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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서점 3화
1. 오후 3시 (3)
“사장님?”
부르는 소리에 머릿속 잡념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사람을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다니…… 이게 무슨 실례야. 창피함이 밀려왔다. 이게 다 예쁜 마루 씨의 눈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상한 내용을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으니,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적당한 구실을 찾았다. 둥그렇게 흘린 시선 끝에 네모난 우유갑이 보였다.
“혹시, 저 우유 마루 씨가 넣어 두고 간 거예요?”
마루 씨는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을 보더니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그렇게 넘어가 주신 게 감사하기도 하고…… 뭔가 들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우편함에요?”
“네. 볼 때마다 비어 있어서요. 아깝잖아요. 저렇게 예쁜데.”
우체부 아저씨도 신경 쓰지 않는 우편함인데. 나 말고도 한 번씩 봐 주는 사람이 있었다 생각하니 묘하게 기분이 들떴다.
“고마워요. 안 그래도 선물 받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그럼 매일 넣어 놓을게요!”
“네?”
“아, 부담스러워 안 하셔도 돼요. 원래 제 몫으로 받는 거라. 저 새벽에 우유 배달하거든요.”
그제야 우비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새벽에 일찍 나온 이유가 거기 있었구나. 가슴 한 켠에 기쁜 마음이 피어오르는 동시에 걱정스러운 물음이 솟아났다. 나한테 주고 나면 마루 씨는 못 마시는 거 아닌가?
“저 주면 마루 씨는요?”
“사장님은 저 책 읽게 해 주시잖아요.”
“그래도 조금 미안한데.”
“……사장님,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시려고 그래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루 씨한테 저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저 순박한 얼굴을 하고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이 말하는데, 이어 붙는 잔소리가 나쁘지 않아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지금 누굴 걱정하는 거야.
“이거 사장님이 손해 보는 거래예요. ‘우유 하나로 여기 책을 모두 읽겠다고? 이런 염치없는 녀석!’ 이렇게 화내는 게 정상이라구요.”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한 손을 허리춤에 얹은 채 어디서 본 것 같은 가게 사장 말투를 흉내 내는 마루 씨의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실제로 마루 씨 말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요. 사장님 착하다는 말 많이 듣죠?”
“아닌데. 굉장히 낯설게 들리네요, 그거.”
미친놈. 싸가지. 독재자. 무뢰한. 제법 익숙하게 들은 단어들이 머리 위로 죽 나열되었다. 딱히 마루 씨 입을 통해 듣고 싶지는 않은 말들이었다. 나는 부정적인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궁금한 몇 가지 질문 중 하나를 물었다.
“그럼 이 시간까지 우유 배달하는 거예요?”
“아뇨. 배달은 오전 8시 반까지 끝나구요, 그 뒤에는 카페에서 일하고 있어요. 보통 마치고 오는 시간이 지금이에요.”
부지런하네. 서점 오픈 시간보다도 마루 씨의 두 번째 일과가 먼저 시작된다는 말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자니, 꽤 절망적인 스케줄 표가 완성되었다. 마루 씨가 서점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지나치게 일정했기 때문이다.
“설마 5시쯤에 가는 이유가?”
마루 씨는 내 짐작이 맞는다는 듯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네. 편의점 알바 하거든요.”
“그렇군요. 가는 시간이 일정해서 그냥 물어본 거예요.”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렸길 바란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스케줄이었다. 어떻게 저걸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 주말에도 서점에 오는 걸 보면, 일주일 내내 쉴 틈이 없다는 소리인데도 마루 씨는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왜…….”
왜 그렇게 쉬지 않고 일해요? 하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종종 아버지는 내가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들이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나무랐다. 지금까지 겪어 온 수많은 상황들을 대입해 봤을 때, 지금은 말을 아낄 때라는 판단이 섰다. 내가 말을 가리며 뱉을 줄이야. 장태하가 알면 혀를 내두를 일이다.
나는 하려던 말이 아닌 조금 더 그럴듯한 칭찬을 해 보기로 했다.
“기특하네요. 열심히 하는 모습이.”
“아…… 고맙습니다.”
