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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1권 (6화)
2장 세상으로 나가다 (2)
“오라버니. 오늘은 어디를 조사할 거야?”
임설향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의 친 오라비인 임덕화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요 며칠 조사를 핑계로 호수와 운하로 유명한 제녕의 풍광을 구경하느라 신이 난 그녀였다.
그래서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오라비의 처소로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그녀가 무림맹 조사단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조사단 임무를 맡은 곳이 바로 그녀의 아버지 임혁태가 문주로 있는 연주(兖州) 제검문(制劍門)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제녕이 그리 작은 도시는 아니었으나, 상업과 관광이 발달한 것에 비해 무림과의 연계는 거의 없어서 어느 정도 규모 있는 문파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러다보니 근처에 무림맹 지부도 없었고, 그나마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중견 문파가 연주의 제검문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무림맹에서 제검문에 이번 사건의 조사를 맡긴 것이다.
제검문은 무당의 속가 문파였다.
가주 임혁태는 이미 절정에 이른 고수였고, 임혁태의 부인은 산동의 패자인 황보세가 출신이어서 연주 근방에서는 상당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글쎄 오늘은 소양호 쪽에 한 번 가 볼까?”
나른한 표정으로 임덕화가 두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좋아! 좋아! 홍 부대주가 또 잔소리하기 전에 빨리 가자!”
홍 부대주라는 말이 나오자 임덕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검문주 임혁태는 이번 사건의 조사에 올해 스물다섯 살이 된 첫째 아들 임덕화를 책임자로 보냈다. 제검문 후계자로서 경험을 쌓을 좋은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직 경험이 일천하고 성격이 급한 임덕화를 보좌하기 위해 제검문의 정예인 제검대 스무 명도 함께 보냈는데, 그중에는 제검대 부대주인 홍천상도 있었다.
임덕화는 아직 나이가 어려 진중한 면이 부족했다.
그에 비해 제검대 부대주 홍천상은 나이가 쉰둘에 이른 중견 무사로 우직하고 항상 진지한 인물이었다.
임혁태는 그런 그가 자신의 아들을 제대로 이끌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대공자님. 홍 부대주입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임설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문 밖에서 홍천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휴! 내 이럴 줄 알고 오늘은 일찍 왔는데!”
임설향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불평을 했다.
“들어오십시오.”
못마땅한 얼굴로 임덕화가 홍천상을 방으로 들였다.
아무리 자신이 제검문의 후계자라 해도 문파 내에서 인망이 높은 홍천상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자님 조사가 시작된 지 벌써 보름이 지났습니다. 한데, 저희가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들어오자마자 홍천상이 쓴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자칫 강호인들에게 제검문의 능력이 의심받게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사건 자체가 워낙에 기이한데다, 좀처럼 범인들의 흔적이나 실마리가 발견되지 않는데 낸들 어쩌란 말입니까? 모두 불에 타서 증거조차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이 아닙니까? 이런 상태에서 범인을 알아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임덕화가 짜증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도 틀리지 않은 것이, 사실 처음에 제녕에 도착했을 때는 임덕화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조사에 나섰었다.
자신이 처음 책임자로 나선 임무이기도 했고, 무림맹의 관심을 받는 사건인지라 강호에 이름을 알릴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흘 동안 발견한 것이라고는 범인들이 지하 비밀통로를 이용해 환자들을 옮긴 후 통로를 다시 매몰시켰다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그 사실도 하오문 제녕 분타주 소진태가 문도들을 동원해 잿더미를 모두 파낸 후 알아낸 것이다.
이후로 증거는커녕 조그마한 실마리조차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임덕화도 점점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몸도 마음도 지친 임덕화는 이제는 거의 포기하다 시피한 상황인 것이다.
본래가 힘든 일을 싫어하고 성격이 폭급한 임덕화가 이만큼 버틴 것도 사실은 대단하다 할 수 있다.
“공자님께서 결과가 나오지 않아 실망하신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신다면 훗날 이처럼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또다시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임덕화의 눈썹이 꿈틀했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도망치다니요! 제녕에 온 후로 무려 열흘이나 이 사건에 매달렸으면 저도 할 만큼 한 거 아닙니까! 지금 상황에서 부대주께서는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단 말씀입니까?”
