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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22화

첫 번째 관문 3

그의 이야기는 별 대단한 것이 없는 3류 이야기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력 없는 작가가 불행한 주인공을 그리고 싶을 때 이렇게 설정하지 않을까 할 만큼, 너무나도 빤하고 재미없는 이야기. 그것이 현성이 생각하는 자신의 이야기였다.
커다란 사고가 있었다. 그것은 유리도 들은 적이 있던 사고. 전 국민을 충격에 몰아넣은, 31층짜리 건물의 붕괴 사고였다. 집에 혼자 남아 있던 동생을 제외한 그의 가족 모두가 그 사고에 휘말렸다. 그리고 그것은 소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죽음의 순간,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소년을 살려냈다. 짓뭉개진 어머니의 시체에 깔려, 소년은 그곳에서 구출될 때까지 긴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소년의 시간 감각은 망가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당시 소년에게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구출된 소년에게 남아 있는 것은 어린 동생뿐이었다.
15세. 누군가의 보호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할 나이에 소년은 동생을 책임지는 입장이 되었다. 아직 덜 자란 그 작고 여린 어깨에, 자신과 동생의 삶을 동시에 짊어지게 되었다.
소년이 짊어지기에 그 짐은 너무 버거웠다. 한 명의 삶조차도 그 작은 어깨에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래서 소년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삶을 그 작은 어깨에서 내려놓았다.
자신의 삶도, 미래도, 행복도…… 소년의 어깨에서 내려갔다. 그의 어깨에는 이제 동생의 삶만이 짊어져 있었다. 소년의 인생은 동생만을 위한 삶이 되었다.
그 이후에는 별것 없었다. 그저 일하면서 동생의 삶을 힘껏 짊어졌을 뿐이다. 소년은 머리가 좋지 않았다. 어떠한 분야에 특출 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몸이 튼튼하지도, 창의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년이 가진 것은 자신의 삶을 버릴 정도의 우둔함과 책임감뿐. 소년은 그 두 가지를 갖고 일을 시작했다.
세상에 소년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짐을 대신 짊어져 줄 사람도, 자신의 그늘 안으로 들여보내 줄 사람도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스로를 책임질 생각이 없는데 타인이 자신을 책임져 줄 거라 생각하는 것부터가 모순이었다. 소년은 애초에 그런 기대조차 한 적 없었다.
그렇게 6년, 소년은 성인이 되었고…….
사고를 당해 이곳으로 왔다.

“…….”
유리는 아무 말도 없었다. 현성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해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신의 삶을 내려놓았다’고 말하는 청년의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질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아도, 이해를 거부해도…… 그녀는 현성의 삶에서 빠진 가장 중요한 것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 너는……?”
유리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슨 대답이 나올지 이미 짐작하고 있는데도, 유리는 쓸모없는 희망을 품으며 현성에게 질문했다.
“네 삶은…… 아니다. 동생이 자립하면, 그 이후엔 넌 무엇을 할지 생각해 본 적 있어?”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있다. 가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자식의 육성에 자신의 젊음과 헌신을 바치는 부모 또한 드물지 않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자신’이 깔려 있다. 그것이 정상이다.
“음…… 그러고 보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 그러게…… 현지가 자립하게 되면 난 뭐 하지?”
너무나도 태연하게 그런 말을 내뱉는 모습을 보며 유리는 현성의 어디가 망가졌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의 삶에는 그 자신이 없다. 동생을 위한 헌신의 밑바탕에도 자신이 없다. 살아가는 데에 있어 자신의 삶은 고려 대상에 들어가지조차 않는다. 본인이 말한 그대로, 자신의 삶을 내려놓은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동생만을 위하는 거야? 왜 네 삶은 생각하지 않고, 동생만……!”
자신도 모르게 그런 질문이 터져 나왔다. 의미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억누를 수 없었다.
“왜냐니? 그야…….”
대답을 앞두고 현성은 싱긋 웃었다. 너무나도 순수하고 깨끗한 웃음을 얼굴에 피워내며, 말을 이었다.
“오빠잖아? 그러니까, 내가 챙겨야지.”
그 웃음에 마음이 아려왔다. 동생을 위해 포기한 자신의 삶에 대한 미련도, 그렇게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조차도 그 웃음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동생을 챙기며 살아온 세월이 좋았다고, 그러한 뿌듯함만이 있었다.
“너…….”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슬픈 과거였다면, 그랬다면 정말로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같이 슬퍼해 주며 등을 토닥이고, 함께 길을 걷자고, 그렇게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비록 이 세계로 오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은 변함이 없다. 사치스러운 고민을 콤플렉스라고 안고 살았던 평범한 자신은 그를 이해할 수 없다.
그에게 어떠한 말도 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청년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것으로 해맑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그저 위선일 뿐인 행동. 하지만 지금의 그녀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
유리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유리는 발돋움까지 하며 현성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기 시작했다.
“어휴, 높아라. 고개 좀 숙여봐.”
사실 현성이 크다기보다는 유리가 지나치게 작은 것이지만, 현성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유리는 생긋 미소 짓고 현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현성으로서는 그 행동의 의미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
현성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러던 중 갑자기 유리의 팔이 현성의 목을 감더니 강하게 끌어당겼다. 현성은 얼떨결에 몸을 숙였다. 유리가 현성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힘들었겠네…… 고생했어.”
“아니, 그렇게 힘들지는…….”
“힘들었잖아, 멍청아.”
힘들지 않을 리가 없다. 자기 스스로를 버린다는 결정이 고통스럽지 않을 리 없다. 그것을 견딜 자신이 없어서, 짊어지고 있는 것이 너무 무거워서 스스로 부서져 버린 소년이었다.
현성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마음 한가운데에서부터 너무나도 따스한 온기가 퍼져 나왔다. 그것이 너무 따뜻해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기댈 곳이 필요했던 거다. 따뜻한 온기 속에서, 누군가에게 기대어, 조금은 쉴 곳이 필요했던 거다. 항상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동생이 자신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동안, 기댈 곳 없던 자신은 너무나도 지쳐 버린 것이다.
아직 청년이 되지 못한 소년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자신을 다독여 주는 소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아주 잠시만, 다시 걸을 수 있도록 아주 조금 쉬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속으로 필사적으로 변명하며, 소년은 소녀에게 기대었다.

