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이링카 1권 (14화)
4. 트리키 가의 비밀 (1)/

<흔히들 말하길, 사랑은 숨길 수 없는 감정이래. 하지만 나는 그것이 누구도 알지 못할 깊은 곳에 숨길 수 있는 감정 중 하나라는 걸 알아. 그리고 숨겨진 사랑이 어쩌면 가장 크고 넓은 것일 수 있다는 것도. 아버지들의 사랑이 종종 그래.>

두 개의 금잠으로 틀어올린 머리, 붉은 보석이 달린 귀걸이와 아예 주렁주렁 매달리다시피한 목걸이, 손가락마다 번쩍이는 반지에 금박이 붙은 새하얀 비단 정장을 차려입고 하얀 담비털 외투로 몸을 휘감은 내가 질린 얼굴로 거울 속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나는… 인간이 아니라 돈덩어리로 보여.”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있는 제제에게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아침부터 나를 붙잡고 한참을 씨름한 끝에 결국 지금의 화려찬란한 모양을 완성시킨 참이었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번쩍이는 것들만 붙여놓고서 마치 일생일대의 작품이라도 완성한 듯 자랑스럽게 굴고 있는 것이다.
“우, 무거워서 못 걷겠어.”
“엄살부리지 마세요. 이번 파티에선 누구보다 눈에 띄셔야 해요. 처음 맞는 공식적인 자리니까 모두에게 확실하게 기억되게 해야죠. 그리고 왕야의 체면도 생각하셔야 하고요. 아시겠어요? 절대로 품위 있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하아, 알았어. 한번만 더 들었다간 귀에 못이 박히겠다.”
거의 연설에 가까운 말을 울상이 된 얼굴로 들어준 다음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방을 나와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현관앞엔 나 못지않게 치렁치렁 차려입은 스칼라와 깔끔하면서도 품위있는 옷차림을 한 킬이 나란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상단에서의 사건으로 킬은 얼굴에 큼직한 멍자국이 생겼는데 마법으로 치료해서 간신히 흔적을 없앤 참이었다. 물론 상처가 없어졌다고 해서 억울한 마음까지도 말짱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오, 우리 아들내미 정말 예쁘구나. 보여주면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지겠는걸? 오호호호…”
“음, 누구에게 뒤지지는 않겠구먼.”
“…도련님, 이쁘다.”
“어라? 거기 있었구나, 나기야?”
내내 안보이던 나기가 꼿꼿하게 서있는 이안의 등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녀석은 머리도 단정하게 묶고 깔끔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헤죽거리고 있었다.
“나기가 기분이 좋아보이네?”
“잘하면 오늘 목걸이를 찾아올지도 모르겠다고 말해줬거든요?”
“목걸이?”
“예. 오늘 파티엔 대부분의 귀족들이 다 모이는 만큼 트리키 가의 노백작님이나 그 식솔들도 반드시 나올 테니까, 왕야께서 말씀만 하신다면 어쩔 수 없이 목걸이를 내놓지 않겠습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킬을 바라보았다. 그래줄 수 있느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는데 그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우선 자세한 사정을 들어보긴 해야겠지만 이런 어린애를 숲으로 보낸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흐음, 하지만 그는 이유없이 일을 만들 사람이 아니야. 분명 무언가 사연이 있을 게다. 그리고 내놓으라고 해서 넙죽 내줄 사람도 아니라서 얘기를 잘 해야 할 게야.”
“아무리 그래도 설마하니 그분이 왕야의 말씀까지 거부하겠습니까?”
“그, 그야… 크허험, 그 노친네가 아무리 고집이 있다고 해도 내 말까지 무시하지는 못하겠지. 암, 그렇고 말고.”
나의 기대어린 눈빛을 받은 킬군은 헛기침을 하며 마구마구 잘난척을 해댔다. 음, 보아주기 사뭇 민망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어찌하랴. 지금은 나기의 목걸이를 되찾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을.
“그럼 제게도 트리키 백작을 소개해 주실거죠?”
“크하하, 그러마. 너는 그저 이 아비만 턱 하니 믿고 있거라.”
아아, 단순한 킬군. 일부러 귀여운 척 물었더니 그는 금새 입이 벌어져서 호언장담을 했다. 전엔 그래도 봐줄만 했는데 오늘날은 어쩌다 저렇게 됐는지 원. 세월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기야, 목걸이를 꼭 찾아올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응. 빨리 돌아와, 도련님.”
“아, 도련님 이것 가져가셔야죠?”
