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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수의 포로입니다

(2화)



재필은 <정신 건강 클리닉> 진료실 안의 푹신한 의자에 기대앉아 <효당의원>에서 넘어온 의무 기록들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훑어갔다. 이제 다음 주 월요일이면 정식으로 진료가 시작될 것이었다.

“한동안은 정신없겠지만 그 정도야 뭐. 수술방 드나드는 것도 아니고.”

재필은 출근 일주일, 아니 오늘이 금요일이니 정확하게는 닷새 만에 <효당마을> 213세대 전원에 대한 신상 파악을 완료했다. 도심 고급형 실버타운답게 입주자들의 면면은 퍽이나 다채로웠다. 아울러 입주자 자녀들의 직업군 또한 다양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의 직업이 입주자들에게 나름의 ‘스펙’이 되고 있었다. ‘내가 왕년에…….’가 아무리 구구절절해도 ‘내 자식이 지금…….’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집단에서건 ‘스펙’을 초월하는 인물은 있게 마련이었다. 재산이 많지 않아도, 자식이 사회적으로 대단히 명예롭지 않아도, 본인이 가진 에너지만으로 가장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영필 할머니와 장옥자 할머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상위 1%였다. 산술적으로도 일치했다. 213의 1%면 2.13이니까 정확히 두 명.

“그러니까 이 두 분이 효당의 실세란 거지.”

수수한 분재 스타일의 이영필 할머니는 언뜻 보기만 해도 품위가 뚝뚝 떨어지는 노인이었다. 무형 문화재 침선장인데, 안타깝게도 수년 전 급성 뇌졸중을 겪으면서 손에서 바늘을 놓았다. 신부로 선 지 몇 달 안 돼 남편을 잃었고, 혼주로 선 지 며칠 안 돼 아들마저 잃었지만, 하나 있는 며느리가 다른 입주자들의 자녀 열 사람 몫을 하고 있었다.

“침선장이라…… 바느질을 얼마나 잘하면 그걸로 무형 문화재가 되지?”

재필에게 오래전 <겨레대학병원> 응급실 앞에서 맞닥뜨렸던 은발 노인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스트레쳐카에 반듯하게 누워 있던 옥색의 고운 한복 차림만큼은 재필의 뇌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의식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살구색 두루마기로 이어졌다. 그 또한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봉긋한 이마에서 빛이 났다는 것만 생각날 뿐이었다.

“뭐…… 다 지나간 일…….”

그리고 잘 다듬어진 정원수 스타일의 장옥자 할머니는 무협 소설의 대가였던 소설가 견호중의 아내로 아주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화려한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모르는 거 빼곤 다 알아서 말발로 밀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딸 견정윤은 고등학교 수학과 교사, 아들 견정완은 점성학자였다. 옥자는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임에도 굉장히 활동적이었다.

“소설가의 아내라…… 재형이 생각나네.”

재필은 머리를 털고 다시금 모니터에 코를 박았다. <겨레대> 의대에서 알아주는 수재였던 재필이 실버타운 안에 새로 들어서는 <정신 건강 클리닉>에 가겠다고 했을 때, 한바탕 소동이 일었었다. 하지만 재필은 개의치 않았다. 당시 재필을 눈독 들이고 있던 스승에게 불려 간 자리에서 재필이 한 말은 이거였다.


‘저보다 하등 나을 거 없는 사람들 상대로 정치하면서 살기 싫습니다.’


그게 재필의 ‘마이 웨이 스타일’이었다. 종합 병원에서 한 단계씩 올라가려면 의술도 의술이지만 정치가 필수였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꽤 좋은 조건도 달려 있었다. 의대 시절, 재필과 툭하면 머리 맞대고 지내던 동기 동섭의 아버지가 바로 <효당마을>의 이사장 현준건이었다. 순환기 내과 전문의였던 준건이 어쩌다 실버산업에 뛰어들었는지 그 자세한 내막이야 알지 못하지만, 그가 의술보다 경영에 더 탁월하다는 건 <효당마을>의 성장이 증명하는 바였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그의 아들 동섭은 실버산업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동섭의 꿈은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폼 나는 성형 전문 병원을 운영하는 것이어서, 실버의 ‘실’이나 효당의 ‘효’ 소리만 들어도 천 리 밖으로 도망을 가 버리곤 했다. 그런 동섭이 준건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준건이 동섭을 통해 전해 온 말은 퍽 매력적이었다.


