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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21화)
5. 거래 (4)/
마음은 급해죽겠는데 현실이 안 따라줘서 나는 적잖이 속을 태워야 했다. 킬의 부름에 냉큼 날아온 제제가 내 옷을 도로 벗기고 다시 꼼꼼하게 치장을 해주는 시간도 아까웠고 앉아서 밥을 먹는 시간도 아까웠으며…
“으허허허, 우리 아기가 왔구나.”
…황제를 만나는 시간도 엄청나게 아까운 순간이었다. 나는 정말 알아야 할 것도 많고, 할 일도 태산처럼 쌓여있는 사람인데… 이 무슨 발목에 쇠고랑을 찬 죄인 은 신세냔 말이다. 킬에게 손을 잡힌 질질 끌려 화려찬란한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말도 못하고 연신 속 아픈 한숨만 내쉬었다.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팔을 활짝 벌리고 다가오는 황제가 정말이지 딱 킬만큼 미운 순간이었다.
“에구, 우리 이쁜 아기가 왔구나. 녀석, 어제는 안 보여서 얼마나 서운했는 줄 아느냐?”
“죄송해요. 너무 피곤해서 그만…”
“허허, 그랬구나. 난 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다.”
그는 정말 걱정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를 데리고 가 자리에 앉았다. 그새 습관이 되버린 나를 무릎위에 떡하니 올려놓고 말이다. 대체 그는 내가 몇 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실제 나이는 둘째 고 겉으로 봐도 열다섯은 돼보일 데 어째서 이렇게 사사건건 애 취급을 하는 거지? 그의 시력 혹은 취향이 매우 의심스러운 나였다.
“헌데, 어쩐 일로 저희를 부르신 겁니까, 폐하?”
“아, 그게 말이다… 실은, 아침 일찍 트리키 백작이 찾아 왔더구나.”
“네? 벌써요?”
“그래. 좀더 쉬어도 됐는데… 쯧, 하루 사이 병색이 더 짙어진 얼굴이더라. 그 꼿꼿했던 사람이 다 죽어가는 몰골로 찾아와 무릎까지 꿇고 비는데… 휴우, 그놈의 자식이 뭔지.”
왠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태연하게 내뱉으면서 황제는 수상한 느낌을 주는 흐릿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내가 뭘 어쨌다고? 깊은 곳에서 번뜩이는 그 눈빛의 의미를 몰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킬을 향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무슨 뜻인지 알아보겠냐는 물음을 두 눈 가득 담은 채. 그러나 내 고개가 다 돌아가기도 전에 킬은 화들짝 놀라더니 갑자기 뜨악한 표정을 해가지고 소리쳤다.
“그 말은… 핫! 이 애가 어째서 폐하의 자식입니까? 분명히 제가 낳았는데요?”
“…!”
“빌어먹을 놈. 그렇게 말하는 네놈은 대체 누구 자식인 것 같냐? 앙? 자식이 어디서 가당치도 않은 반항을… 가만! 그러고 보니 언젠가 오랜만에 전쟁터에서 돌아온 나를 보고 당당하게 ‘계부’라고 부른 놈이 바로 너 아니냐?”
“헉! 아닙니다. 그건 넷째인 웨인 형이었어요. 그리고 ‘언젠가’가 아니라 자그마치 삼.십.년.전. 일이구요.”
“허어, 그랬던가? 어쩐지 그놈 얼굴만 보면 종종 서러워지는 것이… 괜히 기분이 더러워지곤 했었어. 고얀놈, 생각할수록 새삼 이가 갈리네. 이 기회에 잡아다가 다리 몽댕이라도 하나 분질러 놓을까?”
황제는 원한에 사무친 얼굴을 하더니 이마에 주름을 잡고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삼십년 전의 일이라는 사실을 중간에 싹뚝 잘라버린 걸 보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사왕야에게 보복 비슷한 것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고 좋은 것에 대한 구분을 확실하게 하는 그의 성격으로 보아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일이라고 해야 옮을지도… 믿거나 말거나.