얼굴이 붉게 상기된 임덕화가 목소리를 높였다.
“제 이야기가 주제넘었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하오문을 좀 더 닦달해서라도 정보를 더 끌어 모아 조금의 성과라도 얻어 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다 결국 공자님의 업적이 될 것임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산동 무림에 공자님의 이름을 알릴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음 대 후계자인 임덕화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제검문의 미래 역시 탄탄해지는 것이다.
또한 이번 기회는 산동 구석에 머물고 있는 제검문이 좀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자신보다 연배가 훨씬 높은 홍천상이 사죄를 하자 임덕화도 더는 화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귀찮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비천한 하오문 따위에게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어차피 그동안 그자들이 알아낸 거라곤 겨우 범인들이 지하통로를 이용해 환자들을 옮겼다는 것뿐입니다. 게다가 하오문은 지금 분타주가 실종된 탓에 정신이 없지 않습니까? 닦달한다고 해서 우리를 돕는다고 나서겠습니까?”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임덕화가 말했다.
출신이 비천한 하오문도들과는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 제녕 분타주인 소진태가 실종된 뒤로 하오문은 정보 수집을 중단하고 소진태를 찾기 위해 모든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데, 제검문의 후계자인 자신이 그런 자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었다.
“물론, 그런 자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으신 공자님의 마음도 이해는 합니다만, 당장에 제녕에서 그들만큼 뛰어난 정보수집 능력을 가진 곳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분타주의 실종 역시 이번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분타주 소진태는 이번 사건의 조사를 돕는 데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한 자였다.
게다가 실종되기 전 만났을 때, 무언가 실마리를 발견했으니 좀 더 조사한 후 확실해지면 말해 주겠다며 헤어졌었다.
그 뒤로 바로 사라져 버렸으니,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홍천상이 최대한 설득해 보았으나 임덕화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럼 부대주께서 알아서 하세요. 저는 더는 의미 없는 일에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부대주를 저와 함께 보내신 이유가 다 이런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라는 것 아닙니까? 책임자인 제가 일일이 다 움직여야 한다면 대체 부대주께서는 왜 이곳에 온 것입니까. 그저 잔소리나 늘어놓으려 따라오신 겝니까? 하오문을 닦달하든, 부대주께서 문도들을 이끌고 직접 조사를 하시든, 뭔가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기 전까지 더는 저에게 그 일에 대해 말하지 마십시오!”
임덕화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홍천상을 외면했다. 축객령을 내린 것이다.
잠시 흔들리는 눈으로 임덕화를 바라보던 홍천상이 길게 한숨을 내쉬곤 자리를 떠났다.
“아휴! 꼰대! 진짜 짜증나!”
홍천상이 방을 나가자 임설향이 불평을 쏟아 냈다.
그녀는 사건의 조사에는 애초부터 관심도 없었고, 이번 기회에 바깥 구경을 실컷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즐거웠을 따름이다.
당연히 홍천상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흥! 부대주는 신경 쓰지 말고 우린 소양호나 가자. 일단 초 장주에게 미리 준비 좀 해 달라 부탁해야겠다.”
임덕화가 자리에서 일어서 걸음을 옮겼다.
그간 초진도가 아예 배 한 척를 임덕화에게 빌려 주고 호수 위에서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술과 요리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처음엔 잠시 머리도 쉴 겸 초진도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이젠 재미가 붙은 임덕화였다.
“호호호! 역시 오라버니가 최고야!”
임설향이 신이 나서 폴짝거리며 임덕화의 뒤를 따라나섰다.
* * *
주루와 식당이 밀집해 있는 제녕의 번화가를 두 남녀가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검은 무복 차림의 여인과 평범한 경장차림의 청년이었다.
그중 청년은 평범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만큼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청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려왔다.
“무슨 사내가 저리 잘생겼어?”
“어머! 어쩜 저리 피부가 하얗지?”
청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바로 혈귀곡을 빠져나온 진운룡과 소은설이었다.
