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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17화

다시 흐르는 시간 2

현성은 앞으로 걸어갔다. 파티 전원을 감싸는 ORP의 방패 앞까지. 그러고 나서 파티원들을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한데…… 저거, 나한테 양보해 주면 안 될까? 1:1로 해보고 싶은데…….”
“중형 몬스터를 혼자서? 에이, 그건 무리야, 형!”
베오의 우려 섞인 대답에 모두가 동의했다. 현성의 실력은 모르지만 1:1로 ‘중형’ 클래스의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라비린토스’에서도 1:1로 중형 몬스터와 맞설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었다.
현성의 말을 들은 유리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이유를 물었다.
“왜?”
“그냥…… 1:1로 중형급 몬스터를 잡을 정도면 어디 가서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들어서…….”
“한 사람 몫 하기 더럽게 어렵네……. 누구야, 그런 말 한 건? 그런 거 할 수 있는 녀석은 손에 꼽는다고.”
베오가 투덜거렸다.
그렇게 어려운 거였던가?
현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앨리스라고…… 알아?”
앨리스.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그 발언을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후, 모두를 대표해서 ORP가 말했다.
“그 아가씨면 그런 말 할 만도 하네…….”
“어…… 아는 사이야?”
“아는 사이고 나발이고, 이 세계에 떨어진 작자들 중에서 비공식이지만 최강이우, 형님. 랭킹 시스템이 레벨 50부터 적용되니 확인은 못하지만.”
ORP의 대답을 들은 현성의 눈이 커졌다.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수만 명의 사람들 중 고등학생 정도 연배로 보이는 예쁜 소녀가, 비록 비공식이라지만 최강이라는 사실은 현성에게 꽤나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라비린토스’에서 놀던 사람들이면 그 애가 최강이라는 건 다들 인정할 거야. 그런 애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 괜히 무리할 필요는 없어, 현성아.”
유리의 말에 현성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손에 꼽는다는 건…… 가능하다는 이야기잖아. 앨리스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고. 그럼 불가능하진 않겠지. 한 번 해보면 안 될까?”
현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신도 무리라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뒤에 파티원들이 있어 안전이 보장된 현재 상황 같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유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봐.”
“언니, 진짜로 보내려고? 안 위험하겠어?”
“위험하다 싶으면 그때 지져 버리지 뭐.”
수정의 염려에 유리는 태평하게 말하며 마도서를 꺼내 들었다. 캐스팅하는 스킬은 <체인 라이트닝>. 보통은 다음 대상으로의 전이 공격 효과를 노리고 쓰는 마법이지만, 이번에는 오로지 시전 시간만 보고 골랐다. 현재 그녀가 가진 <메이지>용 마법 스킬 중에서 캐스팅 속도가 가장 빠른 마법이었다.
현성이 위험해졌다 싶으면 바로 시전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속도에 치중한 스킬이라지만 명색이 <메이지>의 공격 스킬. 그 위력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겠지.
그리고 약간의 믿음도 그 판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현성의 클래스는 <글래디에이터>. <글래디에이터>는 수호 계열 3종 직업인 <가디언>, <몽크>, <팔라딘>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클래스들 중 가장 생존력이 강하다. 그런 현성이 설마 순식간에 당해 버리기야 하겠느냐, 하는 생각이었다.
스르릉, 부드러운 쇳소리를 내며 현성의 검이 뽑히자 검날이 푸르스름한 빛을 반사했다. 현성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처음 앨리스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와는 다르다. 레벨은 무려 3이나 더 올라 있었다. 추가된 스킬들도 생겼다. 이 정도면 도전할 만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몬스터의 5m 안쪽으로 접근했다. <환몽의 수호기사>의 얼굴 가리개 사이로 푸른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 들린 4m 길이의 마상창이 섬광이 되어 내질러졌다.
현성의 몸이 즉각 반응했다. 검이 세로로 세워져 검의 면과 마상창이 마찰되며 불꽃을 튕겼다. 섬광과도 같은 초격을 흘려낸 현성은 곧바로 몬스터의 지근거리로 접근했다.
초격은 발동 딜레이가 없다시피 한 탓에 스킬 연계의 시동기로 잘 쓰이는 <초승달 베기>와 그 뒤를 <쾌속 연격>과 <일섬>이 이었다. 총 9격의, 그야말로 신속과도 같은 검격이었다.
일반 몬스터라면 충분히 죽이고도 남았을 그 공격은, <환몽의 수호기사>에게는 총 HP의 10%조차 깎지 못하고 멈췄다. 그러나 현성은 당황하지 않았다. 중형 클래스 몬스터의 HP가 일반 클래스 몬스터보다 열 배 이상 많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후웅, 육중한 바람 소리를 내며 거대한 마상창이 허공을 갈랐다. 현성의 몸이 즉시 공중제비를 돌며 공격을 회피, 그 직후에 검을 강하게 내려쳤다. 회피 공격 스킬인 <벼락>, 그리고 이어지는 <회전 베기>와 <일섬>.

