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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15화)
4. 트리키 가의 비밀 (2)/

“단순, 무식, 과격하나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 말의 진위를 나는 바로 다음 순간에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바로 너의 네 번째 백부니라. 노망난 노친네 기분 맞춰주느라 수고했다. 오늘은 생일이니까 봐주고 낼부턴 싹 무시하거라. 알겠지?”
“…네.”
반듯하고 호쾌한 외모의 소유자답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그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삼왕야와 이왕야였는데 모두들 나란히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삼왕야가 동글동글한 외모에 부드럽고 점잖은 사람인 반면 이왕야는 날카롭고 예리한 성격을 가진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같은 형제라도 어찌 그리 다르던지…
“태자 형님께서는 오늘도 몸이 불편하시답니까?”
“그렇지 뭐. 그 형님도 정말 걱정이야. 도통 나아지질 않으니…”
“한번 찾아뵙게. 아무래도 오래 가시지 못할 것 같아.”
“근데 넌 아들내미를 곱게만 키워서 어쩔 작정이냐? 사내라면 모름지기 검을 휘두르고 말을 달려야지.”
“흥, 모르시는 말씀. 이래봬도 보통 실력이 아니예요. 괜히 멀리 보내 공부를 시켰는 줄 알아요? 캬캬캬…”
킬은 이때다 싶었는지 마구마구 자랑을 늘어놓으며 연신 웃어댔다. 덕분에 얘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됐을 때 나는 사왕야와의 검술 대련 약속과 삼왕야와의 사냥 약속을 받아놓게 되었다. 그리고 덤으로 이왕야와의 체스 약속도.
그 뒤로도 나는 참 많은 사람을 만나고 돌아다녔다. 일일이 이름도 못 외울만큼 많았는데 그것은 킬 뿐만 아니라 스칼라가 동원한 아줌마들까지 죄다 만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일에서 얻은 교훈은…
“역시 아줌마들 보다는 아저씨들을 만나는 게 편해.”
한 시간째 아줌마들의 수다를 듣고 있다가 내린 결론이었다.
트리키 노백작을 만난 것은 내가 완전히 지쳐서 발코니 부근에 놓인 의자에 축 늘어져 있을 때였다. 하얗게 센 금발 머리를 가진 그는 몸이 약간 불편한지 지팡이를 짚고 시종의 부축을 받으면서 파티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깡마른 몸에 겨자색 옷을 입고 있는 그를 알아보지 못해 처음엔 그저 그런 귀족중 하나려니 생각하고 말았는데 마침 마실 것을 가져온 킬이 그를 보고 ‘트리키 노백작’이라고 알려줘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근데 대체 나이가 몇살이길래 저렇게 늙어 보이는 것일까?
“폐하랑 동갑일걸?”
“설마… 십년은 더 늙어 보이는데?”
같은 나이인데도 한사람은 젊은 사람 못지않게 탱탱하고 주책인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늙어 꼬부라지고 병든 모습이라니. 그 막심한 차이에 나는 약간 놀랐다. 대체 어느 쪽이 비정상인 건지…
“작년에 봤을 때는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응? 작년?”
“그래. 나이가 많긴 했어도 정정했었다고. 시종의 부축은 물론 지팡이를 짚지도 않았어. 저 사람 저래봬도 기사출신이라 한겨울에도 찬물로 목욕하는 사람이거든. 근데 어쩌다 저리 되었는지. 저거 봐라. 폐하께서도 놀라고 계시잖냐?”
허리를 꽉 졸라맨 아줌마들에게 붙잡혀 열심히 춤을 추고 있던 황제폐하는 비틀비틀 들어오는 그를 발견하고 놀라서 붙잡고 있던 아줌마를 내팽개치고 달려갔다. 그런 다음 노백작의 옆에 서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다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만큼은 백작이 불편한 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후후, 의도하지 않고도 남을 배려해주시는 분이란다, 폐하께서는. 저분이 가는 곳은 항상 떠들썩하고 유쾌해지지.”
