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함수의 포로입니다
(3화)
“흐흠. 혹시 할머님 그런 거세요? 선무당, 사이비.”
“사이비보다는 선무당 쪽.”
“이런. 할머님 오늘부터 제 블랙리스트 맨 윗자리세요.”
“블랙이든 화이트든, 맨 위는 다 좋아요. 꼴찌는 싫고. 중간은 더 싫고.”
해맑게 웃으며 손을 잡아 주는 옥자에게 예의 바른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재필은 <효당마을> 길 건너에 자리한 카페로 향했다. 주말이면 방문 손님들로 미어터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밖에서 들여다보이는 카페 안은 아직 한산한 편이었다. 문을 열자 제일 안쪽 구석에서 현기가 손을 흔들었다.
“안 흔들어도 알아본다.”
“서재필 얼굴 잊어버리는 줄 알았네.”
“이젠 여유 생겼으니까 앞으론 질리도록 봬 주마.”
“진료 준비는 잘돼 가?”
“어.”
현기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말로만 듣다가 처음 봤는데, 예쁘게 꾸며 놨더라.”
“뭐가? 우리 마을?”
“우리 마을? ‘우리’가 아주 자연스럽다?”
“말로만 듣다니? 네가 우리 마을을 어떻게 알아?”
“아, 그런 게 있다.”
갈수록 주둥이가 느슨해져서 큰일이네, 현기가 생각한 내용이었다.
“그런 거 뭐. 말 안 해?”
“집안일이다. 말하면 나 두들겨 맞아.”
“송현기는 나이 서른하나에 대위 달고서도 아버지한테 맞을 거 걱정해?”
“그래, 인마.”
“섭하다. 나도 예외로 안 해 주고.”
입으로 컵을 가져가던 재필의 눈이 순간 반짝했다.
“우해강도 모르는 거지?”
“여기서 해강이가 왜 나와. 너희들 뭐냐. 학생 때도 안 하던 경쟁질 여적 하고 있냐?”
“그게, 우해강이 분위기를 자꾸 그렇게 잡아 가니까 나도 휩쓸리는 경향이 있다.”
“별 진짜. 유치찬란한 것들.”
“유치찬란은 우해강만이지. 나는 아니야.”
“휩쓸린다며. 네 수준도 다르지 않으니까 휩쓸리는 거야. 해강이가 너한테서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그 무엇을 끄집어낸 거라고.”
재필이 한숨을 내쉬고는 하소연을 시작했다. 그 성격에 하소연이라니, 어마어마한 스트레스 속에서도 꿈쩍 않는 재필로선 의외의 상황이었다. 늘 그랬다. 재필의 인생에서 ‘우해강’이란 존재는 좀처럼 계산이 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였다.
“원초고 본능이고 이거고 저거고 간에 너도 생각을 좀 해 보라고, 내가 속이 터지는지 안 터지는지. 재형이랑 내가 엄마 배 속에서 열 달 동안 같이 산 게 너무 싫대. 게다가 몇 초 빨리 나왔다고 오빠라며 유세 떠는 건 더 싫대. 아니, 그게 내 탓이냐고? 근데 그걸 문제 삼으니까 나도 대응을 하는 수밖에.”
“어제오늘 일도 아니잖아. 이젠 그만 적응 좀 하지?”
“계속 시비 걸고 트집 잡는데 적응이 어떻게 되냐고. 그러니까 대답해 봐. 우해강도 모르는 거 맞아?”
“해강이도 제대로는 모르지. 해강이가 재형이 말고 다른 데 관심 두는 거 봤냐?”
“뭔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알긴 안다는 거네.”
“글쎄. 그걸 안다고 할 수나 있나.”
“너, 나중에 보자. 들통났는데 별거면 내가 전투기 날개 한 짝 분질러 버릴 거니까.”
“그러시든가. 근데, 말 나온 김에 얘기 좀 해 봐. 그 초딩 커플 어떻게 사는지. 가향에 있을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남해 쪽으로 내려간 후로는 얼굴 보기 정말 힘드네.”
