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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1권 (16화)
4장 신위를 드러내다 (6)
그때, 제검문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공자 우리와 아가씨를 구해 주셔서 고맙소이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소. 하오문에도 저희의 무례를 진심으로 사과드리오.”
홍천상이 고개를 숙이며 진운룡과 소진혁에게 사과했다.
진운룡이 버티고 있는 이상 하오문은 이제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덕화가 한 짓들을 혹시라도 진운룡이 걸고 넘어간다면 걱정이었다.
제검문 전체가 덤빈다 해도 진운룡을 과연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홍 부대주께서 그나마 저희의 말을 들어 주셔서 오늘 초가 놈을 잡을 수 있었소이다.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소진혁은 무안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으나, 솔직히 속은 무척이나 시원했다.
임덕화는 아직 두려움이 남아 있는지 쭈뼛거리며 진운룡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대놓고 하오문을 무시한데다 어리석게도 초진도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으나, 자존심 때문에 직접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공자님,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 도리라 배웠습니다. 저…… 괜찮으시다면 저희 제검문에 함께 가시는 것은 어떨까요?”
임설향이 수줍은 모습으로 진운룡에게 말했다.
“아, 그것도 좋겠군요. 공자와 하오문 분들을 제검문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아마 문주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홍천상이 맞장구를 쳤다.
여러모로 진운룡과 하오문은 자신들의 은인이었다.
이번 화재사건을 해결하게 된 것도 제검문에게는 큰 경사였다.
도움을 받긴 했으나 결국 무림맹에서 맡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맹에서 그에 대한 걸맞은 보상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진운룡이 아니었으면 자신들은 모두 폭사할 뻔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두 사람의 요청에도 진운룡은 묵묵부답이었다.
그가 세상으로 나온 이유는 오로지 소은설에 대한 의문들과 과거의 여인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다른 일에 신경 쓰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다른 자들과 엮이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진운룡이 아무런 반응도 없자 홍천상이 무안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왜 초진도가 아버지를 제남으로 보낸 거죠?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면, 초진도 뒤에 다른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소은설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글쎄, 그것은 알아내지 못했군. 놈의 머리에 금제가 가해져서 그 이상은 한계였어.”
“아!”
금제 때문에 초진도의 머리가 터져 나간 것을 안 소은설이 아쉬운 탄성을 토해 냈다.
정확히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만 알았어도 훨씬 찾기가 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제남에 가 봐야 될 것 같은데…….”
소은설이 진운룡의 눈치를 살폈다.
정황상 초진도의 뒤에 미지의 세력이 관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세력은 초가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곳일 터였다.
그런 곳을 상대로 소은설이 아버지를 구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진운룡이 돕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진운룡은 그녀가 상상조차 못할 정도의 고수였다.
어쩌면 그녀가 허세라 여겼던 진운룡의 행동과 말들이 모두 진실일 수도 있다고 믿어질 정도였다.
그런 고수가 돕는다면 충분히 희망을 가져 볼 수 있었다.
“약속은 지켜야겠지.”
진운룡의 대답에 소은설이 눈을 빛냈다.
“저, 정말이죠?”
“당연하지. 나 광룡의 약속은 천금보다 귀하니까.”
진운룡의 뻔뻔한 자화자찬도 얼마든지 참아 줄 수 있을 만큼 소은설은 희망에 들떠 있었다.
“고마워요!”
소은설은 문득 정말 진운룡이 마음만 먹었다면 벌써 혈귀곡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그렇다면 나와 약속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소은설이 진운룡을 흘끔 바라봤다.
‘그래도 잘나긴 정말 잘났단 말이야.’
“뭘 그리 빤히 쳐다보는 거지? 혹시 반한 건가? 미안하지만 애들은 사절하지…….”
진운룡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누, 누가요! 착각도 유분수지!”
얼굴이 빨개진 소은설이 휙 고개를 돌렸다.
“단, 일이 좀 늘어났으니, 나도 한 가지 조건이 있어.”
그때 갑자기 진운룡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무, 무슨 조건인데요?”
소은설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진운룡의 괴팍한 성격을 봤을 때 결코 쉬운 조건은 아닐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너에게서 받고 싶은 게 있거든.”
진운룡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소은설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바, 받을 게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진운룡에게 대가로 지불할 만큼 귀한 물건이나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도 실종된 지금 가난한 그녀가 가진 것은 오로지 몸뚱이와 목숨 하나뿐이었다.