다행히 썩 듣기 좋은 말이었는지, 마루 씨의 볼 위로 붉은 홍조가 옅게 퍼졌다.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괜히 나까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서 카운터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의미 없는 행동을 했다. 붕 떠 버린 정적을 깨우기 위해, 입에서는 실없는 소리가 나갔다.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너무 아저씨처럼 말한 건 아닌가 싶네요.”
“예?!”
마루 씨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많이 놀랐는지 눈까지 크게 뜨였다. 저건 또 무슨 반응이지. 얼른 답을 해 달라는 의미로 빤히 보고 있으니 당황한 얼굴 위로 난처한 기색이 스몄다. 팔자로 처진 눈썹이 마루 씨의 미안함을 대신 전했다.
“아뇨, 당연히 서른 이상일 거라 생각했거든요.”
“서른……이요?”
진짜로, 상처받았다. 이번엔 도저히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아마 착잡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을 것이다. 마루 씨는 저 멀리 날아가는 내 멘탈을 다급하게 붙잡아 보려 노력했다.
“그, 나이 들어 보인다는 게 아니라 사장님이잖아요. 이렇게 멋진 가게를 가졌으니까 당연히 그 정도는 될 줄 알았어요.”
그런 노력에도 갑작스럽게 입은 심리적 타격은 회복되지 못했다. 어쩐지 앞에서 지나치게 쭈뼛거리더라니. 나이가 많은 줄 알았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결혼도 하고 애도 셋 정도 있을 법하게 생겼지 내가. 곱씹을수록 침울해지는 마음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
내가 한숨까지 쉬어 대니 마루 씨는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들고 있던 컵까지 놓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다가 결국에는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귀엽지? 조금더 당황해 하는 걸 보고 싶어서 펼친 손으로 웃는 입을 가렸다. 말을 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던 마루 씨는 다급한 손길로 자신의 가방을 뒤졌다.
“책, 책 얘기 해요!”
우는 아이의 손에 사탕을 쥐여 주듯이, 좋아하는 주제로 말을 돌려 보려는 모습이 필사적이었다. 휙 들어 올린 양손에는 노트 하나가 들려 있었다. <독서 노트>라고 쓰여 있는 양장 노트는 얼마나 오래 쓴 건지 옆면이 다 닳아 있었다. 대화 주제를 넘기려는 목적이었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주 보는 얼굴에 설레는 마음이 잔뜩 묻어났다. 걷잡을 수 없이 미소가 번져 갔다.
나만 기대한 게 아니었구나. 그건 생각보다 더 근사한 기분이 들게 했다.
마루 씨의 독서 노트는 내가 이름만 보고 짐작한 것처럼 단순히 독서 내용을 기록하는 노트는 아니었다. 거기엔 취향을 찾아가는 세월이 모두 담겨 있었다. 파란색 민무늬 표지는 구불거리는 글씨로 <독서 노트>라고 써 넣은 것 외에, 곰돌이와 고양이, 도넛, 개나리 등의 전혀 연관성 없는 그림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솜씨는 그리 좋지 않았음에도 무슨 그림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게 신기했다.
취향은 생각보다 더 비슷했다. 나는 주로 일상의 평범함이 묻어 있는 소설을 좋아하는데, 그와 반대로 피와 살인이 낭자하는 추리 소설에도 심장이 뛰곤 했다. 이 극과 극을 넘나드는 독서 형태를 본 친구들은 책 읽는 것마저 범상치 않은 또라이 같다며 치를 떨곤 했었다.
그런데 타인의 입장으로 보니 이건 또 달랐다. 노트의 반을 갈라서 장르별로 구분해 놓은 마루 씨의 독서 노트는 장르마다 쓴 감상문의 성격도 딱 반으로 나눈 것처럼 달랐는데, 그게 꼭…… 착하고 바른 학생의 정직한 일탈 같달까. 페이지마다 널을 뛰는 감상 기준이 호기심 많은 아이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처음 그 독서 노트를 본 날 이후로 우리는 꽤 많은 이아기를 나누었다. 마루 씨는 지난번에 사 갔던 <호텔 선인장>의 등장인물 중 오이가 나와 비슷하고 모자가 자신과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것 같다며 웃어 버렸다.
