀를 아는 사람들의 공통된 질문이었다. 왕궁의 시녀는 여왕과의 친분을 돈독히 할 수 있고, 좋은 혼처를 잡을 수 있는 자리. 고위 귀족이라도 있기에 부족함이 있는 곳은 아니었으나 또한 몇 년씩이나 있을 필요 또한 없었다. 다른 영애들과 달리 혼기가 찬 나이인데도 혼처를 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역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평온해 보이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을 것이다. 결혼을 하기 싫어해서 왕궁에 있는 것이다. 왕궁에 좋아하는 사내가 있다 등등. 엘레나 클로이트에 대한 추측이 분분하지만 사실로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여왕의 충성스러운 시녀라는 것, 아주 유능하다는 것, 차가운 성격으로 여왕을 제외한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드라이칸이 아는 것 역시 그 정도였다.
“실례했습니다.”
예상 못한 상황에 내려앉은 정적을 깬 것은 엘레나였다. 기분이 상했는가? 기사들의 얼굴에 언뜻 초조함이 어렸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언뜻 싸늘한 기색까지 감돌았다.
백색 궁의 얼음꽃.
감히 여왕을 꽃이라 지칭할 수 없는 루지에나의 왕궁에서 유일하게 꽃의 이름을 달고 있는 여자였다. 조각한 것처럼 매끈한 입술 끝에서 튀어나오는 목소리 역시 서늘했다. 긴 속눈썹을 내리까는 엘레나의 얼굴에 기사들의 뚫어질 듯한 시선이 박혔다. 이글거리는 사내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엘레나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저…….”
평소에도 공공연히 엘레나를 흠모한다고 말하고 다녔던 마켈라 단장이 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보지 못한 것처럼 엘레나는 가타부타 말없이 몸을 돌렸다. 펄럭이는 드레스 자락이라도 붙잡겠다는 듯 손을 뻗는 단장의 꼴이 가련하기 짝이 없어 드라이칸의 입꼬리가 심술궂게 비틀렸다.
기사들 중에는 웃통을 벗고 있는 자도 있었다. 정숙해야 할 왕궁에서 훤히 드러난 사내의 상체에 어머, 탄성을 지르며 입을 가리던 시녀들도 엘레나를 따라 드레스를 여미고 돌아섰다.
백색 궁의 시녀들은 유능하기로 유명한 여자들이었지만, 그것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우아한 백조 사이에도 못난이 오리가 튀어나올 수 있는 것처럼 유능한 집단이라고 모두가 자로 잰 것처럼 딱딱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백색 궁의 제3기사단처럼 시녀들 가운데서도 남다른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 증거로, 엘레나를 따라가기 전 몇 명의 시녀들은 키득거리며 웃통을 벗고 있는 기사들을 훔쳐보았다.
드라이칸은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여자가 자신에게 은밀한 시선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다. 지난번 에블란 가의 파티에서 보았었나? 경비를 서면서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누가 심심해 보인다고 제게 간 크게 술을 건넸던 것 같기도 하다. 원래라면 그 역시 눈짓 따위로 답해 주었겠지만 지금은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실망한 시녀가 곧 새침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녀까지 사라지자 정원에 가득했던 향기 역시 서서히 가라앉았다.
사를로테가 아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엘레나 클로이트. 언제 봐도 가차 없는 여자야.”
시녀들이 사라진 가운데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마켈라 단장과 폴이었다. 사를로테의 말에 정신이 든 그들의 얼굴에 공통된 표정이 떠오른 것을 본 드라이칸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큭큭거리며 웃는 그를 못마땅하게 노려본 마켈라 단장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 한 마디 섞지 못한 상황에 아쉬움이 지나쳐 분기탱천한 기세였다.
“조단! 창피하게 웃통은 왜 벗고 난리야?”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에 조단이 억울한 얼굴로 항의했다.
“난들 여자들이 올 줄 알았냐고요!”
“클로이트 양이 얼마나 당황하셨는지 인사도 안 하고 돌아가는 걸 보지 못했나?!”
