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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 *



빠르게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던 아령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말 탄 자들이 왜? 설마, 오라버니가 호위를 푸신 것인가.


「오라버니를 사이에 두고 비마마를 모실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투기하고 분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스스로의 길을 가고자 하니 이대로 놓아주십시오. 목숨을 구해 주시고 돌보아 주신 은혜는, 내세에 부부의 연으로 만나 갚겠습니다. 강건하십시오.」


고맙고 고마워 그에게 순종하였다.

노비 처소에서 일을 거들며 지냈다 하나, 문서에 매인 노비도 아니고. 설마 잡으러 오리라는 생각까지는 못 했다. 이별을 고했으니 당연히 놓아주리라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취라도 지우며 올 것을. 그러나 추격은 쉼 없이 계속된다.

게다 예사 호위들과 다르단 건 느낌뿐일까. 분명 산길에서 말을 끌고 다니려면 그녀보다 빠를 수가 없는데. 먼 점처럼 보였던 자들이 무서운 속도로 따라붙었다. 이 정도면 일각도 지나지 않아 발견될 것 같다.

문제는 시간. 아령은 주변을 샅샅이 돌아보곤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 마차도 다닐 수 있는 큰길 근처다. 한시가 급했지만 커다랗게 주변을 원처럼 돌아 큰길까지 발자국을 찍었다. 그러곤 다시 왔던 발자국을 조심히 밟고 흔적을 지우며 길 없는 곳을 찾아 미끄러졌다.

‘와아아아앗!’

볼기짝이 화끈화끈, 죽을 맛이다. 나뭇잎 덮인 산자락을 엉덩이로 내려왔다.

‘으아아, 으아아, 아이고 아프다!’

입을 막으며 주위를 얼른 살폈다. 도저히 멀리 갈 수가 없었다. 소리 없는 그림자처럼 그들은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많은 수가 움직이는데 소리조차 크지 않다. 진짜 호위들은 저리 무예들이 뛰어난가!

다행히 내려올 때 보아 둔 바위는 몸을 숨기기 적당했다. 진흙을 발라 얼굴에 흙칠을 했다. 바닥과 바위 사이에 난 틈에 몸을 오그려 끼웠다. 마른 나뭇잎을 그러모아 위장했다. 부디, 저들이 조금이라도 어리석어 놓쳤다 생각하길.

그러나 정작 저들은 아령을 아주 우습게 본 모양이었다. 산보를 하듯 기척조차 지우지 않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내려온다. 귀를 쫑긋 세웠다. 아직 내용은 들리지 않지만.

“발은 작은데 보폭이 어찌 이리 넓은지. 키는 큰가 봅니다? 그래도 사내의 발이 어찌 이리 작을까요.”

익비가 신기해하니 륜이 무심히 답했다.

“여인이다.”

“에이, 아닙니다. 여인네가 어찌 이리 뜁니까. 기본적으로 뛰는 힘이 다른데요.”

“발 사이를 봐라, 여인이다.”

“발 사이요?”

되묻던 익비는 합, 입을 다물었다. 보폭이 너무 넓어 생각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다리 사이에 무언가 붙어 있다면 발자국을 이리 똑바로 찍진 못한다.

“아니, 가영(佳影)궁 마마의 말씀으로는…….”

“그래, 나도 그의 말을 듣고 알았다. 족적으론 확인했을 뿐이고.”

‘갈포로 지은 낡은 고습을 입고 다닙니다. 열아홉이나 키가 작달막해 열다섯 내외로 보이지요. 무예가 출중하며, 발이 빠릅니다.’

그 어디에 계집이란 설명이 있었나. 익비는 상대를 읽고 튀어 버리는 륜의 언사가 늘 버거웠다. 피 튀기는 전장에서야 본능대로 움직였으나, 복잡한 정계 속 음모가 판치는 금성에선 행간을 읽기가 힘들었다. 모시기 버거울 정도로 뛰어나신 분.

익비는 침을 꼴깍 삼키고 또 한 번 혼날 각오를 했다.

“저, 발자국이 끊겼습니다.”

“그래. 멍청하게 한 바퀴를 따라 돌 뻔했구나.”

익비가 무어라 떠들려 할 때, 륜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조용히 댔다. 륜이 말에서 내려서자, 무리들이 일제히 따라 내려섰다.

륜은 입을 다문 채 마차 바퀴가 찍은 자취를 살폈다. 비가 그친 뒤 완전히 마르지 않은 땅에 여러 겹이 찍혀 있었다. 발자국이 사라진 곳은 마차가 멈췄다 다시 출발한 곳. 마치 그걸 얻어 타고 사라졌다 열심히 말하려는 듯했다.

“꽤 영악하구나.”

그러나 륜은 피식, 웃었다. 언뜻 보면 속을 수도 있겠으나 륜은 다르다. 계집의 발자국은 신선했고, 바퀴 자국은 희미하게나마 말라 가고 있었다.