하루는 <백설 공주에게 죽음을>이라는 책을 추천 도서 코너에서 실컷 읽다가 쪼르르 달려와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데, 그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여기 아멜리라는 소녀가 10년 형이나 살다 나온 죄수 얼굴에 홀려서 사건 조사를 하기 시작하잖아요.’
‘토비아스 맞죠?’
‘네. 사장님 얼굴을 대입하니까 확 몰입이 돼요.’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가 한참이나 생각했다.
‘잘생겼다구요.’
자주 듣는 식상한 말이라 생각했는데, 마루 씨가 환하게 웃으며 말해 주니 책 속의 한 구절처럼 와닿는 게 참 이상하기도 하다.
그런 날들이 많아졌다. 오후 3시가 다가오면 남모르게 설레며 입고 있는 셔츠 깃이 삐뚤어지진 않았나 확인하는 날들.
커피 머신만 덩그러니 놓여 있던 책장 옆 구석에는 어느 순간부터 다과를 담은 트레이가 함께 놓였고, 추천 도서 코너에는 먼지 한 톨 앉는 책이 없었다. 오롯이 내 취향이었던 그곳에는 그중에서도 조금 더 마루 씨의 취향에 근접한 책들로 꾸려지기 시작했다.
‘와. 사장님 너무 신기해요. 이렇게 쌓여 있는 책 중에 마음에 안 드는 책이 어떻게 단 한 권도 없죠?’
당연하지. 그럴 수밖에 없는 책들만 올려놨는데. 하지만 그저 우연으로 가장하고 싶어서, 나는 덩달아 신기한 척 연기를 해야 했다.
‘우와. 그러게요. 어떻게 매번 마루 씨 마음에 들지?’
빨개진 귀를 괜히 만지작거리면서, 들키지 않게 차분히 가렸다.
마루 씨는 처음엔 내 앞에서 독서 노트를 펼치기 조금 부끄러워하더니, 이제 책을 읽다 쓰고 싶은 구절이 생기면 단박에 노트를 펼쳐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추천 도서 코너에 서서 책을 읽던 손님은, 어느새 카운터 옆에 놓인 의자를 자신의 자리로 여기게 됐다.
오늘도 마루 씨는 펼친 노트 위에 집중한 채 마음에 드는 책 구절을 적고 있었다. 심혈을 기울여도 삐뚤빼뚤한 글씨가 이상하게 예뻐 보였다.
가게를 둘러보니 드물게 손님이 없는 한산한 오후였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온 것은 이제 화단에 핀 꽃이 아니라, 짧아진 마루 씨의 옷소매로 알았다. 아직 한여름이 아니라 약하게 틀어 놓은 선풍기 바람에 마루 씨의 앞머리가 살랑거리는 걸 본 순간, 여기서 딱 한 발자국만 더 다가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마루야.”
놀랐는지 펜을 꾹 잡아 든 손이 움찔거리는 걸 보았다. 나는 순하게 올려다보는 얼굴에 햇살이 드리우는 걸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잘생긴 얼굴로 부리는 비겁한 수작이었다.
“우리 형, 동생 할래? 아니. 하자.”
망설이는 얼굴이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조금 더 확실한 대답을 받아 내기 위해 마루 씨의 눈높이에 맞게 몸을 낮췄다.
“응? 그렇게 하자.”
별거 아닌데도 혹시나 거절할까 싶어 재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루 씨는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네. 형.”
웅웅, 선풍기 날개 돌아가는 소리에 그 ‘형’이라는 단어가 팽글팽글 돌며 귀에 감겼다. 스스로 제안해 놓고도 바보같이 쑥스러워진 나는 책 속으로 붉어진 얼굴을 피신시켰다.
***
“도우재. 그만해라? 그만하라고!”
서점을 오픈한 후 몇 시간째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급기야 다리까지 떨기 시작했다. 주말이라 출근하지 않은 장태하가 놀러 와선, 그 꼴을 보고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우유가 없었다니까?!”
“아니, 우유 좀 없으면 죽어? 어?”
“처음 있던 날부터 두 달 넘게 하루도 안 빠지고 있었던 우유가 없다고!”