재필이 조금 전보다 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마라.”
“표정 보게. 왜.”
“해강이가 엄마를 아주 완전히 제 편으로 만들어 놨어.”
재필의 ‘엄마’ 소리를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현기는 또 웃을 뻔했다. 재필은 아주 어려 어린이집 다닐 때만 해도 ‘어머니’라는 호칭을 썼었다. 작은엄마 말마따나 ‘웬만한 어른은 찜 쪄 먹게’ 생긴 애늙은이 자신에게는 ‘엄마’보다 ‘어머니’가 어울린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그러다 아픈 재형이 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 없던 어머니 미인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엄마’라고 부르며 가끔 어리광을 부린 것이 본격적인 ‘엄마’의 시작이었다.
재필은 이후 어리광을 그만두고 나서도 호칭만큼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재필의 ‘엄마’ 소리를 미인이 티 나게 좋아한 것이다. ‘어머니’라고 불렸을 때보다 훨씬 더. 그렇다 해도 재필은 누가 봐도 ‘어머니’가 어울리지 ‘엄마’가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어서, 재필의 입에서 ‘엄마’가 나올 적마다 현기는 진심으로 웃겼다.
“엄마가 주방에서 뭐 하고 계시면 바로 따라가 붙어 서서 옛날에 우리 재형이가 하면서 온갖 얘기 다 해. 그럼 엄마도 덩달아서 옛날에 우리 재형이가 그러면서 갖은 얘기 더 보태시지. 우해강의 지극정성 지고지순한 해바라기 사랑에 엄마가 완전 감동받으셔 가지고 우해강만 보면 입이 귀에 걸리셔. 맨발로 뛰어나가신다니까.”
현기가 웃음을 터뜨렸다. ‘안 봐도 비디오’였던 것이다.
“솔직히 나나 재형이가 곰살맞고 그런 성격이 아니긴 하지. 근데 우해강은 작정하면 애교가, 애교가…… 어우, 눈꼴 시려서. 식구들 모이면 엄마가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우리 사위’야. 좋은 건 전부 우해강한테 간다고. 그 꼴 볼 적마다 백일에 먹은 젖이 다 올라오겠어.”
“큭큭큭…… 암튼 해강이 대단하지.”
“근데 나, 우해강한테 배운 거 있어.”
“허. 지금 네 말 실화냐?”
배웠다고? 가르친 게 아니라? 현기는 진심 놀랐다.
“난 연인이든 부부든 서로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밖에선 조용한 게 맞다, 그랬거든. 둘이만 좋으면 되지, 밖에서까지 유별 떠는 건 아니다, 그랬다고.”
“어련하겠냐?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재필의 표정이 정말로 진지해서 현기는 더 놀랐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 친척들이 재형이 무시하고 좀 그랬잖냐. 나하고 늘 비교하고. 근데 우해강이 재형이를 마치 무수리가 중전마마 모시듯 하니까 이젠 다들 재형이를 함부로 못 하는 거야. 특히 작은엄마. 재형이만 보면 뭐 하나라도 부려 먹고 싶어서 안달이더니, 저번엔 과일을 다 챙겨 주더라니까. 것도 손수 깎아서.”
오죽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미인이 눈물을 다 글썽거렸을까. 기센 손윗동서와 아랫동서 사이에 끼어 변변한 주장 한 번 못 해 보고 산 세월이 30년이 넘었다. 특히 재형이라면 덮어놓고 무시부터 하는 아랫동서는 손쓸 도리가 없었다. 교묘하고 은근해서 순하고 선한 미인의 에너지로는 되받아칠 방법이 찾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손윗동서와 짝짜꿍이 맞는 판인지라 괜스레 건드렸다가는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해강이 나타나 분위기를 반전시켜 주었으니 감격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사위’가 ‘우리우리 사위’가 된 것이다.
