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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발기한 성기에 굵은 힘줄이 불거졌다. 하늘로 빳빳하게 치켜든 귀두가 끈적한 액을 길게 토했다. 손바닥을 힘껏 펼쳐도 닿지 않을 만큼 기다란 기둥은 강인한 남성성을 상징하는 듯 꿈틀거렸다.
“아윽……!”
그런 성기가 비좁은 안을 무자비하게 헤치고 들어오는 순간, 하루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떠버린 기분이었다. 검붉은 성기가 선단까지 빠져나갔다가 뿌리까지 박혀들 때마다 전신에 벼락이 내리쳤다.
낯선 천장이 흔들렸다. 아니, 뇌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다. 하루는 제 안을 거칠게 파고드는 남자의 어깨에 손톱을 박고 신음을 내질렀다. 그가 인정사정없이 허리를 올려치면 교합 부위에서 투명한 거품이 쩍쩍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아, 아흐, 너무……!”
컸다. 몸이 꿰뚫리는 느낌이었다. 깊은 곳까지 치고 들어왔다가 내벽까지 쓸고 나가는 찰나마다 등줄기로 오싹한 소름이 일었다. 몰아치는 쾌감을 견디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갔다.
“제대로 벌려요.”
“하윽!”
남자는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켜 남은 뿌리를 끝까지 박아 넣었다. 예민한 내벽을 여러 각도와 깊이로 찔러 댔다. 그녀가 힘들어할수록 내벽을 쑤셔 대는 성기는 힘을 받는 듯 단단해졌다. 살이 타 버릴 듯한 열기가 피어오르며 남자의 이마에서 낙하한 땀이 그녀의 배꼽에 고여 들었다.
“……씨발.”
남자는 극도의 쾌감을 느끼는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낮게 욕지거리했다. 하루는 장시간 이어지고 있는 정사에 정신없이 휘둘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점차 사나워지며 이내 이곳이 어디인지도 잊을 만큼 강렬한 쾌감이 몰아쳤다.
단 몇 시간 전만 해도 낯선 남자와 이렇게 뜨거운 섹스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고작 서너 시간 전만 해도 말이다.
* * *
12월의 마지막 일요일. 하루는 비좁은 책상에 앉아 시험지를 채점하고 있었다. 빨간 펜이 종이 위를 오갈 때마다 구겨진 휴지도 쌓여 갔다. 눈가의 여린 살이 짓물러 아플 지경이었지만 눈물샘은 그치지 않고 제 역할에 충실했다.
헤어졌다, 오래 사귄 남자 친구와.
세상에 다시없을 만큼 열정적인 사랑을 한 건 아니지만 좋아했었다. 결혼을 상상해 볼 만큼 잘 맞는 인연이라고 믿었다. 몰라서 그렇지 괜찮은 남자라며 친구들에게 자랑도 했었는데.
“그만 만나자.”
성가신 것을 해치우듯, 참았던 것을 터뜨리듯 당한 이별이 너무 아프고 억울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고치지 못하는 나쁜 버릇을 참아 준 것도 저고, 거듭되는 실수를 봐줬던 것도 저고, 기분을 망칠까 맞춰 줬던 것도 저였건만.
“됐어, 전부 잊어버리자.”
하루가 코맹맹이 소리로 중얼거리며 팔랑 시험지를 넘겼다. 빗금을 그릴 때마다 전 남자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 빨간 줄을 긋듯이 착! 착! 손을 놀렸다. 이렇게라도 해야 분한 제 마음이 시원해질 것 같았다.
어두운 공간에 노란 전등만이 불을 밝힌 밤.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한 10평짜리 분리형 원룸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뭐해?
친구 영신이었다.
“채점 중이야.”
-혜진이 생파 중인데 나와.
“지금?”
하루의 눈동자가 탁상시계로 향했다. 이제 막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너무 늦었어. 지하철도 끊겼는데 어떻게 가.”
-너 오늘 안 나오면 쳐들어간대. 민수 선배가 네 집 알고 있다던데?
수화기 너머에서 떠들썩한 소음이 밀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르바이트와 연애를 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친구들의 얼굴을 못 본 지 오래였다.
