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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21화
첫 번째 관문 2
거대한 문이었다.
금속 재질의 검푸른 색 문에는 이상한 문양이 가운데에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그 문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 살고 있던 주민이자 이곳의 주인인 ‘이브’ 인들이 세운 대신전의 ‘부활의 제단’에 있는 문양.
즉, 이브 인들의 신을 의미하는 문양이었다. 그리고 문양 주위로는 다양한 인물과 동식물이 새겨져 있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바벨탑의 제1관문이었다.
“……이래서 더 가자고 했던 거야, 누나?”
현성의 물음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라비린토스’에서도 중형 몬스터의 출몰이 지나치게 밀집되어 있는 곳을 지나면 ‘관문’이 나왔으니까. 물론 그 이후에도 미궁이 이어져 찾기 어렵긴 했지만.”
“이게…… 관문…….”
현성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목표하던, 바벨탑의 꼭대기로 가기 위한 첫 번째 문. 최초의 관문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관문을 올려다보던 베오는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는 유리 쪽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누나? 들어갈 거야?”
“아니. 우리 모두 지쳤잖아. 오늘은 관문에 도착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가서 쉬자.”
유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한 사람만은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현성이었다. 현성은 굳은 표정으로 관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꾹 다물어진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귀환하자, 얘들아. 모여.”
현성을 제외한 나머지 파티원들이 전원 유리의 곁으로 모였다. 하지만 현성은 전혀 듣지 못한 듯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관문만을 노려보았다.
“현성아?”
유리가 다시금 그를 불렀다. 세 번쯤 부르고 나서야 현성이 고개를 돌렸다. 유리는 애써 웃는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귀환하자.”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한참 후에야 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입술은 꾹 다문 상태였다.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유리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를 제대로 마주 보고, 그와 자신들의 차이점을 직면하여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이 끝나고 그를 제대로 마주 보고 각자의 입장의 차이를 직면할 수 있을 때, 그때 이야기를 하자고 유리는 생각하며 귀환서를 작동시켰다.
* * *
간단히 이루어진 회식이 끝나고, 유리는 여느 때처럼 발코니로 올라왔다. 그곳은 이미 회식 후 유리와 현성의 이야기 장소가 되어 있었다.
발코니에 기대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현성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옆으로 다가갔다.
“불만이야?”
“뭐가?”
“관문으로 안 들어가고 돌아온 거.”
유리의 말에 현성은 침묵했다. 유리는 그 표정을 살피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후, 현성과 함께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 사이로 마치 밤하늘이 눈물을 흘리듯 아름다운 꼬리를 빛내며 별똥별이 떨어졌다. 그 모습이 유리의 커다란 눈망울 안에 들어가, 별빛보다 더 아름다운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미안해.”
사과의 말이 유리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현성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서운한 것은 아니다. 파티 멤버들은 지쳤고, 관문은 위험했다. 만전의 상태로 도전한다 하더라도 가능성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장소다. 그런 이유는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사실 말이야, 애들이 지쳤다는 건 핑계였어. 사실은 무서웠던 것뿐이야. 누구 한 명이라도 잃을까 봐…… 그래서…….”
여전히 현성은 아무 말도 없었다. 유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올라왔다. 티를 안 내려 노력했을 뿐, 현성의 탑을 향한 집념은 놀라울 정도였다. 가장 먼저 준비하고, 가장 마지막까지 탑에 머무르려 했다. 파티의 어느 누구보다도 ‘탐색’에 적극적이었다. 그런 그에게 유리는 그동안 자신들, 현성을 제외한 멤버들의 목적을 말하지 못했다.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늦게’를 속으로 계속해서 읊으며 미뤄왔고, 결국 서로의 삶이 충돌하는 지금 이 시점까지 와버렸다.
조금 더 일찍 말했다면 좋았을걸.
유리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실…… 우리는 탑을 올라갈 생각이 별로 없어.”
현성의 탑에 대한 집념을 알았을 때, 진즉에 말해야 했던 것. 아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해두어야 했던, 자신이 숨겨온 사실. 그것이 유리의 입을 통해 지금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뭐랄까, 낙오자들이거든. 미궁의 경쟁에서 밀려나 갈 곳을 잃어버려서, 그 주제에 뒤처지기는 싫어서…… 그래서 탑에 들어온 거야. 그래서 너처럼 필사적으로 탑을 올라가지 못해. 나도…… 베오도, 수정이도, 모두…….”
