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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15화

New Family 2

환영 파티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베오와 수정은 고등학생다운 활기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담당하다가 결국 술에 취해 쓰러졌다. 그 둘은 그나마 잘 버틴 축에 속했다. 현실에서도 대학생이라 술에 익숙할 것이라 생각한 유진은 아예 처음 한두 잔이 들어간 이후로는 완전히 얼굴이 새빨개져서 헤롱거리다 이내 뻗어버린 것이다.
결국 최후 생존자는 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앳된 외모의 유리와 의외로 술을 잘 마시는 현성, 그리고 초반부터 얼굴이 빨개진 ORP였다. 평소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지고 식탁에 뻗어버린 유진을 보며 ORP는 피식 웃었다.
“이 누님, 또 자기 주량 생각 안 하다 뻗었구만.”
“태영아, 유진이 2층 데리고 가서 재워줄래? 현성이랑 같이 정리하고 애들 데리고 올라갈게.”
유리의 말에 ORP는 고개를 끄덕였다. ORP가 놀림 섞인 명칭이라 유리는 그를 항상 본명인 태영이라 불렀다. 어떻게 부르든 별 상관을 쓰지는 않겠지만, 혹시나 하는 이유에서였다.
이 술집의 2층에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을 때 숙박할 수 있도록 숙박 시설이 존재했다. 과연 ‘주정뱅이들의 성지’라고 불릴 만한 서비스였다. 유리와 그녀의 팀원들이 이곳을 자주 찾는 것도 이 서비스가 있기 때문이었다.
ORP는 ‘어이구, 많이도 먹었네’라고 중얼거리며 유진을 업고 2층으로 올라갔다. <가디언>인 만큼 근력 스탯은 높으니 그녀 하나 옮기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유리는 계산대에서 계산을 마친 후, 현성을 향해 미안한 듯한 미소를 보이며 부탁했다.
“미안한데, 베오 좀 업고 2층에 재워줄래? 수정이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데, 베오는 좀 힘들어서.”
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쓰러진 베오를 업어 들자 묵직한 무게가 등으로부터 전해졌다. 확실히 이 무게를 <메이지>인 그녀가 들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약간의 취기가 더해져 현성마저도 조금 힘들 정도였다.
유리 쪽을 보니 그녀는 수정을 간신히 업고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힘도 힘이지만, 그녀의 짧은 신장이 더 큰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업고 있음에도 수정의 다리가 질질 끌렸다.
결국 보다 못한 현성이 최대한 빨리 베오를 2층 방에 눕혀두고 유리를 도와주고서야 옮길 수 있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유리가 말했다.
“고마워. 아무래도 힘드네. 근력 스탯 좀 올려둘 걸 그랬나?”
물론 농담이었다. <메이지>에게 근력 스탯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모를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농담에 현성은 살짝 웃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근력이 문제가 아닐 것 같지만, 어른답게 그 부분은 입을 다물었다.
“근력 스탯 붙어 있는 장갑이라도 빌려 드릴까요?”
“됐네요. 어차피 직업 제한 걸려서 쓰지도 못할 텐데.”
현성이 나름 농담이라고 던진 말에 유리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현성은 머쓱하게 ‘그런가요’라고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로서는 나름대로 없는 유머 감각을 짜내 던진 농담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서 어린 소녀의 외모가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여성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현성은 흠칫 놀랐다. 새삼 그녀가 미인이라는 사실이 상기되었다.
“저기 말이야…….”
“네?”
“피곤하지 않으면 잠깐 이야기 좀 가능할까? 바람도 쐴 겸해서.”
의외의 제안에 현성은 유리를 보았다. 키 차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려다보는 구도가 되었다. 그 때문일까, 유리의 눈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맑고 큰 눈이 달빛을 반사하여 반짝거렸다.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본인이 미인이라는 자각이 전혀 없는 걸까?
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취기가 조금 돌아서 어지럽기는 하지만, 이야기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유리가 안내한 곳은 조그마한 발코니였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바람을 쐬며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넉넉한 넓이였다. 평수로 따지면 한 평이 조금 넘을 것이다. 유리의 머리카락이 산들바람에 날려 살랑거렸다.
“오늘 정신없었지?”
“뭐…… 활기차고 좋던데요.”
“내일부턴 더 정신없을 거야. 조금 친해졌다고 이제 장난도 치기 시작할 테니까. 꽤나 피곤할걸∼ 나 아까 시달리는 거 봤지?”