-게다가 너, 드디어 똥차 치웠다며? 와서 파티해야지, 파티! 오하루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얼마 안 남은 20대의 밤을 화려하게 즐기자고!
친구들은 입을 모아 그와 헤어지라고 했다. 하루를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다고. 더 사귀어 봐야 하루만 손해라고. 뭐라더라, 관상이 좋지 않다고 했던가.
하루는 한숨과 함께 쥐고 있던 빨간 펜을 내려놓았다. 사실 그녀도 기가 막히던 차였다. 똥차 떠난 기념으로 파티를 해도 모자랄 마당에 골방에 틀어박혀 질질 짜고 있다니. 하루가 손바닥으로 퉁퉁 부은 눈두덩을 지그시 누르며 물었다.
“그래서, 거기가 어딘데.”
* * *
“이별 축하합니다! 이별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오하루!”
장소는 예상대로 클럽이었다. 클럽이라고 하지만 규모가 작았고, 선배인 민수가 운영하는 곳이라 부담스럽지 않았다. 룸으로 들어가자 우렁찬 노랫말이 울려 퍼졌다. 하루가 그만두라는 의미로 두 팔을 휘저어도 아랑곳 않고 완창한 그들이 까르르 웃었다.
“꼴 좀 봐라. 어떡하냐, 진짜.”
“채점하다 나와서 그래.”
“얼마나 채점하기 싫었으면 눈이 그렇게 퉁퉁 부어?”
하루가 머쓱하게 제 뺨을 쓸었다. 뒤늦게 화장 좀 하고 나올 걸, 하고 생각했다.
명색이 이태원에 있는 클럽인데, 민낯은 너무했나.
“오늘만 봐주자. 오하루! 오늘 밤은 여기에서 실컷 놀다 가. 오늘 혜진이가 쏜대!”
“아, 참. 혜진아. 생일 축하해. 정신없이 오느라 선물을 미처…….”
“선물은! 네가 똥차 치운 게 내 선물이다.”
혜진이 앉으라며 손짓했다. 다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같은 대학에서 만난 사이. 그러나 이제는 저마다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누구는 하루가 소원하는 대로 정교사가 되어 학교에 출근 중이고, 누구는 부모의 지원을 받아 학원을 차렸다.
“오하루, 오랜만이네. 뭐 하고 지냈어?”
전공을 살린 건 아니지만, 그들 중 가장 성공한 사장 민수가 목이 긴 잔을 가져다주며 물었다. 술이 약한 그녀를 위해 특별히 제조한 칵테일이었다. 하루는 그에게 인사하며 잔 밑동을 잡았다.
“학원 다니고, 요즘에는 과외도 늘려서…….”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즐기면서 살아. 똥차 치웠다며? 축하한다, 인마. 도수 좀 높였으니 오늘은 실컷 마시고 놀다 가.”
잘게 부순 얼음 사이를 가득 채운 액체가 찰랑거렸다. 어깨를 툭 치는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그녀가 잔에 입술을 댔다. 평소 마시던 것보다 쓰다. 그럼에도 오늘은 취하고 싶은 기분에 빠르게 잔을 비웠다. 눈앞이 핑글 돌았다.
“참, 하루야. 새빛 공고 났던데, 지원했어?”
그때 혜진이 물었다. 그녀는 서울에 위치한 고등학교에서 정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 어, 하기는 했는데…….”
하루가 얼버무리며 멋쩍은 미소를 띠었다.
새빛 고등학교는 그녀가 한 달간 교생 실습을 했던 곳이다. 그녀에게는 추억이 깃든, 어느 학교보다 소중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몇 년 만에 기간제 교사 모집 공고가 올라왔다. 강남 8학군 중에서도 대입 실적이 좋기로 유명하고 평이 좋은 사립이라 모집 초기부터 엄청난 경쟁률을 보였다.
그 탓에 망설였지만, 하루도 저에게 좋은 기억이 있는 학교이니만큼 정성 들여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지금껏 항상 고배를 마셨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기대 안 해.”
“에이, 이번에는 될지 누가 알아? 새빛은 너하고 인연도 있는 학교잖아.”
인연으로만 합격이 좌우된다면 참 좋겠다. 하루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실 때였다.