돌아서는 내게 이안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내가 부탁해 놓은 작은 화분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황제폐하의 선물로 줄 참이었다. 손바닥만한 화분을 가지고 여전히 으리으리한 마차에 오르자 제제가 냉큼 곁에 앉아 화분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마차가 출발했다.
다가닥… 다가닥…
석양이 내리기 시작하는 대로를 지나 시의 중심인 데리암 광장과 타마르 제국이 섬기는 몇몇 신들의 신전을 지나고 그 뒤로 쪽 뻗은 넓은 길을 한참 달리자 눈앞엔 거대한 궁전으로 이어지는 구름 다리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앞서 도착한 마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는데 워낙 제각각인데다가 말을 탄 사람들과 뒤엉켜 있어 상당히 복잡한 모습이었다.
“앞에서 신분을 확인하느라고 지체가 되는 거랍니다. 이거, 한참을 기다려야 겠는데요?”
“지루한 건 싫은데…”
“핫, 걱정을 하지 말거라, 아들아. 시종을 보내 알리면 먼저 들어갈 수 있을게다.”
“됐어요. 조금 기다려보죠, 뭐.”
괜히 일을 만들까봐 걱정돼서 나는 도로 말을 거두어 들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앞에 있는 놈들 다 비켜어…!”
…라는 외침과 함께 마차 옆을 후다닥 지나가는 웬 누런 그림자.
“어디서 본 듯도 한 물건 같았는데, 뭐였지?”
“뭐긴 뭐에요? 철없는 당신 넷째 형님이지.”
“뭬야?”
그 순간에도 확실하게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한 스칼라가 뾰루퉁하게 중얼거리자 킬은 입술 한쪽을 실룩거리더니 갑자기 벌컥 소리쳤다.
“앞에 있는 것들 다 비키라고 해!!!”
아아,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이냐. 영문을 몰라 스칼라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지고는 못 살지. 동생이든 형이든 이겨야 성질이 풀리는 거야. 아들아, 넌 절대 흉내내지 말거라. 알겠지?”
“아하하… 네.”
그렇게 전혀 쓸데없는 이유로 킬은 마부를 닥달했고 그에 충격을 받은 마부는 드디어 위험천만한 곡예운전(?)을 시도한 끝에 다른 누구보다 먼저 궁전 안으로 마차를 들여놓았다.
덕분에 사정없이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 타고 있었던 우리는 뜻하지 않게 다들 조금씩 구겨져 야 했고. 아아, 하마터면 마차 안에서 죽을 뻔 했다.
어쨌든 사정없이 뒹굴었어도 절대 아닌 척 우아하게 마차에서 내리자 제제가 냉큼 뛰어내려 내 뒤를 따랐다. 그런 우리의 앞에는 사이좋은 부부인양 웃는 얼굴로 착 붙어있는 킬과 스칼라가 역시나 우아한 폼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가증스러운…. 마차에서 내리기 전엔 ‘한번만 더 그러면 죽일텨.’라고 이를 갈았으면서. 새삼 그들의 위대함을 깨닫는 나였다.
새하얀 궁전은 초록빛의 지붕과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몇 개의 뾰족한 탑, 그리고 황금빛 돔 형태를 한 건물들을 끼고 마치 잠든 드래곤처럼 둔중하게 그 자리에 서있었다. 예전의 시할룸보다 몇 배나 크지만 그 못지않게 아름다운 건물. 이 정도면 충분히 감탄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몇 분을 걸어 환하게 불이 밝혀진 채 음악소리가 흘러나오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누군가가 달려 나와 안내를 맡았다. 그리고…
“오딜란 왕야 내외분과 그 아드님이 드셨습니다아!”
외투를 벗어 제제에게 맡기고 돌아서자마자 안내를 한 시종이 길게 소리쳐 모두에게 우리의 입장을 알렸다. 그러자 곧 파티장의 거대한 문이 활짝 열렸고 앞에 있던 스칼라와 킬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도련님,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오세요.”
“알았어, 제제. 나 잘 할 수 있어.”
나는 제제에게서 화분을 받아들고 전의(?)를 다진 다음 심호흡을 하고 당당하게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바탕 소란스럽던 실내가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모두들 휘둥그레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아아, 이럴 줄 알았어. 역시나 너무 화려했던 거야. 그래서 보석은 싫다고 했는데… 나는 당황한 얼굴로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앞서 가던 킬과 스칼라가 돌아보며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너무 화려한가봐요.”
걸어가면서 나직하게 속삭이자 스칼라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무리 화려해도 저기 앉아있는 사람보다는 봐줄만 하니까.”
“응? 누구예요?”