* * *

숙소의 방문 앞에서 유리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현성이 문고리를 잡아 돌리던 참이었다. 유리는 살짝 미소 짓고 인사를 했다.
“잘 자.”
“응. 누나도.”
그리 많이 울지는 않았지만 눈물 흘린 티가 나는 얼굴로, 조금은 쑥스러운지 어색하게 웃으며 현성이 대답했다.
유리는 피식 웃었다. 이것으로 그가 짊어진 것이 조금은 가벼워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현성이 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 유리는 다시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현성아.”
“응?”
“……고마워, 이야기해 줘서.”
현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가 조금 민망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더 고맙지. 이야기 들어줘서…… 그럼 잘 자.”
“……응.”
서로 민망한 미소를 지은 채 동시에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탁, 문이 닫히고 고요가 찾아왔다.

따사로운 햇살이 식당 안으로 들어와 내부에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었다. 식탁에는 간단한 샌드위치와 우유가 놓여 있고, 현성을 비롯한 파티원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밤에는 주정뱅이들의 성지가 될 만큼 떠들썩한 술집이지만, 그 외에는 여느 식당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식당이 되는 것이 바로 이곳, ‘악마의 휴가증’이었다.
선술집 위에 숙소가 있는 곳이다 보니 식당 나름대로 손님들을 배려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덕분에 현성과 파티원들은 항상 회식 다음 날에 이렇게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2층 숙소로 이어지는 계단 쪽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파티원들이 돌아보자, 그곳에는 귀여운 분홍색 곰돌이 잠옷을 입은 유리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내려오고 있었다. 충혈된 그 눈을 보고 ORP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누님, 웬 늦잠이우?”
“아…… 잠을 좀 설쳐서…….”
유리는 한 번 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식탁으로 다가왔다. 식탁에는 파티원들 것 외에 샌드위치와 우유가 한 세트 더 놓여 있었다. 현성이 접시에 놓인 샌드위치를 집어 유리의 입가에 가져다주며 말했다.
“하나 더 주문해 놓길 잘했네. 자, 샌드위치.”
“우움…… 고마어…….”
유리는 현성이 내미는 친절을 고맙게 받아들이며 샌드위치를 오물거렸다. 컵을 내려놓는 소리, 쩝쩝거리며 먹는 소리 등 한가로운 소음만이 주변을 채웠다. 다들 아침 햇살에 취해 나른한 상태였기에 그다지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평화로운 아침 식사였다.

