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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수의 포로입니다

(1화)



『애인이 미남입니다』, 『유턴후 직진입니다』, 『당신이 증상입니다』에 이은

「기하고등학교 4대 천왕」 그 마지막 이야기



<기하고등학교>의 4대 천왕이라 하면, 다음과 같다.

전형적인 마이웨이 스타일의 싹수머리 없는 ‘박사’ 서재필, 늘 혼자 움직이는 대체 불가 짱 ‘대장’ 민주한, 피아노 치는 우아한 뇌섹녀 ‘강신’ 강우연, 그리고 매너 좋기로 유명한 영재 초식남 ‘퀸’ 우해강. 그러니까 외모부터 재능까지 신이 특별히 신경 써서 어루만진 다음 세상에 내놓은 인종들. 하지만 사랑 앞에서만큼은 그들도 하늘의 덕을 누릴 수 없었으니, 다시 말해서 순전히 제 할 노릇이었던 것이었던 거시다.



프롤로그



1. 함수의 뜻

여러 값으로 변할 수 있는 변수 x와 y 사이에 ‘x의 값이 정해지면 그에 따라 y의 값도 정해진다.’는 관계가 있다 할 때, y를 x의 ‘함수’라 일컫는다. 비슷한 말로 ‘따름수’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를 식으로 표시하면 y=f(x)가 된다.

여기서 ‘함’은 옷이나 패물 등을 넣어 두는 나무 상자를 가리킬 때의 그 ‘함(函)’이다. 글자 생김새부터가 상자(凵) 안에 뭐가 잔뜩 들어 있는 모양이다. 혼인식 전에 신랑 쪽에서 예물이니 혼서지니 하는 것들을 상자에 바리바리 담아 신부 집에 지고 가 ‘함 사시오!’ 하는 일이 아직도 있다 할 적에, 그 함이 바로 이 함 되겠다.



2. y의 변(辯)

그녀가 오고 있다. 난 그녀가 어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초조하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초조하게. 나는 그녀가 오기 전엔 절대로 눈을 뜨지 않을 생각이다. 내가 눈을 떠 처음 보는 사람이 반드시 그녀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내 눈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 오로지 그녀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닌 이들이여. 나를 이해해 주길. 부디 내 사랑을, 이렇게밖에는 할 수 없는 내 사랑을 지지해 주길.



3. x의 변(辯)

그에게 가고 있다. 난 그에게 한시라도 빨리 닿기 위해 발을 재촉하고 있다. 서두르고, 서두르고 또 서두르면서. 물론 그 이후에 대해 나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 그럼에도 그가 눈을 떠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지금 그가 간절하게 기다리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는 나여. 이젠 솔직해지길. 부디 그가 가진 마음을, 그렇게 해 버린 그의 살아 있는 마음을 받아들이길.



4. y=f(x)

“나는요. 이렇게밖에는 얘기 못 하겠어요.”

“어떻게요?”

“나는 함수식에 사로잡힌 포로예요.”

“함수식이요? y=f(x), 그거요?”

“맞아요. 그러니까 난 거기서 y예요. x의 처분만 기다리는 y요.”

“낭만이라고는 바늘 한 땀만큼도 없는 비유네요.”

“아니요. 나한테는 바이런의 시(詩)보다도, 이상(李箱)의 연서(戀書)보다도 낭만적인 게 함수식이에요. 당신에 따라 내 값이 매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 내가 어떤 값으로든 존재하려면 당신이 괄호 안을 채워 줘야 한다는 거, 그걸 함수식만큼 명확하게 표현해 주는 건 없어요.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요.”

“네.”

“이거 사랑 같아요. 아니, 사랑 맞아요. 사랑이 아니면 내가 이럴 수는 없어요. 해 본 적 없어도 알 수 있어요. 사랑, 그거예요.”



1.1



단단히 박힌 뿌리의 깊이나, 버텨 선 줄기의 기울어진 각도나, 펼쳐진 가지가 차지한 공간의 넓이나, 매달린 작은 열매의 탐스러운 때깔이나, 모든 면에서 줏대 있어 보이는 나무들 틈을 비집고 잔디밭 구석구석 햇발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담 너머 길 건너 자동차 소리와 그 길 건너 땅 아래 지하철 진동이 어렴풋이 전해져 오는 도심 속 잔디밭 구석구석에 말이다.

