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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드라이칸, 어떤가? 솔직히 자네라면 호승심이 돋을 것 같은데.”
대충 그가 할 말을 짐작했지만 드라이칸은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누가 저 얼음꽃을 녹이는지 해 보잔 말일세.”
“관심 없어.”
“으응?”
사를로테가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를로테의 얼빠진 표정에 드라이칸이 고개를 돌렸다.
“왕궁 최고의 미녀가 근처에 있는데 관심이 없다니, 자네 정말 내가 아는 드라이칸 하우어가 맞는 건가?”
“살랑거리지 않는 여자는 피곤해서 싫어.”
“자네가 아무리 우리 기사단에 늦게 들어왔다지만, 그래도 아직 엘레나 클로이트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닌가. 지혜로 유명한 클로이트 백작 가의 금지옥엽일세! 어렸을 때부터 총명한 두뇌와 아름다운 외모로 따를 자가 없었다는, 이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최고 미녀!”
“언제부터 그렇게 유치해졌어?”
드라이칸의 질린 얼굴에 과장되게 손을 펼쳤던 사를로테의 얼굴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아니, 원상태로 돌아왔다는 말은 어폐가 있었다. 눈썹 끝을 올리고 입술을 실룩거리는 얼굴은 이전보다 보기가 괴로웠다.
음흉한 표정으로 사를로테가 허공에서 손을 주물럭거렸다. 마치 보이지 않지만 실제 있는 것을 가늠하는 것처럼 오묘한 손놀림이었다.
“아무도 꺾지 못했다는 꽃이 아닌가. 그 속도 겉모양처럼 훌륭할지 궁금해서 미쳐 버리겠단 말이네!”
“너 이놈, 감히 클로이트 양에게 그 무슨 망발이냐!”
기겁한 마켈라가 던지는 돌멩이에도 사를로테의 요망한 주둥이는 쉬지 않았다.
“단장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얼굴이 붉어진 마켈라가 사를로테를 손가락질했다.
“나는 클로이트 양을 그런 대상으로 본 적이 없어!”
“그럴 리……. 여자 손 하나 잘 잡지 못하는 단장은 그럴 수도 있겠네요.”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사를로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장이 몸을 일으켜 뛰어오려는 찰나 사를로테의 말이 단장의 걸음을 막았다.
“단장, 내가 일전에 도도하다고 알려진 제 고향의 꽃을 꺾었다는 얘길 했던가요?”
“……아니.”
“그 여인의 가시도 아주 날카로웠습니다. 이 내가 가벼이 접근했다가 손가락을 베일 정도로요.”
비장한 얼굴로 내뱉는 말에 기사들의 시선이 쏠렸다. 마켈라가 이야기를 기다리듯 자리에 앉았다. 흘끗 그것을 확인한 사를로테가 씨익 미소 짓고 말을 이었다.
“몇 날 며칠을 걸려 겨우 그 여인의 하룻밤을 취했습니다만…….”
“다만?”
“아름다운 외양과 달리 그 안은 그렇게 달콤하지가 못하더군요.”
사를로테의 침통한 얼굴에 마켈라가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미숙한 여인이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성심을 다해 그 안을 개발해 주었습니다만, 여인의 재능이 출중하지 않아 한계가 있었습니다. 엘레나 클로이트를 봤을 때 그 여인이 생각나더군요. 클로이트 양은 어떨까요. 과연 그 안쪽도 달콤한 외모처럼 훌륭한 꿀이 흐르고 있는지, 아니면 그 메마른 성격처럼 삭막한 동굴을 가지고 있을지.”
사를로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기사들을 상상으로 인도했다. 저마다 무언가를 떠올리는지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본다.
드라이칸의 눈썹이 비뚤게 휘어졌다. 사뭇 불쾌한 얼굴이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저 자식은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기사가 되지 않았으면 떠돌이 약장수가 되어 사기나 치고 다녔을 것이다. 별 웃긴 꼴을 다 보겠다는 듯 드라이칸이 눈살을 찌푸리자 그를 돌아본 사를로테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어떤가, 드라이칸? 이제 좀 구미가 당기지 않는가?”
