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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청계산 여로(旅路) (1)
“이보시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성현과 그 일행이 막 출발해 동작대교 다리를 나서던 찰나였다.
‘생존자?’
도로 밖 우측 우거진 수풀 사이로 세 명의 남녀가 뛰어 나오고 있었다.
‘이들도 표식이 없다. 역시 사람들에겐 표식은 뜨지 않는다.’
성현은 두식이 용칠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머리위에 별다른 표식이 없자 이제는 확신했다.
표식은 좀비와 게이머로 특성을 각성한 자신과 해미만이 유일하다는 걸.
“잠시만. 우리 말 좀 들어주시오. 부탁합니다.”
혹여나 성현 일행이 못 들은 척, 그냥 갈까 봐 노인이 애타게 소리쳤다.
‘끙끙’거리며 가로막는 울타리를 넘으려 애쓰고 있었다.
낮다고는 하나 2m 가까이 되는 철제 울타리를 중년을 넘어 노년의 남자가 쉽게 넘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파바팟.
이를 보던 해미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할아버지 잠시 비켜보세요.”
“응? 그, 그러세.”
드득. 드드득.
촤악-!
철제 울타리가 뜯겨 나가고 사람 한두 명이 드나들 수 있는 길이 생겨났다.
이를 지켜보던 젊은 남녀와 노인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허. 어린 처자가 힘도 세네 그려. 고마우이.”
놀라는 건 둘째 치고 자신을 도우기 위해 힘을 쓴 사람임에 해미의 손을 잡고 진심 어린 고마움을 표했다.
성현도 다가와 가까이서 이들의 행색을 살폈다.
‘젊은 남녀 한 쌍하고 할아버지라······.’
성현이 이들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이, 해미의 손을 잡았던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역시 맞았네 그려, 군인이셨구려.”
단번에 이들 중 리더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말을 건넸다.
성현이 라이트 아머를 입고 겉에 군복을 덧입어 충분히 오해할만한 복장이긴 했다.
“군복만 본다면 제 것이 맞습니다만, 지금은 민간인입니다. 어르신.”
“그랬구먼··· 헌데 그건 총이······?”
“나름의 사정이 있습니다.”
성현은 구체적인 사정을 설명하기가 그랬다. 대충 얼버무리는 게 좋았다.
“그래 알겠네. 미안하네. 가는 길에 이리 불러 세워 다시 한 번 사과 하겠네. 상황이 좋지 않아 소개가 늦었구먼. 나는 김원일이라고 하네.”
“박성현입니다.”
김원일 박사의 내민 손을 성현이 잡았다.
“어디에서 오는 길인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성현이 혹여나 껄끄러워하지는 않을지 김원일 박사는 조금은 조심스레 물었다.
“숨길 것도 없습니다. 저와 저 아이는 같이 영등포 시장역에서 나왔고, 이 두 친구는 목동역에서 출발해서 중간에 우연히 만나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성현의 대답에 김원일 박사는 다시 성현의 손을 잡았다.
“염치없지만 부디 도와주시게. 우리들 일행이 있으이. 많은 이들이 나오다간 틀림없이 사달이 날 것 같네.”
뚝뚝.
성현은 자신의 손을 잡은 김원일 박사의 팔뚝 안쪽에서 떨어지는 피를 보았다.
“다치셨습니까?”
“별거 아니네. 아파트 배관을 타고 내려오다 조금 긁혔네.”
성현은 고민했다.
도와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할아버지의 다친 상처를 해미가 치료해줄지 말지였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초능력이라 할 수 있는 해미의 능력은 예전 세상이라면 반드시 숨겨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해미야.”
성현은 옆에 있는 해미를 바라봤다. 해미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듯 김원일 박사의 몸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배척받는다고 해도 큰 상관은 없다가 성현의 결론이었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자신과 해미 단둘이라면 어려움은 있을지언정 누구에게도 강제 받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화악-!
해미의 손에서 빛이 터져 나왔고, 이내 김원일 박사의 안쪽 팔에 빛이 옮겨갔다.
“이, 이 무슨··· 자네들은 도대체 누군가?”
김원일 박사는 별거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상처는 보기보다 깊었다.
낡은 배관에 찢겨 피부가 벌어지면서 발생한 열상에 둔통까지 있었다.
