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 쌍극의 탑
18화

다시 흐르는 시간 3

흩어지는 빛의 무리 속, 유리는 생글거리는 얼굴로 너무나도 청량하게 외쳤다.
“마무리!”
“우우― 막타 스틸이다―!”
“막타 스틸범은 드롭 템을 내놔라―!”
수정과 베오가 야유를 보내며 항의했다. 현성을 구한 것은 베오이고, 두 번째 공격을 날린 것은 유진인데, 왜 수정이 드롭 템을 내놓으라고 하는지는 본인밖에 몰랐다. 유리가 그 둘을 찌릿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시끄러, 이것들아! 파티끼리 뭔 막타 타령이야?”
“막타가 아이템 다 가져가잖아! 그렇게 설정했잖아!”
“다 잡아놓은 거 숟가락만 얹었잖아!”
“……동감.”
항의는 더욱 거세어졌다. 하지만 유리는 당당했다. 방금 전 확인한 드롭 템, 그중에는 양보할 수 없는 아이템이 들어 있었다. 이건 줘야 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애시당초 숟가락 얹은 것은 본인만이 아니었다.
“시끄러! 나만 숟가락 얹었어? 이거, 현성이가 다 잡아놓은 거거든? 현성이 줄 거거든?”
“우우― 편애다, 편애!”
“아이템은 공정 분배하라―!”
바로 주장이 바뀌었다. 공정 분배하란다.
하지만 유리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몬스터를 잡고 드롭된 아이템은 두 개. 하나는 <수호기사의 갑옷 파편>이라는 재료 아이템이고, 하나는 장비 아이템이었다.
유리는 곧장 그것을 실체화시켰다. 푸른 기운이 도는 장검이 유리의 손에 쥐어졌다. <환몽의 영검>. 레벨 제한 20의 희귀[Rare] 등급 무기 아이템. 카테고리는 롱 소드.
무기 카테고리도, 레벨 제한도, 그리고 성능도…… 명백히 현성을 위한 아이템처럼 보였다. 유리는 현성에게 걸어가 손잡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자, 네 드롭 템.”
“아, 괜찮아. 필요한 사람한테…….”
“네가 제일 필요하잖아. 게다가 사실상 네가 다 잡은 거고.”
유리의 말에 현성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마침 쓰던 무기도 부서졌고, 방금 전의 전투로 자신에게 공격력 증강의 필요성을 느끼던 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드롭한 사람은 유리였고, 왠지 신세를 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거기다가 무려 희귀 등급 아이템이다. 지금 도시로 내려가서 가판대에 올려두기만 해도 부르는 게 값이겠지.
아이템의 체계는 크게 여섯 단계로 나뉜다.

일반[Common].
고급[Uncommon].
희귀[Rare].
보물[Treasure].
유물[Artifact].
전설[Legendary].