“쯧, 입은 그만 단련하고 훈련을 열심히 해야겠어.”
“갑자기 웬 훈련? 자네가 그런 말을 하니 우습구먼.”
사를로테가 파하, 웃었다. 자신이 이런저런 핑계로 훈련을 빼먹는다면 드라이칸은 당당히 훈련에 나오지 않기로 유명한 한량이었다. 그의 비웃음에 드라이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그 입이 썰릴 것 같군.”
휴식을 다 취한 드라이칸이 몸을 일으켰다.
“가려고? 난 좀 더 있어야겠네. 잘 가게나.”
사를로테가 산뜻하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다시 햇볕을 받기 위해 누우려고 했다.
“윽!”
등의 격통에 뒤로 눕는 대신 앞으로 엎어진 사를로테가 홱 고개를 돌렸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드라이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찌릿찌릿한 허리를 부여잡고 있는 사이 드라이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를로테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폴을 바라보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왜 저러지?”
“난들 알아! 넌 잠이나 자.”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은 폴이 분수대의 물을 튕겼다.
***
여왕의 거처를 둘러싼 원형 회랑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왕의 궁과 정원, 거기에 더해진 회랑이다. 사시사철 지는 법이 없는 정원의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와 코를 스친다. 드라이칸은 이 간질간질한 향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왕궁을 방문하는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회랑을 걸어 보지 않고는 왕궁에서 나가지 않을 정도였다.
예전에 잠깐 꼬셨던 어떤 시녀는 황홀한 표정으로 정원의 향을 극찬하곤 했다. 여왕 폐하가 굽어보는 느낌이라고 꽃 하나하나를 아주 신중히 보살폈던 여자였다.
‘여왕의 향이라.’
여자를 유혹하는 법이나 알지 세심한 구석은 부족한 드라이칸은 도통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정원을 아끼는 만큼 그 향이 옮아올 수는 있지만, 한낱 식물의 향기를 두고 여왕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우스웠다.
여왕 폐하는 폐하이고, 꽃은 그냥 꽃이다.
그렇게 말하자 사를로테는 탄식을 뱉으며 그를 뇌까지 돌로 만들어진 남자라고 혹평을 했다. 섬세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이 없는 것 같다나.
─어느 여자든 자네와 짧은 사랑의 기쁨을 나눌 수는 있어도 결혼을 하진 않을 걸세. 감성적이지 못한 남자는 여성과 깊은 마음을 나눌 수 없는 법이지.
쯧쯧 혀를 차며 건방진 소리를 늘어놓았다.
드라이칸은 코웃음을 쳤다.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으나 거슬리기는 했다.
─짧은 사랑의 기쁨 정도는 나누겠지만 그 이상은.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그 이상엔 뭐가 있는데.
뚜벅뚜벅.
발소리가 둔탁해졌다. 힐끗 앞에서 걸어가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걸음 소리를 죽이지도 않았건만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는 여자. 드라이칸의 눈이 여자를 찬찬히 훑었다. 풀어 내린 검푸른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조약돌처럼 반짝였다. 둔한 그의 눈에도 퍽 아름다웠다.
시선이 핥듯이 엘레나를 쓸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하얀 목이 언뜻 드러난다. 속이 근질거렸다. 하얀 피부에는 언제나 붉은 키스 마크를 남기고 싶었다. 저가 이리 꼬인 인간이었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점차, 탄력을 받은 걸음이 빨라졌다.
녹지 않는 얼음꽃.
드라이칸은 남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찬양과 아부를 섞어 별명을 짓는 것을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엘레나 클로이트에 관해서만큼은 그다지 이견이 없다. 깨지기 쉬운 얼음으로 칭해지기에는 단어만큼의 연약한 느낌은 없을지라도.