그 구석 중에서도 더 구석에 은발의 노인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볕이 동글동글 뭉쳐진 듯 전부가 하얀, 전설에나 등장할 법한 신부새처럼 온통 하얀, 그런 노인이. 영필이었다. 그리고 그 노인을 향해 다른 은발의 노인이 전동 휠체어를 조심스럽게 굴려 다가갔다. 무지개를 버무려 놓은 듯 전부가 알록달록한, 동화책에나 나옴 직한 나뭇잎처럼 온통 알록달록한, 그런 노인이. 옥자였다.

“내, 벗님 여기 계실 줄 알았지. 직원한테 걸려서 또 혼나시려고. 그리고 내, 한두 번 말합디까? 자꾸 그렇게 앉으면 무릎 상한다니까.”

옥자가 영필을 향해 잔소리했다. 영필이 쪼그리고 앉은 구석까지는 휠체어 진입이 불가능한 탓에 옥자는 영필로부터 대략 3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주변을 힐긋거리며 소곤소곤, 그렇게 잔소리했다.

“옥이 성. 난…….”

영필이 꾸물꾸물 일어섰다.

“길 잃고 집 없는 것들이 너무 가여워. 내 새끼 생각나.”

옥자가 나타났어도, 영필이 움직였어도, 길고양이들은 느긋하게 먹는 일에 집중했다. 길고양이들 입장에서는 옥자도 영필만큼이나 낯이 익은 사람이어서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그날 앞두고 더 심란하신 게지.”

“그렇기도 하고.”

“아기 며느님 앞에선 표 내지 마시고.”

“안 그래.”

“알지. 그냥 내 오지랖이지.”

그동안 그릇을 싹싹 해치운 길고양이들이 차례대로 영필의 발목 주변을 한 바퀴씩 돌며 몸을 문지르고는 담을 넘어 사라졌다.

“헌데 벗님.”

“왜 또.”

“새로 온 모델 선생 말이야.”

“모델 선생? 그 선생이 왜.”

“우리 정윤이한테 붙여 볼까 하고 이래저래 계산해 봤거든?”

“그새?”

“어. 헌데 아니래. 만나면 백 날 천 날 싸울 팔자라고 나오더라고.”

보도블록 쪽으로 조심조심 걸어 나오던 영필이 다시 되짚어가 그릇을 챙겨 들었다. 옥자의 말에 대꾸하는 데 정신이 팔린 바람에 깜박 잊은 것이다. 그렇게 잊고 내버려 뒀다가 직원이 치워 버린 그릇이 벌써 몇 개째인지 몰랐다.

“안타까워 어쩐대.”

“재밌는 게 뭔 줄 아셔? 우리 정완이하고는 딱 떨어지는 상생이라는 거지.”

“어어? 정완이하고?”

“어. 나 원 참. 그 사주, 누나한테나 주지. 왜 지가 가져가고 그래.”

“그 사주 준 게 옥이 성이면서 뭘 아들 탓을 해.”

“아까워서 그러지. 모델 선생 맘에 든단 말이야. 새침한 게 귀엽잖아.”

새침. 당사자가 들으면 기함할 소리였다. 그러니까 팔순 노인의 눈에는 그런 성격이 ‘새침’의 영역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렇게나 맘에 들면 옥이 성이 꼬셔 봐.”

“꼬시면 넘어오게 생겼어?”

“건 아니고.”

영필 할머니가 풀밭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길고양이에게 무언가 준 흔적을 남겨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정원을 관리하는 직원은 길고양이를 정말 싫어했다.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뭐라도 해 보는 건데 말이야.”

“거기서 10년 젊어 봐야 주름살 하나 빠지는 거지. 그렇게나 옆에 두고 보고 싶으면 정완이 친구 삼아 주면 되겄네.”

“안 돼.”

“딱 떨어지는 상생이라며.”

“둘이 붙어 다니기 시작하면, 그날로 연애는 끝일 거거든.”