“누구긴? 잘난 황후마마시지.”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높은 황금빛 의자에 앉아있는 한 여인이었다. 틀어 올린 붉은 갈색머리위에 작은 왕관을 쓰고 있는 그녀는 갓 사십 정도 되보이는 얼굴에 날씬한 몸매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화려한 것은 둘째 치고 웬일인지 약간 올라간 갈색 눈동자에 어렴풋한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것도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왜 저래요?”
“우릴 꽤 싫어하거든. 자기 아들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래봤자 상대도 안되는 주제에…”
“해가 되다뇨?”
“훗, 자기 아들을 황제로 만들고 싶은데 우리가 방해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란다. 주제에 감히 노릴 걸 노려야지.”
스칼라는 평소 맺힌 것이 많은지 슬며시 이를 갈아부쳤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씹어주고 싶다는 티가 역력해서 나는 그녀를 다시 한번 더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길게 소리쳐 황제폐하의 입장을 알렸고 우리는 잠시 그대로 멈춰서야 했다.
“황제폐하 드십니다!”
길게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느릿하게 들어선 황제는 제왕답게 당당하게 걸어 황후의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머리가 하얀 노인이었는데 아직도 무지 정정한 것이 얼굴엔 주름 하나 없고 몸도 젊은 사람처럼 단단해 보였다. 음, 대체 뭘 먹으면 늙어서도 저렇게 탱탱할 수 있는 걸까? 나는 그점이 몹시 궁금했다.
“오, 네가 왔구나, 오딜란.”
“예, 폐하. 삼가 생신을 감축드리옵니다.”
그가 아는 척을 하자 킬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이 아이는 일전에 말씀드린 제 아들 파비안입니다. 인사드리거라.”
“파비안이라고 합니다. 폐하의 생신을 경하드립니다.”
나는 킬을 따라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황제 왈.
“호오, 예쁜 아이구나. 꼭 내 취향인걸?”
“…!”
흡사 누군가를 흉내 낸 듯한 짧은 한마디. 그 말 한마디로 황제는 처음부터 내게 미운털이 박혀버리고 말았다. 즉, 나는 그를 가차없이 무시해주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항상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이 기본이고 상책이었다. 따라서 나는 손에 들고있는 선물만 전해주고 가능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서 나온 본능적인 결론이었다.
“그것은…?”
“폐하께 드리는 생신 선물입니다. 마침 꽃이 피었기에 가져왔습니다.”
내가 내민 화분엔 눈송이 모양을 한 새하얀 꽃이 하나 피어 있었다. 그것은 월하미인이라고 불리는 꽃이었는데 원래는 선인장과의 꽃으로 더운 여름에나 피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년에 꼭 한번만 피는… 나는 그것을 선물로 가져오기 위해 지난 밤 일부러 꽃을 피워냈고 이대로라면 며칠동안은 계속해서 꽃을 볼 수 있었다.
두 손으로 화분을 내밀자 시종이 냉큼 달려와 받아가더니 이내 황제에게 내밀었다. 그랬더니 역시나 가만히 꽃을 들여다보던 황제 왈.
“흐음, 귀한 꽃이로구나. 아주 마음에 들었도다. 그런 의미에서… 아가, 이리 가까이 와 할애비에게 이 꽃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해 주지 않으련?”
“…!”
그는 당당하게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대체 뭐하자는 짓인지. 예상치 못했던 그의 행동에 주위는 순간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고 나와 킬군은 당황해서 말도 못하고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때였다. 그나마 일찍 정신을 차리고 과감하게 반항을 시도한 이가 나타난 것은.
“쿨럭. 젠장, 놀라서 사래가 걸릴 뻔 했잖아?”
그는 금빛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검은 머리의 중년 사내로 한손에 술잔을 든 채 당당하게 황제폐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곤 몇 번의 기침 끝에 버럭 소리치는 말.
“노망이라도 나셨습니까? 다 늙은 노친네가 그 무슨 가당치도 않은 헛소리예요?”
“끄응. 고얀 놈. 이게 다 손자 사랑 아니냐?”
“흥, 그 많은 손자들을 봤어도 한번도 이런 적 없었잖아요?”
“당연하지. 나도 눈이 있고 취향이라는 게 있는 사람인데!”
어허라, 이건 또 무슨 일인고. 중년인과 황제폐하는 서로 삿대질을 하면서 마구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하는 짓이 영락없이 똑같은 것이 누가 봐도 부자지간이 확실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저 사람이 바로 넷째 왕야시란다.”
역시 부자사이 맞단다. 그것도 아까 우리를 보기 좋게 새치기한 바로 그 누런 사람.