소독과 치료를 하지 않으면 2차 감염이 염려될 정도였다.
헌데 해미가 손을 얹고 빛이 나더니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어 버렸다.
상처가 간질간질하고 청량감 들더니 어느새 통증이 사라진 것이다.
의학박사였던 지라 상처 치유에 따른 경과임을 단번에 눈치챘고, 그 원인이 해미라는 아이의 신묘한 능력임을 알아차렸다.
“일단 함구해주십시오. 또 다른 생존자가 있다고 하셨죠? 몇 명이나 됩니까?”
성현의 눈은 깊고 흔들림이 없었다.
김원일 박사는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킴에 어긋남이 없음을 살아온 연륜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 알겠네··· 여기 있는 세 명을 포함해 모두 36명이네.”
성현도 조금 놀랐다.
많아 봐야 10명 안팎이겠거니 했는데,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해미와 내가 케어 할 수준이 넘어.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어려운 문제다.
당장 구해내는 건 어찌 보면 쉬운 일이었지만, 그 후가 문제다.
그들보고 알아서 가라고 매몰차게 행동할 수도 없었다. 한번 발동한 이타심이 그리하지 못할 게 뻔했다.
일단 구하고 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청계산 피난소로 모두를 데리고 가야 한다.
‘만에 하나 청계산 피난소가 없으면?’
청계산에 정부가 만든 피난소가 없다면, 그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방랑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디든 자리를 잡게 될 테고 그때부터는 성현과 해미도 발목이 잡힌다.
그리된다면 처음부터 구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난제였다.
“우리를 가엽게 여겨주게.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네. 제발···. 도와주시게.”
성현이 장시간 답을 미루고 있자 애가 타는 김원일 박사가 다시 한 번 간절하게 부탁했다.
심적 갈등은 컸지만, 결정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났다.
“후우-. 어르신 하나만 묻겠습니다.”
결정은 내려졌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분명 있었다.
“뭐든지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하겠네.”
“제 뜻에 사람들이 모두 따라 주겠습니까?”
성현의 질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림짐작한 김원일 박사는 쉬이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보니 이 부분은 민감합니다. 만일 단독 행동이나 모두를 위험하게 하는 사람은 절대 같이할 수 없습니다. 이점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김원일 박사는 성현의 단호한 말에 일부나마 그의 성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하-아. 알겠네. 다만 결정할 때 한 번만 더 생각을 해봐 주게. 어찌 되었든 인명보다 중요한 건 없다네.”
성현이 대답을 미루었다.
목숨이라고 다 같은 무게의 목숨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성현은 김원일 박사와 같이 온 젊은 남자 한 명과 같이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데려오기로 했다.
하지만 그전에 성현은 할 일이 있었다.
“두식아, 그리고 용칠이. 이리와 봐라.”
성현은 새로이 만난 세 명의 생존자가 안 보이는 차량 사이에서 두식과 용칠을 불렀다.
“네 선생님. 부르셨습니까?”
둘이 오자 성현은 팔짱을 끼고 턱에 손을 괴여 잠시 더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말문을 열었다.
“너희와 나는 만난 지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 너희를 신뢰할 수 없어. 하지만 지금 나는 너희에게 그 기회를 주려고 한다.
“네, 믿어주십시오.”
둘이 눈을 빛내며 동시에 대답했다.
“알겠다.”
성현은 잔소리 같은 말을 일절 더하지 않았다.
이후는 결정은 이들이 할 것이고 결과도 이들의 몫이다.
뒤통수를 친다 해도 그 결과는 성현과 해미가 아닌 이들 둘이 지게 된다.
뒤통수도 아파야 뒤통수지 아프지 않으면, 지나는 미풍과도 같다.
“둘 다 현역으로 근무했겠지?”
“네. 저는 해병대 나왔고 이놈 용칠이는 철책에서 근무했습니다.”
‘최소한 조건은 되겠다.’
“이것 받아라.”
성현은 K2c1 두 자루를 꺼내 나눠줬다.
둘은 성현이 공중에서 무언가 꺼낼 때마다 아직은 적응이 되지 않은지 움찔움찔 댔다.