“그런 것도 있나?”

“재미있어도 어지간히 재미있는 관계가 아니란 거지. 부부라면 깨가 쏟아질 사이고, 형제라면 우애가 넘칠 사이지. 그러니 정 못 들게 해야지. 우리 정완이야 혼자 산다고 했지만, 모델 선생 인생까지 막을 수는 없잖아.”

“그 정도야?”

“둘 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내들이니 얄궂은 일이야 생길 리 없겠지마는, 그래도 친구끼리 너무 재밌으면 골치 아파져.”

“별…….”

“사람과 사람 사이란 게 별거별거 다 있는 법이니까.”

영필이 옥자 옆에 와서 섰다.

“밀어 드려?”

“지가 알아서 잘 굴러가는 걸 왜 굳이 힘써.”

맞는 말이었다. 전동 휠체어는 알아서 잘 굴러가기 시작했고, 영필은 휠체어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갔다.

“그냥 말해 봤어. 헌데.”

“뭐.”

“정완이 나이가 모델 선생보다 위 아닌가?”

“어. 여섯 살 많지.”

“여섯 살? 그럼 정윤이하고는 여덟 살 차이라는 건데, 그 늙어 빠진 처녀한테 젊디젊은 모델 선생을 붙일 심사였다고?”

“뭐 어때.”

옥자는 ‘늙어 빠진’이라는 표현에 노여워하지도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나이가 많다 뿐이지 어딜 가도 20대 아니냐는 소리를 듣는 딸이었다. 그리고 영필이 말하는 ‘늙어 빠진’이란, 나무랄 것 없는 처녀가 나이 좀 많다고 한물간 취급 받는 데 대한 정면 돌파 차원의 표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지금 정윤의 나이, 서른아홉에 결혼한 영필이었다. 지금이야 30대 비혼이 결코 흉이 아닌 세상이라고 해도, 그 시절의 서른아홉이면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인가. 감정 이입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옥이 성 지금 보니 순 날강도에 도둑년일세.”

“나도 알아. 내가 날강도에 도둑년이니까 잘난 사내 끼고 살았던 거야.”

“또 서방 자랑이다. 아니꼬워서는. 그 서방이고 이 서방이고 간에 세상 뜬 게 언제 적 일인데.”

“내 맘이지.”

영필이 잠시 멈춰 서서는 화단의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놓으면 예쁘겄네.”

“놓으셔.”

“손가락이 맘대로 움직여 줘야 놓지. 바늘구멍이고 실이고 당최 눈에 뵈지도 않고.”

“아기 며느님더러 놔 달라 그러든가.”

“왜 넘의 귀한 며느리 일 시키고 그래?”

“며느리는 무슨.”

“옥이 성은 왜 말이 앞뒤가 달라? 아기 며느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누구시더라?”

영필이 눈을 흘기자 옥자가 웃었다. 영필이 눈을 한 번 더 흘기고는 말을 돌렸다.

“정완이 내일 오나?”

“내일은 정윤이.”

“말 나온 김에 한마디 해야지. 정완이 그 옷 좀 어떻게 안 되나?”

“왜. 멋있기만 하구만.”

“멋은 무슨. 그게 멋이면 세상 멋 다 말라비틀어져 죽었지. 온통 꺼멓기만 한 게 뭔 멋이라고. 뻘건 것도 좀 입어 보라고 해 봐. 옥이 성이 좋아하는 색이잖여.”

“안 돼. 비단잉어처럼 보이면 어떡하라고.”

“저승사자처럼 보이는 것보다야 비단잉어로 보이는 게 낫지. 아님 다른 색깔이라도. 돈 잘 번다면서 그 돈 다 뭐 한대? 옷 좀 사라 해 보셔.”

“꺼멓다고 다 같은 옷이 아니야. 이 패션의 ‘패’ 자도 모르는 할망구야.”

“얻다 대고 할망구래, 이 쭈글렁방탱이 할망구가.”

실랑이하는 두 할머니의 머리 위로 뚱뚱한 비둘기 두 마리가 날렵한 날갯짓을 하며 쌔앵……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