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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서점 4화

1. 오후 3시 (4)



“형, 벌써 닫아요? 8신데. 안 뛰어왔으면 못 볼 뻔했네.”

평소처럼 총총 걸어오는 모양새가 조금 어색했다. 그래도 왔으면 됐지, 뭐.

“아냐, 마감 준비하고 있었어.”

마루는 안쪽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카운터를 사이에 둔 채 내 앞에 마주 섰다. 푹 숙인 고개 탓에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눈이 보고 싶은데……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할 순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어도 잠자코 있어야 했다.

몸이 아팠던 건지, 일은 갔었는지, 어째서 이 시간에 온 건지, 고개는 왜 숙이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말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간 건 고작 한 마디였다.

“너 괜찮아?”

그 순간 가늘게 어깨가 떨렸다. 마루가 대답하지 않으니 나는 그걸 내 방식대로 해석했다. 괜찮지 않다고.

손을 뻗어 마루가 쓰고 있는 검정색 모자를 벗겨 냈다. 만지면 보드라울 것 같은 연갈색 머리카락이 모자에 달라붙었다가 차분히 내려앉았다. 하지만 웨이브 진 머리카락도 이마 위의 큰 반창고를 가려 주지는 못했다. 붉은 피가 잔뜩 묻어난 반창고였다. 그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마루가 움찔거리며 한 발짝 물러났다. 얼마 전까지 붉은 홍조가 예뻤던 뺨 위에도 옅지만 푸른 멍이 자리 잡고 있었다.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여기까지 간섭해도 되나, 자문하기 전에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이거…… 뭐야.”

목 끝이 뜨거워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모자를 벗길 줄 몰랐는지 마루는 많이 당황스러워하며 급히 얼굴을 가렸다. 긴장한 목울대가 크게 한번 움직이며 말을 뱉었다.

“저 알바 잘렸어요.”

일부러 담담하게 꾸며 내는 목소리가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 선을 긋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멋대로 굴기로 했다. 나는 최대한 낼 수 있는 상냥한 투로 별스럽지 않게 물었다.

“누가 때렸어?”

다시 한번 손을 뻗어 눈처럼 차가운 뺨 언저리를 매만졌다. 자연스럽게 마주한 눈에 기시감이 일었다. 눈물이 고이지도 않았는데, 내 얼굴을 비추는 눈동자가 심장이 아릿할 만큼 서럽게 느껴졌다.



평소처럼 마루를 카운터 옆 의자에 앉히고 커피를 내려 주었다. 흰색 바탕에 동백꽃이 새겨진 커다란 머그컵은 이제 마루 전용 컵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손에 쥔 모습이 익숙했다. 모자는 도로 빼앗아가 머리에 쓴 채였다.

“마루야. 말 안 해 줄 거야?”

마루는 손에 든 커피를 마시지 않고, 매끄러운 표면만 손가락으로 비비적거렸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에도 자잘한 상처들이 나 있다. 유난히 하얀 피부라 그런지 도화지 위에 흙탕물이 튄 것처럼 그게 선명하게 보였다.

아무래도 마루는 상처에 대해 말해 줄 생각이 전혀 없나 보다. 내가 너무 채근하는 것 같나? 걱정되는 마음이 커서 화난 어조로 들렸을 수도 있겠다.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애써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여기에 써먹을 적절한 대화법을 학습했던 기억에서 찾아야 했다.

‘<네가>보다 <나는>이라는 화법을 사용하면 대화에서 상대방의 방어적 태도를 누그러뜨릴 수 있어요.’

이게 어디서 들은 말이더라…….

현 상황에서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을 꾹 닫고 있는 마루에게 차분히 물었다.

“형은 아침에 우유가 없길래 마루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어. 매일 오는 시간에도 안 오니까 걱정이 되더라.”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숙이고 있던 마루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왔다. 다시 봐도 뺨에 있는 푸른 멍은 속상하기만 했다. 그래도 마루가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급한 마음을 먹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마루가 해 줄 수 있는 말만 해 줘도 나는 좋을 것 같은데. 안 될까?”