엘레나의 걸음걸이는 조금 독특했다. 시녀들의 우아하고 살랑거리는 걸음에 더해 기사의 것처럼 힘센 느낌이 난다. 거기에는 그녀의 자세가 한몫을 차지했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는 부러지지 않는 검처럼 견고해서 사내의 손길을 불허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로 저런 여자는 취향이 아니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여자는 피곤하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드라이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자신을 깨달은 탓이다.
거의 소리를 내지 않는 조용하고도 정확한 발걸음.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닿을락 말락했다. 소리 없이 온몸으로 존재감을 뿜어내는 여자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엘레나 클로이트.”
나직이 읊조렸다. 작은 소리였으나 텅 빈 회랑에서는 몇 배로 크게 들렸다. 엘레나가 멈칫하는 사이 성큼 다가갔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키가 큰 드라이칸이 뒤에 서자 엘레나의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풍성한 스커트 아래로 감추어진 탄력 있는 엉덩이. 드라이칸이 가볍게 선 것과는 반대로 빠져나갈 수 없게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늘씬한 몸이 드라이칸의 품에 안겼다. 제3기사단의 기사들이 보았더라면 감히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기함을 터뜨릴 광경이었다. 당장에 돌아서 따귀를 날릴 것 같다는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반응은 잠잠했다. 그린 듯한 입술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라이칸 하우어 경.”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달큼한 향기에 눈이 감겼다. 그의 기분을 깨뜨리는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경박하게 굴지 말아요.”
“차갑게 굴지 마, 엘레나.”
공개된 곳에서 접촉하는 것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드라이칸은 더욱 그녀를 가까이 끌어안았다. 엘레나가 한숨을 쉬었다. 작은 그 소리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아까 말이야.”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가 난 건가?”
엘레나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제3기사단이 망나니 기사단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아요. 새삼스럽게 화를 낼 일은 아니죠.”
“눈으로는 화를 냈잖아. 마치 쓰레기가 된 것 같았다구.”
“그렇게 천박하게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어쨌든.”
아무렴 어떻겠냐고 어깨를 으쓱였다.
“폐하의 기사단으로서 그 위명에 먹칠은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네요.”
“그래도 실적은 다른 기사단에 뒤지지 않는다고.”
“훈련까지 열심히 하면 더 뛰어나지겠죠.”
“나한테 기대하고 있는 거야?”
드라이칸이 능글맞게 웃자 엘레나는 말이 없었다. 긍정이 아니라 무시하는 거다. 어떻게 얘기가 그렇게 흘러가냐는 의문도 없었다. 그녀는 시답잖은 말에는 굳이 상대할 필요 없다는 것처럼 입을 다물곤 했다.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우어 가문의 셋째 아들로서 머리 좋은 장남과 차남에 비해 그다지 대우 받지 못하는 위치였으나, 누구도 그를 업신여기진 못했다. 큰 키, 넓게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가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갖게 했다.
성질은 또 어떠한가. 수틀리면 아래위 구분이 없어지는 더러운 성질머리로 이미 옛적에 단장의 분노를 산 몸이다. 내심 그를 무시하는 이들도 그와 시비가 붙을까 피했을지언정 대놓고 무시한 적은 없었다. 때문에 이런 적나라한 무시는 매우 오랜만이었다.
드라이칸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몇 마디 말을 던지려다 포기하고 허리를 가볍게 튕겼다. 그의 관심은 혀의 현란한 움직임보다는 뜨거운 하체에 있었다.
엉덩이에 맞닿은 앞섶이 그 위를 문질렀다. 드라이칸은 얼굴을 구기고 작게 욕설을 씹었다.
빌어먹을 드레스. 쓸데없이 천만 많이 잡아먹는 쓸모없는 옷이다. 몇 겹으로 만들어진 탓에 그녀의 엉덩이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를 감쌌던 손을 내려 허리를 붙잡았다.