당황해서라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드라이칸은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그는 엘레나가 당황하기는커녕 무표정하던 눈이 싸늘해지던 것을 목도했다. 마켈라 단장은 그녀가 그대로 돌아간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 시간에 훈련은 안 하고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고, 왕궁에 사람이 아니라 덩치 큰 고양이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는 말을 들었으면 여린 마음에 이틀은 시름시름 앓았을 터였다.
애초에 날이 너무 좋으니 육체 훈련보다는 마음의 훈련을 하자고 훈련 취소를 외친 사람도 마켈라 단장이었다.
“단장님, 보기만 하지 마시고 한 번 다가가기라도 해 보시죠.”
바락거리며 조단을 잡고 있는 마켈라 단장을 말린 것은 사를로테였다. 단장을 위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결코 성공하리라 생각하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표정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 사를로테의 의중을 마켈라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말 몇 마디로 그쳤던 폴과 달리 주변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를 손에 잡히는 즉시 냅다 던졌다.
휙, 재빨리 목을 기울여 피한 돌멩이가 그 뒤의 드라이칸에게까지 날아갔다. 손을 뻗어 돌멩이를 낚아챈 드라이칸이 마켈라 단장에게로 돌멩이를 되돌렸다. 사를로테의 머리 위로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오는 돌멩이를 미처 보지 못한 마켈라 단장은 이마로 자신이 보낸 돌멩이를 받아들였다.
그가 이마를 부여잡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드라이칸 하우어!”
“단장은 훈련이나 더 하셔야겠습니다. 그것 하나 보지 못하시고.”
“젠장.”
얄미운 자식이라고 중얼거렸으나 그것이 끝이었다. 드라이칸 하우어는 막 대하기에는 꺼림칙한 놈이었다. 만약 아까 던진 돌멩이를 저가 맞았더라면 답례로 돌덩이를 되돌릴 인간이다. 자신의 수하로 있지만 마음대로 다룰 수도 없어 골머리만 썩었다.
마켈라는 풀리지 않은 분을 풀 타깃을 정했다. 그건 자지러질 듯 웃고 있는 사를로테였다. 신중하고 신속하게 돌멩이를 던지자, 웃느라 정신이 없었던 사를로테도 이번에는 피하지 못해서 마켈라처럼 이마로 돌멩이를 받았다. 똑같이 이마가 벌겋게 된 두 사람은 기사가 아니라 어린 사내애들 같았다. 그 우스운 꼴을 기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비웃었다.
“그나저나 클로이트 양은 정말로 결혼하지 않을 생각인 건가?”
“언젠가는 하겠지.”
폴의 중얼거림에 사를로테가 산뜻하게 대꾸했다.
“그게 너는 아닐 뿐.”
자존심을 사뿐히 밟아 대는 말투에 폴은 눈을 홉떴다.
“사를로테! 너라고 다를 줄 알아?”
“나는 가능성이 있기는 하겠지만, 자네는 아예 없지 않나.”
“……무슨 소리야?
의미심장한 말에 폴이 방어적인 태도로 되물었다.
‘저 자식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를로테는 다른 기사들의 시선까지 자신에게로 모였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실제로 청혼서를 넣어 거절당한 자네보다야, 청혼서를 보내지 않은 내가 낫지 않겠나?”
“너, 너 그걸 어떻게……!”
폴이 경악했다. 극렬한 태도에 그 말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된 기사들이 양심도 없다는 얼굴로 폴을 바라보았다. 말은 없지만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뜻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폴은 얼굴을 붉혔다. 꽤나 괜찮은 가문에, 왕궁 기사라는 직함도 멋들어졌으나 결정적으로 폴은 그릇이 작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마켈라가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듯 거세게 혀를 찼다.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한테나 충실해라, 폴. 자네가 감당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니까.”
거만한 태도에 폴의 광대가 붉게 달아올랐다.
“생각도 없었거든요. 지금 여자 친구를 사랑한단 말입니다! 그러는 단장은요. 청혼서 한 번 보내 보시죠? 용기 없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우습습니다.”
폴이 얼굴을 구겼다.
“그 말은 흘려들을 수 없는데, 그래.”