그런 주제에 탑을 올라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너를 영입했다고, 유리는 그렇게 말을 이어갔다.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주위에 있는, 새로 생긴 가족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원래 세계에 미련이 없다고.
“아무도 없어, ‘저쪽’에는……. 모두 떠났거든. 나 혼자뿐인 거야.”
현성도 기억하는 사고. 그가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기 한 달 전에 발생한, 거대 싱크홀로 인한 건물 붕괴 사고. 그 사고에 휘말린 유리는 그곳에서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 사고에서 목숨을 잃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관리자에 의해 이 세계로 오게 되었을 때, 유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가족들을 찾는 것이었다. 자신과 같이 목숨을 잃은 부모님과 동생이 이 세계에 같이 도착하지는 않았을까. 그러한 희망을 품고 유리는 미친 듯이 도시를 뒤지고 다녔다. 이 세계에 오게 된, 자신과 같은 이방인과 원래 살던 주민인 이브 인들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사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찾았다. 찾으면 찾을수록 이 세계로 오게 된 2만 5,000명 중에 가족이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세계로 오게 된 것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확신하고 있는 진실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충돌하여 무너져 내렸을 때 그녀가 만나게 된 사람들이, 그리고 사고 당시의 시간에서 멈춰 있던 그녀를 구원한 사람들이 지금의 파티 멤버들이었다.
“그래서 난…… 지금 아이들이 더 소중해. 너처럼 필사적으로 탑을 오를 수가 없어. 그 과정에서 누군가라도 잃는다는 상상을 하면……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거든.”
탑을 올라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죽음의 바로 옆길을 걷게 된다는 의미였다.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끝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길. 유리는 그 길을 걸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팀원들을 데리고 그 길을 걷게 할 수 없었다.
현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역시도 파티 멤버들과 지내면서 다소는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탑을 필사적으로 오르는 이들이 아니라고,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지금은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배신감은 없었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단지 공허함만이 가슴속에 감돌았다. 그런 그에게 유리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닿았다.
“그러니까, 말해주지 않을래?”
“……뭐?”
“네가 탑을 올라가는 이유. 그리고 욕심을 조금만 더 내자면…… 네가 과거에 붙잡혀 있는 이유.”
그 순간, 현성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마음속 무언가가 유리의 말에 반응했다. 날카로운 것으로 심장을 찌른 느낌.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자신이 알아채지 못한 마음 속 균열에 유리가 정확하게 손을 뻗은, 그런 느낌이었다.
“큰 사고를 겪었지?”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웠다. 마치 속을 읽히는 것 같았다. 혼란 속, 유리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현성의 마음을 헤집었다.
“그리고…… 탑을 올라가는 이유도 그 일과 관계된 거지?”
“어떻……게?”
그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말해준 적도, 관련해서 이야기를 한 적도 없는 것을…… 그녀가 어떻게 알고 있는가. 현성은 떨리는 눈으로 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유리의 커다란 눈은 다소 촉촉해져서 평소보다도 더 많은 별빛을 담고 있었다. 유리는 싱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랑 나는 닮았으니까.”
그것은 예전, 이미 일주일도 더 전에 유진이 유리와 현성에게 한 말이었다. 그리고 분명 그때, 유리도 마지막에는 동의했다.
그때, 유리는 어떤 점이 닮았다고 했었나.
“도와줄게, 네 소망.”
유리의 목소리가 조그맣지만 은은하게 울렸다. 그 말을 들은 현성의 눈이 커졌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는 유리는 은은하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 속에 있는 별빛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만난 시간은 짧지만…… 너도 다른 애들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소중해. 그러니까 네 소망, 도와줄게. 대신…….”
유리는 잠시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그런 후에 의지를 담아 똑바로 현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말해줘, 탑을 올라가는 이유. 그리고…… 네 과거 이야기.”
유리의 눈을 들여다보며 현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할 수 없는 과거는 아니다. 대단한 비밀도 아니다. 그저 듣는 사람이 기분 나빠지는, 그런 3류 비극 이야기일 뿐이었다.
타인에게 동정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성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시시한 3류 비극 이야기로 누군가를, 소중한 사람들을 죽음에 가장 가까운 이 길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유리를, 그리고 다른 멤버들 모두를, 자신이 걷는 길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같이 걷고 싶었다.
입이 열렸다. 낮은 목소리로 현성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말 별거 아닌 이야기야.”