“드라이칸, 어떤가? 솔직히 자네라면 호승심이 돋을 것 같은데.”
대충 그가 할 말을 짐작했지만 드라이칸은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누가 저 얼음꽃을 녹이는지 해 보잔 말일세.”
“관심 없어.”
“으응?”
사를로테가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를로테의 얼빠진 표정에 드라이칸이 고개를 돌렸다.
“왕궁 최고의 미녀가 근처에 있는데 관심이 없다니, 자네 정말 내가 아는 드라이칸 하우어가 맞는 건가?”
“살랑거리지 않는 여자는 피곤해서 싫어.”
“자네가 아무리 우리 기사단에 늦게 들어왔다지만, 그래도 아직 엘레나 클로이트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닌가. 지혜로 유명한 클로이트 백작 가의 금지옥엽일세! 어렸을 때부터 총명한 두뇌와 아름다운 외모로 따를 자가 없었다는, 이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최고 미녀!”
“언제부터 그렇게 유치해졌어?”
드라이칸의 질린 얼굴에 과장되게 손을 펼쳤던 사를로테의 얼굴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아니, 원상태로 돌아왔다는 말은 어폐가 있었다. 눈썹 끝을 올리고 입술을 실룩거리는 얼굴은 이전보다 보기가 괴로웠다.
음흉한 표정으로 사를로테가 허공에서 손을 주물럭거렸다. 마치 보이지 않지만 실제 있는 것을 가늠하는 것처럼 오묘한 손놀림이었다.
“아무도 꺾지 못했다는 꽃이 아닌가. 그 속도 겉모양처럼 훌륭할지 궁금해서 미쳐 버리겠단 말이네!”
“너 이놈, 감히 클로이트 양에게 그 무슨 망발이냐!”
기겁한 마켈라가 던지는 돌멩이에도 사를로테의 요망한 주둥이는 쉬지 않았다.
“단장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얼굴이 붉어진 마켈라가 사를로테를 손가락질했다.
“나는 클로이트 양을 그런 대상으로 본 적이 없어!”
“그럴 리……. 여자 손 하나 잘 잡지 못하는 단장은 그럴 수도 있겠네요.”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사를로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장이 몸을 일으켜 뛰어오려는 찰나 사를로테의 말이 단장의 걸음을 막았다.
“단장, 내가 일전에 도도하다고 알려진 제 고향의 꽃을 꺾었다는 얘길 했던가요?”
“……아니.”
“그 여인의 가시도 아주 날카로웠습니다. 이 내가 가벼이 접근했다가 손가락을 베일 정도로요.”
비장한 얼굴로 내뱉는 말에 기사들의 시선이 쏠렸다. 마켈라가 이야기를 기다리듯 자리에 앉았다. 흘끗 그것을 확인한 사를로테가 씨익 미소 짓고 말을 이었다.
“몇 날 며칠을 걸려 겨우 그 여인의 하룻밤을 취했습니다만…….”
“다만?”
“아름다운 외양과 달리 그 안은 그렇게 달콤하지가 못하더군요.”
사를로테의 침통한 얼굴에 마켈라가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미숙한 여인이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성심을 다해 그 안을 개발해 주었습니다만, 여인의 재능이 출중하지 않아 한계가 있었습니다. 엘레나 클로이트를 봤을 때 그 여인이 생각나더군요. 클로이트 양은 어떨까요. 과연 그 안쪽도 달콤한 외모처럼 훌륭한 꿀이 흐르고 있는지, 아니면 그 메마른 성격처럼 삭막한 동굴을 가지고 있을지.”
사를로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기사들을 상상으로 인도했다. 저마다 무언가를 떠올리는지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본다.
드라이칸의 눈썹이 비뚤게 휘어졌다. 사뭇 불쾌한 얼굴이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저 자식은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기사가 되지 않았으면 떠돌이 약장수가 되어 사기나 치고 다녔을 것이다. 별 웃긴 꼴을 다 보겠다는 듯 드라이칸이 눈살을 찌푸리자 그를 돌아본 사를로테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어떤가, 드라이칸? 이제 좀 구미가 당기지 않는가?”