나는 황제 앞에서 당당하게 소리치고 있는 그가 진정 존경스러워서 입을 쩍 벌리고 바라봐 주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간뎅이가 배 밖으로 나온 것 같은 정신 나간 짓을 과감하게 해치울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흥,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그딴 소리를 해요?”
“못할 건 또 뭐냐? 어차피 내 생일이잖아?”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그들의 살벌한 다툼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킬군이 정신을 차렸는데 방금 전과 달리 그는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는 모양이 꼭 그랬다. 그래서 괜찮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내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그만 두지 못해!”
터져버렸다. 그가 소리치자 잘 싸우고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딱 다물었고 다른 기타등등의 사람들은 흠칫 놀라 작은 경악성을 흘려내었다.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실은, 두 사람의 싸움보다 그가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어찌 되려는 것인지…
“후우, 폐하… 고정하시고 그만 자리에 앉으시지요.”
“크허허험, 그러마.”
“거 봐요. 노망난 소리를 하니까 다섯째가 화를 내잖아요?”
“형님!”
“…알았다, 알았어.”
그의 한마디에 사태는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역시 킬군은 강자였던 것인가? 왠지 믿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두 사람이 진정되자 그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채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준엄하게 말했다.
“폐하, 이 아이는 제 아들입니다.”
“안다. 방금 소개 했잖냐?”
“아신다니 다행이군요. 방금 전의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후우, 오딜란. 너도 알겠지만 나는 일곱 아들에 손자 일곱과 손녀 둘을 두고 있다. 그러나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것들이 어디 인간 몰골을 하고 있더냐? 솔직히 내 평생 이렇게 이쁜 손자를 보리라곤 꿈도 안 꿔봤다. 어째서 하나 같이들…”
황제폐하는 애절하게까지 보이는 표정으로 아예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그런 것을 킬은 의외로 진지하게 듣고 있었고.
‘정말 인간 몰골이 아니예요?’
하도 진지한 태도라서 나는 스칼라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어이없다는 투로 웃더니 살며시 속삭였다.
‘무슨… 다들 제대로 생겼지. 다만 폐하의 눈이 워낙 높아서 저 모양이란다. 오죽하면 다들 몬스터 취급을 당하면서 구박을 받고 있겠니?’
‘그, 그런 거였어요?’
아아, 나야말로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그러나 내가 진실을 깨닫고 있는 사이에도 눈 높은 황제폐하는 당당하게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오늘에 이르러 드디어 보기 드물게 이쁜 놈을 발견한 짐의 심정을 너는 이해하겠지?”
“그야, 어느 정도는…”
“그래, 너라면 이해할 줄 알았도다. 암, 그렇고 말고. 그런 의미에서… 아가, 이리 온?”
그는 또다시 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그 난리를 치르고도 이런 소리가 나오다니. 이 무슨 허탈한 상황인지… 나는 멍청한 얼굴로 킬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또박또박 말했다.
“나 집에 돌아갈래요.”
“흐억! 그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더냐?”
내 말에 황제폐하는 놀라서 벌떡 일어서더니 황금빛 망토를 펄럭이면서 순식간에 계단을 내려와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곤 뭐라 말하려는 킬을 걷어차고 내게 갖은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그 옆에 의자를 놓고 주저앉아 사탕을 먹고 있었다.
“으허허허, 이것도 먹어보렴.”
대체 왜 나는 그에게서 사탕을 받아먹고 있는 것일까? 나란 놈은 원래 이렇게나 사탕에 약한 놈이었던 것인가? 앞에 수북하니 놓여있는 사탕 및 과자와 내 입에 사탕 하나를 넣어주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그를 보며 나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놈의 팔자가 갈수록 이상하게만 꼬이는 것이지?
“폐하, 그만 하시고 저와 춤이라도 추어 주시지요?”
살기를 머금은 채 조용히 앉아있던 황후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은밀하게 살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내가 황제폐하의 곁에 앉자 아예 노골적인 적의를 품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날 보고 뭘 어쩌라고?
“다른 이들의 이목도 생각하셔야지요.”
“응? 귀찮게스리…”
황제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퉁퉁거리다가 결국 황후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다행히 모두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로 집중되었고 그제야 자유로워진 나는 잽싸게 아래로 내려와 무조건 밖으로 도망을 쳤다. 물론 그러다 중간에 킬군에게 잡혔지만.
“이리 와 봐라. 내 형제들을 소개해 줄 테니…”
황제의 주책으로 인해 대부분의 소개 및 인사가 생략된 상태였던 터라 킬은 손수 나를 끌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가 바로 문제의 사왕야였는데 그에 대해 킬은 한마디로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