오픈할 때면 우편함에 항상 들어 있던 우유가 없었다. 즉 오전에 마루가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설마 형 동생 하자고 했던 게 그렇게 부담스러웠나? 잘못 생각했다. 겨우 세 달 정도 친했다고 내가 감히 형 동생 할 생각을 했다니. 섣부른 판단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미칠 듯한 후회가 밀려왔다. 태하는 이제 머리까지 쥐어뜯는 나를 미친놈 보듯이 쳐다봤다.
“세 달을 봤다면서 번호도 몰라?”
“번호 달라고 했다가 이상하게 보면 어떡해.”
“그게 이상하게 볼 일이야? 이게 사랑에 빠지더니 뇌가 굳었나.”
“남자끼리 너무 부담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아, 그럴 거면 그냥 여자 친구 대할 때처럼 해.”
“안 돼. 그건 더 역효과 날 거야.”
“……그러네.”
동시에 한숨이 나왔다. 솔직히 친구 관계는 물론이고, 연인 관계에서도 대부분 내 고집대로만 굴었기 때문에 좋은 쪽으로 발전하기가 꽤 힘들었다. 이 경우, 벌어지는 상황은 둘 중 하나였는데 상대방이 참거나, 못 견디고 이별을 말하거나.
어떤 쪽이든 내가 목을 맨 적은 결단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가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조차 안 났다. 상대가 남자를 좋아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데, 무턱대고 호감 표시를 하다가 이런 관계마저 잃으면 어떡하나.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사정이 있겠지. 남은 우유가 없었거나. 다 큰 성인 남자한테 무슨 별일이 있을 거라고 이렇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구냐?”
“그치? 그래, 우유는 없을 수도 있지. 어차피 오후 되면 볼 텐데 괜한 걱정 안 해야겠다. 그런 의미로 너는 얼른 꺼져라.”
“와. 진짜 도우재 저 싸가지. 그냥 확 차여 버려라.”
“너 그동안 내가 너무 조용하게 굴었지? 이리 와.”
내가 손을 뻗자마자 장태하는 코너 사이로 몸을 숨겼다. 몇 번 쫓아가 잡아 보려다 손님들이 이상하게 보는 바람에 울화가 치미는 속을 얌전히 달래야 했다.
“도우재 다 죽었네. 난 강이현 만나러 간다. 잘 있어라.”
다음에 밖에서 보면 꼭 죽일 거다.
이를 악물며 다짐한 후 얌전히 카운터로 돌아왔다. 올려다본 벽시계는 오후 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내 불안은 현실로 다가오고야 말았다. 마루가 오지 않아서 틈틈이 바라본 시계는 어느덧 오후 7시에 도달해 있었다. 오늘은 마루가 좋아하는 꿀떡까지 사 놨는데. 소용없어진 꿀떡만 나무 트레이 위에서 차갑게 굳어 갔다. 문득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픈 건지 아니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우유 배달은 못 갔어도 카페에는 출근했는지, 그게 아니라면 편의점에서는 일하고 있는 건지. 생각의 끝은 항상 후회였다.
아, 왜 번호를 안 물어봤지.
나도 이 정도로 좋아하는 줄 몰랐다. 겨우 하루 안 보인다고 억장이 무너질 것 같을 줄은. 마음이 소란스러워서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서운하다가, 걱정되다가, 종내에는 이런 내 꼴이 우습게 느껴졌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는 걸로 성에 찰 리 없는 완벽한 연애 감정이었다.
서운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지난번과 상황이 달랐다. 어느 정도 마루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만나러 갈 수 있었다. 서점에 매일 오기로 약속한 것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초조해할 필요가 있나? 열 오른 머리를 식히고 생각하자, 불안했던 마음의 불씨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마감하고 나서 편의점에 가 보기로 결심하고 나서는 살짝 즐거운 마음마저 들었다.
서점에 있던 마지막 손님을 배웅하고 문을 닫기 위해 마감을 서둘렀다. 원래라면 한 시간 정도 더 열어야 할 시간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판매된 책의 목록, 잔고 확인, 청소 등 평소 마감 때 하던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불을 끄기 위해 스위치로 손을 가져갔을 때였다.
“우재 형?”
등 뒤로 선명하게 넘어온 목소리에 어린아이처럼 들뜨고 말았다. 주인 맞이하는 강아지처럼 획 돌아본 곳에는 검정색 모자를 눌러쓴 마루가 보였다. 작은 얼굴이 챙에 그늘져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1. 오후 3시 (3)
“사장님?”