“그리고 예비 탄약하고, 군복, 또 여러 가지 놓고 갈 테니 모두 채비하고 여기서 대기해라. 내가 없으면 해미의 말을 따라주고. 그리고 내가 돌아오면 날 보고 박 중사라고 불러라. 선생님은 무슨······.”
“아,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마. 아 참. 천두식이 너는 하사, 강용칠이 넌 병장이다 호칭 똑바로 해라.”
“넵! 박 중사님!”
“넵! 알겠습니다. 충성!”
성현이 주고 간 군복을 갈아입다 말고 둘은 경례를 했다.
“우리는 단결인데.”
성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마디 하고 갔다.
“어이 강 병장 특전사는 단결이야 몰라?”
“참 형님도······.”
“호칭 똑바로 해라!”
“······네 천 하.사.님.”
“새끼··· 용칠아, 그래도 박 중사님 저 양반 나름 생각이 있는 사람 같다. 이런 세상에는 저런 분 옆에 꽉 붙어 있는 게 사는 길이다. 용칠아, 같이 살자. 그래도 개똥밭을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하잖아.”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번 같이 살아봅시다. 근데 박 중사님 좀 멋있지 않습니까?”
“어쭈. 이게 말하면서 은근슬쩍 너 탄창 몇 개 챙겼어?”
“······.”
* * *
“바로 이 앞입니다.”
성현과 청년은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왜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가스 배관을 타고 내려왔냐고 물으니 어쩔 수 없었단다.
말인즉슨, 오늘 아침에도 아파트 문밖에서 좀비 울음소리가 들려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 베란다 창을 통해 가스 배관을 타고 몰래 내려왔다고 한다.
나이 든 사람도 많고 겁이 많은 이들이 있어 배관을 타고는 모두 내려오는 게 사실상 불가능 하단다.
그리고 어떻게 이들이 살게 되었는지는 오는 길에 듣게 되었다.
참 운도 좋았고, 김원일 박사의 강단에 박수를 보내는 성현이었다.
“내가 앞장설 테니 뒤쪽만 조심하고 따라오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성현은 스코프를 빼고 도트 사이트로 갈아 끼웠다.
“왼쪽 어깨에 손을 올리고 뒤쪽만 경계 하면 됩니다. 자, 갑시다.”
성현은 왼쪽 어깨에 손이 올라오자 아파트 입구에서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그르릉.
‘있기는 있다.’
성현은 검지를 올리고 조용하라는 신호를 했다.
계단의 끝의 코너에 아래쪽에 언뜻 다리 형체가 보였다가 없어졌다.
[좀비 Lv3]
그 찰나에 표식이 뜨고 레벨 3의 좀비임을 알려주었다.
성현은 창고에서 섬광 수류탄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올라있는 손을 두 번 두드리고 귀를 막으라는 수신호를 했다.
틱, 탈칵.
‘하나, 둘.’
휘익.
성현은 둘까지 세고 섬광탄을 계단 위쪽 벽을 향해 강하게 던졌다. 각도를 틀어 위쪽 통로에 들어가게끔 했다.
티잉!
섬광탄이 벽에 튕겨 반발력에 위쪽 계단으로 넘어갔다.
뻥!!!
키에에엑!
성현은 날듯이 계단을 한달음에 올라 뒹굴고 있는 좀비에게 총구를 겨눴다.
타타탕!
터지고 찢긴 좀비의 몸에서 온갖 체액들이 계단을 타고 흘러내렸다.
환기가 안 되는 공간이라 그런지 역한 냄새가 밀려오자 같이 온 남자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이봐요, 괜찮아?”
“예에? 예, 예······.”
남자는 쪼그려 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좀비의 시체를 보고 다리가 풀린 사내를 성현이 부축했다.
“일단 올라갑시다.”
어찌어찌해서 5층까지 올라왔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섬광탄의 폭음과 큰 총성에도 불구하고, 내다볼 만큼 배짱 있는 이들은 없는 듯했다.
성현과 함께 온 남자가 문을 두드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후에야 사람들이 문을 열었다.
“아니, 고작 한 명이 와서 우릴 모두 데려간다고? 거기 있는 사람이 전부 와야지 혼자 와서 뭘 한다고 왔데?”
서 여사는 성현이 혼자임을 보고는 값싼 입을 놀리며 연신 투덜댔다.