“헉. 야야, 생쁨이 왔다!”
“뭐? 우리 생쁨이! 어디, 어디!”
술을 마시던 친구들이 갑자기 요란스럽게 굴었다.
‘생쁨이?’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쭉 빼자 스테이지 인파 속에서도 대번에 눈에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흰 피부에 살짝 구불거리는 머리. 큰 키에 조금은 마른 체형. 그러나 한눈에 봐도 강단 있는 체구. 하루처럼 셔츠에 청바지만 입고 있음에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제 막 20대 초반일 듯한 앳된 외모임에도 조명 탓인지 신비로운 느낌을 풍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루는 어지러운 기분에 테이블에 뺨을 대고 엎드렸다. 친구들의 수다 소리, 쿵쿵거리는 음악 소리가 고막을 마비시킬 듯 크게 울렸다.
“야, 오하루. 오자마자 뻗냐?”
“미안. 잠을 못 자서. 조금만 엎드려 있을게.”
너무 운 데다 도수 높은 칵테일을 빠르게 마셨더니 몸이 늘어졌다. 눈을 감자, 아득해지는 청각 너머로 생쁨이에 대한 찬양이 들려왔다. 클럽에서 어지간히 유명 인사인지, 남자에 큰 관심이 없던 영신까지도 흥분한 기색이었다.
눈을 감은 채로 제 처지를 생각했다. 나이는 스물아홉. 서른을 코앞에 둔 시점에 결혼을 생각하던 남자 친구와 헤어졌고, 미술 교육전공이지만 번번이 취업에 실패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연명. 현재는 미술 학원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면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그룹 과외 중이다. 꿈은 학교 미술 교사이지만, 이 나이 먹도록 꿈에 발가락도 담그지 못한 애매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벌써 취했나. 새삼 눈물이 나려 했다. 하루는 한참을 늘어져 있다가 화장실에 다녀오기로 했다. 찬물에 세수하고 저도 나가 신나게 춤을 출 생각이었다. 시궁창 같은 현실은 다 잊고서.
“……!”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단박에 얽혀드는 시선이 있었다.
프롤로그
발기한 성기에 굵은 힘줄이 불거졌다. 하늘로 빳빳하게 치켜든 귀두가 끈적한 액을 길게 토했다. 손바닥을 힘껏 펼쳐도 닿지 않을 만큼 기다란 기둥은 강인한 남성성을 상징하는 듯 꿈틀거렸다.
“아윽……!”
그런 성기가 비좁은 안을 무자비하게 헤치고 들어오는 순간, 하루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떠버린 기분이었다. 검붉은 성기가 선단까지 빠져나갔다가 뿌리까지 박혀들 때마다 전신에 벼락이 내리쳤다.
낯선 천장이 흔들렸다. 아니, 뇌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다. 하루는 제 안을 거칠게 파고드는 남자의 어깨에 손톱을 박고 신음을 내질렀다. 그가 인정사정없이 허리를 올려치면 교합 부위에서 투명한 거품이 쩍쩍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아, 아흐, 너무……!”
컸다. 몸이 꿰뚫리는 느낌이었다. 깊은 곳까지 치고 들어왔다가 내벽까지 쓸고 나가는 찰나마다 등줄기로 오싹한 소름이 일었다. 몰아치는 쾌감을 견디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갔다.
“제대로 벌려요.”
“하윽!”
남자는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켜 남은 뿌리를 끝까지 박아 넣었다. 예민한 내벽을 여러 각도와 깊이로 찔러 댔다. 그녀가 힘들어할수록 내벽을 쑤셔 대는 성기는 힘을 받는 듯 단단해졌다. 살이 타 버릴 듯한 열기가 피어오르며 남자의 이마에서 낙하한 땀이 그녀의 배꼽에 고여 들었다.
“……씨발.”
남자는 극도의 쾌감을 느끼는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낮게 욕지거리했다. 하루는 장시간 이어지고 있는 정사에 정신없이 휘둘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점차 사나워지며 이내 이곳이 어디인지도 잊을 만큼 강렬한 쾌감이 몰아쳤다.
단 몇 시간 전만 해도 낯선 남자와 이렇게 뜨거운 섹스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고작 서너 시간 전만 해도 말이다.