“재형이도 자연스럽게 받더라고. 이젠 몸에 밴 거지. 맘이 좋더라. 진짜 좋더라. 우해강이 고맙고. 안에서 대접받는 짐승이 밖에서도 대접받는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더란 거지. 짐승도 그런데 사람은 오죽하겠어. 솔직히 나, 거기까진 생각 못 했거든. 우해강이 재형이한테 하는 거 보면 자기 자신은 아예 없는 것처럼 구는데, 그러니 누가 재형이를 건드리겠냐고. 감히. 그래서 나도 나중에 사람 생기면 그러려고. 다른 사람 앞에선 더 귀하게 대하려고. 누구도 함부로 못 하게.”
“와우, 브라보. 우해강이 서재필 조기교육 하나는 끝내주게 시켰네.”
현기가 박수까지 치며 엄지를 치켜들자 재필이 픽, 웃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겠는데?”
“뭐를?”
“그럴 사람이 생길 거는 같냐?”
재필이 한 번 더 픽, 했다. 언제나처럼 오른쪽 입꼬리만 살짝 올라갔다 내려오는 그런 픽, 이었다.
*
<효당마을>로 향하는 은기의 손엔 언제나처럼 보따리가 하나 가득이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영필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 가는 게 습관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새 모시적삼도 포함이었다. 쑥물을 들이고 소맷단에는 민들레를 작게 수놓았는데, 더위에 약한 영필에게 딱 맞춘 옷이었다.
은기가 침선장 이영필 선생을 만난 건 중3 겨울방학 때였다. 어려서부터 세상에서 바느질이 제일 좋았던 은기가 무턱대고 찾아간 것이다. 따로 제자를 두지 않았던 영필이었지만 은기에겐 한눈에 사로잡혔다. 그날 퇴근한 아들 한이를 붙들고 영필이 이렇게 말했었다.
‘직녀한테 아우가 있었으면 꼭 그 아이 같겠어.’
‘직녀가 아니고 직녀 아우요?’
‘직녀는 길쌈하잖여. 업종이 달라. 그리고 난 직녀 맘에 안 들어. 연애질하다 그 지경 된 거가 뭐가 예뻐.’
‘어머니도 참. 그래서 정말 받아 주시게요?’
‘그럴 생각이다.’
그때 그렇게 영필과 연을 맺은 은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예 영필의 거처로 몸을 옮겼다. 춘호도 적극 찬성했다. 영필이 운영하던 <시침 감침>이 집에서 너무 멀어 그때까지 오고 가느라 힘들었다는 게 첫째 이유였고, 어차피 춘호가 한 달의 반 이상은 집을 비우는 상황에서 굳이 부녀가 함께 지내야 한다고 고집부릴 이유가 없다는 게 둘째 이유였고, 무형 문화재의 제자로 그 뒤를 이으려면 영필의 옆에 붙어 있는 게 합리적이라는 게 셋째 이유였다.
영필이 쓰러진 후에도 2년간은 은기가 직접 시중을 들었다. 제자로서 그리고 며느리로서. 하지만 영필은 계속 함께 살자는 은기에게 요양원에 가겠다고 고집했다.
‘제가 부담되세요?’
‘오냐. 이젠 부담이 되는구나.’
‘선생님.’
‘이럴 때 영화에선 그러더구나. 하산하여라.’
‘더 가르쳐 주셔야지요.’
‘하산하라니까 그러네. 다만 안타까운 건 너를 전수조교로 등록해 주지 못한 것인데.’
‘아시잖아요. 그쪽으론 마음 별로 없는 거.’
‘나 부담 덜라고 그렇게 말하는 거 안다.’
‘정말이에요.’
‘오냐. 그럼 그런 걸로 하지, 뭐.’
‘선생님.’
‘나, 심심해. 맘 맞는 늙은이들 만나서 편히 놀고 싶다고.’