* * *

현성이 싸우는 모습을 파티원들은 뒤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회피와 공격을 적절히 섞어가며 전투를 벌이는 현성을 보며 베오가 태평하게 말했다.
“워우…… 저 형, 대단한데?”
“하긴, 처음 봤을 때도 아담이랑 대등한 상태 아니었어?”
“대등하지는 않고……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다가 디버프로 반격한 느낌? 그보다…… 생각보다 굉장히 잘 싸우네.”
수정과 유리가 번갈아가며 말했다. 유리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여전히 마도서를 들고 있지만, 왠지 내려놓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환몽의 수호기사>의 HP는 40%를 밑도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같은 페이스로 계속 밀어붙이면 금방 잡을 것이다. ‘라비린토스’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포함시키더라도, 저 정도까지 할 수 있는 <글래디에이터>는 많지 않다.
개인의 전투 능력은 저 정도인데, 파티에서의 역할을 아예 모르다니…….
유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실력의 편향이 너무 심하다. 몬스터를 상대로 한 개인 전투 능력은 우수하지만, 다른 직업과 부딪치거나 조합될 때에는 너무나도 서투르다. 여태껏 어느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솔로 플레이만 해온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그다지 지원이 필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유리는 펼치고 있던 마도서를 덮고는 베오의 옆에 털썩 앉았다.
현성의 전투 장면을 지켜보던 베오는 ‘끙차’ 하는 기합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옆에 세워둔 할버드를 잡았다. 유리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베오?”
“저 형, 슬슬 집중력이 깨질 때거든. 근접 계통 직업의 숙명이지, 뭐.”
그렇게 말한 베오는 할버드를 질질 끌며 천천히 싸움터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이제 막 전황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 * *