‘서, 설마!’
소은설의 얼굴이 순간 벌겋게 상기됐다.
“무, 무엇을 받고 싶은데요?”
소은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나중에 말해 주지. 왜, 싫어? 싫으면 관두고.”
소은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 아무리 그래도 순결을 바쳐야 하다니…….’
당찬 그녀도 결국은 여인이었다.
첫 경험을 사랑이 아닌 거래의 대가로 지급한다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아냐!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내 몸 따위.’
소은설이 이를 악물었다.
당장에 아버지의 생사가 걸린 일이다.
순결을 지키는 것보다는 아버지의 목숨이 훨씬 중요했다.
‘그래도 순결을 이렇게…….’
다시 소은설의 표정에 망설임이 어렸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소은설의 얼굴을 보며 진운룡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오해를 풀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름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없었던 일로 하지…….”
짐짓 표정을 차갑게 굳힌 진운룡이 그대로 돌아섰다.
“아, 아니에요!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소은설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래?”
순간, 갑자기 진운룡이 그녀를 향해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무, 무슨……!”
소은설은 너무 놀라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마치 입맞춤을 하듯 진운룡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향해 점점 다가왔기 때문이다.
‘무, 무슨 짓이야 이 사람! 아무리 내가 허락했다 해도 이렇게 갑자기!’
그녀의 심장은 터질 듯이 방망이질 쳤고, 머릿속은 온통 하얗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거의 닿을 듯 말듯 다가온 진운룡의 입술이 마지막 순간 소은설의 귓가로 향했다.
“좋아. 그럼 계약이 성립된 것으로 하지. 대신 나는 네 아버지를 구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대가 누구든 돕기로 하마.”
진운룡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소은설은 순간 온몸의 힘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시, 심장 떨어질 뻔했네!’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서는 왠지 허전함이 느껴졌다.
‘내, 내가 무슨 생각이야!’
소은설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제남으로 갈 거면, 어차피 연주까지는 함께 움직여도 되겠네요!”
제남으로 간다는 말을 들은 임설향이 얼른 끼어들면서 소은설은 정신을 차렸다.
“그게 좋겠군요. 요즘 연주 근처에서 민란이 발생해서 검문검색이 심한 편이라 우리와 함께 가시는 편이 귀찮은 일을 피하기엔 좋을 겁니다. 이번 기회에 비슷한 또래의 후기지수들 간에 좋은 교분을 나누시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홍천상이 임설향을 거들었다.
무림맹 조사단이라면 관에서도 함부로 건들 수가 없었다.
물론 진운룡이라면 관의 검문을 두려워할 리는 없었으나, 혼자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소은설과 함께라면 여러모로 번거로운 일일 것이다.
“흠, 흠……. 아, 아무래도 그편이 낫겠네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소은설이 아직 상기된 얼굴로 진운룡에게 물었다.
“그게 덜 번거롭기는 하겠군.”
진운룡도 관군과 부딪히는 일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피해 가는 것은 그의 성격상 어울리지 않았다.
진운룡까지 동행에 동의하자 임설향은 펄쩍 뛰며 좋아했다.
이렇게 되니 조사단의 책임자인 임덕화 역시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응?”
그때였다.
갑자기 진운룡의 시선이 금원각 꼭대기로 향했다.
그곳에는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쥐새끼가 있었군.”
번쩍!
퍽!
진운룡의 두 눈에서 섬광이 번뜩임과 동시에 까마귀의 몸이 터져 나갔다.
“무, 무슨 일이죠?”
소은설이 놀라 물었다.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어.”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은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자신이 본 바로는 까마귀 한 마리가 있었을 뿐인데, 누가 지켜보고 있었다니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어떤 자들은 특수한 술법을 통해 동물들과 교감을 하고 그것들이 듣고 보는 것을 똑같이 느낄 수 있어. 흔히 수혼통령(獸魂通靈)이라 하지 아까 그 까마귀는 인간의 지배를 받는 복령수(僕靈獸)야.”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에 소은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아까 그 까마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이야기예요?”
“맞아.”
“누가 왜 우릴 지켜봤을까요?”
“글쎄, 어쩌면 우릴 지켜본 게 아니라 초가장을 염탐하고 있었던 걸 수도 있지…….”
문제는 수혼통령이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술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운룡이 알기로 이 술법을 사용하는 무리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다.
“초진도의 금제도 그렇고, 이상하군…….”
진운룡의 두 눈이 묘하게 빛났다.