하지만 은기가 영필의 거처로 택한 곳은 일반 요양원이 아니라 실버타운 <효당마을>이었다. 몸이 살짝 불편하긴 해도 심신이 강건한 노인을 아픈 노인들과 함께 둘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입주 경비는 영필의 재산으로 충당했고, 매달 들어가는 비용은 은기가 감당하고 있었다. 그런 은기를 <효당마을> 입주자들은 ‘아기 며느님’이라 부르며 거의 신성시하다시피 했다.
은기가 ‘아기 며느님’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팔순 영필에게 스물아홉 은기면 거의 손녀뻘이었지만, 영필이 결혼을 원체 늦게 해 마흔이 넘어서야 아들 한이를 본 데다, 한이와 은기가 열 살이나 차이지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어쨌거나 은기는 침선장 이영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영필에게 은기는 제자이자, 며느리이자, 딸이자, 동료이자 그리고 친구였다. 반면, 은기는 단순했다. 은기에게 영필은 존경하는 스승이면서 어려서 헤어진 엄마 대신이었다.
“들어 드릴까요?”
난데없는 기척에 은기가 고개를 돌렸다. 재필이었다. 은기는 진심으로 놀라선 자신도 모르게 ‘아빠야.’ 할 뻔했다.
“놀라게 해 드렸나 보네요. 무거워 보여서요.”
은기가 놀란 이유를 자신이 갑자기 말을 건 때문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재필이 알 턱이 있나.
“아, 저는 여기 의료센터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네.”
“주세요.”
재필이 거의 빼앗다시피 은기의 보따리를 가져갔다.
“온 지 이제 일주일 됐거든요. 오다가다 보면 가끔 마주치게 될 텐데 기억해 두세요. 근데 어느 분 뵈러 오셨어요?”
“이영필 선생님요.”
“아. 혹시 말로만 듣던 아기 며느님이세요?”
은기는 그냥 웃었다. 그 웃음을 힐끗한 재필이 멈칫, 했다가 다시 움직였다. 가슴이 철렁했던 것이다.
‘뭐야. 왜 이래.’
(3화)
“흐흠. 혹시 할머님 그런 거세요? 선무당, 사이비.”
“사이비보다는 선무당 쪽.”
“이런. 할머님 오늘부터 제 블랙리스트 맨 윗자리세요.”
“블랙이든 화이트든, 맨 위는 다 좋아요. 꼴찌는 싫고. 중간은 더 싫고.”
해맑게 웃으며 손을 잡아 주는 옥자에게 예의 바른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재필은 <효당마을> 길 건너에 자리한 카페로 향했다. 주말이면 방문 손님들로 미어터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밖에서 들여다보이는 카페 안은 아직 한산한 편이었다. 문을 열자 제일 안쪽 구석에서 현기가 손을 흔들었다.
“안 흔들어도 알아본다.”
“서재필 얼굴 잊어버리는 줄 알았네.”
“이젠 여유 생겼으니까 앞으론 질리도록 봬 주마.”
“진료 준비는 잘돼 가?”
“어.”
현기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말로만 듣다가 처음 봤는데, 예쁘게 꾸며 놨더라.”
“뭐가? 우리 마을?”
“우리 마을? ‘우리’가 아주 자연스럽다?”
“말로만 듣다니? 네가 우리 마을을 어떻게 알아?”
“아, 그런 게 있다.”
갈수록 주둥이가 느슨해져서 큰일이네, 현기가 생각한 내용이었다.
“그런 거 뭐. 말 안 해?”
“집안일이다. 말하면 나 두들겨 맞아.”
“송현기는 나이 서른하나에 대위 달고서도 아버지한테 맞을 거 걱정해?”
“그래, 인마.”
“섭하다. 나도 예외로 안 해 주고.”
입으로 컵을 가져가던 재필의 눈이 순간 반짝했다.
“우해강도 모르는 거지?”
“여기서 해강이가 왜 나와. 너희들 뭐냐. 학생 때도 안 하던 경쟁질 여적 하고 있냐?”