“긴말 안 합니다. 나올 사람들은 저와 함께 가고 아니면 남으면 됩니다. 1층까지는 정리가 되었으니 따라 내려오세요. 5분 드립니다. 그사이 안 나오시는 분은 안 가시는 걸로 간주합니다.”
“아니, 뭐 저런!!”
성현은 자신의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해 말을 끝낸 뒤 곧장 내려갔다.
고마움도 모르는 몰염치한 이들하고는 말을 섞지 않는 성현이었다.
“저 봐봐. 저런 사람 따라가 봐야 개고생만 하지. 하루나 이틀만 기다리면 진짜 군인들이 와서 구해줄 거라니까 그러네.”
서 여사가 말을 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짐을 챙겨 하나둘 내려가기 시작했다.
“쯔쯔쯧. 미련하기는.”
내려가는 이들을 보고 혀를 차면서 내심 불안한지 눈동자가 많이 흔들리는 서 여사였다.
서 여사를 제외한 마지막 남은 네 명의 사람들도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어어, 정희네 가지 마. 큰일 난다니까.”
네 명이 한 가족인 이들도 모두 떠나자 안색이 파리해진 서 여사도 서둘러 채비를 가지고 뛰어 내려갔다.
중간에 좀비 시체를 보고 화들짝 놀라 찔끔 지렸지만 자신만 홀로 남겨질까 엉거주춤하면서도 끝내 제시간에 내려갔다.
“시간이 되었으니 출발 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은 걱정 마시고 옆과 뒤를 잘 살피시고 따르세요. 뭔가 발견하면 바로 알려 주시면 됩니다.”
성현이 앞장서고 조깅하듯 천천히 뛰었다.
“좀 비켜. 젊은 사람들이 앞에 오면 쓰나 뒤에서 와야지. 늙은것들은 다 죽으라는 거야?”
제일 늦게 와서 앞으로 비집고 나오는 서 여사를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지만, 한두 번도 아닌 터라 화를 삼키고 그냥 넘겼다.
오직 저밖에 모르는 서 여사와 엮이면 항상 시끄러워 질뿐이고, 되도록 안 엮이는 게 그나마 낫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보시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성현과 그 일행이 막 출발해 동작대교 다리를 나서던 찰나였다.
‘생존자?’
도로 밖 우측 우거진 수풀 사이로 세 명의 남녀가 뛰어 나오고 있었다.
‘이들도 표식이 없다. 역시 사람들에겐 표식은 뜨지 않는다.’
성현은 두식이 용칠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머리위에 별다른 표식이 없자 이제는 확신했다.
표식은 좀비와 게이머로 특성을 각성한 자신과 해미만이 유일하다는 걸.
“잠시만. 우리 말 좀 들어주시오. 부탁합니다.”
혹여나 성현 일행이 못 들은 척, 그냥 갈까 봐 노인이 애타게 소리쳤다.
‘끙끙’거리며 가로막는 울타리를 넘으려 애쓰고 있었다.
낮다고는 하나 2m 가까이 되는 철제 울타리를 중년을 넘어 노년의 남자가 쉽게 넘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파바팟.
이를 보던 해미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할아버지 잠시 비켜보세요.”
“응? 그, 그러세.”
드득. 드드득.
촤악-!
철제 울타리가 뜯겨 나가고 사람 한두 명이 드나들 수 있는 길이 생겨났다.
이를 지켜보던 젊은 남녀와 노인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허. 어린 처자가 힘도 세네 그려. 고마우이.”
놀라는 건 둘째 치고 자신을 도우기 위해 힘을 쓴 사람임에 해미의 손을 잡고 진심 어린 고마움을 표했다.
성현도 다가와 가까이서 이들의 행색을 살폈다.
‘젊은 남녀 한 쌍하고 할아버지라······.’
성현이 이들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이, 해미의 손을 잡았던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역시 맞았네 그려, 군인이셨구려.”
단번에 이들 중 리더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말을 건넸다.
성현이 라이트 아머를 입고 겉에 군복을 덧입어 충분히 오해할만한 복장이긴 했다.
“군복만 본다면 제 것이 맞습니다만, 지금은 민간인입니다. 어르신.”
“그랬구먼··· 헌데 그건 총이······?”