4장 신위를 드러내다 (6)
그때, 제검문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공자 우리와 아가씨를 구해 주셔서 고맙소이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소. 하오문에도 저희의 무례를 진심으로 사과드리오.”
홍천상이 고개를 숙이며 진운룡과 소진혁에게 사과했다.
진운룡이 버티고 있는 이상 하오문은 이제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덕화가 한 짓들을 혹시라도 진운룡이 걸고 넘어간다면 걱정이었다.
제검문 전체가 덤빈다 해도 진운룡을 과연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홍 부대주께서 그나마 저희의 말을 들어 주셔서 오늘 초가 놈을 잡을 수 있었소이다.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소진혁은 무안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으나, 솔직히 속은 무척이나 시원했다.
임덕화는 아직 두려움이 남아 있는지 쭈뼛거리며 진운룡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대놓고 하오문을 무시한데다 어리석게도 초진도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으나, 자존심 때문에 직접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공자님,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 도리라 배웠습니다. 저…… 괜찮으시다면 저희 제검문에 함께 가시는 것은 어떨까요?”
임설향이 수줍은 모습으로 진운룡에게 말했다.
“아, 그것도 좋겠군요. 공자와 하오문 분들을 제검문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아마 문주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홍천상이 맞장구를 쳤다.
여러모로 진운룡과 하오문은 자신들의 은인이었다.
이번 화재사건을 해결하게 된 것도 제검문에게는 큰 경사였다.
도움을 받긴 했으나 결국 무림맹에서 맡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맹에서 그에 대한 걸맞은 보상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진운룡이 아니었으면 자신들은 모두 폭사할 뻔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두 사람의 요청에도 진운룡은 묵묵부답이었다.
그가 세상으로 나온 이유는 오로지 소은설에 대한 의문들과 과거의 여인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다른 일에 신경 쓰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다른 자들과 엮이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진운룡이 아무런 반응도 없자 홍천상이 무안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왜 초진도가 아버지를 제남으로 보낸 거죠?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면, 초진도 뒤에 다른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소은설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글쎄, 그것은 알아내지 못했군. 놈의 머리에 금제가 가해져서 그 이상은 한계였어.”
“아!”
금제 때문에 초진도의 머리가 터져 나간 것을 안 소은설이 아쉬운 탄성을 토해 냈다.
정확히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만 알았어도 훨씬 찾기가 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제남에 가 봐야 될 것 같은데…….”
소은설이 진운룡의 눈치를 살폈다.
정황상 초진도의 뒤에 미지의 세력이 관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세력은 초가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곳일 터였다.
그런 곳을 상대로 소은설이 아버지를 구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진운룡이 돕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진운룡은 그녀가 상상조차 못할 정도의 고수였다.
어쩌면 그녀가 허세라 여겼던 진운룡의 행동과 말들이 모두 진실일 수도 있다고 믿어질 정도였다.
그런 고수가 돕는다면 충분히 희망을 가져 볼 수 있었다.
“약속은 지켜야겠지.”
진운룡의 대답에 소은설이 눈을 빛냈다.
“저, 정말이죠?”
“당연하지. 나 광룡의 약속은 천금보다 귀하니까.”
진운룡의 뻔뻔한 자화자찬도 얼마든지 참아 줄 수 있을 만큼 소은설은 희망에 들떠 있었다.
“고마워요!”
소은설은 문득 정말 진운룡이 마음만 먹었다면 벌써 혈귀곡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그렇다면 나와 약속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소은설이 진운룡을 흘끔 바라봤다.
‘그래도 잘나긴 정말 잘났단 말이야.’
“뭘 그리 빤히 쳐다보는 거지? 혹시 반한 건가? 미안하지만 애들은 사절하지…….”
진운룡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누, 누가요! 착각도 유분수지!”
얼굴이 빨개진 소은설이 휙 고개를 돌렸다.
“단, 일이 좀 늘어났으니, 나도 한 가지 조건이 있어.”
그때 갑자기 진운룡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무, 무슨 조건인데요?”
소은설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진운룡의 괴팍한 성격을 봤을 때 결코 쉬운 조건은 아닐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너에게서 받고 싶은 게 있거든.”
진운룡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소은설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바, 받을 게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진운룡에게 대가로 지불할 만큼 귀한 물건이나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도 실종된 지금 가난한 그녀가 가진 것은 오로지 몸뚱이와 목숨 하나뿐이었다.