* * *
12월의 마지막 일요일. 하루는 비좁은 책상에 앉아 시험지를 채점하고 있었다. 빨간 펜이 종이 위를 오갈 때마다 구겨진 휴지도 쌓여 갔다. 눈가의 여린 살이 짓물러 아플 지경이었지만 눈물샘은 그치지 않고 제 역할에 충실했다.
헤어졌다, 오래 사귄 남자 친구와.
세상에 다시없을 만큼 열정적인 사랑을 한 건 아니지만 좋아했었다. 결혼을 상상해 볼 만큼 잘 맞는 인연이라고 믿었다. 몰라서 그렇지 괜찮은 남자라며 친구들에게 자랑도 했었는데.
“그만 만나자.”
성가신 것을 해치우듯, 참았던 것을 터뜨리듯 당한 이별이 너무 아프고 억울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고치지 못하는 나쁜 버릇을 참아 준 것도 저고, 거듭되는 실수를 봐줬던 것도 저고, 기분을 망칠까 맞춰 줬던 것도 저였건만.
“됐어, 전부 잊어버리자.”
하루가 코맹맹이 소리로 중얼거리며 팔랑 시험지를 넘겼다. 빗금을 그릴 때마다 전 남자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 빨간 줄을 긋듯이 착! 착! 손을 놀렸다. 이렇게라도 해야 분한 제 마음이 시원해질 것 같았다.
어두운 공간에 노란 전등만이 불을 밝힌 밤.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한 10평짜리 분리형 원룸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뭐해?
친구 영신이었다.
“채점 중이야.”
-혜진이 생파 중인데 나와.
“지금?”
하루의 눈동자가 탁상시계로 향했다. 이제 막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너무 늦었어. 지하철도 끊겼는데 어떻게 가.”
-너 오늘 안 나오면 쳐들어간대. 민수 선배가 네 집 알고 있다던데?
수화기 너머에서 떠들썩한 소음이 밀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르바이트와 연애를 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친구들의 얼굴을 못 본 지 오래였다.
-게다가 너, 드디어 똥차 치웠다며? 와서 파티해야지, 파티! 오하루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얼마 안 남은 20대의 밤을 화려하게 즐기자고!
친구들은 입을 모아 그와 헤어지라고 했다. 하루를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다고. 더 사귀어 봐야 하루만 손해라고. 뭐라더라, 관상이 좋지 않다고 했던가.
하루는 한숨과 함께 쥐고 있던 빨간 펜을 내려놓았다. 사실 그녀도 기가 막히던 차였다. 똥차 떠난 기념으로 파티를 해도 모자랄 마당에 골방에 틀어박혀 질질 짜고 있다니. 하루가 손바닥으로 퉁퉁 부은 눈두덩을 지그시 누르며 물었다.
“그래서, 거기가 어딘데.”
* * *
“이별 축하합니다! 이별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오하루!”
장소는 예상대로 클럽이었다. 클럽이라고 하지만 규모가 작았고, 선배인 민수가 운영하는 곳이라 부담스럽지 않았다. 룸으로 들어가자 우렁찬 노랫말이 울려 퍼졌다. 하루가 그만두라는 의미로 두 팔을 휘저어도 아랑곳 않고 완창한 그들이 까르르 웃었다.
“꼴 좀 봐라. 어떡하냐, 진짜.”
“채점하다 나와서 그래.”
“얼마나 채점하기 싫었으면 눈이 그렇게 퉁퉁 부어?”
하루가 머쓱하게 제 뺨을 쓸었다. 뒤늦게 화장 좀 하고 나올 걸, 하고 생각했다.
명색이 이태원에 있는 클럽인데, 민낯은 너무했나.
“오늘만 봐주자. 오하루! 오늘 밤은 여기에서 실컷 놀다 가. 오늘 혜진이가 쏜대!”
“아, 참. 혜진아. 생일 축하해. 정신없이 오느라 선물을 미처…….”
“선물은! 네가 똥차 치운 게 내 선물이다.”