매섭게 주위를 죽 둘러보던 륜의 얼굴에 심상찮은 빛이 떠오르자, 익비는 순간적으로 그의 의중을 알아챘다. 이런 동물적 교감은 그들에게 목숨과도 같다. 전장에서 적장들을 사로잡던 순간처럼, 익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륜은 이미 몸을 돌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나는 마, 마차를 잡아타고 갔나 봅니다. 마차 바퀴를 따라 내려갈까요?”

그러나 좀 형편없는 연기력. 륜은 웃음을 참으며 집게손가락으로 원을 크게 그렸다. 꽤 떨어진 바위 하나를 향해서.

주위에도 몸을 숨길 만한 큰 바위는 여럿이었지만, 륜이 지정한 바위는 딱 하나였다. 륜이 열 손가락을 펼치며 흩뿌리는 시늉을 하자, 따르던 수십의 호위들은 일제히 방사형으로 펼쳐졌다. 륜은 여상하게 답했다. 그의 연기력은 꽤 좋다.

“시간을 줄이려면 질러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마차는 꽤 빠르니, 두 발로 도망치는 것보단 잡기 어려울 것이다.”

“어, 어쩌지요? 이러다 놓칠 것 같습니다.”

“꽤나 미인인 것 같던데, 얼굴을 못 보면 아쉽겠구나.”

“아니, 미인이라 어찌 장담하시는지요?”

이번엔 익비가 정말로 궁금해하며 묻자, 륜은 빙그레 웃었다.

“아까워하며 내미는 게, 녀석이 미인계를 준비한 것 같다. 미인계에는 미인이 있지 않겠느냐. 장인의 유품을 훔친 도둑 말이다.”

“예에?”

알 수 없는 말에 오금이 저린 건 익비만이 아니었다. 기척을 숨기고 바위 아래 그림같이 숨어 있는데, 호위들은 이상하게도 딱 찍은 것같이 아령을 향해만 내려온다. 아령이 알아들은 건 마차 이야기부터였다.

미인계? 유품을 훔친 도둑? 나를 쫓던 게 아니었나?

그럼에도 등골이 오싹한 것은 본능. 사냥감이 된 특유의 쫓기는 느낌 때문이다. 숨소리조차 죽이며 눈알을 굴렸지만 더 이상 움직일 순 없다. 귀를 바싹 세워 들은 것은 분명 포위망을 좁혀 오는 발걸음. 속았구나!

사사삭, 마른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주위를 에워쌌다. 일부러 거짓 대화를 했어.

아령은 꿈틀대기 시작했다. 정말 단번에 날 발견한 걸까? 저 멀리서?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빨리 판단을 해야 했다. 이제 와 도망치는 건 날 잡아 주쇼, 하는 것. 그렇더라도 몸을 휘돌려 뛰기로 했다. 포위망이 더 좁혀지기 전에.

“……!”

그러나 이미 목이 선뜩했다. 날 선 검 끝이 지그시 목을 누른다.

“나와라.”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음성이었다.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하는 형체 없는 무인의 기백.

어찌 이리 기척을 싹 지우고 왔을까.

이런 사람은 처음 보기에, 그 무서운 기에 짓눌려 아령은 륜이 다소나마 장난기를 가지고 대한다는 걸 몰랐다.

“…….”

자괴감이 들었다. 어떻게 코앞까지 오는데도 몰랐을까. 입술을 깨물며 꼼짝 않자, 곧 무서운 협박이 이어졌다.

“빨리 나와라. 바위를 콱 눌러 짓이겨 줄까?”

다른 이의 우렁찬 소리. 아령은 화들짝 놀라 바위 밖으로 기어 나왔다. 여기저기서 하하하, 웃음이 터진다. 제길!

“꿇어라.”

누군가 오금을 차 무릎을 꿇렸다. 어이없이 굴종의 자세를 취하면서도 아령은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 수장은 저자다!

모두 똑같은 검은 무복을 입었으나 그냥 알았다.

큰 키에 너른 어깨, 검을 잡는 자 특유의 그을린 피부. 진한 눈썹과 우뚝한 코는 미남자라 할 만했으나 번들거리는 특유의 눈빛이 매서워 보는 사람을 저릿하게 한다. 가슴이 쿵, 떨어짐에도 아령은 그의 눈빛을 견뎠다.

익비가 경고했다.

“방자하구나. 눈을 내리깔지 못할까.”

그러나 륜의 손이 올라간다.

“모두들 긴장을 늦추지 마라.”

하지만 그만은 긴장을 완전히 푼 얼굴이었다. 스릉, 하고 검마저 치우곤 한 손가락으로 사로잡은 소년, 아니 여인의 턱을 들어 올린다.

이건 무슨 종류의 미인계인가. 여인은커녕 아이 같은데.

저쪽도 조용히 륜을 응시했다.