사를로테가 반박했다. 용기 하면 나 아닌가.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인 사를로테가 말없는 드라이칸을 끌어들였다.
“미녀가 나지 않는 땅, 절대로 이로운 땅이 될 수 없으리니.”
드라이칸이 킬킬대며 명언이라고 허벅지를 쳤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폴이 말이 안 통하는 친구들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폴도 여자라면 정신을 못 차리고 주머니까지 통째로 털리는 인종이었다. 드라이칸이 나른한 얼굴로 얌전한 체하는 그를 비웃었다.
“이참에 폴 네 여자 얘기나 해 봐.”
“무슨 여자?”
“또 모르는 척하려는 건가?”
사를로테가 누워 있던 자세 그대로 고개를 틀어 폴을 바라보았다. 빤한 시선에 폴이 움찔한 얼굴로 딴청을 피웠다.
“누가 네 여자를 건들기라도 한다나.”
“너, 너 이 자식.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냐!”
역시 여자 얘기에는 점잖은 척하던 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새가슴이라고 이죽거리는 사를로테에게 돌이라도 던질 요량으로 폴이 분개했다. 양심에 찔리는 기색도 없이 사를로테가 어깨를 으쓱였다.
“뭘?”
“마를리나를 달의 마지막 날에 네놈의 더러운 집에 데려갔다는 것을 모를 줄 알아?”
“폴. 너무 쩨쩨하게 굴지 말라고. 그 여자 입으로 직전 너랑 별 사이 아니라는 확답을 받아 냈단 말일세.”
“침대에서 받아 냈겠지!”
씨근덕거리는 폴이 한참이 지나도 수그러들 기색을 보이지 않자 사를로테가 한발 물러섰다.
“더 묻지 않을 테니 돌은 그만 찾게. 정말로 내 머리를 깨려고 그러나?”
소란에 잠을 자는 것을 포기한 드라이칸은 폴이 고민하다가 돌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 피식거렸다. 마를리나 전에는, 제시라는 여자였던가? 그 여자도 사를로테의 꾐에 넘어갔던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여자였던 것 같기도 하고. 확실한 것은 다 폴의 여자였다는 것이다.
돌을 내려놓은 것을 후회할 텐데, 드라이칸은 폴이 알았다면 더 격분할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망나니라 불리는 그라도 기사의 정원에 피가 흩뿌려지는 꼴은 피하고 싶었다. 비린내를 맡으며 편히 쉴 수는 없을 테니.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드라이칸은 코를 실룩이며 바람에 섞여 흘러들어 오는 향기를 맡았다. 곧이어 꺄르르,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드레스를 입은 한 무리의 시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짜 맞춘 것처럼 하얀 계통의 드레스를 입은 시녀들은 고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는지 왕궁에서의 엄격한 얼굴보다는 다소 풀어진 표정이었다.
“뭐야.”
“누구야?”
기가 막히게 여자 냄새를 맡은 기사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다. 드라이칸들의 떠드는 소리에도 코를 도롱도롱 골던 마켈라 단장은 아예 완전히 일어날 기세였다.
한편 시녀들은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곳에서 기사들이 튀어나오자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을 했다. 땅에 붙어 있던 기사들이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에 아무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기도 했고, 본래 이 시간은 기사들의 훈련 시간인지라 으레 아무도 없겠거니 생각했던 탓이다.
“엘레나다.”
드라이칸은 폴이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꼴이 누가 들으면 애인이라도 만난 것 같겠다. 빈정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엘레나 클로이트.
하얀 여왕을 모시는 가장 아름다운 수석 시녀. 왕궁의 시녀들은 다른 귀족 가문들의 시녀들과는 그 의미가 달랐다. 모두들 고위 귀족의 영애들인지라 기사들이 함부로 수작을 걸 수도 없는 대상이었다. 그중에서도 수석 시녀인 엘레나 클로이트는 클로이트 백작 가의 금지옥엽 장녀다.
