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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16화
다시 흐르는 시간 1
빛 한 점 없는,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각이 사라진 세계에서 소년의 코는 짙은 피비린내와 매캐한 먼지를 맡고, 촉각은 자신의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압력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중학생인 소년도 자신이 어떤 일에 휘말렸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이 칠흑의 세계에 갇힌 지는 꽤 오래되었고, 그 시간 동안 꾸준히 들려오던 고통에 찬 신음과 살려 달라는 비명조차도 이제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죽음이 잠시 뒤로 미뤄졌을 뿐,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이 무게는 자신이 치울 수 있는 무게가 아니고, 이곳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구하러 와주지 못한다고, 소년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살려 달라고 소리치던 목소리도 이미 먼 과거의 일. 희망은 썩어 문드러져 사라졌고, 살고 싶다는 욕구도 닳아 없어졌다. 소년은 그저 자신의 얼굴 위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한때는 뜨거웠던 액체를 느끼며 소년의 몸을 누르고 있던 엄마였던 것이 남긴 마지막 말만을 되새겼다.
* * *
따스한 햇살이 감겨진 눈을 간지럽혔다. 열려 있는 창문 사이로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들어왔다. 현성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이 꿈…… 오랜만에 꾸네…….”
현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여동생을 뒷바라지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살아올 때 즈음부터 꾸지 않던 꿈을 이제 와서 다시 꾸기 시작한 것을 보니, 자신이 지금 어지간히 편안한가 보다 생각했다.
졸린 눈을 억지로 뜨며 주위를 둘러보자 옆에는 요란하게 코를 골며 배를 벅벅 긁는 베오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제대로 이부자리를 펴고 얌전하게 자는 ORP가 있었다. 생긴 것과는 달리 베오보다 훨씬 문명인다운 모습이었다.
현성은 아직도 뻑뻑한 눈을 몇 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눈에 조금씩 눈물이 고이며 뻑뻑함이 사라져 갔다. 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생각보다 몸이 개운했다. 밤늦게까지 술을 먹고, 거기에 더해 유리와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다 들어와 세 시간 남짓 잤으니,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워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여덟 시간 정도를 푹 잔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 온 뒤로, 구체적으로는 레벨이 올라갈수록 피로 회복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하긴, 게임 캐릭터가 피곤해한다는 것도 좀 이상한가?’
현성은 그렇게 납득했다. 현성은 다시 세상모른 채 자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픽, 웃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덮고 잔 이불을 베오에게 덮어주고 자신의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개운한 기분을 느낀 것은 아무래도 현성뿐인 모양이었다. 베오와 수정은 일어나자마자 숙취를 호소했고, 유진은 그 특유의 포커페이스가 완전히 부서져서 턱까지 내려온 다크 서클을 보여주었다. 유리는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연신 하품을 하며 피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나마 ORP가 가장 멀쩡해 보였다.
그런 까닭에 ‘바벨탑’ 탐색은 오후, 그것도 점심을 먹은 지 한참 후에야 시작되었다. 사실 베오와 수정으로부터 오늘은 ‘바벨탑’ 탐색을 하지 말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곧바로 기각되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메인 탱커인 <가디언> ORP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베오는 거대한 할버드를 땅에 질질 끌며 금속음을 냈다. 수정은 시도 때도 없이 두통을 호소하며 누가 보면 임신했다고 오해할 정도로 헛구역질을 해 댔다. 유진 역시 퀭해진 눈으로 창을 땅에 질질 끌고 다니고 있었다.
“으으…… 머리 아퍼…….”
“그러게 좀 적당히 마시라니까. 술도 못 마시는 주제에 무리하기는.”
“멀쩡한 누나하고 현성이 형이 이상한 거야……. 하여간 술고래 아니랄까 봐.”
“……멀쩡하지는 않거든?”
유리가 이마에 힘줄을 빠직 세우며 말했다. 사실 그녀가 피곤한 이유는 술 때문이 아니라 현성과 이야기하느라 네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한 탓이지만, 현성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굳이 오해의 소지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베오와 수정이라면 그 부분을 어떻게든 양념해서 놀려 댈 것 같았다.
“와…… 근데 현성이 형도 대단하다. 그만큼 마시고도 그렇게 멀쩡해?”