“휴우, 넷째형이 또 난리를 치게 생겼군. 그나저나 백작은 어찌 되었습니까? 설마 그대로 돌려보낸 것은 아니시겠지요?”
“아니긴? 아까전에 돌려보냈다.”
“예에? 어째서입니까? 혹시 살인을 한 그들을 용서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멍청한 놈. 네놈은 아직도 나를 모르는 게냐? 듣거라. 나와 백작은 친구다. 수십년을 함께 해온 친구.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황제이고 그런 내겐 무엇보다 제국의 안위가 우선이다. 즉, 수십년을 함께 해온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가엾은 친구에게 의사를 보내주는 것뿐이었단 말이다. 그리고 이젠 고개를 돌려 그에게 칼질 보다 더한 짓을 하려는 참이지. 이런 내 슬픔을 네놈이 아느냐?”
“흠, 그야 어느 정도는 이해를…”
“흥, 이해? 그런 놈이 말끝마다 따지고 드냐? 망할 놈, 입에 침이나 바르고 떠들어라. 젠장, 갑자기 살맛이 안 나는구먼. 진정으로 나를 이해해주는 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것을 내 이미 깨닫고 있거늘. 하아, 외로운지고.”
황제는 쓸쓸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쬐금 안돼 보이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외로움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약간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 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봐, 기운내라구. 그래도 당신은 자식들이 있잖아? 아직 젊은데(?) 열심히 살아야지.
나는 고개까지 끄덕여가면서 열심히 위로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는데 그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앗, 나 실수 한건가? 엇, 이놈의 손이 언제 이런 짓을…?’
화들짝 놀란 나는 냉큼 손을 내리고 고개를 푹 숙인 다음 가만히 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위로해 주는 게냐?”
끄덕끄덕.
“…그래. 역시 내 눈이 틀리진 않았어. 에구, 이쁜 놈. 그저 날 위해 주는 놈은 너 밖에 없구나.”
“우에에에…!”
황제는 감동한 얼굴로 나를 덥석 끌어 안더니 그 꺼실꺼실한 수염투성이의 턱을 내 얼굴에다 대고 사정없이 부벼대는 것이었다. 아아, 어찌나 세게 부벼대던지 양쪽 볼이 금새 새빨갛게 부어오르고 말았다.
“그러다 애 잡겠습니다. 제발 그만 좀 하시고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폐하. 대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무언가 생각이 있으셔서 저희를 부르신 거잖아요?”
황제가 하는 짓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던 킬이 조금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체 트리키 가를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쩌긴? 조사를 해야지. 아, 그런 의미에서 묻는 것이다만… 그 아이, 루이베르라고 했던가? 그래, 그 녀석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혹시 이유를 짐작하겠느냐?”
“보나마나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후계자로서 경쟁이 될만한 상대를 없애는 것은…”
“쯧쯧쯧.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으면서 꼭 그렇게 쓰잘데기 없는 딴소리를 해야겠느냐?”
…오오, 황제는 바보가 아니었다. 나는 그 한마디로 인해 그가 루이베르의 일을 생각보다 꽤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와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도.
“그 꼬맹이 말이다. 네가 데리고 있는 그 꼬맹이… 대체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길래 그렇게 쫓겨다녔던 거지? 게다가 어찌 보면 엉뚱하기까지 한 놈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고…”
“글쎄요. 그건 저희도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꼬맹이도 스스로의 신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라 알아내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거든요.”
“흐응, 그렇다면 결국은 루이베르를 찾아 직접 사연을 듣는 수 밖에 없단 말인가?”
황제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한동안 말이 없더니 잠시 후 시종을 불러들여 궁정 기사단에게 짧은 명령을 전하는 것이었다. 은밀하게 움직여 루이베르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말이다.