21화
첫 번째 관문 2
거대한 문이었다.
금속 재질의 검푸른 색 문에는 이상한 문양이 가운데에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그 문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 살고 있던 주민이자 이곳의 주인인 ‘이브’ 인들이 세운 대신전의 ‘부활의 제단’에 있는 문양.
즉, 이브 인들의 신을 의미하는 문양이었다. 그리고 문양 주위로는 다양한 인물과 동식물이 새겨져 있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바벨탑의 제1관문이었다.
“……이래서 더 가자고 했던 거야, 누나?”
현성의 물음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라비린토스’에서도 중형 몬스터의 출몰이 지나치게 밀집되어 있는 곳을 지나면 ‘관문’이 나왔으니까. 물론 그 이후에도 미궁이 이어져 찾기 어렵긴 했지만.”
“이게…… 관문…….”
현성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목표하던, 바벨탑의 꼭대기로 가기 위한 첫 번째 문. 최초의 관문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관문을 올려다보던 베오는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는 유리 쪽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누나? 들어갈 거야?”
“아니. 우리 모두 지쳤잖아. 오늘은 관문에 도착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가서 쉬자.”
유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한 사람만은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현성이었다. 현성은 굳은 표정으로 관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꾹 다물어진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귀환하자, 얘들아. 모여.”
현성을 제외한 나머지 파티원들이 전원 유리의 곁으로 모였다. 하지만 현성은 전혀 듣지 못한 듯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관문만을 노려보았다.
“현성아?”
유리가 다시금 그를 불렀다. 세 번쯤 부르고 나서야 현성이 고개를 돌렸다. 유리는 애써 웃는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귀환하자.”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한참 후에야 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입술은 꾹 다문 상태였다.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유리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를 제대로 마주 보고, 그와 자신들의 차이점을 직면하여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이 끝나고 그를 제대로 마주 보고 각자의 입장의 차이를 직면할 수 있을 때, 그때 이야기를 하자고 유리는 생각하며 귀환서를 작동시켰다.
* * *
간단히 이루어진 회식이 끝나고, 유리는 여느 때처럼 발코니로 올라왔다. 그곳은 이미 회식 후 유리와 현성의 이야기 장소가 되어 있었다.
발코니에 기대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현성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옆으로 다가갔다.
“불만이야?”
“뭐가?”
“관문으로 안 들어가고 돌아온 거.”
유리의 말에 현성은 침묵했다. 유리는 그 표정을 살피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후, 현성과 함께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 사이로 마치 밤하늘이 눈물을 흘리듯 아름다운 꼬리를 빛내며 별똥별이 떨어졌다. 그 모습이 유리의 커다란 눈망울 안에 들어가, 별빛보다 더 아름다운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미안해.”
사과의 말이 유리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현성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서운한 것은 아니다. 파티 멤버들은 지쳤고, 관문은 위험했다. 만전의 상태로 도전한다 하더라도 가능성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장소다. 그런 이유는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사실 말이야, 애들이 지쳤다는 건 핑계였어. 사실은 무서웠던 것뿐이야. 누구 한 명이라도 잃을까 봐…… 그래서…….”
여전히 현성은 아무 말도 없었다. 유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올라왔다. 티를 안 내려 노력했을 뿐, 현성의 탑을 향한 집념은 놀라울 정도였다. 가장 먼저 준비하고, 가장 마지막까지 탑에 머무르려 했다. 파티의 어느 누구보다도 ‘탐색’에 적극적이었다. 그런 그에게 유리는 그동안 자신들, 현성을 제외한 멤버들의 목적을 말하지 못했다.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늦게’를 속으로 계속해서 읊으며 미뤄왔고, 결국 서로의 삶이 충돌하는 지금 이 시점까지 와버렸다.
조금 더 일찍 말했다면 좋았을걸.
유리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실…… 우리는 탑을 올라갈 생각이 별로 없어.”
현성의 탑에 대한 집념을 알았을 때, 진즉에 말해야 했던 것. 아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해두어야 했던, 자신이 숨겨온 사실. 그것이 유리의 입을 통해 지금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뭐랄까, 낙오자들이거든. 미궁의 경쟁에서 밀려나 갈 곳을 잃어버려서, 그 주제에 뒤처지기는 싫어서…… 그래서 탑에 들어온 거야. 그래서 너처럼 필사적으로 탑을 올라가지 못해. 나도…… 베오도, 수정이도, 모두…….”