부르는 소리에 머릿속 잡념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사람을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다니…… 이게 무슨 실례야. 창피함이 밀려왔다. 이게 다 예쁜 마루 씨의 눈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상한 내용을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으니,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적당한 구실을 찾았다. 둥그렇게 흘린 시선 끝에 네모난 우유갑이 보였다.
“혹시, 저 우유 마루 씨가 넣어 두고 간 거예요?”
마루 씨는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을 보더니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그렇게 넘어가 주신 게 감사하기도 하고…… 뭔가 들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우편함에요?”
“네. 볼 때마다 비어 있어서요. 아깝잖아요. 저렇게 예쁜데.”
우체부 아저씨도 신경 쓰지 않는 우편함인데. 나 말고도 한 번씩 봐 주는 사람이 있었다 생각하니 묘하게 기분이 들떴다.
“고마워요. 안 그래도 선물 받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그럼 매일 넣어 놓을게요!”
“네?”
“아, 부담스러워 안 하셔도 돼요. 원래 제 몫으로 받는 거라. 저 새벽에 우유 배달하거든요.”
그제야 우비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새벽에 일찍 나온 이유가 거기 있었구나. 가슴 한 켠에 기쁜 마음이 피어오르는 동시에 걱정스러운 물음이 솟아났다. 나한테 주고 나면 마루 씨는 못 마시는 거 아닌가?
“저 주면 마루 씨는요?”
“사장님은 저 책 읽게 해 주시잖아요.”
“그래도 조금 미안한데.”
“……사장님,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시려고 그래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루 씨한테 저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저 순박한 얼굴을 하고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이 말하는데, 이어 붙는 잔소리가 나쁘지 않아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지금 누굴 걱정하는 거야.
“이거 사장님이 손해 보는 거래예요. ‘우유 하나로 여기 책을 모두 읽겠다고? 이런 염치없는 녀석!’ 이렇게 화내는 게 정상이라구요.”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한 손을 허리춤에 얹은 채 어디서 본 것 같은 가게 사장 말투를 흉내 내는 마루 씨의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실제로 마루 씨 말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요. 사장님 착하다는 말 많이 듣죠?”
“아닌데. 굉장히 낯설게 들리네요, 그거.”
미친놈. 싸가지. 독재자. 무뢰한. 제법 익숙하게 들은 단어들이 머리 위로 죽 나열되었다. 딱히 마루 씨 입을 통해 듣고 싶지는 않은 말들이었다. 나는 부정적인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궁금한 몇 가지 질문 중 하나를 물었다.
“그럼 이 시간까지 우유 배달하는 거예요?”
“아뇨. 배달은 오전 8시 반까지 끝나구요, 그 뒤에는 카페에서 일하고 있어요. 보통 마치고 오는 시간이 지금이에요.”
부지런하네. 서점 오픈 시간보다도 마루 씨의 두 번째 일과가 먼저 시작된다는 말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자니, 꽤 절망적인 스케줄 표가 완성되었다. 마루 씨가 서점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지나치게 일정했기 때문이다.
“설마 5시쯤에 가는 이유가?”
마루 씨는 내 짐작이 맞는다는 듯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네. 편의점 알바 하거든요.”
“그렇군요. 가는 시간이 일정해서 그냥 물어본 거예요.”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렸길 바란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스케줄이었다. 어떻게 저걸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 주말에도 서점에 오는 걸 보면, 일주일 내내 쉴 틈이 없다는 소리인데도 마루 씨는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왜…….”
왜 그렇게 쉬지 않고 일해요? 하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종종 아버지는 내가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들이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나무랐다. 지금까지 겪어 온 수많은 상황들을 대입해 봤을 때, 지금은 말을 아낄 때라는 판단이 섰다. 내가 말을 가리며 뱉을 줄이야. 장태하가 알면 혀를 내두를 일이다.
나는 하려던 말이 아닌 조금 더 그럴듯한 칭찬을 해 보기로 했다.
“기특하네요. 열심히 하는 모습이.”
“아…… 고맙습니다.”