다른 딸들도 아니고 첫째 딸이 어째서 왕궁의 시녀로 있냐는 것은 그녀를 아는 사람들의 공통된 질문이었다. 왕궁의 시녀는 여왕과의 친분을 돈독히 할 수 있고, 좋은 혼처를 잡을 수 있는 자리. 고위 귀족이라도 있기에 부족함이 있는 곳은 아니었으나 또한 몇 년씩이나 있을 필요 또한 없었다. 다른 영애들과 달리 혼기가 찬 나이인데도 혼처를 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역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평온해 보이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을 것이다. 결혼을 하기 싫어해서 왕궁에 있는 것이다. 왕궁에 좋아하는 사내가 있다 등등. 엘레나 클로이트에 대한 추측이 분분하지만 사실로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여왕의 충성스러운 시녀라는 것, 아주 유능하다는 것, 차가운 성격으로 여왕을 제외한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드라이칸이 아는 것 역시 그 정도였다.
“실례했습니다.”
예상 못한 상황에 내려앉은 정적을 깬 것은 엘레나였다. 기분이 상했는가? 기사들의 얼굴에 언뜻 초조함이 어렸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언뜻 싸늘한 기색까지 감돌았다.
백색 궁의 얼음꽃.
감히 여왕을 꽃이라 지칭할 수 없는 루지에나의 왕궁에서 유일하게 꽃의 이름을 달고 있는 여자였다. 조각한 것처럼 매끈한 입술 끝에서 튀어나오는 목소리 역시 서늘했다. 긴 속눈썹을 내리까는 엘레나의 얼굴에 기사들의 뚫어질 듯한 시선이 박혔다. 이글거리는 사내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엘레나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저…….”
평소에도 공공연히 엘레나를 흠모한다고 말하고 다녔던 마켈라 단장이 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보지 못한 것처럼 엘레나는 가타부타 말없이 몸을 돌렸다. 펄럭이는 드레스 자락이라도 붙잡겠다는 듯 손을 뻗는 단장의 꼴이 가련하기 짝이 없어 드라이칸의 입꼬리가 심술궂게 비틀렸다.
기사들 중에는 웃통을 벗고 있는 자도 있었다. 정숙해야 할 왕궁에서 훤히 드러난 사내의 상체에 어머, 탄성을 지르며 입을 가리던 시녀들도 엘레나를 따라 드레스를 여미고 돌아섰다.
백색 궁의 시녀들은 유능하기로 유명한 여자들이었지만, 그것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우아한 백조 사이에도 못난이 오리가 튀어나올 수 있는 것처럼 유능한 집단이라고 모두가 자로 잰 것처럼 딱딱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백색 궁의 제3기사단처럼 시녀들 가운데서도 남다른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 증거로, 엘레나를 따라가기 전 몇 명의 시녀들은 키득거리며 웃통을 벗고 있는 기사들을 훔쳐보았다.
드라이칸은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여자가 자신에게 은밀한 시선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다. 지난번 에블란 가의 파티에서 보았었나? 경비를 서면서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누가 심심해 보인다고 제게 간 크게 술을 건넸던 것 같기도 하다. 원래라면 그 역시 눈짓 따위로 답해 주었겠지만 지금은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실망한 시녀가 곧 새침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녀까지 사라지자 정원에 가득했던 향기 역시 서서히 가라앉았다.
사를로테가 아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엘레나 클로이트. 언제 봐도 가차 없는 여자야.”
시녀들이 사라진 가운데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마켈라 단장과 폴이었다. 사를로테의 말에 정신이 든 그들의 얼굴에 공통된 표정이 떠오른 것을 본 드라이칸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큭큭거리며 웃는 그를 못마땅하게 노려본 마켈라 단장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 한 마디 섞지 못한 상황에 아쉬움이 지나쳐 분기탱천한 기세였다.
“조단! 창피하게 웃통은 왜 벗고 난리야?”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에 조단이 억울한 얼굴로 항의했다.
“난들 여자들이 올 줄 알았냐고요!”
“클로이트 양이 얼마나 당황하셨는지 인사도 안 하고 돌아가는 걸 보지 못했나?!”