유리가 농담조로 던진 말에 이번에는 현성이 미소로 대답했다. 확실히 그녀에게 하는 것처럼 놀려 대면 피곤할 것 같기는 했다. 딱히 놀림당할 여지는 없지만, 놀리는 것을 좋아하는 악동들은 어떻게든 놀릴 구석을 찾아내서 놀리는 것이 특기라는 것을 현성은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불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그들이 살던 세계에서는 이미 볼 수 없게 된, 쏟아질 듯이 별이 많은 밤하늘이었다.
“저기 말이야…….”
조용히 유리가 말을 걸었다. 현성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엷은 미소를 지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리가 있었다. 잠시의 망설임. 잠시 후, 유리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무언가 의미를 담아 그에게 물었다.
“혹시 오늘, 재미없었어?”
“네?”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현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도 유리가 말하는 것은 회식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현성은 그 회식을 충분히 즐겼다. 활기가 넘치는 자리였다.
“아뇨. 즐거웠어요.”
“그래? 다행이네.”
안도하듯 그렇게 말하고 나서 유리의 눈이 다시금 하늘로 올라갔다. 현성은 여전히 의문을 품은 채 그녀를 보았다. 왠지 이번에는 자신이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았다. 현성은 잠시 말을 고르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애들도 유쾌했고, 술도 맛있었고…… 재밌었어요.”
“그래? 나 괴롭힘당하는 거 보고 재밌었나 봐?”
“네? 그…….”
짓궂음이 담긴 질문이 되돌아오자 현성은 당황해서 말을 흐렸다. 사실 오늘의 회식은 두 악동이 유리를 놀려 대고, 유리는 그것에 화를 내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것을 재미있었다고 하는 것은 유리가 괴롭힘당하는 것이 재미있었다는 의미도 될 수 있기에 현성은 자신이 내뱉은 말의 함정에 빠진 셈이었다.
당황해서 할 말을 찾지 못하는 현성을 보며 유리는 쿡, 웃었다. 그러더니 장난기가 솟은 듯 한층 더 짓궂게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아, 어디에도 내 편은 없고…… 서럽네∼ 난 키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 받으면서 살아왔는데 말이지∼ 놀리는 누구 씨들과 그걸 재밌었다는 누구 씨는 그런 내 고충을 알까∼?”
“하하…….”
찔리는 게 있는 현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 유리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그녀의 안에서 장난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가끔 말이야∼ 여자는 작아도 귀여워서 괜찮다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작은 것도 정도껏이지. 이만큼 작으면 엄청 스트레스받는다고∼”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현성의 입가에 걸린 어색한 미소는 점점 커져 갔다. 본인이 놀린 것도 아니건만, 왠지 모르게 상대에 대한 미안함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유리가 그것을 부추긴 탓도 있었다. 그래서 현성은 소악마스러운 미소를 잔뜩 띠고 있는 유리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네가 보기엔 어때? 나 작아도 너무 작지?”
“예?”
갑작스럽게 날아온 질문에 현성이 고개를 돌리자 짓궂게 히죽히죽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리의 얼굴이 보였다. 현성이 곤란한 듯 웃자 유리는 대답을 재촉하듯이 눈을 더 크게 뜨며 별빛을 반사했다.
“그게…… 작은 대로 매력이 있다고 할까…….”
현성은 자신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유리의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사실 솔직한 마음이기는 하지만, 민감한 부분이기도 했다. 특정 취향으로 오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볼을 부풀리며 잠시 현성을 쏘아보던 유리는 픽, 웃었다. 왠지 눈앞에 있는 청년의 성격을 알 것도 같았다. 농담도 못하고, 빈말도 못하는 주제에 상대방의 장난을 잘 받아줄 줄도 모른다. 상대가 장난을 걸면 정직하게 받아쳐 버리는 것이다. 상대가 예상한 반응 그대로.
정말 놀리기 딱 좋은 타입이다. 자신조차도 이렇게 짓궂은 장난을 치고 싶어지는데, 수정과 베오가 현성의 이런 성격을 파악하면 정말 숨 돌릴 틈도 없이 놀려 댈 것 같았다.
‘그런 주제에 착해 빠져서 말이지…….”
유리는 속으로 하하, 웃었다. 자신도 모르게 장난기가 솟는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가엔 이미 짓궂은 미소가 걸려 있다.
“빈말은 별로 필요 없는데. 아, 혹시 그쪽 취향?”
“아뇨, 아뇨!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
그리고 이성 관계에도 엄청나게 어설프다.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여자에게 대놓고 ‘예쁘다’거나, ‘귀엽다’는 말을 못한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 것이다. 정말 놀리기 좋은 성격이다.
“아아∼ 큰일 났네. 이래서는 수정이하고 베오의 좋은 먹잇감이네∼ 잘 부탁해, 총알받이! 덕분에 내가 편해지겠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힘없이 하하, 웃는 현성을 보며 유리는 살짝 미소 지었다.