나는 그가 명령을 내리고 다시 생각에 잠기는 동안을 틈타 제제에게 또다른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기사단에게 전해. 폐하의 기사들보다 먼저 루이베르를 찾아서 데리고 오라고. 그리고 칠왕야의 기사단을 살피고 있는 자들을 모두 불러들여라. 보고를 듣겠다.’
잘못하면 오해를 살수도 있는 위험한 명령이었지만 제제는 별다른 의문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길로 궁전을 나갔다. 근데 뒤돌아 서는 그의 얼굴에 웬 미소가… 으음,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럼 저희는 선약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타러 가자고 붙잡는 황제의 손을 가차없이 쳐내고 우리는 냉큼 별궁으로 돌아왔다. 시종 하나가 들어와 멍하니 앉아있는 우리에게 ‘손님’이 찾아왔다고 외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손님이란 말할 것도 없이 모치즈 가의 가주이자 내겐 외할아버지가 되는 드레인 영감이 분명했고.
“흐흐흐, 왔느냐?”
급한 마음에 허겁지겁 별궁 안으로 들어서자 눈 밑에 시커먼 그늘을 드리운 드레인 영감이 팔짱을 끼고 떡하니 서서 우리를 맞이했다. ‘나 잘났소.’라고 외치는 듯한 그 오만무쌍한 자세로. 그런 그의 등 뒤엔 전에 본 상단의 인물 몇 명과 영감의 아들내미인 딜런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흐음, 자신이 있단 말이지?
“똥폼은 그만 잡고 저리 좀 비켜요.”
“흥! 쓸데없이 목뼈만 단단한 썩을 칼잡이 놈, 불치에 가까운 네놈의 그 오만함도 오늘로 끝이다. 흐흐흐, 하늘은 드디어 우리 편이 되버렸거든?”
“앙? 그게 무슨 헛소리요?”
뜬금없이 흘러나온 소리에 킬은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비며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힘차게 콧바람을 날린 드레인 영감 왈.
“내가 먼저 할아버지 소리를 듣게 되었단 말이지. 캬캬캬, 뿐만 아니라 내 손자놈을 내어주지 않을 수 없을걸? 아니, 얘길 들으면 제발로 따라나서겠지. 푸하하하하…”
“핫, 그렇다면…?”
“그래! 성공했다. 오오, 이 얼마나 행복한 날인가. 이십년 묵은 체증이 그냥 쑥 내려가는구나. 우흐흐흐…”
그는 한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유별나게 기뻐하고 있었다. 차마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을만큼 번쩍거리는 얼굴로. 근데 정말로 이링카를 찾아낸 건가? 좋아 죽으려고 드는 그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워낙 궁금한 일이었던 까닭에 나는 앞 뒤 가리지 않고 당장 달려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링카는요? 어디에 있지요?”
“크흠, 그야 당연히 상단에 있지 않겠니?”
“상단에? 어라라? 확인을 해야 하는데 왜 가져오지 않은 건가요?”
“그건…”
눈을 똑바로 뜨고 묻자 영감은 입을 다물더니 잠시 망설였다. 그래서 킬은 당장 의심을 품었고 나는 무언가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을 갖기에 이르렀는데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실, 우리가 찾은 것은… 이링카 자체가 아니라 그걸 만든 장본인이다.”
“에엥?!”
“이링카를 만든 장본인?!”
쿠궁! …휘잉. 아아, 나의 예감은 어찌하여 이리도 잘 들어맞는단 말인가? 솔직히 이때만 해도 나는 전혀 몰랐다. 그것이 내 예상을 뛰어넘고도 모자라 정말이지 무섭도록 귀찮은 일의 시작이 된다는 것을. 진짜루.
<책갈피> ― <그들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헉… 헉… 으윽. 쿨럭.”