“그게, 우해강이 분위기를 자꾸 그렇게 잡아 가니까 나도 휩쓸리는 경향이 있다.”
“별 진짜. 유치찬란한 것들.”
“유치찬란은 우해강만이지. 나는 아니야.”
“휩쓸린다며. 네 수준도 다르지 않으니까 휩쓸리는 거야. 해강이가 너한테서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그 무엇을 끄집어낸 거라고.”
재필이 한숨을 내쉬고는 하소연을 시작했다. 그 성격에 하소연이라니, 어마어마한 스트레스 속에서도 꿈쩍 않는 재필로선 의외의 상황이었다. 늘 그랬다. 재필의 인생에서 ‘우해강’이란 존재는 좀처럼 계산이 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였다.
“원초고 본능이고 이거고 저거고 간에 너도 생각을 좀 해 보라고, 내가 속이 터지는지 안 터지는지. 재형이랑 내가 엄마 배 속에서 열 달 동안 같이 산 게 너무 싫대. 게다가 몇 초 빨리 나왔다고 오빠라며 유세 떠는 건 더 싫대. 아니, 그게 내 탓이냐고? 근데 그걸 문제 삼으니까 나도 대응을 하는 수밖에.”
“어제오늘 일도 아니잖아. 이젠 그만 적응 좀 하지?”
“계속 시비 걸고 트집 잡는데 적응이 어떻게 되냐고. 그러니까 대답해 봐. 우해강도 모르는 거 맞아?”
“해강이도 제대로는 모르지. 해강이가 재형이 말고 다른 데 관심 두는 거 봤냐?”
“뭔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알긴 안다는 거네.”
“글쎄. 그걸 안다고 할 수나 있나.”
“너, 나중에 보자. 들통났는데 별거면 내가 전투기 날개 한 짝 분질러 버릴 거니까.”
“그러시든가. 근데, 말 나온 김에 얘기 좀 해 봐. 그 초딩 커플 어떻게 사는지. 가향에 있을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남해 쪽으로 내려간 후로는 얼굴 보기 정말 힘드네.”
재필이 조금 전보다 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마라.”
“표정 보게. 왜.”
“해강이가 엄마를 아주 완전히 제 편으로 만들어 놨어.”
재필의 ‘엄마’ 소리를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현기는 또 웃을 뻔했다. 재필은 아주 어려 어린이집 다닐 때만 해도 ‘어머니’라는 호칭을 썼었다. 작은엄마 말마따나 ‘웬만한 어른은 찜 쪄 먹게’ 생긴 애늙은이 자신에게는 ‘엄마’보다 ‘어머니’가 어울린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그러다 아픈 재형이 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 없던 어머니 미인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엄마’라고 부르며 가끔 어리광을 부린 것이 본격적인 ‘엄마’의 시작이었다.
재필은 이후 어리광을 그만두고 나서도 호칭만큼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재필의 ‘엄마’ 소리를 미인이 티 나게 좋아한 것이다. ‘어머니’라고 불렸을 때보다 훨씬 더. 그렇다 해도 재필은 누가 봐도 ‘어머니’가 어울리지 ‘엄마’가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어서, 재필의 입에서 ‘엄마’가 나올 적마다 현기는 진심으로 웃겼다.
“엄마가 주방에서 뭐 하고 계시면 바로 따라가 붙어 서서 옛날에 우리 재형이가 하면서 온갖 얘기 다 해. 그럼 엄마도 덩달아서 옛날에 우리 재형이가 그러면서 갖은 얘기 더 보태시지. 우해강의 지극정성 지고지순한 해바라기 사랑에 엄마가 완전 감동받으셔 가지고 우해강만 보면 입이 귀에 걸리셔. 맨발로 뛰어나가신다니까.”
현기가 웃음을 터뜨렸다. ‘안 봐도 비디오’였던 것이다.