그래도 굳게 다문 입은 열리지 않았다. 말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억지로 들을 생각은 없다. 어떤 기억은 입으로 뱉어 내는 것만으로 더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말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지극히 자기방어에서 나오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다그치는 대신 머그컵을 쥔 마루의 손등 위로 내 손을 겹쳤다. 마루의 손이 움찔 떨렸다. 나는 서툰 손짓으로 힘이 들어간 마루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기 시작했다. 도닥도닥. 괜찮아. 말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었다. 잡았던 마루의 손을 놓아 줄 때쯤엔 차가운 손에 제법 온기가 돌았다. 마루는 내가 그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커피 다 식었다. 차로 바꿔 줄게.”

아무래도 밤에 쓴 커피는 어울리지 않았다. 물을 데우기 위해 커피포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던 순간, 드디어 마루가 말을 해 왔다.

“맞은 건 맞는데요…… 누군지 말하기는 좀 곤란해서요…… 그래도 잘 해결됐어요. 카페 알바는 잘렸지만요. 오늘 아침엔 조금 아파서 늦잠을 자 버리는 바람에 우유 배달은 동생이 대신 갔어요. 도토리 서점에 우유 꼭 넣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까먹었나 봐요.”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에 담겨 있는 모든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내내 표정을 읽기 힘들었던 얼굴은, 동생이 우유를 까먹었다고 말하는 순간에만 난색을 표했다. 아무래도 우유를 넣어 놓지 못했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낀 듯했다. 이 와중에도 그런 것에 신경 쓰는 마루의 순박함에 기가 찼다. 이런 애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예쁜 얼굴에 흠집을 내 놓은 놈을 찾아 흠씬 두들겨 패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말을 다 했으니, 대답을 해 달라는 듯 얌전히 기다리는 마루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반짝거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분노는 물리고 그저 싱긋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구나. 잘 해결됐다고…….”

더 이상 캐묻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마루는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멍 든 뺨 위로 손을 뻗었다. 아까 만졌을 때 아파하는 것 같아서, 차마 거기에 손을 대지는 못하고 허공을 어루만지듯 근처를 배회했다.

“그래도 많이 아팠겠다.”

마루는 피하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복잡 미묘한 표정을 보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적당한 대답을 찾느라 눈을 꿈뻑거리더니, 결국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한 번 까딱이는 게 전부였다. 아프다는 말에는 솔직한 게 귀여워서 슬핏 웃음이 나왔다.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 물러났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마루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마주 보고 웃으니, 마루도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나를 따라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찢긴 이마도, 멍든 뺨도. 그러고 있으니 퍽 개구쟁이 같다는 귀여운 느낌만 줄 뿐이었다.

“다음에도 그런 나쁜 사람 있으면 바로 형한테 달려와. 형이 이래 뵈도 힘 있고 빽도 있어서 웬만한 건 다 해결해 줄 수 있어.”

“알았어요. 형은 너무 착한 게 탈이에요.”

“그게 왜 탈이야.”

“내가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려구요.”

아이고 무섭다. 하얀 얼굴에 말랑거리는 피부를 하곤, 그걸 협박이라고 하는 건지. 머릿속으로는 여태 살면서 겪어 온 수많은 나쁜 새끼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이 정도는 되야 나쁜 사람이지.

“괜찮아. 형 주변에 나쁜 사람 많아. 문제없어.”

“그건 괜찮다고 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진짠데. 마루는 헤실거리는 내 얼굴을 보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저걸 나에 대한 걱정으로 생각하면 너무 과한 해석인가. 저 솔직한 형형색색의 감정들이 오롯이 나로 인해 빚어지는 날들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또 한 번 욕심이 커졌다. 그러려면 우선 마루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했다. 마루에 관한 건 전부 다 알고 싶었다.

“근데, 마루야.”

마루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아지 같아…….

“너 동생이 있었어?”

아까는 중간에 끊을 수 없어서 듣고만 있었는데 우유 배달을 동생이 대신 가 주었다고 했다. 동생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서, 호기심이 일었다. 내 말을 들은 마루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당연히 말을 한 줄 알았던 모양이다.

“네. 말한 줄 알았는데 안 했구나. 고3인 남동생이 하나 있어요.”

“남동생? 와, 엄청 귀엽겠다.”

“보여 줄까요?”

마루를 똑 닮은 고등학생의 모습을 생각하니 정말 귀여울 것 같았다.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마루는 이내 낡은 가죽 지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당연하게 지갑에서 사진 하나를 빼내는 모습이 굉장히 신선했다. 형제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네. 나는 한 달에 한 번 보는 얼굴도 띠껍던데.