그런 주제에 탑을 올라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너를 영입했다고, 유리는 그렇게 말을 이어갔다.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주위에 있는, 새로 생긴 가족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원래 세계에 미련이 없다고.
“아무도 없어, ‘저쪽’에는……. 모두 떠났거든. 나 혼자뿐인 거야.”
현성도 기억하는 사고. 그가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기 한 달 전에 발생한, 거대 싱크홀로 인한 건물 붕괴 사고. 그 사고에 휘말린 유리는 그곳에서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 사고에서 목숨을 잃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관리자에 의해 이 세계로 오게 되었을 때, 유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가족들을 찾는 것이었다. 자신과 같이 목숨을 잃은 부모님과 동생이 이 세계에 같이 도착하지는 않았을까. 그러한 희망을 품고 유리는 미친 듯이 도시를 뒤지고 다녔다. 이 세계에 오게 된, 자신과 같은 이방인과 원래 살던 주민인 이브 인들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사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찾았다. 찾으면 찾을수록 이 세계로 오게 된 2만 5,000명 중에 가족이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세계로 오게 된 것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확신하고 있는 진실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충돌하여 무너져 내렸을 때 그녀가 만나게 된 사람들이, 그리고 사고 당시의 시간에서 멈춰 있던 그녀를 구원한 사람들이 지금의 파티 멤버들이었다.
“그래서 난…… 지금 아이들이 더 소중해. 너처럼 필사적으로 탑을 오를 수가 없어. 그 과정에서 누군가라도 잃는다는 상상을 하면……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거든.”
탑을 올라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죽음의 바로 옆길을 걷게 된다는 의미였다.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끝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길. 유리는 그 길을 걸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팀원들을 데리고 그 길을 걷게 할 수 없었다.
현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역시도 파티 멤버들과 지내면서 다소는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탑을 필사적으로 오르는 이들이 아니라고,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지금은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배신감은 없었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단지 공허함만이 가슴속에 감돌았다. 그런 그에게 유리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닿았다.
“그러니까, 말해주지 않을래?”
“……뭐?”
“네가 탑을 올라가는 이유. 그리고 욕심을 조금만 더 내자면…… 네가 과거에 붙잡혀 있는 이유.”
그 순간, 현성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마음속 무언가가 유리의 말에 반응했다. 날카로운 것으로 심장을 찌른 느낌.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자신이 알아채지 못한 마음 속 균열에 유리가 정확하게 손을 뻗은, 그런 느낌이었다.
“큰 사고를 겪었지?”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웠다. 마치 속을 읽히는 것 같았다. 혼란 속, 유리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현성의 마음을 헤집었다.
“그리고…… 탑을 올라가는 이유도 그 일과 관계된 거지?”
“어떻……게?”
그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말해준 적도, 관련해서 이야기를 한 적도 없는 것을…… 그녀가 어떻게 알고 있는가. 현성은 떨리는 눈으로 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유리의 커다란 눈은 다소 촉촉해져서 평소보다도 더 많은 별빛을 담고 있었다. 유리는 싱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랑 나는 닮았으니까.”
그것은 예전, 이미 일주일도 더 전에 유진이 유리와 현성에게 한 말이었다. 그리고 분명 그때, 유리도 마지막에는 동의했다.
그때, 유리는 어떤 점이 닮았다고 했었나.
“도와줄게, 네 소망.”
유리의 목소리가 조그맣지만 은은하게 울렸다. 그 말을 들은 현성의 눈이 커졌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는 유리는 은은하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 속에 있는 별빛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만난 시간은 짧지만…… 너도 다른 애들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소중해. 그러니까 네 소망, 도와줄게. 대신…….”
유리는 잠시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그런 후에 의지를 담아 똑바로 현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말해줘, 탑을 올라가는 이유. 그리고…… 네 과거 이야기.”
유리의 눈을 들여다보며 현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할 수 없는 과거는 아니다. 대단한 비밀도 아니다. 그저 듣는 사람이 기분 나빠지는, 그런 3류 비극 이야기일 뿐이었다.
타인에게 동정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성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시시한 3류 비극 이야기로 누군가를, 소중한 사람들을 죽음에 가장 가까운 이 길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유리를, 그리고 다른 멤버들 모두를, 자신이 걷는 길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같이 걷고 싶었다.
입이 열렸다. 낮은 목소리로 현성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말 별거 아닌 이야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