루이베르는 눈발이 휘날리는 숲길을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백작에 의해 이층 창밖으로 내던져지는 바람에 한쪽 다리가 부러져 움직일 때마다 치가 떨릴 정도로 지독하게 아파왔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쓸 겨를이 없을 만큼 마음이 급한 지경이었다.
“여기서 끝낼 수는 없어! 크읍, 반드시… 그놈을…”
그는 이를 악물고 움직이면서 얼마 전에 죽은 그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검은 머리칼로 늘상 얼굴의 반쪽을 가리고 다니던 사내. 그는 자신이 왜 죽어야 했는지를 알고 있었을까?
“사, 상관없어. 후회하지 않아.”
그는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다짐하듯 나직하게 소리쳤다. 그놈이 녀석에게 정체를 털어놓지만 않았어도… 그는 동생에게 독을 먹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니 착해빠진 세이 녀석이 앞 뒤도 가리지 못한 주제에 돕겠다고 나서지만 않았어도.
“하아, 하아… 뭐가 옳은 일이라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깟 꼬맹이 하나 살려 놓는다고 해서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어? 세상은 강한 자가 지배하는 거야.”
최소한 그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약한 지배자는 쓸모가 없다. 짐승도 나약한 새끼에게는 젖을 먹이지 않듯 인간 세상에서도 약한 자는 죽고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아야 한다. 밭이나 일구다가 죽는 천한 것들은 약해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는 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가 섬길 왕은 그래야 했다.
히이이잉…
정원 숲 한곳에 미리 숨겨둔 말을 찾아 타고 그는 빠른 속도로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휙휙 귓가를 스쳐가는 시린 바람. 계속되는 통증 때문에 이마에 식은 땀이 맺혔지만 그것은 채 흐르기도 전에 도로 사라져 버렸다.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트리키 가의 영지를 벗어나 간신히 텔란시로 접어든 그는 말을 몰아 도시의 중심가 쪽에 위치한 어느 저택 안으로 빨려들 듯 들어갔다.
“아니! 자네 어떻게 된 건가?”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온 것은 그의 친구이자 동지이기도 한 데일 자피스. 자피스 남작의 둘째 아들이었다. 데일은 말에서 떨어지듯 내려서는 루이베르를 부축해서 우선 저택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치료를 위해 의사를 불러놓은 다음 마주 앉아 그의 얘기에 귀를 모았다. 상태를 보니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것이 조금은 안 좋은 얘기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으윽, 실패 했어. 황제 폐하까지 오시는 바람에…”
“폐하께서?”
“그래. 게다가 오왕야의 아들이라는 놈이 끼어들었어. 아무래도 그 꼬마 놈을 도울 생각인 모양이야. 젠장! 일을 들켜버려서 날 잡으려고 들 텐데…”
“큰일이군. 대체 어디까지 들킨 건가? 설마 우리의 계획을…”
“아니야. 계획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을 거야. 맹세코 운도 띄운 적 없어.”
그는 단호하게 말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하겠지만 그들로서는 자세한 사정까지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죽은 놈의 무죄가 밝혀진 이상 가문이 커다란 타격을 받고 명성 또한 빛을 잃겠지만… 그건 훗날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제손으로 가문을 다시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그때였다. 저택의 주인이 나타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일이 발각되었답니다.”
“이런… 사실인가?”
“죄송합니다. 오딜란 왕야의 아들놈이 끼어드는 바람에…”
오왕야의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주인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으르렁거리듯 나직하게 하는 말.
“그놈은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안 그래도 생각해 놓은 것이 있었어.”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네는 당분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겠군. 그리고 일이 드러나기 전에 그 꼬마놈을 서둘러 없애야겠어. 그래야… 셀리온의 새 왕이 우리 편에 설 테니까.”
뾰족하게 기른 적갈색 수염을 만지작거리는 그. 비릿하게 머금은 미소 속에 음모의 그림자를 숨긴 그는 바로 황비의 친동생인 고가 백작이었다.