“여기요!”

마루는 무슨 아들 자랑하는 온화한 가장처럼, 입을 양옆으로 쭉 찢어 웃으며 사진을 들이밀었다. 동시에 내 환상은 와장창 깨져 버리고 말았다.

“귀……귀엽네! 귀엽다.”

“그쵸? 애가 낯가림이 많아서 그렇지 되게 좋은 애예요.”

다급하게 내놓은 내 대답에 마루는 신이 나서 말을 보탰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흑발에 피부가 하얀 마루의 동생은 겉보기에도 귀염성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나는 학교에서 저런 반항적인 눈빛을 자주 마주했었다. 한 가닥 할 법한 성격이 사진을 뚫고 나오는 듯했다. 친해지기는…… 좀 힘들겠네.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마루는 계속 신나게 떠들었다. 동생 얘기가 나오니 봇물 터지듯이 가정사가 함께 딸려 나왔다.

“과외 한번 시켜 준 적 없는데 매번 전교에서 1등을 해낸다니까요?”

“와. 요즘 그러기 힘들 텐데, 대단하다.”

“손잡고 초등학교 졸업식 갔던 게 바로 어제 같은데, 쑥쑥 크는 거 보면 신기해요 정말.”

“동생이 마루 잘 따르나 보네.”

“네. 그래서 고마워요. 안 삐뚤어지고 잘 자라 줘서.”

누가 보면 형이 아니라 부모인 줄 알겠다. 말하는 중에도 동생 생각이 나는지 팔다리가 귀여줘 죽겠다는 듯 공중에 버둥거렸다. 내가 누나랑 세 살 터울밖에 안 나서 모르는 건가. 원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제들은 다 이런 건지 혼란스러웠다.

“부모님이 뿌듯해하시겠다. 형제끼리 이렇게 사이좋으니까.”

“…….”

“……?”

마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해사하게 보이던 웃음은 차츰 작아지더니 이내 보일 듯 말 듯 한 줌으로 남았다. 그 후 뜸을 들인 것과 어울리지 않는 무심한 말투로 툭, 마루의 슬픔이 뱉어졌다.

“부모님은 돌아가셔서 없지만요. 네, 아마 뿌듯해하실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다 식어 버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침묵이 얼굴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메어 버린 목을 축이기 위해 들이켰을 식은 커피는 차갑고 쓴맛만 났을 것이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꼴딱, 소리를 내며 커피를 삼켜 낸 마루의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위로가 필요한 순간일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하는 순간일까. 멋진 문장이 가득한 책을 수없이 읽었음에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때가 늦으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위로가 되어 버리니 어쭙잖은 말은 다 생략하기로 했다. 대신 엄지손가락으로 찌그러진 마루의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도장 찍듯, 천천히. 뭐 하냐는 듯한 눈빛이 단박에 날아들었다.

“맛있는 거 사 줄까?”

“네?”

“나 위로 잘 못해. 근데 네가 잘하고 있는 게 기특해서 상 주고 싶어.”

미간의 주름을 완벽하게 펴 내고 만족스러운 듯 떼어 내니 마루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뭐예요, 완전 오글거려. 위로 진짜 못한다.”

“그러게.”

말하고 나니 진짜 바보 같은 말이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도 참 별 볼 일 없구나. 그래도 마루가 웃으니까 그런 부끄러운 일쯤 천 번은 할 수 있을 듯했다. 나는 카운터 책상에 팔을 올리고 손에 턱을 괸 다음 마루의 웃는 얼굴을 마음껏 감상했다.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살인적인 하루 사이클은 마루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요소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전거를 타고 우유 배달하던 모습도 청량하기보다 짠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으…… 이런 상상은 심장에 좋지 않은데.

카페 알바는 잘렸다고 했으니 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려나. 이제 시간이 안 맞아서 서점에 안 온다고 하면 어쩌지. 그건 내가 곤란한데. 이런 와중에도 나는 이기적일 만큼 마루의 시간을 탐냈다. 오늘 같은 일이 또 생기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좋은 핑계가 뇌리를 스쳤다.

“……아!”

머리에 전기가 오른 것처럼 파득 튀었다.

생각났다. 마루가 돈도 벌고, 나도 마루를 볼 수 있는 방법. 그리고 굳이 시간 내지 않아도 마루가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쾌적한 환경.