“자기 주량도 조절 못하는 게 비정상 아닐까…….”
현성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리고 진실이기도 했다. 현성 본인의 주량이 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소주 기준으로 두 병까지는 맨 정신을 유지하는 정도의 주량이었다. 어디 가서 술 못 먹는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하지만 어제의 파티는 그 주량을 넘어서는 범주였다. 결국은 본인이 알아서 주량을 조절해야 했다. 작은 소주잔도 아니고, 나무통으로 만들어진 맥주잔만 한 크기의 술잔에 담긴 술을 꺾어 마시는 정도야 그에게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주량 조절은 본인 주량의 일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 그럼 형은 어제 일부러 조금씩 마셨다는 말……?”
베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좀 전까지 두통을 호소하던 소년은 어디 갔나 싶었다. 현성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먹이를 주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한 참이었다. 그 순간, 긴장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부터 긴장해. ‘중형’급 몬스터가 나올 수 있는 구역이니까.”
“어머나∼ 유리 언니, 은근히 말 돌리는 거 봐. 그러고 보니 어제 환영 파티에서 둘만 멀쩡했지? 뭐 했을까∼? 그러고 보니 오빠가 언니한테 언제부턴가 말을 놓네? 언니는 되게 피곤해 보이고?”
수정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놀렸다. 현성과 유리, 둘 다 흠칫했다. 이상한 짓(?)을 한 것은 아니지만,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다. 그것도 단둘이, 발코니에서.
그리고 유리가 일부러 주의를 돌린 이유도 현성에게 공격이 들어갈 타이밍에 대화의 흐름을 끊기 위해서인 것도 사실이었다.
유리의 얼굴에 일순간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유리는 여유를 되찾았다. 유리는 너무나도 상큼하게 싱긋, 웃으며 수정에게 반격했다.
“뭘 하긴, 취해서 뻗은 니들 옮겼지. 수정이, 너는 적당히 좀 먹어야겠더라. 너무 쪘던데? 어제 업었을 때 뱃살이 포동포동한 게…….”
“아…… 안 쪘거든! 매일매일 체중 확인하고 있단 말이야! 부…… 분명 어제는 좀 많이 먹기는 했지만…… 아냐! 그럴 리 없어!”
어지간히 민감한 부분인 모양이었다. 수정은 현실 부정까지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번 공방은 유리의 완승인 듯싶었다.
물론 그런 장난도 잠깐, 유리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말을 돌리기 위해 한 경고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쯤 들어오면 ‘중형’ 클래스 몬스터의 등장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었다.
바벨탑에서 ‘중형’ 클래스 몬스터를 본 적은 없지만, 라비린토스에서의 경험에 의하면 레벨 20 전후의 ‘일반’ 클래스 몬스터 출몰 지역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중형’ 클래스 몬스터의 서식지였다.
방금 전에 17∼21레벨의 <환몽의 수도사>가 등장했으니, 언제 ‘중형’ 클래스 몬스터가 등장하더라도 이상한 것은 없었다.
“아무튼 긴장해. 니들 상태 보니까 중형 한 마리만 떠도 전멸하겠다.”
“걱정 마! 여기 든든한 힐러가 있으니까!”
“너, 힐 되게 느리잖아.”
“…….”
유리의 한마디에 수정이 조용해졌다. 숙취의 영향으로 기가 많이 약해진 영향인지 오늘따라 유리는 수정을 간단히 제압하고 있었다. 물론 항상 페어로 놀려 대는 베오가 숙취 때문에 골골거리고 있어서 합세할 여유가 없다는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하긴, 힐이 너무 늦게 들어와서 내가 물약을 들이켜고 있지.”
ORP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메인 탱커인 <가디언>, ORP에게도 힐이 늦게 들어온다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는 말이었다. 수정은 단번에 울상이 되었다.
“오…… 오빠까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수정의 표정을 보자 ORP는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너무 심하게 말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럼 이번에 잘하면 되겠네.”
“어…… 언니이…….”
냉정한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타이밍에 그런 내용은 수정을 위로하는 말처럼 들렸고, 실제로 수정은 그렇게 알아들었다. 그래서 울상인 표정에 애교를 더해 유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유진의 시선은 줄곧 전방으로 향해 있었다. 수정을 외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전방에, 시선을 떼면 안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알아차린 유리가 외쳤다.