‘재필이 네가 효당으로 들어온다고만 하면 아버지가 클리닉 하나를 만들어 주시겠대. 안 그래도 필요하던 차였다고.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나중에 원장 맡기신다고. 서류 만들어서 공증도 해 주시겠대.’


그때 재필의 뇌를 스친 건 ‘원장’이라는 자리가 아니라 부모님인 서장군 약사와 정미인 약사의 안정된 노후였다. 거동이 불편해지면 <효당마을>로 모셔 오면 된다는. 아들인 자신이 하루 종일 지근거리에서 보살필 수 있다는. 물론 재필은 그런 내색까지는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신경과 전문의로서 재필이 <정신 건강 클리닉>에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문진 및 신체검사를 진행하고 신경학적 검사로 환자의 병소 위치를 파악한다. 그리고 방사선 검사, 신경 생리 검사, 신경 초음파 검사 등으로 질병의 내용을 확인한다. 뇌경색, 뇌출혈과 같은 신경계의 혈관 질환을 비롯해, 치매 등의 퇴행성 질환, 뇌전증이나 두통을 포함한 발작성 질환, 파킨슨병과 같은 이상 운동 질환, 그 외에도 대사성 질환과 감염 질환 등등 각 질환에 합당한 약물을 처방하거나 내과적 치료를 시행한다. 아울러 노인의 자연적 퇴화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장애에 관하여 상담하고, 일상생활이 가능하도록 건강 상태를 점검해 조언하며 가족과의 상담도 진행한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가장 많이 하게 될 일은 수면 장애 치료와 치매 예방이 될 것이었다. 상당수의 입주자들이 수면 장애에 시달리고 있었고, 대부분의 입주자들이 치매에 공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치매…… 무섭지.”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재필이 픽, 웃었다. 어머니 미인이었다.

“네에, 네에.”

― 안 잊어버렸지?

“네에, 네에.”

― 건성으로 대답할래?

“진지해요.”

― 꼭 봐. 내용 물어볼 거야.

“네에, 네에.”

용건으로만 이루어진 간단한 통화를 마무리하고 시간을 확인하니 9시 40분이었다. 2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재필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참, 별 시집살이를 다 해요.”

가족 중에 드라마 작가가 있다는 건 참으로 피곤한 일이라는 게 재필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그 드라마 작가의 아내가 자신의 쌍둥이 동생이고, 그 드라마 작가의 열성팬이 자신의 어머니인 경우라면 더 피곤할 수밖에 없다는 게, 수년 경험에 의한 재필의 결론이었다.

장르가 미스터리일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나름 머리 쓰는 재미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건 멜로였다. 어머니 미인은 사위의 첫 멜로라고 손뼉까지 치며 열광했지만, 재필은 도대체가 감정 이입이 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드라마 안에 누가 봐도 재수 없는 ‘자뻑 대마왕 찌질이’ 의사 캐릭터가 하나 나오고 있는데, 재필을 모델로 쓴 게 분명했다. 이름마저 서필재였다. 현기가 문자를 보내오기까지 했다. ‘너 나왔더라.’라고.

“우해강. 유치찬란하기로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자식. 나이를 똥꼬로 먹는 자식. 분풀이도 꼭 저처럼 해요. 차라리 악역이 낫지, 그게 뭐냐고.”

그럴 만했다. 서필재 관련 기사만 떴다 하면, 그런 밥맛없는 인종은 멸종시켜야 한다는 댓글이 주르르 달리는 판이었으니까.