다행히 썩 듣기 좋은 말이었는지, 마루 씨의 볼 위로 붉은 홍조가 옅게 퍼졌다.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괜히 나까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서 카운터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의미 없는 행동을 했다. 붕 떠 버린 정적을 깨우기 위해, 입에서는 실없는 소리가 나갔다.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너무 아저씨처럼 말한 건 아닌가 싶네요.”
“예?!”
마루 씨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많이 놀랐는지 눈까지 크게 뜨였다. 저건 또 무슨 반응이지. 얼른 답을 해 달라는 의미로 빤히 보고 있으니 당황한 얼굴 위로 난처한 기색이 스몄다. 팔자로 처진 눈썹이 마루 씨의 미안함을 대신 전했다.
“아뇨, 당연히 서른 이상일 거라 생각했거든요.”
“서른……이요?”
진짜로, 상처받았다. 이번엔 도저히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아마 착잡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을 것이다. 마루 씨는 저 멀리 날아가는 내 멘탈을 다급하게 붙잡아 보려 노력했다.
“그, 나이 들어 보인다는 게 아니라 사장님이잖아요. 이렇게 멋진 가게를 가졌으니까 당연히 그 정도는 될 줄 알았어요.”
그런 노력에도 갑작스럽게 입은 심리적 타격은 회복되지 못했다. 어쩐지 앞에서 지나치게 쭈뼛거리더라니. 나이가 많은 줄 알았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결혼도 하고 애도 셋 정도 있을 법하게 생겼지 내가. 곱씹을수록 침울해지는 마음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
내가 한숨까지 쉬어 대니 마루 씨는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들고 있던 컵까지 놓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다가 결국에는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귀엽지? 조금더 당황해 하는 걸 보고 싶어서 펼친 손으로 웃는 입을 가렸다. 말을 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던 마루 씨는 다급한 손길로 자신의 가방을 뒤졌다.
“책, 책 얘기 해요!”
우는 아이의 손에 사탕을 쥐여 주듯이, 좋아하는 주제로 말을 돌려 보려는 모습이 필사적이었다. 휙 들어 올린 양손에는 노트 하나가 들려 있었다. <독서 노트>라고 쓰여 있는 양장 노트는 얼마나 오래 쓴 건지 옆면이 다 닳아 있었다. 대화 주제를 넘기려는 목적이었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주 보는 얼굴에 설레는 마음이 잔뜩 묻어났다. 걷잡을 수 없이 미소가 번져 갔다.
나만 기대한 게 아니었구나. 그건 생각보다 더 근사한 기분이 들게 했다.
마루 씨의 독서 노트는 내가 이름만 보고 짐작한 것처럼 단순히 독서 내용을 기록하는 노트는 아니었다. 거기엔 취향을 찾아가는 세월이 모두 담겨 있었다. 파란색 민무늬 표지는 구불거리는 글씨로 <독서 노트>라고 써 넣은 것 외에, 곰돌이와 고양이, 도넛, 개나리 등의 전혀 연관성 없는 그림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솜씨는 그리 좋지 않았음에도 무슨 그림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게 신기했다.
취향은 생각보다 더 비슷했다. 나는 주로 일상의 평범함이 묻어 있는 소설을 좋아하는데, 그와 반대로 피와 살인이 낭자하는 추리 소설에도 심장이 뛰곤 했다. 이 극과 극을 넘나드는 독서 형태를 본 친구들은 책 읽는 것마저 범상치 않은 또라이 같다며 치를 떨곤 했었다.
그런데 타인의 입장으로 보니 이건 또 달랐다. 노트의 반을 갈라서 장르별로 구분해 놓은 마루 씨의 독서 노트는 장르마다 쓴 감상문의 성격도 딱 반으로 나눈 것처럼 달랐는데, 그게 꼭…… 착하고 바른 학생의 정직한 일탈 같달까. 페이지마다 널을 뛰는 감상 기준이 호기심 많은 아이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처음 그 독서 노트를 본 날 이후로 우리는 꽤 많은 이아기를 나누었다. 마루 씨는 지난번에 사 갔던 <호텔 선인장>의 등장인물 중 오이가 나와 비슷하고 모자가 자신과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것 같다며 웃어 버렸다.