혜진이 앉으라며 손짓했다. 다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같은 대학에서 만난 사이. 그러나 이제는 저마다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누구는 하루가 소원하는 대로 정교사가 되어 학교에 출근 중이고, 누구는 부모의 지원을 받아 학원을 차렸다.
“오하루, 오랜만이네. 뭐 하고 지냈어?”
전공을 살린 건 아니지만, 그들 중 가장 성공한 사장 민수가 목이 긴 잔을 가져다주며 물었다. 술이 약한 그녀를 위해 특별히 제조한 칵테일이었다. 하루는 그에게 인사하며 잔 밑동을 잡았다.
“학원 다니고, 요즘에는 과외도 늘려서…….”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즐기면서 살아. 똥차 치웠다며? 축하한다, 인마. 도수 좀 높였으니 오늘은 실컷 마시고 놀다 가.”
잘게 부순 얼음 사이를 가득 채운 액체가 찰랑거렸다. 어깨를 툭 치는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그녀가 잔에 입술을 댔다. 평소 마시던 것보다 쓰다. 그럼에도 오늘은 취하고 싶은 기분에 빠르게 잔을 비웠다. 눈앞이 핑글 돌았다.
“참, 하루야. 새빛 공고 났던데, 지원했어?”
그때 혜진이 물었다. 그녀는 서울에 위치한 고등학교에서 정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 어, 하기는 했는데…….”
하루가 얼버무리며 멋쩍은 미소를 띠었다.
새빛 고등학교는 그녀가 한 달간 교생 실습을 했던 곳이다. 그녀에게는 추억이 깃든, 어느 학교보다 소중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몇 년 만에 기간제 교사 모집 공고가 올라왔다. 강남 8학군 중에서도 대입 실적이 좋기로 유명하고 평이 좋은 사립이라 모집 초기부터 엄청난 경쟁률을 보였다.
그 탓에 망설였지만, 하루도 저에게 좋은 기억이 있는 학교이니만큼 정성 들여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지금껏 항상 고배를 마셨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기대 안 해.”
“에이, 이번에는 될지 누가 알아? 새빛은 너하고 인연도 있는 학교잖아.”
인연으로만 합격이 좌우된다면 참 좋겠다. 하루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실 때였다.
“헉. 야야, 생쁨이 왔다!”
“뭐? 우리 생쁨이! 어디, 어디!”
술을 마시던 친구들이 갑자기 요란스럽게 굴었다.
‘생쁨이?’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쭉 빼자 스테이지 인파 속에서도 대번에 눈에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흰 피부에 살짝 구불거리는 머리. 큰 키에 조금은 마른 체형. 그러나 한눈에 봐도 강단 있는 체구. 하루처럼 셔츠에 청바지만 입고 있음에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제 막 20대 초반일 듯한 앳된 외모임에도 조명 탓인지 신비로운 느낌을 풍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루는 어지러운 기분에 테이블에 뺨을 대고 엎드렸다. 친구들의 수다 소리, 쿵쿵거리는 음악 소리가 고막을 마비시킬 듯 크게 울렸다.
“야, 오하루. 오자마자 뻗냐?”
“미안. 잠을 못 자서. 조금만 엎드려 있을게.”
너무 운 데다 도수 높은 칵테일을 빠르게 마셨더니 몸이 늘어졌다. 눈을 감자, 아득해지는 청각 너머로 생쁨이에 대한 찬양이 들려왔다. 클럽에서 어지간히 유명 인사인지, 남자에 큰 관심이 없던 영신까지도 흥분한 기색이었다.
눈을 감은 채로 제 처지를 생각했다. 나이는 스물아홉. 서른을 코앞에 둔 시점에 결혼을 생각하던 남자 친구와 헤어졌고, 미술 교육전공이지만 번번이 취업에 실패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연명. 현재는 미술 학원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면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그룹 과외 중이다. 꿈은 학교 미술 교사이지만, 이 나이 먹도록 꿈에 발가락도 담그지 못한 애매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벌써 취했나. 새삼 눈물이 나려 했다. 하루는 한참을 늘어져 있다가 화장실에 다녀오기로 했다. 찬물에 세수하고 저도 나가 신나게 춤을 출 생각이었다. 시궁창 같은 현실은 다 잊고서.
“……!”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단박에 얽혀드는 시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