그중에서 세 번째 등급인 희귀급 아이템은 현재까지 그 수량이 열 개도 채 되지 않는다고 파악된 물품이다. 초기인 만큼 고위 등급 아이템이 잘 드롭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이건…….”
“에, 오빠가 가지는 게 맞겠네. 검 아이템이면…… 쳇.”
수정이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뭔가 더 나온 게 없나 하고 의심하는 것이었다. 물론 장난이지만, 유리는 이마에 힘줄을 세우며 말했다.
“재료 아이템 나왔어, 재료 아이템! 파티 공용 인벤토리 열어보든가! 어차피 우리 인벤토리 통합이잖아! 막타 몰빵 설정은 그래서 한 거잖아!”
그 모습에 베오와 수정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둘이 진지하게 항의하지 않고 장난을 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신입 멤버인 현성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파티 공용 인벤토리를 만들고, 그곳에 자신의 거의 전 재산을 전부 담아놓았다.
“언니 또 화낸다, 킥킥.”
“누나, 혹시 개인 인벤토리에 뭐 하나 슬쩍한 건 아니지? 왜 그렇게 찔린 표정이야?”
“이것들이 진짜! 너희 한 대씩 맞을래?”
유리가 팔을 흔들며 둘을 쫓아가고, 베오와 수정은 웃으면서 그녀로부터 달아나기 시작했다. 수정은 잽싸게 달아날 수 있었지만, <버서커>인 베오는 곧 붙잡혔다.
<메이지>인 그녀가 빠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풀 플레이트 아머에 거대한 할버드를 들고 다니는 <버서커> 베오보다는 빨랐다. 물론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투닥투닥 때린다고 해서 베오가 아플 리는 없었지만.
“……공용 인벤토리?”
현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개념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고 있을 줄은 몰랐고, 납득하기도 힘들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시스템이다. 넣는 것도, 빼는 것도 자유롭다면, 누군가 나쁜 마음을 품고 자신의 인벤토리에 모조리 쓸어 담은 후 파티를 탈퇴해 도망가 버리면 답이 없지 않은가.
“아, 그러고 보니 형님은 아직 통합 안 했지?”
“아…… 그러고 보니!”
이제야 기억났다는 듯 ORP가 말을 꺼내고, 유리가 손뼉을 짝, 치며 동조했다. 마치 인벤토리 공유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공용 인벤토리 써?”
“교환 불가 아이템인데 필요 없는 사람이 드롭하면 곤란하니까 만든 거요. 게다가 물약도 급하면 바로바로 꺼내 쓸 수 있으니까. 만들고 보니 편해서 다들 자기 재산까지 넣고 다니는 거고. 그리고 혹시 누가 길 가다가 PK당하더라도 아이템 떨굴 걱정 없잖수.”
“그러다 누가 갖고 도망가 버리면?”
당연한 의문이다. 파티 인벤토리에서 누구나 그 아이템을 꺼낼 수 있으면, 누군가 그걸 갖고 도망쳐 버릴 가능성은 당연히 있다. 그 질문에 ORP는 히죽 웃었다. 원시인 같은 그 외모에 파티원들에 대한 신뢰와 순수한 호의가 담겨 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수?”
너무나도 순수한 호의와 신뢰. 현성은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족을 제외하고 저렇게까지 누군가를 믿어본 적이 있던가.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는 현성의 모습에 유리는 픽, 웃었다. 확실히 남들이 보면 놀라울 수도 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세계에 온 후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사람을 믿기에는 부족한 기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와 팀원들은 마치 10년을 만난 것처럼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개인적으로는 현성 역시 믿어도 될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형씨도 하실 테우?”
“어…… 나도?”
예상치도 못한 제안이었다. 현성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ORP를 바라보았다. 의심 따위는 깃들지 않은, 절대적이고도 순수한 신뢰가 그의 눈에서 엿보였다.
“괜찮은…… 거야? 나 여기 들어온 지 이틀도 안 됐잖아.”
“그게 중요하우? 형씨가 우리 팀원이라는 게 중요하지.”
“아니, 내가 만약 갖고 도망쳐 버리면…….”
“형씨, 그런 짓 하실 거유?”
“아니, 내가 한다는 말이 아니라…….”
당황해서 대답하는 현성에게 ORP는 씨익 웃었다. 원시인다운 그의 얼굴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순수한 웃음이었다.
“그럼 문제없잖수?”
ORP는 정말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 말에 유리도, 다른 모두도 동조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을 신뢰해 주는 모습에 현성은 말문이 막혔다. 정말 이런 바보들이 있을까.
인벤토리에는 단순히 돈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장비는 물론, 서로의 목숨을 챙겨주기 위한 포션이나 붕대, 귀환서 등 중요 물품까지 들어 있다.
그런 중요한 공용 인벤토리를 그저 같은 팀원이라는 이유로 공유하자고 한다. 그것은 서로의 생명을 공유하자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것도 만난 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은 사람에게.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그저 ‘하지 않는다’는, 그런 허술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대답을 듣고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는 자신들의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의심이 티끌만큼이라도 있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겠지. 그야말로 어린아이도 놀릴 정도의 절대적인 신뢰이다.
“그럼 공용 인벤토리, 쓰실 거요?”
만약 자신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그러한 가정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다. 현성은 정말 바보 같은 태도라고 생각했다.
이 녀석은…… 정말로 바보다. 그리고 이 파티의 모두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바보다.
“……우슈?”
“……어?”
황당하다는 듯이 묻는 ORP의 말에 현성은 자신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것을 알아차렸다.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무슨 감정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자신의 마음을 파고드는, 그러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어? 형 우네?”
“에∼ 이런 걸로 감동한 거야? 오빠, 눈물 되게 싸다∼!”
현성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발견한 베오와 수정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자기 자신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당황한 현성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얼굴을 가렸다. 혼란스러웠다. 지금 자신이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왜 눈물이 흐르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닦아.”
어느새 다가온 유진이 손수건을 내밀며 짧게 말했다. 그 언뜻 차가워 보이는 얼굴에는 약간의 걱정이 담겨 있었다. 현성은 천천히 손수건을 받아 들어 얼굴을 닦았다.
왜 눈물이 흐르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단순하게 사람 간의 온기와, 자신을 향한 순수한 신뢰에 굶주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마음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충족되었다고…… 현성은 느꼈다.
시계가 녹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얼어붙어 있던 시계가 어떠한 계기로 녹아서, 천천히 째깍거리는 소리를 울리며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