5. 거래 (4)/
마음은 급해죽겠는데 현실이 안 따라줘서 나는 적잖이 속을 태워야 했다. 킬의 부름에 냉큼 날아온 제제가 내 옷을 도로 벗기고 다시 꼼꼼하게 치장을 해주는 시간도 아까웠고 앉아서 밥을 먹는 시간도 아까웠으며…
“으허허허, 우리 아기가 왔구나.”
…황제를 만나는 시간도 엄청나게 아까운 순간이었다. 나는 정말 알아야 할 것도 많고, 할 일도 태산처럼 쌓여있는 사람인데… 이 무슨 발목에 쇠고랑을 찬 죄인 은 신세냔 말이다. 킬에게 손을 잡힌 질질 끌려 화려찬란한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말도 못하고 연신 속 아픈 한숨만 내쉬었다.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팔을 활짝 벌리고 다가오는 황제가 정말이지 딱 킬만큼 미운 순간이었다.
“에구, 우리 이쁜 아기가 왔구나. 녀석, 어제는 안 보여서 얼마나 서운했는 줄 아느냐?”
“죄송해요. 너무 피곤해서 그만…”
“허허, 그랬구나. 난 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다.”
그는 정말 걱정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를 데리고 가 자리에 앉았다. 그새 습관이 되버린 나를 무릎위에 떡하니 올려놓고 말이다. 대체 그는 내가 몇 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실제 나이는 둘째 고 겉으로 봐도 열다섯은 돼보일 데 어째서 이렇게 사사건건 애 취급을 하는 거지? 그의 시력 혹은 취향이 매우 의심스러운 나였다.
“헌데, 어쩐 일로 저희를 부르신 겁니까, 폐하?”
“아, 그게 말이다… 실은, 아침 일찍 트리키 백작이 찾아 왔더구나.”
“네? 벌써요?”
“그래. 좀더 쉬어도 됐는데… 쯧, 하루 사이 병색이 더 짙어진 얼굴이더라. 그 꼿꼿했던 사람이 다 죽어가는 몰골로 찾아와 무릎까지 꿇고 비는데… 휴우, 그놈의 자식이 뭔지.”
왠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태연하게 내뱉으면서 황제는 수상한 느낌을 주는 흐릿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내가 뭘 어쨌다고? 깊은 곳에서 번뜩이는 그 눈빛의 의미를 몰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킬을 향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무슨 뜻인지 알아보겠냐는 물음을 두 눈 가득 담은 채. 그러나 내 고개가 다 돌아가기도 전에 킬은 화들짝 놀라더니 갑자기 뜨악한 표정을 해가지고 소리쳤다.
“그 말은… 핫! 이 애가 어째서 폐하의 자식입니까? 분명히 제가 낳았는데요?”
“…!”
“빌어먹을 놈. 그렇게 말하는 네놈은 대체 누구 자식인 것 같냐? 앙? 자식이 어디서 가당치도 않은 반항을… 가만! 그러고 보니 언젠가 오랜만에 전쟁터에서 돌아온 나를 보고 당당하게 ‘계부’라고 부른 놈이 바로 너 아니냐?”
“헉! 아닙니다. 그건 넷째인 웨인 형이었어요. 그리고 ‘언젠가’가 아니라 자그마치 삼.십.년.전. 일이구요.”
“허어, 그랬던가? 어쩐지 그놈 얼굴만 보면 종종 서러워지는 것이… 괜히 기분이 더러워지곤 했었어. 고얀놈, 생각할수록 새삼 이가 갈리네. 이 기회에 잡아다가 다리 몽댕이라도 하나 분질러 놓을까?”
황제는 원한에 사무친 얼굴을 하더니 이마에 주름을 잡고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삼십년 전의 일이라는 사실을 중간에 싹뚝 잘라버린 걸 보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사왕야에게 보복 비슷한 것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고 좋은 것에 대한 구분을 확실하게 하는 그의 성격으로 보아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일이라고 해야 옮을지도… 믿거나 말거나.