이거 봐. 너무 착하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쏟아질 듯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새벽에 높은 산에 올라가거나, 아니면 시골로 가지 않는 한은 볼 수 없는 경관이었다. 물론 인공의 빛으로 가득 찬 야경도 그립지만, 이건 이것대로 예쁘다.
밤바람을 쐬며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유리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에 가까웠다. 대부분 키로 인해 곤란을 겪은 일들이었다. 어지간히 콤플렉스인 모양이었다.
혹시 병은 아닐까 해서 병원에 가본 적도 있었다. 실제로 발육 부진은 호르몬 이상에 의해 발병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무 이상도 없었다고 한다. 그저 키가 작고 여성으로서의 발육이 평균치보다 한참 아래일 뿐이었다.
하루에 2L가 넘는 우유도 마셔보고 별짓을 다했지만, 결국 145㎝라는 가공할 만한 단신에서 성장이 멈춰 버렸다. 그 이후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가는 곳마다 아이 취급을 받았다. 술집에 가면 항상 의심의 눈초리부터 받아야 했다. 아르바이트나 인턴 면접에서는 너무 아이 같다는 이유로 떨어진 경우도 많았다.
연애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남자 친구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존감은 이미 바닥까지 떨어져 버린 상태였다. 남자 친구가 이상한 취향은 아닐까 의심하다가 결국 헤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그녀를 진지하게 대한 남자는 딱 한 명뿐이었다고 했다.
“……중학생이었지…….”
“…….”
뭐라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현성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유리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매일 날 따라다니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는데 말이야…… 설마 그렇게 진지하게 고백할 줄은…….”
거의 한 달 동안 따라다녔다고 한다. 거의 스토커 수준이기는 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유리는 전혀 경계심을 못 느끼고 있었다. 설마하니 중학생이 자신을 좋아해서 따라다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옆집이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과 또래인 줄 안 모양이다. 한 달 동안이나 따라다니고서도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녀의 푸념은 계속되었다. 약 두 시간 정도 이야기하고 나자 그제야 졸린지 유리는 늘어지게 하품을 쏟아냈다.
“슬슬 피곤하네…… 잘래?”
“예, 뭐…….”
설마 이야기라는 게 푸념을 늘어놓는 거였나 싶었다. 그러나 멤버들을 하나씩 머리에 떠올려 본 현성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베오나 수정에게는 이런 푸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놀림감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중학생에게 고백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두고두고 놀려 먹을 것이다. ORP 역시 장난기는 그 둘 못지않아 보였다.
유일하게 진지하게 들어줄 가능성이 있는 멤버는 유진이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과 쉽사리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에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묘하게 서운함을 담은 투였다.
“결국 넌 네 이야기는 하나도 안 하는구나.”
“네?”
“치사하네. 남의 속은 막 파헤쳐 놓고.”
“아니…… 안 물어봤잖아요…….”
뾰로통하게 투덜거리는 유리에게 현성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애초에 이야기를 하자고 데려와 놓고 마음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그녀였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지만,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다. 다만, 그녀의 스펙타클한 인생사에 비해 너무 3류 비극 소설 같아서 말하기 껄끄러울 뿐이었다.
유리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짓고 그 커다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다음엔, 네 이야기도 들려줘.”
“별로 재미는 없을 텐데요.”
“내 것도 그다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잖아?”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현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는 끄덕였지만, 이후에도 자신의 일을 말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수로운 이유도 아니었다. 그저, 듣는 사람 기분만 나빠질 이야기라서 내키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럼 내려가자. 피곤하다.”
몸을 돌리며 유리가 말했다. 현성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발코니는 3층이었다. 한 층을 내려와 방문을 열기 전, 주위가 시끄럽지 않게 현성은 목소리를 낮춰서 유리에게 인사했다.
“그럼 잘 자요.”
“그래, 너도.”
문고리를 돌려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열었다. 워낙 고요한 나머지 작은 소리도 굉장히 크게 들렸다. 그때,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현성아.”
현성은 뒤를 돌아보았다. 유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현성은 의문 어린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늘,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말 편하게 해. 베오처럼.”
베오처럼 말을 편하게 하라는 뜻이지, 베오처럼 놀리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문득 베오가 그녀를 얼마나 편하게 대하는지를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알았어, 누나. 잘 자.”
자연스럽게 반말이 나왔다. 자신조차도 놀랐다. 어린 외모의 탓인지, 아니면 시도 때도 없이 놀려서 유리에 대한 이미지를 편하게 만들어 버린 베오와 수정의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성은 유리가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방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