도도하리만치 당당한 눈빛. 그럼에도 그 눈빛이 투명하고 맑다.

더러운 진흙으로 문댔어도 이목구비가 반듯하다. 저 눈빛만큼이나 아름다울까. 갑자기 흥미가 생겨 륜은 그 얼굴을 닦아 내려 엄지를 뻗었다. 그러나 그 틈에, 아이는 짐승처럼 륜의 손을 콱 물었다.

“아얏!”

그러나 비명은 아령의 것. 이빨을 박아 넣기도 전에 그대로 어깨의 견정혈이 짚어졌다.

“아, 아얏. 아야야!”

꼼짝조차 못 하게 강렬한 전기가 흐른다. 아령은 아픈 중에도 화가 버럭 났다.

“가영궁 마마의 호위는 맞으십니까. 제가 그분을 피해 도망친 것은 맞습니다. 허나 어찌 이리 무례하십니까.”

“그래. 아아주, 미안하구나.”

그러나 륜은 빙글거리며 웃곤, 그대로 아령의 뒷덜미를 휙 잡아챘다. 아앗! 아령의 발이 땅에서 확 떨어졌다. 공중에 대롱대롱, 새끼 고양이처럼 매달렸다. 아령은 발버둥 쳤다.

“커컥, 노, 놓아…….”

분했다. 창피했다. 짜증이 났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흔들흔들, 흔들어 대기까지.

“네, 이노오옴! 이젠 경방 오라버니의 호위라도, 커컥. 안 봐줘…….”

아령은 재빨리 팔을 뻗어 사내의 손목 양계혈을 인정사정없이 콱, 짚었다. 그러곤 착지할 자세를 취하며 공중을 한 바퀴 돌려는데.

“아아앗! 아얏, 아야야.”

오히려 자신이 비명을 지른다. 그는 즐거워하며 클클거렸다.

“숨바꼭질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혈도를 짚을 줄도 아는구나. 혈은 이리 짚는 게다.”

사내는 복수하듯 아령의 손목 양계혈을 지그시 누르며 속삭였다.

“아아악. 아, 아, 아파!”

아령이 자지러지자, 곧바로 힘 조절을 해 줬지만 혈도를 짚는 건 여전했다.

“노, 놓아라. 놓지 못하겠느냐. 네 이놈들, 용서치 않겠다!”

그런 아령이 귀여웠는지 갑자기 웃는 사내의 웃음에, 그의 수하들도 재미있어하며 “하하.”, “낄낄.” 웃느라 난리가 났다.

아령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 솔직히 아픈 건 아니다. 치욕스럽고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놓아라, 내려놓으란 말이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바닥에 고이 놓였다. 함부로 던져질 줄 알았던 아령은 오랜만에 땅을 밟으면서 약간 휘청, 했다. 그러나 앗!

“능욕을 당하기 싫으면 도둑질은 말아야지.”

목이 허전하다. 놈은 황당한 소릴 하며 스승님이 주신 인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누가 도둑이고 누가 피해자란 말인가!

“이봐, 그건 내 거야!”

팔을 뻗었지만 아이의 물건을 빼앗듯 그대로 사내는 팔을 길게 뻗어 올렸다. 그리고 긴 줄을 가볍게 말아 소매에 넣는다. 재빨리 찾으려 하니 사내는 아령의 머리꼭지를 한 팔로 쿡, 밀어 버렸다.

“무슨 헛소리냐. 이 인장의 주인이 있다면 바로 나다.”

“아니, 이 미친놈이? 내 거야, 내놓으라고!”

이런 봉변이 또 없었다. 아령은 뒤늦게 깨달았다. 저들은 경방 오라버니의 호위일 리 없다. 경방 오라버니가 보냈다면 적어도 그녀를 이리 대하진 않을 것이다.

스승님이 주신 귀한 걸 빼앗긴 게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 큰 능욕을 당하거나 목숨까지 잃는 것보단 낫다.

아령은 눈물을 쓱, 훔치며 순간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놈은 목걸이를 넣은 소매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수하들은 경계가 흩어져 있었다. 언덕 위론 말들만이 우두커니 주인들을 기다린다. 언덕까지는 겨우 열 장의 거리. 아령은 순간적으로 뛰어올라 수하의 검 하나를 빼앗았다.

“아앗! 네, 네 이년!”

그리고 달렸다.

익비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사라질 만큼 아주 무서운 속도였다. 등 뒤로 시위에 살을 먹이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령은 개의치 않았다. 나무둥치를 등져 몸을 보호하며 큰길을 향해 냅다 뛰었다.

“잡아라!”

륜은 이를 악물었다. 발이 빠르다더니, 정말로 산짐승보다 더 빨랐다. 결국 아이는 눈 깜짝할 새 다람쥐처럼 언덕을 올라, 바람처럼 말 한 마리 위에 올라탔다. “히히힝!” 우는 말 울음소리. 그리고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의 울림이 저 멀리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