“나름의 사정이 있습니다.”
성현은 구체적인 사정을 설명하기가 그랬다. 대충 얼버무리는 게 좋았다.
“그래 알겠네. 미안하네. 가는 길에 이리 불러 세워 다시 한 번 사과 하겠네. 상황이 좋지 않아 소개가 늦었구먼. 나는 김원일이라고 하네.”
“박성현입니다.”
김원일 박사의 내민 손을 성현이 잡았다.
“어디에서 오는 길인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성현이 혹여나 껄끄러워하지는 않을지 김원일 박사는 조금은 조심스레 물었다.
“숨길 것도 없습니다. 저와 저 아이는 같이 영등포 시장역에서 나왔고, 이 두 친구는 목동역에서 출발해서 중간에 우연히 만나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성현의 대답에 김원일 박사는 다시 성현의 손을 잡았다.
“염치없지만 부디 도와주시게. 우리들 일행이 있으이. 많은 이들이 나오다간 틀림없이 사달이 날 것 같네.”
뚝뚝.
성현은 자신의 손을 잡은 김원일 박사의 팔뚝 안쪽에서 떨어지는 피를 보았다.
“다치셨습니까?”
“별거 아니네. 아파트 배관을 타고 내려오다 조금 긁혔네.”
성현은 고민했다.
도와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할아버지의 다친 상처를 해미가 치료해줄지 말지였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초능력이라 할 수 있는 해미의 능력은 예전 세상이라면 반드시 숨겨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해미야.”
성현은 옆에 있는 해미를 바라봤다. 해미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듯 김원일 박사의 몸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배척받는다고 해도 큰 상관은 없다가 성현의 결론이었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자신과 해미 단둘이라면 어려움은 있을지언정 누구에게도 강제 받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화악-!
해미의 손에서 빛이 터져 나왔고, 이내 김원일 박사의 안쪽 팔에 빛이 옮겨갔다.
“이, 이 무슨··· 자네들은 도대체 누군가?”
김원일 박사는 별거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상처는 보기보다 깊었다.
낡은 배관에 찢겨 피부가 벌어지면서 발생한 열상에 둔통까지 있었다.
소독과 치료를 하지 않으면 2차 감염이 염려될 정도였다.
헌데 해미가 손을 얹고 빛이 나더니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어 버렸다.
상처가 간질간질하고 청량감 들더니 어느새 통증이 사라진 것이다.
의학박사였던 지라 상처 치유에 따른 경과임을 단번에 눈치챘고, 그 원인이 해미라는 아이의 신묘한 능력임을 알아차렸다.
“일단 함구해주십시오. 또 다른 생존자가 있다고 하셨죠? 몇 명이나 됩니까?”
성현의 눈은 깊고 흔들림이 없었다.
김원일 박사는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킴에 어긋남이 없음을 살아온 연륜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 알겠네··· 여기 있는 세 명을 포함해 모두 36명이네.”
성현도 조금 놀랐다.
많아 봐야 10명 안팎이겠거니 했는데,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해미와 내가 케어 할 수준이 넘어.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어려운 문제다.
당장 구해내는 건 어찌 보면 쉬운 일이었지만, 그 후가 문제다.
그들보고 알아서 가라고 매몰차게 행동할 수도 없었다. 한번 발동한 이타심이 그리하지 못할 게 뻔했다.
일단 구하고 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청계산 피난소로 모두를 데리고 가야 한다.
‘만에 하나 청계산 피난소가 없으면?’
청계산에 정부가 만든 피난소가 없다면, 그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방랑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디든 자리를 잡게 될 테고 그때부터는 성현과 해미도 발목이 잡힌다.
그리된다면 처음부터 구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난제였다.
“우리를 가엽게 여겨주게.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네. 제발···. 도와주시게.”
성현이 장시간 답을 미루고 있자 애가 타는 김원일 박사가 다시 한 번 간절하게 부탁했다.
심적 갈등은 컸지만, 결정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났다.
“후우-. 어르신 하나만 묻겠습니다.”
결정은 내려졌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분명 있었다.
“뭐든지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하겠네.”
“제 뜻에 사람들이 모두 따라 주겠습니까?”