재필이 컴퓨터는 그대로 둔 채, 핸드폰을 열어서 드라마 채널에 맞추었다. 드라마 때문에 방송국 어플을 다운받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인생이었는데 말이다.

“봅니다. 예, 봅니다. 팔자에 없는 멜로, 본다구요. 나도 사돈어르신처럼 당당하게 멜로는 안 본다고 선언할 수 있으면 좋겠다구요.”

그랬다. 해강의 아버지인 <우한진한의원> 원장 한진은 아들 부부에게 단단히 일러둔 터였다. 자신의 인생에 멜로는 없다고. 그러니 그리들 알고 섭섭해 말라고.

“서필재 씨가 오늘은 좀 조용하시려나 모르겠네요. 그렇게 마지막까지 일관성 있게 사고 치기도 쉽지 않은데, 에피소드도 어지간히도 많이 구해 놨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꾸역꾸역 시간이 흘러 내일이 종영이라는 사실이었다.

“설마 다음 거도 멜로는 아니겠지. 우해강 동창님 겸 매제님. 제발 나 좀 살려 줘라.”



*



은기는 낡은 패브릭 소파 위에 엎드려 있었다.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까무룩 잠든 새 신경이 너덜너덜해지도록 꾼 악몽 탓이었다. 심해에서 무언가가 자꾸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악몽. 그러다 물속으로 빠르게 끌려 들어가는 악몽. 온몸이 조여들어서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드는 악몽. 겪을 적마다 물의 힘이 어찌나 세던지. 그 투명한 것이 어쩜 그리도 우악스럽던지. 아니, 깊어질수록 칠흑같이 어두워지는 것이 어쩜 그리도 공포스럽던지.

‘아, 힘들어.’

애를 썼지만, 결국 오늘도 <시침 감침>의 문을 열지 못했다. 해마다 전날이면 그랬다. 희한했다. 당일은 그럭저럭 넘어가지는데 전날은 죽을 것만 같은 게, 정말 희한했다. 축제 전날이 더 들뜨는 것과 마찬가지인 건가.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당일인 25일보다 전날인 24일이 더 축제 같은 것처럼 말이다.

‘전날마다…… 죽겠어.’

그때였다. 까랑까라랑 까랑까라랑…….

핸드폰이 그렇게 한참 동안을 요란하게 울었다. 하지만 은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다.

까랑까라랑 까랑까…….

드디어 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 딩동, 문자음이 이어졌다. 은기는 이번에도 바로 움직이지 못했고, 거의 20여 분이 지나서야 간신히 손을 뻗어 핸드폰을 열었다.


[우리 딸, 일 많아?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오고 다닐 때 늘 조심하는 거 명심하고, 응? 명준이 아저씨도 오토바이 뒤집어지면서 다쳐 가지고 병원에 입원해 있어. 제 아빠 저러고 있는 거 알면 지은이 난리 날 텐데, 언제까지 속여지려나 몰라. 한 치 앞을 모른다더니 세상이 참말로. 아빠가 전화했던 건 별거 아니고. 별거가 아닌 게 아닌가? 저기, 내일…… 노 서방 기일이잖아. 그래서 했어. 맘 끓이지 말라고, 응? 우리 딸, 보고 싶네.]


‘아빠.’

은기는 살면서 아빠 춘호처럼 온유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조경사라 늘 보고 사는 게 자연이라 그런지 몰라도 춘호의 동그란 얼굴에서는 언제나 따뜻한 미소가 맴돌았다. 고모 춘희가 늘 그랬었다.

‘엄마 복 없는 대신 아빠 복은 두 배니까, 속으로도 울지 마.’

그나저나 명준이 아저씨가 다쳤다면 춘호의 속이 어지간히도 시끄러울 것이었다. 맘 터놓고 지내는 친구라고는 그 아저씨 하나인데, 그 아저씨마저 없으면 춘호가 얼마나 외로워질지 불 보듯 뻔했다. 도대체가 왜 두 남자 모두 그 흔한 연애 한 번을 안 하고 독수공방을 고집하는 건지.