“솔직히 나나 재형이가 곰살맞고 그런 성격이 아니긴 하지. 근데 우해강은 작정하면 애교가, 애교가…… 어우, 눈꼴 시려서. 식구들 모이면 엄마가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우리 사위’야. 좋은 건 전부 우해강한테 간다고. 그 꼴 볼 적마다 백일에 먹은 젖이 다 올라오겠어.”
“큭큭큭…… 암튼 해강이 대단하지.”
“근데 나, 우해강한테 배운 거 있어.”
“허. 지금 네 말 실화냐?”
배웠다고? 가르친 게 아니라? 현기는 진심 놀랐다.
“난 연인이든 부부든 서로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밖에선 조용한 게 맞다, 그랬거든. 둘이만 좋으면 되지, 밖에서까지 유별 떠는 건 아니다, 그랬다고.”
“어련하겠냐?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재필의 표정이 정말로 진지해서 현기는 더 놀랐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 친척들이 재형이 무시하고 좀 그랬잖냐. 나하고 늘 비교하고. 근데 우해강이 재형이를 마치 무수리가 중전마마 모시듯 하니까 이젠 다들 재형이를 함부로 못 하는 거야. 특히 작은엄마. 재형이만 보면 뭐 하나라도 부려 먹고 싶어서 안달이더니, 저번엔 과일을 다 챙겨 주더라니까. 것도 손수 깎아서.”
오죽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미인이 눈물을 다 글썽거렸을까. 기센 손윗동서와 아랫동서 사이에 끼어 변변한 주장 한 번 못 해 보고 산 세월이 30년이 넘었다. 특히 재형이라면 덮어놓고 무시부터 하는 아랫동서는 손쓸 도리가 없었다. 교묘하고 은근해서 순하고 선한 미인의 에너지로는 되받아칠 방법이 찾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손윗동서와 짝짜꿍이 맞는 판인지라 괜스레 건드렸다가는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해강이 나타나 분위기를 반전시켜 주었으니 감격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사위’가 ‘우리우리 사위’가 된 것이다.
“재형이도 자연스럽게 받더라고. 이젠 몸에 밴 거지. 맘이 좋더라. 진짜 좋더라. 우해강이 고맙고. 안에서 대접받는 짐승이 밖에서도 대접받는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더란 거지. 짐승도 그런데 사람은 오죽하겠어. 솔직히 나, 거기까진 생각 못 했거든. 우해강이 재형이한테 하는 거 보면 자기 자신은 아예 없는 것처럼 구는데, 그러니 누가 재형이를 건드리겠냐고. 감히. 그래서 나도 나중에 사람 생기면 그러려고. 다른 사람 앞에선 더 귀하게 대하려고. 누구도 함부로 못 하게.”
“와우, 브라보. 우해강이 서재필 조기교육 하나는 끝내주게 시켰네.”
현기가 박수까지 치며 엄지를 치켜들자 재필이 픽, 웃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겠는데?”
“뭐를?”
“그럴 사람이 생길 거는 같냐?”
재필이 한 번 더 픽, 했다. 언제나처럼 오른쪽 입꼬리만 살짝 올라갔다 내려오는 그런 픽, 이었다.
*
<효당마을>로 향하는 은기의 손엔 언제나처럼 보따리가 하나 가득이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영필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 가는 게 습관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새 모시적삼도 포함이었다. 쑥물을 들이고 소맷단에는 민들레를 작게 수놓았는데, 더위에 약한 영필에게 딱 맞춘 옷이었다.
은기가 침선장 이영필 선생을 만난 건 중3 겨울방학 때였다. 어려서부터 세상에서 바느질이 제일 좋았던 은기가 무턱대고 찾아간 것이다. 따로 제자를 두지 않았던 영필이었지만 은기에겐 한눈에 사로잡혔다. 그날 퇴근한 아들 한이를 붙들고 영필이 이렇게 말했었다.
‘직녀한테 아우가 있었으면 꼭 그 아이 같겠어.’
‘직녀가 아니고 직녀 아우요?’