‘서, 설마!’
소은설의 얼굴이 순간 벌겋게 상기됐다.
“무, 무엇을 받고 싶은데요?”
소은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나중에 말해 주지. 왜, 싫어? 싫으면 관두고.”
소은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 아무리 그래도 순결을 바쳐야 하다니…….’
당찬 그녀도 결국은 여인이었다.
첫 경험을 사랑이 아닌 거래의 대가로 지급한다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아냐!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내 몸 따위.’
소은설이 이를 악물었다.
당장에 아버지의 생사가 걸린 일이다.
순결을 지키는 것보다는 아버지의 목숨이 훨씬 중요했다.
‘그래도 순결을 이렇게…….’
다시 소은설의 표정에 망설임이 어렸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소은설의 얼굴을 보며 진운룡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오해를 풀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름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없었던 일로 하지…….”
짐짓 표정을 차갑게 굳힌 진운룡이 그대로 돌아섰다.
“아, 아니에요!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소은설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래?”
순간, 갑자기 진운룡이 그녀를 향해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무, 무슨……!”
소은설은 너무 놀라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마치 입맞춤을 하듯 진운룡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향해 점점 다가왔기 때문이다.
‘무, 무슨 짓이야 이 사람! 아무리 내가 허락했다 해도 이렇게 갑자기!’
그녀의 심장은 터질 듯이 방망이질 쳤고, 머릿속은 온통 하얗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거의 닿을 듯 말듯 다가온 진운룡의 입술이 마지막 순간 소은설의 귓가로 향했다.
“좋아. 그럼 계약이 성립된 것으로 하지. 대신 나는 네 아버지를 구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대가 누구든 돕기로 하마.”
진운룡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소은설은 순간 온몸의 힘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시, 심장 떨어질 뻔했네!’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서는 왠지 허전함이 느껴졌다.
‘내, 내가 무슨 생각이야!’
소은설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제남으로 갈 거면, 어차피 연주까지는 함께 움직여도 되겠네요!”
제남으로 간다는 말을 들은 임설향이 얼른 끼어들면서 소은설은 정신을 차렸다.
“그게 좋겠군요. 요즘 연주 근처에서 민란이 발생해서 검문검색이 심한 편이라 우리와 함께 가시는 편이 귀찮은 일을 피하기엔 좋을 겁니다. 이번 기회에 비슷한 또래의 후기지수들 간에 좋은 교분을 나누시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홍천상이 임설향을 거들었다.
무림맹 조사단이라면 관에서도 함부로 건들 수가 없었다.
물론 진운룡이라면 관의 검문을 두려워할 리는 없었으나, 혼자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소은설과 함께라면 여러모로 번거로운 일일 것이다.
“흠, 흠……. 아, 아무래도 그편이 낫겠네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소은설이 아직 상기된 얼굴로 진운룡에게 물었다.
“그게 덜 번거롭기는 하겠군.”
진운룡도 관군과 부딪히는 일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피해 가는 것은 그의 성격상 어울리지 않았다.
진운룡까지 동행에 동의하자 임설향은 펄쩍 뛰며 좋아했다.
이렇게 되니 조사단의 책임자인 임덕화 역시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응?”
그때였다.
갑자기 진운룡의 시선이 금원각 꼭대기로 향했다.
그곳에는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쥐새끼가 있었군.”
번쩍!
퍽!
진운룡의 두 눈에서 섬광이 번뜩임과 동시에 까마귀의 몸이 터져 나갔다.
“무, 무슨 일이죠?”
소은설이 놀라 물었다.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어.”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은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자신이 본 바로는 까마귀 한 마리가 있었을 뿐인데, 누가 지켜보고 있었다니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어떤 자들은 특수한 술법을 통해 동물들과 교감을 하고 그것들이 듣고 보는 것을 똑같이 느낄 수 있어. 흔히 수혼통령(獸魂通靈)이라 하지 아까 그 까마귀는 인간의 지배를 받는 복령수(僕靈獸)야.”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에 소은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아까 그 까마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이야기예요?”
“맞아.”
“누가 왜 우릴 지켜봤을까요?”
“글쎄, 어쩌면 우릴 지켜본 게 아니라 초가장을 염탐하고 있었던 걸 수도 있지…….”
문제는 수혼통령이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술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운룡이 알기로 이 술법을 사용하는 무리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다.
“초진도의 금제도 그렇고, 이상하군…….”
진운룡의 두 눈이 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