“아, 진짜. 그 얼굴 어떻게 좀 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자꾸 쳐다봐서 귀찮아 죽겠잖아요!”
소은설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투덜댔다.
“잘나게 태어난 게 내 잘못인가? 정 못마땅하면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한테 따지든가.”
진운룡이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와! 진짜 재수 없어! 왕 짜증나!”
소은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진운룡을 바라봤다.
혈귀곡을 벗어나더니 특유의 뻔뻔함이 더 심해진 듯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소은설이 진운룡을 외면한 채 걸음 속도를 높였다.
“근데, 대체 어딜 가려는 거냐?”
진운룡이 궁금한 듯 물었다.
“하오문 제녕 분타요.”
그녀가 혈귀곡을 나오자마자 제녕 시내로 향한 이유는 일단 하오문 동료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들과 의논한 뒤 초가장의 일을 무림맹 조사단에게 말할 것인지, 아니면 따로 움직일 것인지 결정하려는 것이다.
무림맹 조사단으로 온 제녕문 무사들이 혹시 초가장에 매수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재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함부로 먼저 그들에게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사단이 머무는 곳은 호랑이굴인 초가장이었다.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초가장 무사들에게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그에 대한 대비도 해야 했다.
“하오문 사람이었나?”
“네.”
“오호! 그럼 기녀? 기녀치곤 몸매가 좀 빈약한데…….”
진운룡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소은설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무, 무슨 소리예요! 기녀 아니거든요! 그리고, 내 몸매가 뭐가 어때서요? 엉? 이만하면 나올 때 나오고, 들어갈 때 들어가고, 어디 가도 빠지지 않지!”
소은설이 목에 핏대를 올리며 소리치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무슨 일인가 하여 쳐다봤다.
“쯧쯧, 무슨 여자애가 그런 이야기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크게 떠드냐?”
진운룡이 혀를 차며 소은설을 외면했다.
“어휴! 속 터져! 정말! 내 상대를 안 하고 말지!”
얼굴이 벌게진 소은설이 재빨리 속도를 높여 거리를 빠져나갔다.
몇 개의 골목을 지난 뒤 소은설이 걸음을 멈췄다.
2장 세상으로 나가다 (2)
“오라버니. 오늘은 어디를 조사할 거야?”
임설향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의 친 오라비인 임덕화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요 며칠 조사를 핑계로 호수와 운하로 유명한 제녕의 풍광을 구경하느라 신이 난 그녀였다.
그래서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오라비의 처소로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그녀가 무림맹 조사단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조사단 임무를 맡은 곳이 바로 그녀의 아버지 임혁태가 문주로 있는 연주(兖州) 제검문(制劍門)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제녕이 그리 작은 도시는 아니었으나, 상업과 관광이 발달한 것에 비해 무림과의 연계는 거의 없어서 어느 정도 규모 있는 문파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러다보니 근처에 무림맹 지부도 없었고, 그나마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중견 문파가 연주의 제검문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무림맹에서 제검문에 이번 사건의 조사를 맡긴 것이다.
제검문은 무당의 속가 문파였다.
가주 임혁태는 이미 절정에 이른 고수였고, 임혁태의 부인은 산동의 패자인 황보세가 출신이어서 연주 근방에서는 상당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글쎄 오늘은 소양호 쪽에 한 번 가 볼까?”
나른한 표정으로 임덕화가 두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좋아! 좋아! 홍 부대주가 또 잔소리하기 전에 빨리 가자!”
홍 부대주라는 말이 나오자 임덕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검문주 임혁태는 이번 사건의 조사에 올해 스물다섯 살이 된 첫째 아들 임덕화를 책임자로 보냈다. 제검문 후계자로서 경험을 쌓을 좋은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직 경험이 일천하고 성격이 급한 임덕화를 보좌하기 위해 제검문의 정예인 제검대 스무 명도 함께 보냈는데, 그중에는 제검대 부대주인 홍천상도 있었다.
임덕화는 아직 나이가 어려 진중한 면이 부족했다.
그에 비해 제검대 부대주 홍천상은 나이가 쉰둘에 이른 중견 무사로 우직하고 항상 진지한 인물이었다.
