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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복학한 대학교의 경영학과는 아무리 노력을 해 봐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졸업을 하는 대신 자퇴를 하고 1년 후, 용돈과 일을 해서 번 돈을 갖고 독일 유학을 떠나겠다고 선포했다.

부모님은 극심한 반대를 하셨다. 특히, 아버지는 유학을 떠나는 순간 부모와의 연도 끊어질 생각을 하라고 엄포를 늘어놓으셨다. 그럼에도 기어코 물러서지 않고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유현이었다.

순수 미술을 배워 화가가 되는 것. 그건, 유현의 아주 오래된 꿈이었다.

그런 유현이 그날 당장, 한국으로 귀국을 하게 된 건 여행을 온 수형이 전한 설영의 소식 때문이었다.

‘요즘 주말마다 맞선 보는 것 같더라고. 가뜩이나 낯가림도 심한 앤덴……. 그 흉터 때문에 더 큰 상처를 받지 않나 싶어. 사실, 그렇잖아. 우리는 익숙해졌으니까 괜찮은데, 처음 보는 사람들은 놀라서 눈빛으로도 상처를 주잖아.’

독일에 와 있는 1년 동안, 종종 그녀에게 전화를 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았기 때문에 수형에서 소식을 듣는 순간,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계속 거절당하는 거 같더라고, 그 상처 때문에.’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던 설영 아버지는 잘못된 투자로 한순간에 쌓아 온 모든 것을 날려 먹었다.

그로 인해 빚은 날이 갈수록 더욱 늘어났고, 결국 그녀의 아버지는 사채업자에게까지 손을 뻗고 말았다.

사채업자들은 돈을 갚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부모들뿐만 아니라, 설영을 붙잡고 협박을 일삼았다.

문제의 그날은, 설영 역시 유난히 집에 가기 싫어했던 날이었다.

‘유현아. 오늘 집에 좀 늦게 들어가고 나랑 같이 있어 주면 안 돼?’

‘집에 가서 할 게 있어.’

‘내일 하면 안 돼? 오늘은 그냥, 좀 같이 있어 줘.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그래.’

‘진짜 미안해. 그런데 오늘까지 완성하기로 한 그림이 있어. 내가 오늘 말고 내일부터는 네가 같이 있자고 하면 무조건 같이 있어 줄게.’

그깟 그림 때문에 집에 가기 싫다는 설영을 억지로 등을 떠밀어 보냈던 날이었다.

그날을, 유현은 두고두고 후회하며 극심한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사채업자들은 그날도 어김없이 설영의 아버지를 협박하던 도중 염산을 꺼냈고, 그것을 막겠다며 몸부림치던 설영에게 들이부어지는 큰 사고가 나게 된 것이다.

그 바람에 설영의 오른쪽 이마에서부터 관자놀이까지 녹아내렸지만 돈이 없어 기본적인 치료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한 달 동안 설영이 학교에 나오지 않고 집에도 없어 걱정을 하던 유현이 보게 된 그녀의 모습은 이전에 알고 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설영의 아버지는 다시 회사를 살리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온 인맥을 다 동원했다. 그중, 그의 대학 동창과 함께 아이템을 개발하여 동업을 할 수 있게 되어 겨우 빚을 갚을 수 있었고, 이제는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는 단계였다.

하지만 이미 수술 시기를 놓친 설영의 피부는 두 번의 수술에도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았고, 그 아픔을 더는 겪고 싶지 않은 설영은 수술을 거부했다.

그때가 겨우, 설영과 유현의 나이 열네 살이었다.

‘유현아. 내 얼굴 추하지?’

‘아니.’

‘거짓말. 애들이 다 내 얼굴 보고 놀래. 아까는 화장실 갔는데, 나 있는지 모르고 애들이 내 욕 하더라. 괴물 같다고.’

‘누가 그랬어? 가서 패 줄게.’

‘됐어. 있잖아, 유현아. 나 계속 얼굴 이렇게…… 안 예뻐도 나랑 놀아 줄 거지? 계속 내 옆에 있어 줄 거지?’

다사로운 햇살이 비추고 따뜻한 바람이 불던 봄날의 교정에서 예쁜 교복을 입은 설영이 물었다.

울컥, 치밀어 오르던 눈물을 가까스로 참아 내며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던 일이 떠오른다.

‘몰랐냐? 너 원래 한 번도 예뻤던 적 없어. 그래도 난 항상 네 옆에 있잖아.’

무드 없게 던져 버린 말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는 듯이 설영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다행이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동창 덕에 다시 일어서게 된 설영의 아버지는 점점 나아지는 회사 사정에도 ‘동업’이라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다시 홀로서기를 바랐고,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사업체를 제대로, 완벽하게 밀어 줄 인맥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인맥이 가족만 한 것이 없다고 여기고는 딸, 설영을 앞세워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중소기업부터 대기업까지 가리지 않고 내켜 하지 않는 설영의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무작정 맞선을 강행하며…….

그동안 설영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을 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계속 같이 있어 주기로 했는데. 설영이가 그래 줬던 것처럼…….

그림을 하겠다는 못난 욕심으로 잠시나마 떨어져 있었던 지난날이 후회가 되었다.

“유현아.”

공항에서 곧장 오느라, 차를 가지고 오지 못한 탓에 올라탄 택시 안.

옆에서 걱정스레 자신을 부르는 설영의 목소리에 그제야 유현은 깊게 빠져들었던 과거의 일들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다. 마주 본 설영의 얼굴엔 피곤함과 걱정이 묻어 있었다.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멍 때리고 있었던 거야. 너도 알잖아. 나 뭐 생각할 머리는 아닌 거.”