“난 전혀 유쾌하지 않았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유쾌했지. 물론 아비도 기뻤단다, 아들아. 저분이 손자를 보시고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거든. 항상 무관심 혹은 생기다 말았다고 타박이나 주셨는데 말이지. 흐흐흐…”
킬은 정말로 기분이 좋은 듯 말하다 말고 히죽 웃었다. 무언가 묘한 승리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사람처럼. 이럴땐 그저 가볍게 무시해 주는 것이 정신 건강을 위해서 좋은 일이다. 즉, 나는 그를 무시해주고 담담한 표정으로 폐하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트리키 백작만 바라보았다. 주름이 가득한 마른 얼굴위로 가끔 뜻 모를 슬픔을 드러내는 사람.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기의 목걸이를 되찾고 녀석에게 이링카를 찾아오라고 시킨 이유를 듣기 위해서.
“킬, 저 사람하고 얘기를 해보고 싶어.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
“그건… 아무래도 폐하께 부탁해 보는 게 빠를 것 같구나. 그러면 호기심으로라도 따로 자리를 마련해 주실 테니까. 그리고 목걸이를 돌려받는데도 도움을 주실 수 있어. 왜냐면, 두 사람은 오랜 친구사이거든.”
“나보고 또 옆에 앉아서 사탕을 받아먹으란 말야?”
일은 도무지 맘에 안 드는 방향으로 진행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하필이면 황제에게 부탁을 해야 하다니… 차마 그 일만은 하고 싶지 않은 나였다. 내 나이가 몇인데 또다시 그에게 ‘아가’ 소리를 들으며 사탕을 받아먹어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유희중이라곤 하지만 아직 연기력이 부족한 나에겐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다못해 얼굴 가죽이라도 두툼했다면 좋았으련만 그마저도 안되니 원.
“애 취급하는 건 너랑 스칼라만으로도 충분해. 너희들에겐 내 나이쯤은 나이라고도 할 수 없는 수준일 테니까 이해한다고. 하지만 같은 인간에게조차 어린애 취급을 당해야 하는 건 솔직히 짜증나. 그럴 때마다 내가 살아온 세월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고.”
“흐응, 그렇지만 우린 지금 유희중이니 하는 수 없잖냐? 게다가 네 겉모습은 여전히 열다섯 어린애의 모습이고. 아니 열다섯이라고 봐주는 것도 상당히 인심을 쓴 거다. 열세살이라고 말해도 의심 않고 죄다 믿어줄 걸? 게다가 아직도 사탕을 좋아하는 건 또 어떻고?”
“그, 그건…”
으음, 워낙 예리한(?) 지적이라 할 말이 없구먼. 대체 이 도마뱀이 언제부터 이렇게 옳은 소리만 꼬박꼬박 하면서 살게 된 거지? 나는 입도 한번 벙긋 못해보고 얌전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러자 드디어 하늘을 찌를 듯 기고만장해진 놈이 마치 선언을 하듯 외치는 말.
“목걸이를 되찾고 싶거든 폐하께 가서 꼬리를 흔들어. 넌 지금 누가 뭐래도 내 아들내미인데다 아직 열다섯살 밖에 안됐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알겠느냐? 사탕을 주면 사탕을 받아먹고 과자를 주면 과자를 받아 먹으란 말이다.”
“으윽!”
“그것이 바로 너의 할 도리란다, 아들아. 푸하하하!”
킬은 눈밑에 음침한 그늘을 깐 채 기세 좋게 웃어젖혔다. 마치 전부터 그렇게 되길 바랬던 것처럼 기쁨에 겨운 모습이었다. 이럴 땐 정말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이 안가는 놈이라니까. 어쨌든 사정이 그러한 까닭에 나는 킬군에게 등을 떠밀려 트리키 백작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채 가까이 가기도 전에 그는 나를 발견해내고 이렇게 소리쳤다.
“아가, 할애비 여기 있단다!”
“흡!”