‘직녀는 길쌈하잖여. 업종이 달라. 그리고 난 직녀 맘에 안 들어. 연애질하다 그 지경 된 거가 뭐가 예뻐.’
‘어머니도 참. 그래서 정말 받아 주시게요?’
‘그럴 생각이다.’
그때 그렇게 영필과 연을 맺은 은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예 영필의 거처로 몸을 옮겼다. 춘호도 적극 찬성했다. 영필이 운영하던 <시침 감침>이 집에서 너무 멀어 그때까지 오고 가느라 힘들었다는 게 첫째 이유였고, 어차피 춘호가 한 달의 반 이상은 집을 비우는 상황에서 굳이 부녀가 함께 지내야 한다고 고집부릴 이유가 없다는 게 둘째 이유였고, 무형 문화재의 제자로 그 뒤를 이으려면 영필의 옆에 붙어 있는 게 합리적이라는 게 셋째 이유였다.
영필이 쓰러진 후에도 2년간은 은기가 직접 시중을 들었다. 제자로서 그리고 며느리로서. 하지만 영필은 계속 함께 살자는 은기에게 요양원에 가겠다고 고집했다.
‘제가 부담되세요?’
‘오냐. 이젠 부담이 되는구나.’
‘선생님.’
‘이럴 때 영화에선 그러더구나. 하산하여라.’
‘더 가르쳐 주셔야지요.’
‘하산하라니까 그러네. 다만 안타까운 건 너를 전수조교로 등록해 주지 못한 것인데.’
‘아시잖아요. 그쪽으론 마음 별로 없는 거.’
‘나 부담 덜라고 그렇게 말하는 거 안다.’
‘정말이에요.’
‘오냐. 그럼 그런 걸로 하지, 뭐.’
‘선생님.’
‘나, 심심해. 맘 맞는 늙은이들 만나서 편히 놀고 싶다고.’
하지만 은기가 영필의 거처로 택한 곳은 일반 요양원이 아니라 실버타운 <효당마을>이었다. 몸이 살짝 불편하긴 해도 심신이 강건한 노인을 아픈 노인들과 함께 둘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입주 경비는 영필의 재산으로 충당했고, 매달 들어가는 비용은 은기가 감당하고 있었다. 그런 은기를 <효당마을> 입주자들은 ‘아기 며느님’이라 부르며 거의 신성시하다시피 했다.
은기가 ‘아기 며느님’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팔순 영필에게 스물아홉 은기면 거의 손녀뻘이었지만, 영필이 결혼을 원체 늦게 해 마흔이 넘어서야 아들 한이를 본 데다, 한이와 은기가 열 살이나 차이지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어쨌거나 은기는 침선장 이영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영필에게 은기는 제자이자, 며느리이자, 딸이자, 동료이자 그리고 친구였다. 반면, 은기는 단순했다. 은기에게 영필은 존경하는 스승이면서 어려서 헤어진 엄마 대신이었다.
“들어 드릴까요?”
난데없는 기척에 은기가 고개를 돌렸다. 재필이었다. 은기는 진심으로 놀라선 자신도 모르게 ‘아빠야.’ 할 뻔했다.
“놀라게 해 드렸나 보네요. 무거워 보여서요.”
은기가 놀란 이유를 자신이 갑자기 말을 건 때문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재필이 알 턱이 있나.
“아, 저는 여기 의료센터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네.”
“주세요.”
재필이 거의 빼앗다시피 은기의 보따리를 가져갔다.
“온 지 이제 일주일 됐거든요. 오다가다 보면 가끔 마주치게 될 텐데 기억해 두세요. 근데 어느 분 뵈러 오셨어요?”
“이영필 선생님요.”
“아. 혹시 말로만 듣던 아기 며느님이세요?”
은기는 그냥 웃었다. 그 웃음을 힐끗한 재필이 멈칫, 했다가 다시 움직였다. 가슴이 철렁했던 것이다.
‘뭐야.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