아침 식사가 끝난 후, 다들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모였다. 유리가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해서 모두를 한자리에 모은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명목상 파티의 리더인 그녀가 이런 식으로 본인이 리더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오늘 ‘관문’에 한 번 가보자.”
진지한 태도로 유리가 말을 꺼냈다. 현성은 그 말에 놀라 유리를 보았다. 어제, 그녀는 탑을 올라가는 것보다 그녀 주위의 사람들이 더 소중하다는 말을 했다.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말은 했지만, 조금 더 레벨을 올리고, 장비를 강화한 후에 도전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유리는 진지했다. 이미 완전히 마음을 먹은 표정이었다. 의지가 느껴지는 그 말과 표정에 ORP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누님.”
모두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에 장난을 일삼는 베오와 수정도 지금만큼은 진지했다. 라비린토스의 경험을 통해 관문을 지키는 정예[Elite] 클래스 몬스터가 어느 정도로 강한지 그들은 알고 있었다. 라비린토스에서 내로라하는 파티들도 관문 개방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올 정도의 난이도인 것이다.
ORP는 주변 팀원들의 시선을 느끼며 말을 덧붙였다.
“누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했으니, 된다고 생각한 거겠지. 갑시다. 안 되더라도 부딪혀 봐야 하는 거 아니겠수? 어차피 언제까지나 관문에 묶여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우?”
ORP는 그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는 <가디언>. 팀의 가장 선두에서 적의 모든 공격을 받아내며 아군에게 신뢰를 받고, 동시에 아군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하는 직업이다. 자신 주위의 사람을 절대적으로 믿는 그의 마음은 그의 직업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쉽진 않을 거야.”
“알고 있수.”
걱정스럽게 말하는 유리의 말에 ORP는 즉시 대답했다.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는 그녀를, 그리고 팀원 모두를 믿고 있었다.
자신이 공격을 막는다. 팀원들이 적에게 대미지를 입히고, 수정은 그를 회복시킨다.
이 단순하면서도 소중한 연계를 그는 믿고 있었다.
팀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모두가 그것을 느꼈다. 유진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베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저렇게 말하면 어떻게 반대해……. 해야지, 뭐……. 근데, 나 얘가 주는 힐은 못 믿겠는데.”
“네가 앞에 나가서 처 맞지만 않으면 괜찮거든?”
“<버서커>가 후위에 있어서 뭘 하는데? 앞에 가서 두들겨 패야지.”
“두들겨 패기는 개뿔. 두들겨 맞으면서.”
베오와 수정이 다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의 긴장이 일시에 풀리며 다들 피식거렸다.
이 둘은 항상 그랬다. 분위기가 심각해지고 다들 긴장해 있을 때,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서로 싸우면서 긴장을 풀어준다. 훌륭한 분위기 메이커다.
베오는 자신을 투닥투닥 두드려 대는 유리의 머리를 잡고 밀어내면서 다른 한 손을 들고 말했다.
“난 일단 찬성. 근데 얘는 빼고 하자. 힐러 한 명 고용 좀.”
“팀에서 네가 제일 필요 없거든!”
“음∼ 한 20레벨 좀 넘는 <프리스트> 구하면 되나?”
“어, 언니이∼!”
유리마저 농담을 곁들이며 놀리자, 수정은 울상이 되었다. 물론 그녀도 유리가 농담을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유리는 결코 팀원을 따돌리거나 제외할 사람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팀원을 아끼는 리더였다.
유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평소엔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유진, 장난기가 넘치지만 자기들 나름대로의 배려를 하는 베오와 수정, 든든한 전위이자 모두를 절대적으로 믿어주는 ORP, 그리고…… 배려심 깊고 착하면서 외로움으로 가득 찬 현성까지. 모두가 소중한 그녀의 팀원이었다. 어느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다.
유리는 웃는 얼굴로 그녀의 팀원들에게 당부했다. 팀원들의 마음에 단 한 조각의 두려움도 깃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럼 준비 확실하게 하고, 점심 먹고 나서 출발하자. 알겠지?”
‘단 한 명도 잃는 일 없도록……’이라는 말이 유리의 목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잃는다’는 가정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말에도 힘이 있다는 말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그 말 한마디로 인해서 그녀 마음속의 조그마한 불안을 가능성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힘차게 대답하는 팀원들을 보며 유리는 가슴에 손을 모아 주먹을 꾸욱 쥐었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여기에 있는 모두가 웃는 얼굴로 다시 이 자리에 모일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