성현의 질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림짐작한 김원일 박사는 쉬이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보니 이 부분은 민감합니다. 만일 단독 행동이나 모두를 위험하게 하는 사람은 절대 같이할 수 없습니다. 이점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김원일 박사는 성현의 단호한 말에 일부나마 그의 성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하-아. 알겠네. 다만 결정할 때 한 번만 더 생각을 해봐 주게. 어찌 되었든 인명보다 중요한 건 없다네.”
성현이 대답을 미루었다.
목숨이라고 다 같은 무게의 목숨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성현은 김원일 박사와 같이 온 젊은 남자 한 명과 같이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데려오기로 했다.
하지만 그전에 성현은 할 일이 있었다.
“두식아, 그리고 용칠이. 이리와 봐라.”
성현은 새로이 만난 세 명의 생존자가 안 보이는 차량 사이에서 두식과 용칠을 불렀다.
“네 선생님. 부르셨습니까?”
둘이 오자 성현은 팔짱을 끼고 턱에 손을 괴여 잠시 더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말문을 열었다.
“너희와 나는 만난 지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 너희를 신뢰할 수 없어. 하지만 지금 나는 너희에게 그 기회를 주려고 한다.
“네, 믿어주십시오.”
둘이 눈을 빛내며 동시에 대답했다.
“알겠다.”
성현은 잔소리 같은 말을 일절 더하지 않았다.
이후는 결정은 이들이 할 것이고 결과도 이들의 몫이다.
뒤통수를 친다 해도 그 결과는 성현과 해미가 아닌 이들 둘이 지게 된다.
뒤통수도 아파야 뒤통수지 아프지 않으면, 지나는 미풍과도 같다.
“둘 다 현역으로 근무했겠지?”
“네. 저는 해병대 나왔고 이놈 용칠이는 철책에서 근무했습니다.”
‘최소한 조건은 되겠다.’
“이것 받아라.”
성현은 K2c1 두 자루를 꺼내 나눠줬다.
둘은 성현이 공중에서 무언가 꺼낼 때마다 아직은 적응이 되지 않은지 움찔움찔 댔다.
“그리고 예비 탄약하고, 군복, 또 여러 가지 놓고 갈 테니 모두 채비하고 여기서 대기해라. 내가 없으면 해미의 말을 따라주고. 그리고 내가 돌아오면 날 보고 박 중사라고 불러라. 선생님은 무슨······.”
“아,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마. 아 참. 천두식이 너는 하사, 강용칠이 넌 병장이다 호칭 똑바로 해라.”
“넵! 박 중사님!”
“넵! 알겠습니다. 충성!”
성현이 주고 간 군복을 갈아입다 말고 둘은 경례를 했다.
“우리는 단결인데.”
성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마디 하고 갔다.
“어이 강 병장 특전사는 단결이야 몰라?”
“참 형님도······.”
“호칭 똑바로 해라!”
“······네 천 하.사.님.”
“새끼··· 용칠아, 그래도 박 중사님 저 양반 나름 생각이 있는 사람 같다. 이런 세상에는 저런 분 옆에 꽉 붙어 있는 게 사는 길이다. 용칠아, 같이 살자. 그래도 개똥밭을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하잖아.”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번 같이 살아봅시다. 근데 박 중사님 좀 멋있지 않습니까?”
“어쭈. 이게 말하면서 은근슬쩍 너 탄창 몇 개 챙겼어?”
“······.”
* * *
“바로 이 앞입니다.”
성현과 청년은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왜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가스 배관을 타고 내려왔냐고 물으니 어쩔 수 없었단다.
말인즉슨, 오늘 아침에도 아파트 문밖에서 좀비 울음소리가 들려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 베란다 창을 통해 가스 배관을 타고 몰래 내려왔다고 한다.
나이 든 사람도 많고 겁이 많은 이들이 있어 배관을 타고는 모두 내려오는 게 사실상 불가능 하단다.
그리고 어떻게 이들이 살게 되었는지는 오는 길에 듣게 되었다.
참 운도 좋았고, 김원일 박사의 강단에 박수를 보내는 성현이었다.
“내가 앞장설 테니 뒤쪽만 조심하고 따라오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성현은 스코프를 빼고 도트 사이트로 갈아 끼웠다.
“왼쪽 어깨에 손을 올리고 뒤쪽만 경계 하면 됩니다. 자, 갑시다.”