임혁태는 그런 그가 자신의 아들을 제대로 이끌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대공자님. 홍 부대주입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임설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문 밖에서 홍천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휴! 내 이럴 줄 알고 오늘은 일찍 왔는데!”
임설향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불평을 했다.
“들어오십시오.”
못마땅한 얼굴로 임덕화가 홍천상을 방으로 들였다.
아무리 자신이 제검문의 후계자라 해도 문파 내에서 인망이 높은 홍천상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자님 조사가 시작된 지 벌써 보름이 지났습니다. 한데, 저희가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들어오자마자 홍천상이 쓴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자칫 강호인들에게 제검문의 능력이 의심받게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사건 자체가 워낙에 기이한데다, 좀처럼 범인들의 흔적이나 실마리가 발견되지 않는데 낸들 어쩌란 말입니까? 모두 불에 타서 증거조차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이 아닙니까? 이런 상태에서 범인을 알아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임덕화가 짜증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도 틀리지 않은 것이, 사실 처음에 제녕에 도착했을 때는 임덕화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조사에 나섰었다.
자신이 처음 책임자로 나선 임무이기도 했고, 무림맹의 관심을 받는 사건인지라 강호에 이름을 알릴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흘 동안 발견한 것이라고는 범인들이 지하 비밀통로를 이용해 환자들을 옮긴 후 통로를 다시 매몰시켰다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그 사실도 하오문 제녕 분타주 소진태가 문도들을 동원해 잿더미를 모두 파낸 후 알아낸 것이다.
이후로 증거는커녕 조그마한 실마리조차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임덕화도 점점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몸도 마음도 지친 임덕화는 이제는 거의 포기하다 시피한 상황인 것이다.
본래가 힘든 일을 싫어하고 성격이 폭급한 임덕화가 이만큼 버틴 것도 사실은 대단하다 할 수 있다.
“공자님께서 결과가 나오지 않아 실망하신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신다면 훗날 이처럼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또다시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임덕화의 눈썹이 꿈틀했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도망치다니요! 제녕에 온 후로 무려 열흘이나 이 사건에 매달렸으면 저도 할 만큼 한 거 아닙니까! 지금 상황에서 부대주께서는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단 말씀입니까?”
얼굴이 붉게 상기된 임덕화가 목소리를 높였다.
“제 이야기가 주제넘었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하오문을 좀 더 닦달해서라도 정보를 더 끌어 모아 조금의 성과라도 얻어 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다 결국 공자님의 업적이 될 것임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산동 무림에 공자님의 이름을 알릴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음 대 후계자인 임덕화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제검문의 미래 역시 탄탄해지는 것이다.
또한 이번 기회는 산동 구석에 머물고 있는 제검문이 좀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자신보다 연배가 훨씬 높은 홍천상이 사죄를 하자 임덕화도 더는 화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귀찮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비천한 하오문 따위에게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어차피 그동안 그자들이 알아낸 거라곤 겨우 범인들이 지하통로를 이용해 환자들을 옮겼다는 것뿐입니다. 게다가 하오문은 지금 분타주가 실종된 탓에 정신이 없지 않습니까? 닦달한다고 해서 우리를 돕는다고 나서겠습니까?”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임덕화가 말했다.
출신이 비천한 하오문도들과는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 제녕 분타주인 소진태가 실종된 뒤로 하오문은 정보 수집을 중단하고 소진태를 찾기 위해 모든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데, 제검문의 후계자인 자신이 그런 자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었다.
“물론, 그런 자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으신 공자님의 마음도 이해는 합니다만, 당장에 제녕에서 그들만큼 뛰어난 정보수집 능력을 가진 곳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분타주의 실종 역시 이번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분타주 소진태는 이번 사건의 조사를 돕는 데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한 자였다.
게다가 실종되기 전 만났을 때, 무언가 실마리를 발견했으니 좀 더 조사한 후 확실해지면 말해 주겠다며 헤어졌었다.