“쯧, 입은 그만 단련하고 훈련을 열심히 해야겠어.”
“갑자기 웬 훈련? 자네가 그런 말을 하니 우습구먼.”
사를로테가 파하, 웃었다. 자신이 이런저런 핑계로 훈련을 빼먹는다면 드라이칸은 당당히 훈련에 나오지 않기로 유명한 한량이었다. 그의 비웃음에 드라이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그 입이 썰릴 것 같군.”
휴식을 다 취한 드라이칸이 몸을 일으켰다.
“가려고? 난 좀 더 있어야겠네. 잘 가게나.”
사를로테가 산뜻하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다시 햇볕을 받기 위해 누우려고 했다.
“윽!”
등의 격통에 뒤로 눕는 대신 앞으로 엎어진 사를로테가 홱 고개를 돌렸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드라이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찌릿찌릿한 허리를 부여잡고 있는 사이 드라이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를로테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폴을 바라보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왜 저러지?”
“난들 알아! 넌 잠이나 자.”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은 폴이 분수대의 물을 튕겼다.
***
여왕의 거처를 둘러싼 원형 회랑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왕의 궁과 정원, 거기에 더해진 회랑이다. 사시사철 지는 법이 없는 정원의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와 코를 스친다. 드라이칸은 이 간질간질한 향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왕궁을 방문하는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회랑을 걸어 보지 않고는 왕궁에서 나가지 않을 정도였다.
예전에 잠깐 꼬셨던 어떤 시녀는 황홀한 표정으로 정원의 향을 극찬하곤 했다. 여왕 폐하가 굽어보는 느낌이라고 꽃 하나하나를 아주 신중히 보살폈던 여자였다.
‘여왕의 향이라.’
여자를 유혹하는 법이나 알지 세심한 구석은 부족한 드라이칸은 도통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정원을 아끼는 만큼 그 향이 옮아올 수는 있지만, 한낱 식물의 향기를 두고 여왕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우스웠다.
여왕 폐하는 폐하이고, 꽃은 그냥 꽃이다.
그렇게 말하자 사를로테는 탄식을 뱉으며 그를 뇌까지 돌로 만들어진 남자라고 혹평을 했다. 섬세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이 없는 것 같다나.
─어느 여자든 자네와 짧은 사랑의 기쁨을 나눌 수는 있어도 결혼을 하진 않을 걸세. 감성적이지 못한 남자는 여성과 깊은 마음을 나눌 수 없는 법이지.
쯧쯧 혀를 차며 건방진 소리를 늘어놓았다.
드라이칸은 코웃음을 쳤다.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으나 거슬리기는 했다.
─짧은 사랑의 기쁨 정도는 나누겠지만 그 이상은.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그 이상엔 뭐가 있는데.
뚜벅뚜벅.
발소리가 둔탁해졌다. 힐끗 앞에서 걸어가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걸음 소리를 죽이지도 않았건만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는 여자. 드라이칸의 눈이 여자를 찬찬히 훑었다. 풀어 내린 검푸른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조약돌처럼 반짝였다. 둔한 그의 눈에도 퍽 아름다웠다.
시선이 핥듯이 엘레나를 쓸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하얀 목이 언뜻 드러난다. 속이 근질거렸다. 하얀 피부에는 언제나 붉은 키스 마크를 남기고 싶었다. 저가 이리 꼬인 인간이었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점차, 탄력을 받은 걸음이 빨라졌다.
녹지 않는 얼음꽃.
드라이칸은 남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찬양과 아부를 섞어 별명을 짓는 것을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엘레나 클로이트에 관해서만큼은 그다지 이견이 없다. 깨지기 쉬운 얼음으로 칭해지기에는 단어만큼의 연약한 느낌은 없을지라도.