당황해서라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드라이칸은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그는 엘레나가 당황하기는커녕 무표정하던 눈이 싸늘해지던 것을 목도했다. 마켈라 단장은 그녀가 그대로 돌아간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 시간에 훈련은 안 하고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고, 왕궁에 사람이 아니라 덩치 큰 고양이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는 말을 들었으면 여린 마음에 이틀은 시름시름 앓았을 터였다.
애초에 날이 너무 좋으니 육체 훈련보다는 마음의 훈련을 하자고 훈련 취소를 외친 사람도 마켈라 단장이었다.
“단장님, 보기만 하지 마시고 한 번 다가가기라도 해 보시죠.”
바락거리며 조단을 잡고 있는 마켈라 단장을 말린 것은 사를로테였다. 단장을 위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결코 성공하리라 생각하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표정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 사를로테의 의중을 마켈라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말 몇 마디로 그쳤던 폴과 달리 주변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를 손에 잡히는 즉시 냅다 던졌다.
휙, 재빨리 목을 기울여 피한 돌멩이가 그 뒤의 드라이칸에게까지 날아갔다. 손을 뻗어 돌멩이를 낚아챈 드라이칸이 마켈라 단장에게로 돌멩이를 되돌렸다. 사를로테의 머리 위로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오는 돌멩이를 미처 보지 못한 마켈라 단장은 이마로 자신이 보낸 돌멩이를 받아들였다.
그가 이마를 부여잡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드라이칸 하우어!”
“단장은 훈련이나 더 하셔야겠습니다. 그것 하나 보지 못하시고.”
“젠장.”
얄미운 자식이라고 중얼거렸으나 그것이 끝이었다. 드라이칸 하우어는 막 대하기에는 꺼림칙한 놈이었다. 만약 아까 던진 돌멩이를 저가 맞았더라면 답례로 돌덩이를 되돌릴 인간이다. 자신의 수하로 있지만 마음대로 다룰 수도 없어 골머리만 썩었다.
마켈라는 풀리지 않은 분을 풀 타깃을 정했다. 그건 자지러질 듯 웃고 있는 사를로테였다. 신중하고 신속하게 돌멩이를 던지자, 웃느라 정신이 없었던 사를로테도 이번에는 피하지 못해서 마켈라처럼 이마로 돌멩이를 받았다. 똑같이 이마가 벌겋게 된 두 사람은 기사가 아니라 어린 사내애들 같았다. 그 우스운 꼴을 기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비웃었다.
“그나저나 클로이트 양은 정말로 결혼하지 않을 생각인 건가?”
“언젠가는 하겠지.”
폴의 중얼거림에 사를로테가 산뜻하게 대꾸했다.
“그게 너는 아닐 뿐.”
자존심을 사뿐히 밟아 대는 말투에 폴은 눈을 홉떴다.
“사를로테! 너라고 다를 줄 알아?”
“나는 가능성이 있기는 하겠지만, 자네는 아예 없지 않나.”
“……무슨 소리야?
의미심장한 말에 폴이 방어적인 태도로 되물었다.
‘저 자식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를로테는 다른 기사들의 시선까지 자신에게로 모였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실제로 청혼서를 넣어 거절당한 자네보다야, 청혼서를 보내지 않은 내가 낫지 않겠나?”
“너, 너 그걸 어떻게……!”
폴이 경악했다. 극렬한 태도에 그 말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된 기사들이 양심도 없다는 얼굴로 폴을 바라보았다. 말은 없지만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뜻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폴은 얼굴을 붉혔다. 꽤나 괜찮은 가문에, 왕궁 기사라는 직함도 멋들어졌으나 결정적으로 폴은 그릇이 작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마켈라가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듯 거세게 혀를 찼다.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한테나 충실해라, 폴. 자네가 감당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니까.”
거만한 태도에 폴의 광대가 붉게 달아올랐다.
“생각도 없었거든요. 지금 여자 친구를 사랑한단 말입니다! 그러는 단장은요. 청혼서 한 번 보내 보시죠? 용기 없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우습습니다.”
폴이 얼굴을 구겼다.
“그 말은 흘려들을 수 없는데, 그래.”
사를로테가 반박했다. 용기 하면 나 아닌가.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인 사를로테가 말없는 드라이칸을 끌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