하루는 <백설 공주에게 죽음을>이라는 책을 추천 도서 코너에서 실컷 읽다가 쪼르르 달려와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데, 그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여기 아멜리라는 소녀가 10년 형이나 살다 나온 죄수 얼굴에 홀려서 사건 조사를 하기 시작하잖아요.’
‘토비아스 맞죠?’
‘네. 사장님 얼굴을 대입하니까 확 몰입이 돼요.’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가 한참이나 생각했다.
‘잘생겼다구요.’
자주 듣는 식상한 말이라 생각했는데, 마루 씨가 환하게 웃으며 말해 주니 책 속의 한 구절처럼 와닿는 게 참 이상하기도 하다.
그런 날들이 많아졌다. 오후 3시가 다가오면 남모르게 설레며 입고 있는 셔츠 깃이 삐뚤어지진 않았나 확인하는 날들.
커피 머신만 덩그러니 놓여 있던 책장 옆 구석에는 어느 순간부터 다과를 담은 트레이가 함께 놓였고, 추천 도서 코너에는 먼지 한 톨 앉는 책이 없었다. 오롯이 내 취향이었던 그곳에는 그중에서도 조금 더 마루 씨의 취향에 근접한 책들로 꾸려지기 시작했다.
‘와. 사장님 너무 신기해요. 이렇게 쌓여 있는 책 중에 마음에 안 드는 책이 어떻게 단 한 권도 없죠?’
당연하지. 그럴 수밖에 없는 책들만 올려놨는데. 하지만 그저 우연으로 가장하고 싶어서, 나는 덩달아 신기한 척 연기를 해야 했다.
‘우와. 그러게요. 어떻게 매번 마루 씨 마음에 들지?’
빨개진 귀를 괜히 만지작거리면서, 들키지 않게 차분히 가렸다.
마루 씨는 처음엔 내 앞에서 독서 노트를 펼치기 조금 부끄러워하더니, 이제 책을 읽다 쓰고 싶은 구절이 생기면 단박에 노트를 펼쳐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추천 도서 코너에 서서 책을 읽던 손님은, 어느새 카운터 옆에 놓인 의자를 자신의 자리로 여기게 됐다.
오늘도 마루 씨는 펼친 노트 위에 집중한 채 마음에 드는 책 구절을 적고 있었다. 심혈을 기울여도 삐뚤빼뚤한 글씨가 이상하게 예뻐 보였다.
가게를 둘러보니 드물게 손님이 없는 한산한 오후였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온 것은 이제 화단에 핀 꽃이 아니라, 짧아진 마루 씨의 옷소매로 알았다. 아직 한여름이 아니라 약하게 틀어 놓은 선풍기 바람에 마루 씨의 앞머리가 살랑거리는 걸 본 순간, 여기서 딱 한 발자국만 더 다가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마루야.”
놀랐는지 펜을 꾹 잡아 든 손이 움찔거리는 걸 보았다. 나는 순하게 올려다보는 얼굴에 햇살이 드리우는 걸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잘생긴 얼굴로 부리는 비겁한 수작이었다.
“우리 형, 동생 할래? 아니. 하자.”
망설이는 얼굴이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조금 더 확실한 대답을 받아 내기 위해 마루 씨의 눈높이에 맞게 몸을 낮췄다.
“응? 그렇게 하자.”
별거 아닌데도 혹시나 거절할까 싶어 재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루 씨는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네. 형.”
웅웅, 선풍기 날개 돌아가는 소리에 그 ‘형’이라는 단어가 팽글팽글 돌며 귀에 감겼다. 스스로 제안해 놓고도 바보같이 쑥스러워진 나는 책 속으로 붉어진 얼굴을 피신시켰다.
***
“도우재. 그만해라? 그만하라고!”
서점을 오픈한 후 몇 시간째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급기야 다리까지 떨기 시작했다. 주말이라 출근하지 않은 장태하가 놀러 와선, 그 꼴을 보고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우유가 없었다니까?!”
“아니, 우유 좀 없으면 죽어? 어?”
“처음 있던 날부터 두 달 넘게 하루도 안 빠지고 있었던 우유가 없다고!”