아아, 그에게 부탁을 하느니 차라리 혼자 애써보는 게 낫지 않을까? 헤벌죽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대는 그를 보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버리는 것이 할수만 있다면 나는 가능한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고만 싶었다. 그래서 딴에는 애처로운 눈을 하고 슬쩍 킬을 올려다 보았는데 그는 그런 나를 한번 슥 내려다 보더니 다짜고짜 내 손을 잡아끌어 황제 앞에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아비의 얼굴과 나기를 생각하거라’ 라는 말과 함께.
‘목걸이 같은 건 얼마든지 되찾아 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친 주제에… 이건 배신이야.’
언젠가는 이 복수를 해주고야 말리라고 다짐하는 나였다.
“으허허, 안보여서 찾았단다. 어서 이리와 앉거라.”
“…!”
팔불출 황제가 가리킨 곳은 자신의 무릎 위였다. 주위에 그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는데 정녕 민망하지도 않은 것일까? 팔을 벌리고 헤죽 웃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는 슬며시 트리키 백작 옆에 주저앉았다. 그랬더니 갑자기 홱 도끼눈을 치켜뜨고 트리키 백작을 노려보면서 소리치는 말.
“자네도 보는 눈이 제법이구먼. 그러나 걘 내 손자야. 어서 이리 넘기시지.”
“허허, 폐하. 이 꼬마 손님은 아무래도 제가 더 마음에 드는 눈치인데요?”
“그럴 리가 없네. 아무리 봐도 자네보단 역시 내가 더 잘났는 걸? 인기도 내가 더 많았잖아?”
“허허, 아니지요. 지금이야 이렇지만 원래는 제가 더 인기가 많았습니다. 제가 폐하보다 더 동안이었잖아요.”
그렇게 그들은 내가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유치한 싸움을 시작했다. 그것도 점점 목소리를 높여가면서. 덕분에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나는 당황해서 차마 몸둘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마침 누군가가 나타나 그 곤란한 상황을 멋지게 해결해 주었다.
“문안 인사 드리옵니다, 폐하.”
“엥? 네 녀석은…?”
불쑥 나타난 그는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른 차가운 인상의 사내였다. 이십대 중반쯤 되보이는 나이에 날카롭게 뻗어 올라간 눈매와 약간은 얄팍한 입술이 조금 잔인해 보이기도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래서인지 그다지 정이 가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아는 척 인사를 해오자 황제는 싸우다 말고 그를 삐죽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그나저나 배짱도 좋다. 다른 놈들은 일찌감치 들어와 이쁜 짓들도 해주던데 네놈은 이제 기어들어온 주제에 뻣뻣한 얼굴이나 하고 있고.”
“죄송합니다, 폐하.”
“흐응, 죄송한 줄 알면 재롱 좀 떨어보려므나. 응?”
그렇게 말하면서 황제는 탁자위에 놓여있는 꽃병에서 꽃을 한송이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내의 코앞에 들이대고 진지하게 말했다.
“고양이 흉내내봐. ‘야옹’ 하고…”
“…!”
사내의 얼굴이 당근처럼 벌게졌다. 아아, 불쌍하기도 해라. 동변상련이랬다고 나는 그에게서 진한 동지애를 느꼈다. 댁도 고생이 만만치 않구먼. 부디 꿋꿋하게 살아. 나는 속 깊은 한숨을 내쉰 다음 고개를 돌려 트리키 노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두번 보는 일이 아닌지 담담한 얼굴로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시선을 돌리게 한 다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는데…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응? 내게 말이냐?”
“네.”
“잠깐! 내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내 손자를 꼬시다니. 허허, 자네 솜씨가 제법이구먼?”
