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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러면서도 절 어찌나 따르는지. 그리 대찬 구석이 있음에도 또 제 이야긴 참 잘 듣습니다. 제가 이리해라, 하면 예, 하고. 제가 하지 말아라, 하면 또 예, 합니다. 그 순종은 ‘연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아인 절 깊이 연모해요.”

경방은 슬쩍 웃었다. 어릴 때나 보았던 경방의 진짜 웃음이다. 하긴, 경방은 저리 소박한 데 마음을 쏟는 순한 아이였다. 몇 년 새 크게 달라지긴 했지만.

언젠가부터 태자의 개가 되길 자처했다. 태자의 환심을 사는 데만 골몰하며 백성을 터는 데 앞장서 월령궁을 짓고 환약과 계집을 댄다.

“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미 제 여인이지요. 그 아인 제 것입니다!”

권력이, 정치가, 세상이 그리 만든 것을.

다 살려는 발버둥인 것을.

부황은 병색이 짙어지셨다. 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황위 계승이 가능한 모든 종친 사내들은 단두대 위에서 패가 갈릴 것이다. 개가 된 자와 죽을 자. 세상이 뒤집어지든 말든 상관없는 륜과 달리 저 아이는 살길을 트는 것이다. 그를 저리 간절히 붙드는 것은 그의 희첩이던가.

“형님 전하께선 제 첩을 빼앗거나 취하시진 않으시겠지요?”

그 질문이 륜의 비위를 뒤틀었다.

“태자께오선 그런다더냐?”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다. 경방의 눈빛도 뒤틀어졌다.

온유하지만 이기적인 녀석. 그것이 발현되면 잔인해지는 구석도 있는. 륜은 피식, 웃으며 경방을 안심시켰다.

“네 희첩이 곱든 박색이든 내가 무슨 상관이겠느냐.”

“그렇지요? 형님 전하께오선 계집에 관심이 없으시지요. 그게 참 다행입니다!”

경방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그런 경방을 바라보는 륜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는다.

계집은 무슨, 여인은 무슨…….

내 편이 될 것이다, 그리 당차게 다가드는 아이를 끝끝내 상처만 주다 그리 무참히 보낸 것을.

죽음의 칼날이 눈앞에 날아들었을 때 열둘의 아이는 제 어깨로 륜을 살려 냈다. 그 새와 같은 여린 어깨로 검날을 대신 맞아 주었다.

‘부부는 서로의 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절규가 아직도 사무친다. 비가 될 아이를 잃었다. 모후를 잃었다. 스승이자 장인이 될 집안을 멸절시켰단 오명은 오히려 낯간지러운 사치였다. 다들 죽어 귀신이 되었는데, 무엇이 중요할까. 이 구차한 목숨, 버릴 곳만 찾을 뿐.

그러나 아직은 할 일이 남았다.

“그나저나, 형님 전하께서는 무슨 일로 매은에게 가십니까. 매은이 명귀춘의 친우였으니 찾으십니까. 아무리 황상의 마음이 풀리셨대도 옛 명가의 일을 들추신다면 애써 회복한 성총을…….”

세상을 얼려 버릴 듯 차가운 눈빛. 그 싸늘한 일별에 경방은 입을 꼭 다물었다. 진왕의 치명적이고도 유일한 약점을 건드렸다는 걸 모를까.

“흐흠! 뭐, 전 덕택에 형님 전하께 호위를 받으니 그저 광영입니다.”

헛기침을 하고 명랑하게 웃는다. 그러곤 백운궁의 계집 노비에 관한 수다를 계속한다. 륜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사람에게서 마음을 떼니, 우습게도 사람이 들여다보인다. 이런 것도 홀로 살아남은 천벌일까.

“전 그 아이만 무사히 데려가면 그뿐이니…….”

문득, 이 동행이 어색하단 걸 깨달았다. 매은을 만나러 간다니 경방은 호위도 없이 버선발로 따라나섰다. 그러면서도 약사는 왜 데려왔는가. 륜은 행렬의 맨 끝에 따라오는 약사, 박지를 흘끗 바라보았다.

약에 능통하며 재주가 뛰어난 자다. 재물을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는 게 장점이자 단점. 태자의 환약을 대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저 약사는 왜 데려가는 것이냐.”

경방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쌕 웃었다.

“그 아이가 좀 아픕니다.”