엘레나의 걸음걸이는 조금 독특했다. 시녀들의 우아하고 살랑거리는 걸음에 더해 기사의 것처럼 힘센 느낌이 난다. 거기에는 그녀의 자세가 한몫을 차지했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는 부러지지 않는 검처럼 견고해서 사내의 손길을 불허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로 저런 여자는 취향이 아니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여자는 피곤하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드라이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자신을 깨달은 탓이다.
거의 소리를 내지 않는 조용하고도 정확한 발걸음.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닿을락 말락했다. 소리 없이 온몸으로 존재감을 뿜어내는 여자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엘레나 클로이트.”
나직이 읊조렸다. 작은 소리였으나 텅 빈 회랑에서는 몇 배로 크게 들렸다. 엘레나가 멈칫하는 사이 성큼 다가갔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키가 큰 드라이칸이 뒤에 서자 엘레나의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풍성한 스커트 아래로 감추어진 탄력 있는 엉덩이. 드라이칸이 가볍게 선 것과는 반대로 빠져나갈 수 없게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늘씬한 몸이 드라이칸의 품에 안겼다. 제3기사단의 기사들이 보았더라면 감히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기함을 터뜨릴 광경이었다. 당장에 돌아서 따귀를 날릴 것 같다는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반응은 잠잠했다. 그린 듯한 입술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라이칸 하우어 경.”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달큼한 향기에 눈이 감겼다. 그의 기분을 깨뜨리는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경박하게 굴지 말아요.”
“차갑게 굴지 마, 엘레나.”
공개된 곳에서 접촉하는 것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드라이칸은 더욱 그녀를 가까이 끌어안았다. 엘레나가 한숨을 쉬었다. 작은 그 소리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아까 말이야.”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가 난 건가?”
엘레나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제3기사단이 망나니 기사단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아요. 새삼스럽게 화를 낼 일은 아니죠.”
“눈으로는 화를 냈잖아. 마치 쓰레기가 된 것 같았다구.”
“그렇게 천박하게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어쨌든.”
아무렴 어떻겠냐고 어깨를 으쓱였다.
“폐하의 기사단으로서 그 위명에 먹칠은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네요.”
“그래도 실적은 다른 기사단에 뒤지지 않는다고.”
“훈련까지 열심히 하면 더 뛰어나지겠죠.”
“나한테 기대하고 있는 거야?”
드라이칸이 능글맞게 웃자 엘레나는 말이 없었다. 긍정이 아니라 무시하는 거다. 어떻게 얘기가 그렇게 흘러가냐는 의문도 없었다. 그녀는 시답잖은 말에는 굳이 상대할 필요 없다는 것처럼 입을 다물곤 했다.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우어 가문의 셋째 아들로서 머리 좋은 장남과 차남에 비해 그다지 대우 받지 못하는 위치였으나, 누구도 그를 업신여기진 못했다. 큰 키, 넓게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가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갖게 했다.
성질은 또 어떠한가. 수틀리면 아래위 구분이 없어지는 더러운 성질머리로 이미 옛적에 단장의 분노를 산 몸이다. 내심 그를 무시하는 이들도 그와 시비가 붙을까 피했을지언정 대놓고 무시한 적은 없었다. 때문에 이런 적나라한 무시는 매우 오랜만이었다.
드라이칸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몇 마디 말을 던지려다 포기하고 허리를 가볍게 튕겼다. 그의 관심은 혀의 현란한 움직임보다는 뜨거운 하체에 있었다.
엉덩이에 맞닿은 앞섶이 그 위를 문질렀다. 드라이칸은 얼굴을 구기고 작게 욕설을 씹었다.
빌어먹을 드레스. 쓸데없이 천만 많이 잡아먹는 쓸모없는 옷이다. 몇 겹으로 만들어진 탓에 그녀의 엉덩이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를 감쌌던 손을 내려 허리를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