황제는 빈틈이 없었다. 그는 우리가 몇마디 속삭이기가 무섭게 고개를 돌리더니 트리키 백작을 한번 슥 노려봐준 후 나를 향해 손을 까딱거렸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옆자리로 옮겨가야 했다. 그가 ‘오딜란!’ 하면서 저만치에 서서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있는 킬을 부를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었다. 치사스럽게 협박까지 하다니…
어쨌든 결국 날 곁에 앉히는데 성공한 그는 내게 히죽 웃어 보이곤 아직도 멍청히 서있는 사내에게 꽃을 내밀면서 고양이 흉내를 내보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그가 얼굴을 붉힌 채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자 갑자기 나를 붙잡고 하소연 비슷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 썰렁한 놈은 내 여섯 번째 아들놈이란다. 이쁘게 생기지도 못한 주제에 어찌나 성질 더럽고 못돼 먹었는지 내 말은 죽어도 안들어. 어릴 때부터 그랬다니까. 대체 누굴 닮아서 저 모양인지…”
“아앙?!”
그랬다. 사내는 황제의 여섯 번째 아들이자 황후의 첫 번째 아들인 키렌이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소개를 싹 무시하는 황제 대신 트리키 백작의 소개를 듣고서야 그의 정체를 깨닫고 황급히 인사를 했다. 그래봤자 그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말이다.
“오딜란의 아들내미다. 이쁘지? 으허허, 그 괴이쩍은 놈이 말년에 효도를 했지 뭐냐? 기특한 놈이지. 너무 기특해서 그놈을 낳아놓은 보람을 느끼고 있는 중이라니까.”
“그, 그렇습니까? 다섯째 형님의 아들…”
“뵙게 돼서 기쁩니다, 숙부님.”
눈을 반짝이면서 다시 인사를 하자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짐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 어서 고양이 흉내를 내보라니까. 생일 선물로 그것 하나 못해주냐?”
“…야, 야, 야오옹!”
벌게진 얼굴로 그는 끝내 고양이 흉내를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꽃을 내민채 굳어있는 황제를 보고 당황해서 자그마치 대여섯번이나. 우리처럼 황제도 놀랐던 것일까? 한참동안 말없이 굳어있는 그를 보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렇게 생각해봤다. 그러나 키렌이 창피함에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황제는 식은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놈을 낳은 이래 처음으로 감격을 해봤다. 역시 자식은 키우기 나름이라는 것인가?”
그 말을 해놓고 그는 혼자 말짱하게 일어서더니 당황해서 굳어있는 나와 트리키 백작을 이끌고 별실로 자리를 옮겼다. 모두에겐 잠시 쉬고 싶다고 말해놓았는데 사실은 내가 트리키 백작에게 대화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순전히 나를 지키기 위해서 따라나선 것이고. 아니면 킬의 말대로 호기심 때문이거나.
별실은 파티장 바로 안쪽에 붙어있는 작은 방이었는데 그곳엔 긴 의자와 침대, 갈아입을 옷 몇가지와 차를 마실 수 있는 둥근 탁자등이 놓여있었다.
“자아,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어서 말해보렴.”
황제가 긴 의자위에 비스듬히 드러누우면서 말했다. 그때 트리키 백작은 그의 맞은편에 놓인 푹신한 의자에 불편한 몸을 푹 파묻고 있었는데 나는 그 둘 사이에 오도카니 앉아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부터 대뜸 목걸이를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아무튼 잠시 동안의 진지한 고민 끝에 나는 드디어 가장 적당한 질문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얼굴을 굳히고 백작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음, 왜 이링카가 필요하신 거죠?”
“…!
내 질문이 예상 밖이었는지 백작은 흠칫 놀라더니 서서히 얼굴을 굳히고 내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의 노인은 사라지고 어느덧 당당한 기사 하나가 내 앞에 앉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링카를 알고 있느냐?”
무섭도록 담담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단단히 노리고 있는 듯한 목소리. 이렇게 되면 나도 대충 상대해 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최대한 냉정한 목소리로 내가 알고 있고 또 원하는 것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물론이예요. 신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하더군요. 외가에 부탁했더니 쉽게 알려주었어요. 벌써 찾아 달라고 부탁을 해놓은 참이에요.”
“무엇 때문에?”