“병이 났는데 첩으로 들이느냐?”

“그건 아니고, 좀 약한 구석이 있어서요. 탕약을 먹여 보려 합니다.”

무얼까. 제 것이라 이리 강조하면서도 왜 굳이 따라와서 계집에 관한 말을 쏟아 낼까. 마치 보여 주기 싫은 걸 억지로 보여 주려는 듯. 경방의 눈빛이 오늘따라 탁했다.



“게 아무도 없느냐. 여봐라.”

매은의 처소에 다다르자, 길잡이는 목청을 높여 시비를 불렀다.

“오셨습니까.”

어린 사내 노비가 경방에게 얼른 인사했다. 담장 주위로 편백나무 성성한 빈 마당이 시야에 들어온다. 호위들이 마구간으로 말을 돌리는 동안, 경방과 륜은 대문을 넘어섰다.

“매은, 계시는가.”

경방은 습관처럼 매은을 부르면서도 노비들 처소로 이어진 쪽문을 넘었다. 사내 노비는 난감해하며 륜을 매은의 방으로 안내했다.

“선생께서 며칠 자리를 비우시겠다 했습니다. 차를 내오겠습니다.”

륜이 매은의 처소로 향하자, 그의 호위장 익비도 얼른 따랐다. 둘은 주인 없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게, 기별 없이 그냥 확 와야 했지 않습니까.”

울림통 좋은 굵직한 목소리, 커다랗고 퉁퉁한 몸. 성격은 우직하지만 보기와 달리 계집처럼 살뜰하다.

“장인(명귀춘)의 유품도 중요하지만, 친우였던 매은의 마음을 돌리는 것도 중요하다.”

“기어이 명가 사건을 바로잡으시렵니까.”

“그게 내가 여태까지 달려온 유일한 이유임을 모르느냐.”

태자에게 마음 뜨신 황상의 명이 화급을 다투는데, 왜 죽은 사람들에게 이리 아까운 시간을 쓰십니까.

그러나 세상 다 산 듯한 주군 특유의 비소를 보며 익비는 입을 다물었다. 한이 되는 일은 풀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모시는 도리이다.

가림막을 돌아드니 매은의 성격을 닮은 단정한 내부가 들어왔다. 휘장 너머 빈 침상, 민무늬 화리목으로 짠 뼈대 앙상한 가구들. 책장엔 귀한 병서와 무예서가 가득했고, 가궤안 위엔 손때 묻은 장검이 장식되어 있다.

륜이 벽에 걸린 낡은 무복을 바라볼 때 익비는 서안 위에 보란 듯 올려 둔 지편을 집어 들었다.

“어휴, 이럴 줄 알았습니다. 작정하고 피했습니다.”

유유자적, 거리낌 없는 필체도 매은을 닮았다.


「옛일을 들추며 찬 서리를 맞기엔 소인이 너무 늙었습니다. 쓸모없는 재주나마 팔며 명을 보존하도록 놓아주십시오. 드릴 말씀도 드릴 물건도 제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말투는 공손하나, 뜻은 너 만나기 싫어, 쯤 된다. 그럼에도 륜의 얼굴은 여상했다.

“그의 마음을 돌리려면 헛걸음도 냉대도 필요하다. 문제는 매은이 어떤 약점을 잡힌 것 같은 거다.”

전장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늘 찬찬히 준비했다. 그러나 금의위 수장이 되고부터는 본격적으로 정보를 모았다.

“예? 혈혈단신 늙은이가 무예도 출중한데, 무슨 약점을 잡힙니까.”

“경방이 그믐이면 이곳에 들르곤 하더구나. 매번은 아니지만, 7년쯤 된 것 같다.”

“예? 7년이라면…….”

익비는 입을 닫았다. 장지문이 열리며 당황한 표정의 경방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그 동요를 륜이 못 알아챌 리 없다.

“나는 곧 떠날 것이니 넌 찬찬히 머물다 가거라.”

경방의 흔들리는 눈빛이 륜을 똑바로 향한다.

“매은에게 찾으시는 게…… 정녕 없으십니까.”

“상관할 바 없다 했다.”

“아주 잃어버린다고 해도요?”

“…….”

비소가 여전한 륜의 눈빛에 소리 없는 포화가 스쳤다. 보통 때라면 그 작은 노기에라도 숨죽이며 꽁지를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경방은 다급해 보였다. 륜은 물었다.