거대한 마상창이 땅에 꽂혔다. 마상창의 찌르기 공격이 표적을 조준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현성이 일부러 바로 발밑까지 접근한 것이다.
자신을 조준하고 날아오는 마상창을 피하고 무기가 땅에 꽂힌 틈을 타 현성이 반격에 들어갔다. 마상창을 뽑아 다시 자세를 잡기까지 아마도 3초 정도. 큰 규모의 스킬 연계를 한 번 더 이을 수 있는 시간이다.
“……?!”
그 순간, 현성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환몽의 수호기사>가 땅에 박힌 마상창을 미련 없이 버린 것이다. 그러더니 곧바로 허리춤에 찬 검으로 손을 가져가 발도와 동시에 현성을 향해 휘둘렀다.
상대는 신장만 2m 50cm에 육박하는 거구의 몬스터였다. 몬스터와 비교해서 롱 소드로 보이는 그 검은, 사람에게는 명백히, 앨리스가 쓰던 대검과 비슷한 크기로 보였다.
그 중량을 살린 대검의 일격은 몬스터의 근력에 힘입어 철퇴와도 같은 파괴력을 발휘했다. 현성은 급히 자세를 방어로 돌렸다. 검과 검이 맞부딪친 순간, 현성의 몸이 튕겨져 날아갔다.
약 10m 정도를 날아 바닥에 처박힌 현성의 시야에 무기 파괴 경고가 떴다. 곧 들고 있던 바스타드 소드의 중앙부에 금이 가더니, 두 동강이 나 바닥에 떨어졌다. HP는 약 10% 정도 깎인 상태였다.
<몽크>를 제외한 수호 계열 직업과 근접 공격 계열 직업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막기> 계열 스킬은 시전자의 근력 스탯, 무기의 성능, 무기 혹은 방패의 종류에 따른 방어 보정치, 클래스에 따른 방어 보정치를 합산하여 결정된 일정 수치 이하의 대미지를 완전히 방어한다.
반대로 말하면, 그 수치 이상으로 넘어가면 설령 방어하더라도 대미지를 입는다. 초과된 만큼의 대미지를.
현성의 장비와 스탯, 그리고 <글래디에이터>에게 주어진 보정치를 합산한 방어 가능 대미지 수치는 약 900, 현성의 총 HP는 약 2,500. 약 250 정도의 대미지가 들어왔으니 만약 현성이 막지 않았다면 약 1,150의 대미지를 줄 수 있는 일격이었다. 단 일격으로 약 46%에 달하는 HP를 날려 버릴 정도의 공격력인 것이다. 무시무시한 공격력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큰 피해는 무기가 파괴되어 버린 것이었다. 현성은 <글래디에이터>. 검이 없으면 전투 속행이 불가능하다. 처음으로 겪는 무기 파괴 현상에 현성이 크게 당황한 사이, <환몽의 수호기사>는 땅에 박힌 랜스를 뽑아 들었다.
다음 순간 발밑에서 푸른 물이 고여드는가 싶더니, 이내 군마가 되어 <환몽의 수호기사>를 태웠다.
‘수호기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환몽의 수호기사>는 말을 몰고 한 줄기 섬광이 되어 현성을 향해 돌진했다.
고작 검 한 자루의 위력이 그 정도였다. 그렇다면 랜스 차징의 위력은 어떻게 될까. 그 위력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피할 틈조차 없었다. 파멸의 일격이 현성에게 쇄도해 왔다. 마상창의 날카로운 창끝이 현성의 머리를 부수기 직전.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봐, 무리라니까?”
두터운 중갑과 거대한 할버드를 들고 어떻게 그 높이까지 뛰어올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베오는 하늘을 나는 듯 수호기사를 향해 날아왔다. 베오는 날아오는 기세에 더해 온 힘을 실어 할버드를 내려쳤다.
평소와 다르게 붉은 기운이 감도는 할버드는 허공에 붉은 선을 그리며 수호기사의 몸을 강렬하게 후려쳤다. 자신의 HP를 깎고, 감소한 HP에 비례한 대미지를 주는 <버서커> 최강의 일격 스킬, <광격>.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환몽의 수호기사>의 HP가 단번에 15%가량 깎여 나갔다. 치명타가 아님에도 그 정도였다. 그 충격으로 <환몽의 수호기사>는 낙마하여 바닥에 고꾸라졌고, 베오는 바닥에 착지하고는 다시 할버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늦다. <버서커>의 최대 특징은 강력한 한 방과 그에 비례해 끔찍할 정도로 긴 후 딜레이. <환몽의 수호기사>는 곧바로 일어나 랜스를 들고 베오를 노렸다.
그 공격을 가로막은 것은 ORP의 강철 방패였다. 강철과 강철이 충돌하며 굉음과 불꽃이 튀었다. 현성과 달리 흔들림 없는 안정적인 방어였다. <팔라딘>을 제외한다면, 가장 높은 방어 능력을 지닌 <가디언>의 힘이었다.
“니 뒤치다꺼리도 지친다, 이 자식아.”
“그러면서 잘 막아주네, 뭐.”
쏘아붙이면서도 ORP는 기분이 좋은 표정이었다. 베오의 직감이 아니었다면 눈앞에서 사람이 죽을 뻔한 것이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보여주는 두 남자의 등 뒤에서 검은 섬광이 날아들었다.
“노닥거릴 시간 없어.”
마치 검은 유성과도 같은 스피드로 돌진한 유진은 창을 한 바퀴 회전시키더니, 수호기사의 몸에 3연격 초고속 찌르기를 날렸다. <스피어맨>의 스킬, <트리플 피어싱>.
높은 방어력을 자랑하는 <환몽의 수호기사>이지만, 그녀의 직업은 <스피어맨>. 상대의 물리 방어력의 70%를 관통하는 특성을 지닌 클래스였다.
그런 특성 탓에 <광격>과 달리 HP를 소모하는 리스크 없이 수호기사의 체력을 12%나 깎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연이어 수호기사의 머리 위로 떨어진 푸른 낙뢰, <라이트닝 볼트>는 <환몽의 수호기사>의 남은 HP를 모조리 날려 버리며 소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