“필요해서요. 근데 백작님께서도 찾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그것을 찾기 위해 이제 갓 열다섯살 밖에 안된 어린 것을 죽음의 숲으로 들여보냈다고 하더군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그 말을 하자 백작은 얼굴빛이 달라지더니 서늘하게 변한 눈에 살기마저 담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애써 못본척 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유를 알고 싶어요. 그렇게까지 한 이유. 합당한 이유라면 이링카를 찾는 일에 협조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못하다면? 어쩔 셈이지?”
“…당신은 내 손에 죽어.”
나는 살기를 담아 잔인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물론이고 그때까지 시큰둥해 있던 황제도 흠칫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이미 한번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다 죽어가는 것을 발견하고 내가 살려놓았으니까. 목숨에는 목숨으로 빚을 갚아야 하는 법. 정당하지 못한 이유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 트리키 백작님.”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링카를 찾는 이유와 아이에게서 빼앗아 간 목걸이. 그리고 아이 아버지의 행방.”
“으음, 네가 나를 죽일 수 있을까?”
스각! 조금은 오만하게 나온 말에 나는 흐릿한 미소와 함께 바람의 칼날을 이용해 망설임없이 그의 목에 매달려있는 리본을 깨끗하게 잘라내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그리고 잠시 동안 그와 나는 불꽃 튀는 눈싸움을 했는데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가 불쑥 끼어들더니 하는 말.
“음, 이 과자는 맛이 꽤 좋은 걸? 아가, 너도 한번 먹어보련?”
가차없이 분위기를 깨버린 그가 히죽 웃는 얼굴로 기어이 내 입에 과자를 하나 넣어주었다. 호두맛이 나는 과자였다.
“자네도 하나 먹어보려나? 이게 보기보다 맛이 좋아.”
“사양하겠습니다. 요샌 속이 좋질 않아서…”
“그래에? 얼마나 안 좋길래 과자 하나 못 먹을꼬? 그럼 자넨 사탕으로 할텐가?”
과자를 사양하는 백작에게 그가 이번엔 사탕을 내밀었다. 그것도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직접 입에 넣어줄 듯이 매우 친절하게. 끈질기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집요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진정 구분이 안 가는 그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결국 백작은 사탕을 받아들고 말았다. 코앞에 들이대고 빤히 바라보는데 어느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을까? 뒤에 나올 말이 겁나서라도 절대 거부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암, 그렇고 말고. 떨떠름한 얼굴로 사탕을 받아드는 백작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조금은 통쾌하고 조금은 안돼 보이는 그였다. 그러게 나처럼 과자줄 때 반항하지 말고 그냥 받아먹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쨌든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마주보고 앉아 잠시동안 말없이 과자와 사탕을 우물거려야 했다. 새삼 어찌나 민망하던지…
“근데 이링카가 그렇게나 좋은 건가?”
과자를 우물거리던 그가 지나가는 말처럼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만병통치약이라고?”
“그렇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흐응, 자네 나몰래 무슨 병이라도 키우고 있는 건가? 얼굴이 상한걸 보고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병이 있다고 해도 살만큼 살았으니 더 이상 미련을 둘 것도 없고요.”
“그럼 뭐하러 그걸 찾는 건가? 제수씨가 찾아오라고 바가지라도 긁으셨나?”
심각한 얘기를 빙 돌려서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그. 아닌척 하면서 교묘하게 내막을 캐는 솜씨가 상당히 능숙한 것이 암만 봐도 한두번 하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몇마디 안돼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가 어느 누구의 편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딱 중간에 서서 상황을 듣고 있는 것일뿐.
“폐하, 아시다시피 이 사람에겐 두 아들이 있습니다. 큰 아이는 이제 서른을 넘겼고 작은 아이는 올해 스물다섯이 되었지요. 착한 아이들입니다. 수십년 동안 전쟁터를 돌아다니느라 곁에 있어주지 못했는데도 모두 곧게 잘 자라준 고마운 녀석들이예요. 헌데…”
“헌데? 아들놈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작은 아이가 독에 취해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백작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은채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