그 뒤로 바로 사라져 버렸으니,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홍천상이 최대한 설득해 보았으나 임덕화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럼 부대주께서 알아서 하세요. 저는 더는 의미 없는 일에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부대주를 저와 함께 보내신 이유가 다 이런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라는 것 아닙니까? 책임자인 제가 일일이 다 움직여야 한다면 대체 부대주께서는 왜 이곳에 온 것입니까. 그저 잔소리나 늘어놓으려 따라오신 겝니까? 하오문을 닦달하든, 부대주께서 문도들을 이끌고 직접 조사를 하시든, 뭔가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기 전까지 더는 저에게 그 일에 대해 말하지 마십시오!”
임덕화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홍천상을 외면했다. 축객령을 내린 것이다.
잠시 흔들리는 눈으로 임덕화를 바라보던 홍천상이 길게 한숨을 내쉬곤 자리를 떠났다.
“아휴! 꼰대! 진짜 짜증나!”
홍천상이 방을 나가자 임설향이 불평을 쏟아 냈다.
그녀는 사건의 조사에는 애초부터 관심도 없었고, 이번 기회에 바깥 구경을 실컷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즐거웠을 따름이다.
당연히 홍천상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흥! 부대주는 신경 쓰지 말고 우린 소양호나 가자. 일단 초 장주에게 미리 준비 좀 해 달라 부탁해야겠다.”
임덕화가 자리에서 일어서 걸음을 옮겼다.
그간 초진도가 아예 배 한 척를 임덕화에게 빌려 주고 호수 위에서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술과 요리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처음엔 잠시 머리도 쉴 겸 초진도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이젠 재미가 붙은 임덕화였다.
“호호호! 역시 오라버니가 최고야!”
임설향이 신이 나서 폴짝거리며 임덕화의 뒤를 따라나섰다.
* * *
주루와 식당이 밀집해 있는 제녕의 번화가를 두 남녀가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검은 무복 차림의 여인과 평범한 경장차림의 청년이었다.
그중 청년은 평범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만큼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청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려왔다.
“무슨 사내가 저리 잘생겼어?”
“어머! 어쩜 저리 피부가 하얗지?”
청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바로 혈귀곡을 빠져나온 진운룡과 소은설이었다.
“아, 진짜. 그 얼굴 어떻게 좀 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자꾸 쳐다봐서 귀찮아 죽겠잖아요!”
소은설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투덜댔다.
“잘나게 태어난 게 내 잘못인가? 정 못마땅하면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한테 따지든가.”
진운룡이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와! 진짜 재수 없어! 왕 짜증나!”
소은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진운룡을 바라봤다.
혈귀곡을 벗어나더니 특유의 뻔뻔함이 더 심해진 듯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소은설이 진운룡을 외면한 채 걸음 속도를 높였다.
“근데, 대체 어딜 가려는 거냐?”
진운룡이 궁금한 듯 물었다.
“하오문 제녕 분타요.”
그녀가 혈귀곡을 나오자마자 제녕 시내로 향한 이유는 일단 하오문 동료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들과 의논한 뒤 초가장의 일을 무림맹 조사단에게 말할 것인지, 아니면 따로 움직일 것인지 결정하려는 것이다.
무림맹 조사단으로 온 제녕문 무사들이 혹시 초가장에 매수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재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함부로 먼저 그들에게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사단이 머무는 곳은 호랑이굴인 초가장이었다.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초가장 무사들에게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그에 대한 대비도 해야 했다.
“하오문 사람이었나?”
“네.”
“오호! 그럼 기녀? 기녀치곤 몸매가 좀 빈약한데…….”
진운룡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소은설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무, 무슨 소리예요! 기녀 아니거든요! 그리고, 내 몸매가 뭐가 어때서요? 엉? 이만하면 나올 때 나오고, 들어갈 때 들어가고, 어디 가도 빠지지 않지!”
소은설이 목에 핏대를 올리며 소리치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무슨 일인가 하여 쳐다봤다.
“쯧쯧, 무슨 여자애가 그런 이야기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크게 떠드냐?”
진운룡이 혀를 차며 소은설을 외면했다.
“어휴! 속 터져! 정말! 내 상대를 안 하고 말지!”
얼굴이 벌게진 소은설이 재빨리 속도를 높여 거리를 빠져나갔다.
몇 개의 골목을 지난 뒤 소은설이 걸음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