유현의 싱거운 대답에도 설영은 웃지 않았다. 무언가 제 옆에 있을 때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그래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긴장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유현은 그 표정이 신경 쓰였다.

“표정이 왜 그래?”

“응?”

“내 옆에서 그런 표정 한 번도 지어 보인 적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 지금 내 표정이 어떤데?”

“음, 무너진 하늘에서 구멍 찾는 표정?”

“뭐야, 그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유현의 대답에 설영이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말해 봐.”

“…….”

“이설영. 너 지금 하고 싶은 말 있잖아.”

“사실…….”

설영이 이번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눈이 허공에서 심하게 방황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잔뜩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기다려 줄게. 생각 정리되면 말해.”

“이미 정리는 다 됐어.”

유현은 설영이 할 말을 가만히 바라보며 기다렸다.

“유현아.”

“응.”

“네가 결혼하자고 그랬잖아. 그거 정말 진심으로 한 소리야?”

“응. 진심이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날아든 유현의 대답에도 설영은 자꾸만 무언가를 망설이는 눈치였다.

휴우, 몰래 뱉어 내려던 한숨이었겠지만 유현에겐 다 들려 버리고 말았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해. 이설영.”

“……너 나 좋아해?”

“나만큼 널 좋아하는 사람 이 세상에 없을걸?”

낮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반박 불가의 인정이었다. 하지만 설영의 얼굴엔 여전히 퍼져 있던 근심이 거두어지지 않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설영을 유현은 더는 보채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한참을 입술까지 달싹이며 망설이다 결심이라도 한 듯, 미간을 한 번 구겼다가 편 설영이 말했다.

“내가 좋아하느냐고 물은 건, 그런 의미가 아니야.”

“그럼 무슨 의미인데?”

“사랑해?”

“사랑?”

“응. 너 나 사랑해?”

“사랑하는 거랑 좋아하는 거랑 뭐가 달라?”

“다르지……. 그건 달라.”

“난 다른 거 모르겠어.”

단호한 유현의 말에 설영이 입술을 달싹였다.

다른 건 알겠는데, 정확하게 어떻게 다른지 설득하는 데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유현이 먼저 말했다.

“넌 나한테 소중해. 네가 상처받는 거 싫어. 그래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내가 네 곁에 있어야 할 이유. 그게 네가 말하는 좋아하는 것이든, 사랑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

“그러는 너는 나 좋아해?”

이번엔 유현이 물었다. 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랑해?”

하지만 이번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그녀는 분명,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사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감정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유현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택시가 멈췄다. 설영의 집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설영은 무거운 눈으로 자신의 집을 바라보았다.

편안하고 안락한 집을 바라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참, 우습지?”

설영의 음성에는 허탈함이 묻어 있었다.

“뭐가?”

“처음부터 맞선 보고 결혼할 거였으면서 너한테 사랑 운운하는 거.”

“나는 너의 맞선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는 거 충분히 이해해.”

“…….”

“이제 내리자.”

“너도 같이 들어가려고?”

설영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응. 가서 말씀드려야지.”

“좀 더 생각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결혼이라는 게…… 애들 소꿉놀이도 아니고.”

“앞으로 며칠, 아니 몇 년을 더 생각해도 내 결심은 바뀌지 않아. 독일에서 한국 들어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부터 내 결심은 이미 확고했어. 그러니까, 얼른 내려.”

유현이 계산을 끝내고 차마 문을 열지 못하는 설영을 두고 반대편 문을 열어 내렸다. 그러고는 한 바퀴 돌아와 설영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래도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 설영에게 유현은 상체를 수그려 눈을 마주했다.

“왜? 못 걷겠어? 오랜만에 업어 줄까?”

운동과는 거리가 참 멀었던 설영이었다. 그래서 체육 시간에 종종 넘어지곤 했었는데, 찰과상을 입어 유현의 등에 업혀 양호실을 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의 등에 안겨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 그는 무거우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곤 했었다.

하지만 그 등은 언제나 든든하고 따뜻했으며 그는 핀잔을 주는 사람치고는 너무도 많이 등을 내어 주곤 했다.

“어? 아, 아니.”

“그럼, 안아 줄까?”

“아니!”

손까지 뻗어 안아 올리려는 유현에 그제야 설영이 허겁지겁 택시에서 내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설핏, 미소가 새어 나왔다.

“두 분 많이 놀라시겠지? 아니, 좋아하실 거야.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횡설수설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옮기고 있는 설영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초인종을 누르기 위해 뻗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런 설영의 손을 유현이 꼭 잡아 내렸다. 설영이 몸까지 움찔하며 놀라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설영 대신 유현이 초인종을 눌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손을 놓으려고 힘을 주는 작은 설영의 손을 더욱 꽉 잡고 아주 작은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설영이 너 이 녀석 어떻게 된……!”

분노하며 큰소리를 내던 설영의 부, 호태는 손을 맞잡고 있는 유현과 설영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렸을 적부터 친했던 두 아이들은 종종 저렇게 손을 잡기도 했고, 설영이 유현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다닐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온전히 고등학생 이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다 큰 성인이 되어 저렇게 손을 맞잡고 집으로 함께 오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겼다.

더군다나 오늘 맞선을 진행했던 그룹의 아들 민성이 한 말을 유추해 보면, 두 사람 사이가 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현이 네가 이 시간에 우리 애랑 무슨 일로 온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