“휴우, 넷째형이 또 난리를 치게 생겼군. 그나저나 백작은 어찌 되었습니까? 설마 그대로 돌려보낸 것은 아니시겠지요?”
“아니긴? 아까전에 돌려보냈다.”
“예에? 어째서입니까? 혹시 살인을 한 그들을 용서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멍청한 놈. 네놈은 아직도 나를 모르는 게냐? 듣거라. 나와 백작은 친구다. 수십년을 함께 해온 친구.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황제이고 그런 내겐 무엇보다 제국의 안위가 우선이다. 즉, 수십년을 함께 해온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가엾은 친구에게 의사를 보내주는 것뿐이었단 말이다. 그리고 이젠 고개를 돌려 그에게 칼질 보다 더한 짓을 하려는 참이지. 이런 내 슬픔을 네놈이 아느냐?”
“흠, 그야 어느 정도는 이해를…”
“흥, 이해? 그런 놈이 말끝마다 따지고 드냐? 망할 놈, 입에 침이나 바르고 떠들어라. 젠장, 갑자기 살맛이 안 나는구먼. 진정으로 나를 이해해주는 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것을 내 이미 깨닫고 있거늘. 하아, 외로운지고.”
황제는 쓸쓸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쬐금 안돼 보이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외로움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약간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 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봐, 기운내라구. 그래도 당신은 자식들이 있잖아? 아직 젊은데(?) 열심히 살아야지.
나는 고개까지 끄덕여가면서 열심히 위로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는데 그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앗, 나 실수 한건가? 엇, 이놈의 손이 언제 이런 짓을…?’
화들짝 놀란 나는 냉큼 손을 내리고 고개를 푹 숙인 다음 가만히 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위로해 주는 게냐?”
끄덕끄덕.
“…그래. 역시 내 눈이 틀리진 않았어. 에구, 이쁜 놈. 그저 날 위해 주는 놈은 너 밖에 없구나.”
“우에에에…!”
황제는 감동한 얼굴로 나를 덥석 끌어 안더니 그 꺼실꺼실한 수염투성이의 턱을 내 얼굴에다 대고 사정없이 부벼대는 것이었다. 아아, 어찌나 세게 부벼대던지 양쪽 볼이 금새 새빨갛게 부어오르고 말았다.
“그러다 애 잡겠습니다. 제발 그만 좀 하시고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폐하. 대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무언가 생각이 있으셔서 저희를 부르신 거잖아요?”
황제가 하는 짓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던 킬이 조금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체 트리키 가를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쩌긴? 조사를 해야지. 아, 그런 의미에서 묻는 것이다만… 그 아이, 루이베르라고 했던가? 그래, 그 녀석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혹시 이유를 짐작하겠느냐?”
“보나마나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후계자로서 경쟁이 될만한 상대를 없애는 것은…”
“쯧쯧쯧.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으면서 꼭 그렇게 쓰잘데기 없는 딴소리를 해야겠느냐?”
…오오, 황제는 바보가 아니었다. 나는 그 한마디로 인해 그가 루이베르의 일을 생각보다 꽤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와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도.
“그 꼬맹이 말이다. 네가 데리고 있는 그 꼬맹이… 대체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길래 그렇게 쫓겨다녔던 거지? 게다가 어찌 보면 엉뚱하기까지 한 놈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고…”
“글쎄요. 그건 저희도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꼬맹이도 스스로의 신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라 알아내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거든요.”
“흐응, 그렇다면 결국은 루이베르를 찾아 직접 사연을 듣는 수 밖에 없단 말인가?”
황제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한동안 말이 없더니 잠시 후 시종을 불러들여 궁정 기사단에게 짧은 명령을 전하는 것이었다. 은밀하게 움직여 루이베르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말이다.