“진형 갖춰! 빨리!”
기묘한 푸른빛으로 빛나는 풀 플레이트 아머. 전신 판금 갑옷으로 온 몸을 감싸고, 오른손에는 그 길이가 4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마상창이, 왼손에는 거대한 원형 방패가 들려 있었다.
신장은 2m 50㎝ 정도로, 이제까지 봐온 몬스터들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환몽의 수호기사>. 23에서 25 정도의 레벨 분포를 보이는 ‘바벨탑’의 ‘중형’ 클래스 몬스터다.
<환몽의 수호기사>를 보자마자 각자가 반쯤 시체가 되어 있던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재빠르게 움직였다.
<가디언> ORP가 전방으로, <프리스트>인 수정과 <메이지> 유리가 뒤로, <버서커> 베오와 <스피어맨> 유진이 중위로 이동했다.
그리고 현성은 어디에 위치해야 할지 몰라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그는 완성된 파티의 전투를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파티 내에서 <글래디에이터>가 어떤 존재인지도 몰랐다.
“……엉?”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앨리스가 자신을 평가할 때 매겨준 70점은 굉장히 높게 평가해 준 수치였다고.
“이 형님, 파티 전투는 아예 모르는구만!”
ORP가 쾌활하게 외쳤다. 악의로 한 말은 아니지만, 그 말은 묘하게 현성의 가슴에 쑤셔 박혔다. 실제로 앨리스가 그에게 가르친 것은 기본적인 테크닉과 솔로 플레이 기술이지, 파티 플레이에서 <글래디에이터>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알려준 적 없었다.
단 한 가지, 단편적으로 말해준 것은 있었다. 현성은 70점이라고, 나머지 30점은 타인과 직접 부딪치며 단체전을 경험하면서 채워 나가야 하는 부분이라고.
물론 그전에 현성에게는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현성은 앞으로 걸어갔다. 파티 전원을 감싸는 ORP의 방패 앞까지. 그러고 나서 파티원들을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한데…… 저거, 나한테 양보해 주면 안 될까? 1:1로 해보고 싶은데…….”
16화
다시 흐르는 시간 1
빛 한 점 없는,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각이 사라진 세계에서 소년의 코는 짙은 피비린내와 매캐한 먼지를 맡고, 촉각은 자신의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압력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중학생인 소년도 자신이 어떤 일에 휘말렸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이 칠흑의 세계에 갇힌 지는 꽤 오래되었고, 그 시간 동안 꾸준히 들려오던 고통에 찬 신음과 살려 달라는 비명조차도 이제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죽음이 잠시 뒤로 미뤄졌을 뿐,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이 무게는 자신이 치울 수 있는 무게가 아니고, 이곳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구하러 와주지 못한다고, 소년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살려 달라고 소리치던 목소리도 이미 먼 과거의 일. 희망은 썩어 문드러져 사라졌고, 살고 싶다는 욕구도 닳아 없어졌다. 소년은 그저 자신의 얼굴 위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한때는 뜨거웠던 액체를 느끼며 소년의 몸을 누르고 있던 엄마였던 것이 남긴 마지막 말만을 되새겼다.
* * *
따스한 햇살이 감겨진 눈을 간지럽혔다. 열려 있는 창문 사이로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들어왔다. 현성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이 꿈…… 오랜만에 꾸네…….”
현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여동생을 뒷바라지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살아올 때 즈음부터 꾸지 않던 꿈을 이제 와서 다시 꾸기 시작한 것을 보니, 자신이 지금 어지간히 편안한가 보다 생각했다.
졸린 눈을 억지로 뜨며 주위를 둘러보자 옆에는 요란하게 코를 골며 배를 벅벅 긁는 베오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제대로 이부자리를 펴고 얌전하게 자는 ORP가 있었다. 생긴 것과는 달리 베오보다 훨씬 문명인다운 모습이었다.
현성은 아직도 뻑뻑한 눈을 몇 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눈에 조금씩 눈물이 고이며 뻑뻑함이 사라져 갔다. 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생각보다 몸이 개운했다. 밤늦게까지 술을 먹고, 거기에 더해 유리와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다 들어와 세 시간 남짓 잤으니,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워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여덟 시간 정도를 푹 잔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 온 뒤로, 구체적으로는 레벨이 올라갈수록 피로 회복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하긴, 게임 캐릭터가 피곤해한다는 것도 좀 이상한가?’