“마루야. 나 지금 알바 구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단박에 알아들은 마루의 눈이 반짝거렸다. 물론 이 작은 가게에 아르바이가 필요할 리 없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마루는 동아줄이라도 잡은 것처럼 기뻐하며 펄펄 뛰었다. 백 퍼센트 순수한 마음은 아닌지라, 양심이 콕콕 찔리긴 했지만 뭐 어떤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벌써부터 이것저것 해 주고 싶은 게 많았지만, 나는 마루가 나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 부담스럽지 않은 속도로 다가가자 결심했다.

사실 그때는 내가 따라 걸어 주는 줄 알았는데, 그건 내 자만심에서 나온 착각이었다. 혼자 우뚝 서 있던 정상과 달리 마루의 주변은 온통 꽃밭이었으니 결국 득을 보게 된 건 내 쪽이었던 셈이다.



***



오늘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잠에서 깼다. 잠이 많은 편이라 누가 깨워 주지 않으면 통 일어나기가 힘들었는데, 쉬폰 커튼 사이를 뚫고 들어온 볕이 눈꺼풀 위에 따스하게 내리는 감촉만으로도 기분 좋게 눈이 뜨였다.

베개에 파묻은 고개를 나른하게 부비적거리면 바싹 마른 섬유 향이 은은하게 풍긴다. 스트레칭하듯 쭉 뻗은 다리로는 보드라운 이불이 감겨 오니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7시 50분. 협탁 위에 놓인 깔끔한 화이트 톤의 사각 시계는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미쳤구나, 진짜.”

평소라면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았을 시각일 텐데, 아직 이른 시간이 아쉬운 걸 보면 나는 지금 보통 들뜬 게 아니었다. 오늘은 비 오는 날만큼,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특별할 수도 있는 날이다. 마루가 도토리 서점의 가족이 되는 날이었다.

다시 자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서 침대 위에 밍기적거리던 몸을 억지로 끌어 일으켰다. 침실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걸음은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향했다. 긴장한 마음에 목이 바싹 말랐던 탓이다. 크리스탈 유리컵에 정수기 물을 가득 채운 후 단번에 들이켰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누가 봤다면, 네가 첫 출근 하는 줄 알겠다며 놀렸을 만큼 우스운 꼴이었다. 찬물을 들이켜고 나니 조금은 몽롱했던 정신이 완전히 깨어났다. 이른 아침인 집은 공허함이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다.

집의 구조상 부엌에 서 있으면 넓은 거실이 한눈에 들어온다. 침실을 제외한 방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개인 서재였고 나머지 하나는 드레스룸이었다. 종종 장태하가 놀러 오면 손님방 하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툴툴댔지만, 우리 집에 잠깐 오는 손님 때문에 방을 비워 두는 건 효율성이 꽝인 짓이었다. 대신 드레스룸에 구겨 자든 화장실 욕조에 들어가서 자든 아무 상관없다고 말하니, 장태하는 경악스러운 얼굴로 내게 냉혈한이라고 떠들어 댔다. 기껏 신경 써서 해 준 말에 왜 그러는지 모를 일이다. 하여튼 장태하도 성질머리 하나는 더럽다.

우리 집에 쳐들어오는 사람은 딱 둘뿐인데,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에는 거실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둘을 볼 수 있었다. 침실에만 들어오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놀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소소한 일탈을 즐기는 행위라 짐작할 뿐이었다.

부모님과 도이설은 내가 본가에 찾아가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도이설은 세 살 터울인 내 누나다. 그것 말고 다른 건…… 설명할 게 없다. 아버지는 가끔 내 집에 못 오게 하는 게 섭섭하다며 울상이셨지만, 독립하기 전에 하도 간섭받았던 기억이 좋지 않게 남아 어쩔 수 없었다. 골프채로 미친 듯이 팰 땐 언제고 이럴 땐 또 마음 여린 척을 잘도 하신다. 그래도 나한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게 어머니한테나 통하지.

귀찮다는 듯이 굴긴 했지만, 역시 혼자 살기에 이 큰 집은 조금 썰렁하긴 하다. 그래서 최근엔 늦게까지 도토리 서점에서 책을 읽고 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내 취향대로 채워 놓은 풀 향내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조용한 동네가 만들어 주는 밤의 소음 때문인지, 은은한 불을 켜 놓고 책을 읽으면 한 시간은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