나는 그가 명령을 내리고 다시 생각에 잠기는 동안을 틈타 제제에게 또다른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기사단에게 전해. 폐하의 기사들보다 먼저 루이베르를 찾아서 데리고 오라고. 그리고 칠왕야의 기사단을 살피고 있는 자들을 모두 불러들여라. 보고를 듣겠다.’
잘못하면 오해를 살수도 있는 위험한 명령이었지만 제제는 별다른 의문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길로 궁전을 나갔다. 근데 뒤돌아 서는 그의 얼굴에 웬 미소가… 으음,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럼 저희는 선약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타러 가자고 붙잡는 황제의 손을 가차없이 쳐내고 우리는 냉큼 별궁으로 돌아왔다. 시종 하나가 들어와 멍하니 앉아있는 우리에게 ‘손님’이 찾아왔다고 외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손님이란 말할 것도 없이 모치즈 가의 가주이자 내겐 외할아버지가 되는 드레인 영감이 분명했고.
“흐흐흐, 왔느냐?”
급한 마음에 허겁지겁 별궁 안으로 들어서자 눈 밑에 시커먼 그늘을 드리운 드레인 영감이 팔짱을 끼고 떡하니 서서 우리를 맞이했다. ‘나 잘났소.’라고 외치는 듯한 그 오만무쌍한 자세로. 그런 그의 등 뒤엔 전에 본 상단의 인물 몇 명과 영감의 아들내미인 딜런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흐음, 자신이 있단 말이지?
“똥폼은 그만 잡고 저리 좀 비켜요.”
“흥! 쓸데없이 목뼈만 단단한 썩을 칼잡이 놈, 불치에 가까운 네놈의 그 오만함도 오늘로 끝이다. 흐흐흐, 하늘은 드디어 우리 편이 되버렸거든?”
“앙? 그게 무슨 헛소리요?”
뜬금없이 흘러나온 소리에 킬은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비며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힘차게 콧바람을 날린 드레인 영감 왈.
“내가 먼저 할아버지 소리를 듣게 되었단 말이지. 캬캬캬, 뿐만 아니라 내 손자놈을 내어주지 않을 수 없을걸? 아니, 얘길 들으면 제발로 따라나서겠지. 푸하하하하…”
“핫, 그렇다면…?”
“그래! 성공했다. 오오, 이 얼마나 행복한 날인가. 이십년 묵은 체증이 그냥 쑥 내려가는구나. 우흐흐흐…”
그는 한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유별나게 기뻐하고 있었다. 차마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을만큼 번쩍거리는 얼굴로. 근데 정말로 이링카를 찾아낸 건가? 좋아 죽으려고 드는 그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워낙 궁금한 일이었던 까닭에 나는 앞 뒤 가리지 않고 당장 달려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링카는요? 어디에 있지요?”
“크흠, 그야 당연히 상단에 있지 않겠니?”
“상단에? 어라라? 확인을 해야 하는데 왜 가져오지 않은 건가요?”
“그건…”
눈을 똑바로 뜨고 묻자 영감은 입을 다물더니 잠시 망설였다. 그래서 킬은 당장 의심을 품었고 나는 무언가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을 갖기에 이르렀는데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실, 우리가 찾은 것은… 이링카 자체가 아니라 그걸 만든 장본인이다.”
“에엥?!”
“이링카를 만든 장본인?!”
쿠궁! …휘잉. 아아, 나의 예감은 어찌하여 이리도 잘 들어맞는단 말인가? 솔직히 이때만 해도 나는 전혀 몰랐다. 그것이 내 예상을 뛰어넘고도 모자라 정말이지 무섭도록 귀찮은 일의 시작이 된다는 것을. 진짜루.
<책갈피> ― <그들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헉… 헉… 으윽. 쿨럭.”