현성은 그렇게 납득했다. 현성은 다시 세상모른 채 자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픽, 웃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덮고 잔 이불을 베오에게 덮어주고 자신의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개운한 기분을 느낀 것은 아무래도 현성뿐인 모양이었다. 베오와 수정은 일어나자마자 숙취를 호소했고, 유진은 그 특유의 포커페이스가 완전히 부서져서 턱까지 내려온 다크 서클을 보여주었다. 유리는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연신 하품을 하며 피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나마 ORP가 가장 멀쩡해 보였다.
그런 까닭에 ‘바벨탑’ 탐색은 오후, 그것도 점심을 먹은 지 한참 후에야 시작되었다. 사실 베오와 수정으로부터 오늘은 ‘바벨탑’ 탐색을 하지 말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곧바로 기각되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메인 탱커인 <가디언> ORP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베오는 거대한 할버드를 땅에 질질 끌며 금속음을 냈다. 수정은 시도 때도 없이 두통을 호소하며 누가 보면 임신했다고 오해할 정도로 헛구역질을 해 댔다. 유진 역시 퀭해진 눈으로 창을 땅에 질질 끌고 다니고 있었다.
“으으…… 머리 아퍼…….”
“그러게 좀 적당히 마시라니까. 술도 못 마시는 주제에 무리하기는.”
“멀쩡한 누나하고 현성이 형이 이상한 거야……. 하여간 술고래 아니랄까 봐.”
“……멀쩡하지는 않거든?”
유리가 이마에 힘줄을 빠직 세우며 말했다. 사실 그녀가 피곤한 이유는 술 때문이 아니라 현성과 이야기하느라 네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한 탓이지만, 현성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굳이 오해의 소지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베오와 수정이라면 그 부분을 어떻게든 양념해서 놀려 댈 것 같았다.
“와…… 근데 현성이 형도 대단하다. 그만큼 마시고도 그렇게 멀쩡해?”
“자기 주량도 조절 못하는 게 비정상 아닐까…….”
현성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리고 진실이기도 했다. 현성 본인의 주량이 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소주 기준으로 두 병까지는 맨 정신을 유지하는 정도의 주량이었다. 어디 가서 술 못 먹는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하지만 어제의 파티는 그 주량을 넘어서는 범주였다. 결국은 본인이 알아서 주량을 조절해야 했다. 작은 소주잔도 아니고, 나무통으로 만들어진 맥주잔만 한 크기의 술잔에 담긴 술을 꺾어 마시는 정도야 그에게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주량 조절은 본인 주량의 일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 그럼 형은 어제 일부러 조금씩 마셨다는 말……?”
베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좀 전까지 두통을 호소하던 소년은 어디 갔나 싶었다. 현성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먹이를 주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한 참이었다. 그 순간, 긴장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부터 긴장해. ‘중형’급 몬스터가 나올 수 있는 구역이니까.”
“어머나∼ 유리 언니, 은근히 말 돌리는 거 봐. 그러고 보니 어제 환영 파티에서 둘만 멀쩡했지? 뭐 했을까∼? 그러고 보니 오빠가 언니한테 언제부턴가 말을 놓네? 언니는 되게 피곤해 보이고?”
수정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놀렸다. 현성과 유리, 둘 다 흠칫했다. 이상한 짓(?)을 한 것은 아니지만,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다. 그것도 단둘이, 발코니에서.
그리고 유리가 일부러 주의를 돌린 이유도 현성에게 공격이 들어갈 타이밍에 대화의 흐름을 끊기 위해서인 것도 사실이었다.
유리의 얼굴에 일순간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유리는 여유를 되찾았다. 유리는 너무나도 상큼하게 싱긋, 웃으며 수정에게 반격했다.
“뭘 하긴, 취해서 뻗은 니들 옮겼지. 수정이, 너는 적당히 좀 먹어야겠더라. 너무 쪘던데? 어제 업었을 때 뱃살이 포동포동한 게…….”
“아…… 안 쪘거든! 매일매일 체중 확인하고 있단 말이야! 부…… 분명 어제는 좀 많이 먹기는 했지만…… 아냐! 그럴 리 없어!”