오픈할 때면 우편함에 항상 들어 있던 우유가 없었다. 즉 오전에 마루가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설마 형 동생 하자고 했던 게 그렇게 부담스러웠나? 잘못 생각했다. 겨우 세 달 정도 친했다고 내가 감히 형 동생 할 생각을 했다니. 섣부른 판단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미칠 듯한 후회가 밀려왔다. 태하는 이제 머리까지 쥐어뜯는 나를 미친놈 보듯이 쳐다봤다.
“세 달을 봤다면서 번호도 몰라?”
“번호 달라고 했다가 이상하게 보면 어떡해.”
“그게 이상하게 볼 일이야? 이게 사랑에 빠지더니 뇌가 굳었나.”
“남자끼리 너무 부담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아, 그럴 거면 그냥 여자 친구 대할 때처럼 해.”
“안 돼. 그건 더 역효과 날 거야.”
“……그러네.”
동시에 한숨이 나왔다. 솔직히 친구 관계는 물론이고, 연인 관계에서도 대부분 내 고집대로만 굴었기 때문에 좋은 쪽으로 발전하기가 꽤 힘들었다. 이 경우, 벌어지는 상황은 둘 중 하나였는데 상대방이 참거나, 못 견디고 이별을 말하거나.
어떤 쪽이든 내가 목을 맨 적은 결단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가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조차 안 났다. 상대가 남자를 좋아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데, 무턱대고 호감 표시를 하다가 이런 관계마저 잃으면 어떡하나.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사정이 있겠지. 남은 우유가 없었거나. 다 큰 성인 남자한테 무슨 별일이 있을 거라고 이렇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구냐?”
“그치? 그래, 우유는 없을 수도 있지. 어차피 오후 되면 볼 텐데 괜한 걱정 안 해야겠다. 그런 의미로 너는 얼른 꺼져라.”
“와. 진짜 도우재 저 싸가지. 그냥 확 차여 버려라.”
“너 그동안 내가 너무 조용하게 굴었지? 이리 와.”
내가 손을 뻗자마자 장태하는 코너 사이로 몸을 숨겼다. 몇 번 쫓아가 잡아 보려다 손님들이 이상하게 보는 바람에 울화가 치미는 속을 얌전히 달래야 했다.
“도우재 다 죽었네. 난 강이현 만나러 간다. 잘 있어라.”
다음에 밖에서 보면 꼭 죽일 거다.
이를 악물며 다짐한 후 얌전히 카운터로 돌아왔다. 올려다본 벽시계는 오후 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내 불안은 현실로 다가오고야 말았다. 마루가 오지 않아서 틈틈이 바라본 시계는 어느덧 오후 7시에 도달해 있었다. 오늘은 마루가 좋아하는 꿀떡까지 사 놨는데. 소용없어진 꿀떡만 나무 트레이 위에서 차갑게 굳어 갔다. 문득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픈 건지 아니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우유 배달은 못 갔어도 카페에는 출근했는지, 그게 아니라면 편의점에서는 일하고 있는 건지. 생각의 끝은 항상 후회였다.
아, 왜 번호를 안 물어봤지.
나도 이 정도로 좋아하는 줄 몰랐다. 겨우 하루 안 보인다고 억장이 무너질 것 같을 줄은. 마음이 소란스러워서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서운하다가, 걱정되다가, 종내에는 이런 내 꼴이 우습게 느껴졌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는 걸로 성에 찰 리 없는 완벽한 연애 감정이었다.
서운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지난번과 상황이 달랐다. 어느 정도 마루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만나러 갈 수 있었다. 서점에 매일 오기로 약속한 것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초조해할 필요가 있나? 열 오른 머리를 식히고 생각하자, 불안했던 마음의 불씨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마감하고 나서 편의점에 가 보기로 결심하고 나서는 살짝 즐거운 마음마저 들었다.
서점에 있던 마지막 손님을 배웅하고 문을 닫기 위해 마감을 서둘렀다. 원래라면 한 시간 정도 더 열어야 할 시간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판매된 책의 목록, 잔고 확인, 청소 등 평소 마감 때 하던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불을 끄기 위해 스위치로 손을 가져갔을 때였다.
“우재 형?”
등 뒤로 선명하게 넘어온 목소리에 어린아이처럼 들뜨고 말았다. 주인 맞이하는 강아지처럼 획 돌아본 곳에는 검정색 모자를 눌러쓴 마루가 보였다. 작은 얼굴이 챙에 그늘져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