성현은 왼쪽 어깨에 손이 올라오자 아파트 입구에서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그르릉.
‘있기는 있다.’
성현은 검지를 올리고 조용하라는 신호를 했다.
계단의 끝의 코너에 아래쪽에 언뜻 다리 형체가 보였다가 없어졌다.
[좀비 Lv3]
그 찰나에 표식이 뜨고 레벨 3의 좀비임을 알려주었다.
성현은 창고에서 섬광 수류탄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올라있는 손을 두 번 두드리고 귀를 막으라는 수신호를 했다.
틱, 탈칵.
‘하나, 둘.’
휘익.
성현은 둘까지 세고 섬광탄을 계단 위쪽 벽을 향해 강하게 던졌다. 각도를 틀어 위쪽 통로에 들어가게끔 했다.
티잉!
섬광탄이 벽에 튕겨 반발력에 위쪽 계단으로 넘어갔다.
뻥!!!
키에에엑!
성현은 날듯이 계단을 한달음에 올라 뒹굴고 있는 좀비에게 총구를 겨눴다.
타타탕!
터지고 찢긴 좀비의 몸에서 온갖 체액들이 계단을 타고 흘러내렸다.
환기가 안 되는 공간이라 그런지 역한 냄새가 밀려오자 같이 온 남자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이봐요, 괜찮아?”
“예에? 예, 예······.”
남자는 쪼그려 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좀비의 시체를 보고 다리가 풀린 사내를 성현이 부축했다.
“일단 올라갑시다.”
어찌어찌해서 5층까지 올라왔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섬광탄의 폭음과 큰 총성에도 불구하고, 내다볼 만큼 배짱 있는 이들은 없는 듯했다.
성현과 함께 온 남자가 문을 두드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후에야 사람들이 문을 열었다.
“아니, 고작 한 명이 와서 우릴 모두 데려간다고? 거기 있는 사람이 전부 와야지 혼자 와서 뭘 한다고 왔데?”
서 여사는 성현이 혼자임을 보고는 값싼 입을 놀리며 연신 투덜댔다.
“긴말 안 합니다. 나올 사람들은 저와 함께 가고 아니면 남으면 됩니다. 1층까지는 정리가 되었으니 따라 내려오세요. 5분 드립니다. 그사이 안 나오시는 분은 안 가시는 걸로 간주합니다.”
“아니, 뭐 저런!!”
성현은 자신의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해 말을 끝낸 뒤 곧장 내려갔다.
고마움도 모르는 몰염치한 이들하고는 말을 섞지 않는 성현이었다.
“저 봐봐. 저런 사람 따라가 봐야 개고생만 하지. 하루나 이틀만 기다리면 진짜 군인들이 와서 구해줄 거라니까 그러네.”
서 여사가 말을 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짐을 챙겨 하나둘 내려가기 시작했다.
“쯔쯔쯧. 미련하기는.”
내려가는 이들을 보고 혀를 차면서 내심 불안한지 눈동자가 많이 흔들리는 서 여사였다.
서 여사를 제외한 마지막 남은 네 명의 사람들도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어어, 정희네 가지 마. 큰일 난다니까.”
네 명이 한 가족인 이들도 모두 떠나자 안색이 파리해진 서 여사도 서둘러 채비를 가지고 뛰어 내려갔다.
중간에 좀비 시체를 보고 화들짝 놀라 찔끔 지렸지만 자신만 홀로 남겨질까 엉거주춤하면서도 끝내 제시간에 내려갔다.
“시간이 되었으니 출발 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은 걱정 마시고 옆과 뒤를 잘 살피시고 따르세요. 뭔가 발견하면 바로 알려 주시면 됩니다.”
성현이 앞장서고 조깅하듯 천천히 뛰었다.
“좀 비켜. 젊은 사람들이 앞에 오면 쓰나 뒤에서 와야지. 늙은것들은 다 죽으라는 거야?”
제일 늦게 와서 앞으로 비집고 나오는 서 여사를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지만, 한두 번도 아닌 터라 화를 삼키고 그냥 넘겼다.
오직 저밖에 모르는 서 여사와 엮이면 항상 시끄러워 질뿐이고, 되도록 안 엮이는 게 그나마 낫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