어지간히 민감한 부분인 모양이었다. 수정은 현실 부정까지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번 공방은 유리의 완승인 듯싶었다.
물론 그런 장난도 잠깐, 유리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말을 돌리기 위해 한 경고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쯤 들어오면 ‘중형’ 클래스 몬스터의 등장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었다.
바벨탑에서 ‘중형’ 클래스 몬스터를 본 적은 없지만, 라비린토스에서의 경험에 의하면 레벨 20 전후의 ‘일반’ 클래스 몬스터 출몰 지역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중형’ 클래스 몬스터의 서식지였다.
방금 전에 17∼21레벨의 <환몽의 수도사>가 등장했으니, 언제 ‘중형’ 클래스 몬스터가 등장하더라도 이상한 것은 없었다.
“아무튼 긴장해. 니들 상태 보니까 중형 한 마리만 떠도 전멸하겠다.”
“걱정 마! 여기 든든한 힐러가 있으니까!”
“너, 힐 되게 느리잖아.”
“…….”
유리의 한마디에 수정이 조용해졌다. 숙취의 영향으로 기가 많이 약해진 영향인지 오늘따라 유리는 수정을 간단히 제압하고 있었다. 물론 항상 페어로 놀려 대는 베오가 숙취 때문에 골골거리고 있어서 합세할 여유가 없다는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하긴, 힐이 너무 늦게 들어와서 내가 물약을 들이켜고 있지.”
ORP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메인 탱커인 <가디언>, ORP에게도 힐이 늦게 들어온다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는 말이었다. 수정은 단번에 울상이 되었다.
“오…… 오빠까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수정의 표정을 보자 ORP는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너무 심하게 말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럼 이번에 잘하면 되겠네.”
“어…… 언니이…….”
냉정한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타이밍에 그런 내용은 수정을 위로하는 말처럼 들렸고, 실제로 수정은 그렇게 알아들었다. 그래서 울상인 표정에 애교를 더해 유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유진의 시선은 줄곧 전방으로 향해 있었다. 수정을 외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전방에, 시선을 떼면 안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알아차린 유리가 외쳤다.
“진형 갖춰! 빨리!”
기묘한 푸른빛으로 빛나는 풀 플레이트 아머. 전신 판금 갑옷으로 온 몸을 감싸고, 오른손에는 그 길이가 4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마상창이, 왼손에는 거대한 원형 방패가 들려 있었다.
신장은 2m 50㎝ 정도로, 이제까지 봐온 몬스터들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환몽의 수호기사>. 23에서 25 정도의 레벨 분포를 보이는 ‘바벨탑’의 ‘중형’ 클래스 몬스터다.
<환몽의 수호기사>를 보자마자 각자가 반쯤 시체가 되어 있던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재빠르게 움직였다.
<가디언> ORP가 전방으로, <프리스트>인 수정과 <메이지> 유리가 뒤로, <버서커> 베오와 <스피어맨> 유진이 중위로 이동했다.
그리고 현성은 어디에 위치해야 할지 몰라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그는 완성된 파티의 전투를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파티 내에서 <글래디에이터>가 어떤 존재인지도 몰랐다.
“……엉?”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앨리스가 자신을 평가할 때 매겨준 70점은 굉장히 높게 평가해 준 수치였다고.
“이 형님, 파티 전투는 아예 모르는구만!”
ORP가 쾌활하게 외쳤다. 악의로 한 말은 아니지만, 그 말은 묘하게 현성의 가슴에 쑤셔 박혔다. 실제로 앨리스가 그에게 가르친 것은 기본적인 테크닉과 솔로 플레이 기술이지, 파티 플레이에서 <글래디에이터>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알려준 적 없었다.
단 한 가지, 단편적으로 말해준 것은 있었다. 현성은 70점이라고, 나머지 30점은 타인과 직접 부딪치며 단체전을 경험하면서 채워 나가야 하는 부분이라고.
물론 그전에 현성에게는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현성은 앞으로 걸어갔다. 파티 전원을 감싸는 ORP의 방패 앞까지. 그러고 나서 파티원들을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한데…… 저거, 나한테 양보해 주면 안 될까? 1:1로 해보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