“원하는 걸 말해라.”

“제가 아니라 형님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이지요. 매은이 명귀춘의 인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저도 압니다.”

륜은 작게 실소했다. 륜을 걸려들게 하는 데 성공한 경방은 말을 계속했다.

“그 인장은 목걸이로 되어 있습니다. 매은은 그걸 노비에게 지니고 다니게 했습니다.”

“아, 그 귀한 것을…….”

익비가 놀라자 경방은 각오를 다지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노비가 지금 도망을 친 모양입니다. 물론, 인장을 목에 건 채로요.”

경방은 손에 든 지편을 륜에게 슬쩍 내보였다. 그러나 팔을 뻗으니 뒤로 싹 감춘다. 륜은 코웃음 쳤다.

“글을 쓸 줄 아는 노비라니. 이런 시골에선 국법조차 우습구나.”

노비가 글을 아는 것은 중죄를 받을 일이다. 경방은 쪽지를 바치지 않은 걸 고개 숙여 사죄했다.

“갈포로 지은 낡은 고습을 입고 다닙니다. 열아홉이나 키가 작달막해 열다섯 내외로 보이지요. 무예가 출중하며, 발이 빠릅니다. 부자나 귀족의 호위 무사가 되고 싶어 하는 녀석이니,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금성 쪽으로 향할 것입니다.”

냉엄하던 륜의 눈빛에 문득 진짜 웃음기가 올랐다. 그래, 어째 이 동행이 어색했었다. 준비되었던 것이 이것인가.

“그래, 날 엮을 올가미라도 준비한 것이냐.”

맥락 없이 튀는 주군의 말에 놀란 것은 익비뿐만이 아니었다. 경방은 사색이 되어 예를 취하곤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저는 그저 형님 전하께서 명귀춘의 인장을 찾으실 거라 짐작한 것뿐입니다.”

“그으래?”

“매번 오랑캐며 반란군을 크게 진압해 우리 와국을 굳건히 지켜 주신 형님 전하께, 올가미라니요! 적장을 끝까지 추격해 목을 베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늘 간담 서늘하면서도 기뻤습니다. 황명에 갑옷을 입으실 때마다 늘 마음 졸이며 승전보를 기다렸습니다.”

“설마, 내 시신이겠지.”

그의 부드러운 미소에 번들거리는 눈빛이 더해졌다. 그 부조화에서 오는 괴리감이 경방을 압사시킬 만큼 깊이 내리눌렀다.

“알아 두렴. 거짓일수록 말은 짧아야 유리하단다.”

경방은 감히 더 이상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아, 아닙니다. 미, 믿, 믿어 주십시오!”

그러나 륜은 책망을 그치고, 예의 그 눈빛을 거두었다. 그의 눈엔 작은 흥겨움마저 담겨 있었다.

“매은의 무예를 익히며 산에서 자란 발 빠른 아이라……. 좀 번거롭겠구나.”

전장에서의 추격은 늘 목숨을 담보로 한다. 그러나 이것은 즐거운 유흥이 아닌가.

속이면 속아 주고, 덫이면 걸려 주리라. 모든 것이 불타 폐허가 된 곳에서 아무것도, 단 한 사람도 건지지 못했다. 명귀춘의 인장. 그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륜은 자비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잡아다 주지. 대신 그 아이의 목이 비었다면, 그 모가지를 잘라 데려올 것이다.”

경방은 기겁을 하며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식은땀 한 방울이 툭 떨어진다.

“매은이 아끼는 아이입니다. 부디 조금이라도 상하지 않게…….”

“도망친 노비가 아니더냐. 그리 중요한 물건까지 들고.”

“치, 치죄는 매은의 몫입니다. 털끝 하나라도 상하지 않도록, 아, 않도록 해 주십시오.”

륜은 빙긋 웃으며 익비에게 채비를 명했다. 이제 막 마구간에 말을 맸던 호위들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주군의 명에 곧바로 도열했다. 걱정의 빛을 억지로 감추며 경방은 륜을 배웅했다. 가볍게 말 위에 오른 륜이 그보다 더 가볍게 말했다.

“너는 마음이 약하다. 그래선 소중한 걸 잃기가 쉽지.”

하하하, 웃는 륜의 말발굽 아래로 짧은 정오의 그림자가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