‘아빠는 나 때문이지? 미안해. 근데 내가 이 꼴이라 미안해.’

은기는 발치에 있던 무릎 덮개를 끌어 올려선 끄트머리를 조금 말아 입 안에 틀어박았다. 그리고 더하거나 제한 것 없이 딱 낼 수 있는 만큼만 소리를 내서 울었다.

‘오빠는…… 한이 오빠는 어떤데요? 잘 지내고 있어요?’

아직 사랑이 아닌 상태에서 떠나 버린 남편이었다. 그래서 추억 대신 회한만 남았고, 그 회한은 사랑해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버무려져 고통이 되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서 죽을 거 같아요.’

한이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다정했고 친절했고 상냥했다. 그래서 친오빠처럼 따랐다. 하지만 1년 정도의 심심하고 담백했던 연애 끝에 시작된 그와의 결혼 생활은 고작 나흘이 전부였다. 신혼여행지에서 늦잠 자던 은기를 두고 혼자 웨이크보드를 타러 바다에 나가선 돌아오지 않은 때문이었다.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은기와 한이는 서류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으로 남았다. 그리고 한이는 여전히 실종 상태로 되어 있었다. 그가 사라지고 거의 9년이나 지났지만 영필이 사망 신고를 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한이 오빠. 내일 올 거죠? 와요. 와서 나하고 같이 가요. 우리 선생님 보러.’

한이가 떠나고 은기에겐 심각한 트라우마가 남았다. 부피가 큰 물에 대한 공포였다. 특히 바다에 대한 강력한 공포. 그러니 꿈에서 물을 보았다는 건, 심신이 모두 힘들다는 증거였다.

은기가 울음을 멈추고 입에서 엉망진창이 된 천 뭉치를 빼냈다. 그러곤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왜 울고 난리야. 뭘 잘했다고. 고은기가 울면 노한이가 얼마나 속상해했는데.’

울음이 속으로 흘렀다. 사방에 미안한 사람밖에 없어서, 괴롭고 또 괴로워서, 멈춰지지 않는 울음이 속으로 철철 흘렀다.



1.2



“짝꿍 어디다 버려두시고 혼자 계세요?”

“우리 벗님, 오늘은 그냥 둬야 해요.”

“무슨 일 있으세요?”

“오늘이 아들 기일이거든. 엄밀히 말하자면 실종된 날.”

옥자가 아주 간단하게 영필의 이야기를 전했다.

“본인 입으로는 절대 말 안 할 테니 내가 미리 언질을 주는 거예요. 뭔 일이 생길지 알아. 대강이라도 알고는 있어야지. 의사 양반이시잖아. 그것도 우리 정신머리 챙기는.”

“예. 잘 알아들었습니다.”

실종. 글자로만 알던 단어가 들이미는 현실성 앞에서 재필은 가슴께에 뻐근한 통증을 느꼈다. 자세마저도 숙연해지는 것이 ‘사망’이라는 단어보다도 무겁게 다가왔다.

“그나저나 우리 모델 선생은 어디 가시나?”

“친구가 요 앞에 온다고 해서요.”

“저번에 여자 친구 없다 그러지 않으셨던가?”

“없는 거 맞습니다. 성별이 궁금하신 거면, 안타깝게도 남자구요. 그런데 할머님. 왜 뒷말씀이 없으세요?”

“무슨 뒷말씀?”

“제 생년월일시 알아 가셨잖아요. 저 운 때 봐 주신다고.”

“아. 올해 큰 건이 하나 있다고 나오기는 했는데…….”

“큰 건이라. 기대되네요. 그런데요?”

“그냥 살던 대로 사시면 돼요.”

옥자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커다란 별에 대해서. 각막이 찢어져 나갈 정도로 눈부신 반짝이는 별에 대해서. 자신은 예언가가 아니니까 말이다. 어차피 닥쳐 봐야 알 일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