루이베르는 눈발이 휘날리는 숲길을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백작에 의해 이층 창밖으로 내던져지는 바람에 한쪽 다리가 부러져 움직일 때마다 치가 떨릴 정도로 지독하게 아파왔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쓸 겨를이 없을 만큼 마음이 급한 지경이었다.
“여기서 끝낼 수는 없어! 크읍, 반드시… 그놈을…”
그는 이를 악물고 움직이면서 얼마 전에 죽은 그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검은 머리칼로 늘상 얼굴의 반쪽을 가리고 다니던 사내. 그는 자신이 왜 죽어야 했는지를 알고 있었을까?
“사, 상관없어. 후회하지 않아.”
그는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다짐하듯 나직하게 소리쳤다. 그놈이 녀석에게 정체를 털어놓지만 않았어도… 그는 동생에게 독을 먹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니 착해빠진 세이 녀석이 앞 뒤도 가리지 못한 주제에 돕겠다고 나서지만 않았어도.
“하아, 하아… 뭐가 옳은 일이라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깟 꼬맹이 하나 살려 놓는다고 해서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어? 세상은 강한 자가 지배하는 거야.”
최소한 그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약한 지배자는 쓸모가 없다. 짐승도 나약한 새끼에게는 젖을 먹이지 않듯 인간 세상에서도 약한 자는 죽고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아야 한다. 밭이나 일구다가 죽는 천한 것들은 약해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는 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가 섬길 왕은 그래야 했다.
히이이잉…
정원 숲 한곳에 미리 숨겨둔 말을 찾아 타고 그는 빠른 속도로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휙휙 귓가를 스쳐가는 시린 바람. 계속되는 통증 때문에 이마에 식은 땀이 맺혔지만 그것은 채 흐르기도 전에 도로 사라져 버렸다.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트리키 가의 영지를 벗어나 간신히 텔란시로 접어든 그는 말을 몰아 도시의 중심가 쪽에 위치한 어느 저택 안으로 빨려들 듯 들어갔다.
“아니! 자네 어떻게 된 건가?”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온 것은 그의 친구이자 동지이기도 한 데일 자피스. 자피스 남작의 둘째 아들이었다. 데일은 말에서 떨어지듯 내려서는 루이베르를 부축해서 우선 저택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치료를 위해 의사를 불러놓은 다음 마주 앉아 그의 얘기에 귀를 모았다. 상태를 보니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것이 조금은 안 좋은 얘기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으윽, 실패 했어. 황제 폐하까지 오시는 바람에…”
“폐하께서?”
“그래. 게다가 오왕야의 아들이라는 놈이 끼어들었어. 아무래도 그 꼬마 놈을 도울 생각인 모양이야. 젠장! 일을 들켜버려서 날 잡으려고 들 텐데…”
“큰일이군. 대체 어디까지 들킨 건가? 설마 우리의 계획을…”
“아니야. 계획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을 거야. 맹세코 운도 띄운 적 없어.”
그는 단호하게 말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하겠지만 그들로서는 자세한 사정까지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죽은 놈의 무죄가 밝혀진 이상 가문이 커다란 타격을 받고 명성 또한 빛을 잃겠지만… 그건 훗날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제손으로 가문을 다시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그때였다. 저택의 주인이 나타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일이 발각되었답니다.”
“이런… 사실인가?”
“죄송합니다. 오딜란 왕야의 아들놈이 끼어드는 바람에…”
오왕야의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주인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으르렁거리듯 나직하게 하는 말.
“그놈은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안 그래도 생각해 놓은 것이 있었어.”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네는 당분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겠군. 그리고 일이 드러나기 전에 그 꼬마놈을 서둘러 없애야겠어. 그래야… 셀리온의 새 왕이 우리 편에 설 테니까.”
뾰족하게 기른 적갈색 수염을 만지작거리는 그. 비릿하게 머금은 미소 속에 음모의 그림자를 숨긴 그는 바로 황비의 친동생인 고가 백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