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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22화)
6. 실마리를 찾아서… (1)/

<문득 밖으로 나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진 건 어쩌면... 달아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상하지? 왜 갑자기 두려워지는 걸까?>

“이링카를 반으로 쪼갤 수 있어?”
나기는 과자를 먹다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앉아 그렇게 물었다. 그리하여 당연히 대답을 알리 없었던 나는 의문 섞인 눈으로 시바를 바라보았고 그는 대답 대신 입을 쩍 벌렸다. 역시 안돼는 거겠지?
“…아무래도 안 돼나 보다, 나기야. 보석이라는 건 원래 쪼개면 값어치가 떨어지는 거니까 이링카도 쪼개면 약효가 떨어질지 몰라.”
“아, 그렇구나. 그럼 어쩌지? 나기는 이링카가 꼭 필요한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우리는 또 나란히 시바를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윽’ 하고 신음성을 흘리며 얼굴을 찌푸렸고 우린 그런 그를 무시하고 먹고 있던 과자를 계속 먹기로 했다.
“이링카를 빨리 보고 싶어.”
“나도.”
내일은 나기와 함께 모치즈 가를 찾아갈 예정이었다. 이링카를 만들어 낸 장본인을 데리고 있으니 필요하면 와서 데려가라고 상단의 영감이 단단히 큰소리를 쳐놓고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링카를 직접 확인할 때까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보류하기로 하기로 했다. 곁에서 킬이 협박 비슷한 애원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가 워낙 잘난 척을 해서 차마 손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은 까닭이었다. 음, 그러고 보면 나도 알게 모르게 성질이 고약한 것일지도…
“다시 한번 생각해다오.”
얼굴을 찌푸린 채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시바가 바짝 다가와 나기의 두손을 부여잡더니 이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꺼냈다.
“네가…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겠다. 종이 되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다. 그러니 부디 내게 이링카를 양보해다오. 그래도 안 된다면… 그때는 나도 어쩔 수 없다. 힘을 써서라도 강제로 빼앗을 수밖에.”
“흥! 자신만만하구나.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물론.”
시바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내걸었다더니 아무래도 참말이었나 보다. 그러나 왜 모르는 것일까? 내게서 무언가를 빼앗을 때는, 목숨보다 더 큰 것을 잃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약간 화가 난 나는 굳은 얼굴로 서있는 그를 한동안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마치 선언하듯 말했다.
“후회하게 될 거야.”
“상관없다. 이링카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래? 그렇다면 네 부탁을 들어주지. 상단에 이링카를 만든 장본인이 있다. 그에게 또 하나의 이링카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겠어. 단!”
“…?”
“너는… 나기의 수하가 되어라.”
비틀! 충격적인 말이었는지 시바는 상체를 크게 휘청거렸다. 제 입으로 그러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정말로 그것을 요구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정이야 어찌됐든 이링카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은 내 말대로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면 정말로 목숨을 내던지고 내게서 이링카를 빼앗아 가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는 일이고.
“나기의 종이 되던가 아니면 목숨을 걸고 내게서 빼앗아 가던가…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해. 그리고 결정이 되거든 그때 다시 찾아와.”
경악으로 굳어지는 시바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나는 그렇게 냉정하고 가차 없이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더라면 그런 요구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기가 에시 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더라면 그저 이링카를 찾아주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냈을 거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연인지 운명인지 나기는 에시형의 후손으로 내 앞에 나타났고 셀리온의 존재는 드디어 내게 커다란 수수께끼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어째서… 크샤인 제국은 멸망했는데 형제의 나라인 너희는 무사한 것이냐?’
나는 묻혀진 과거를 철저하게 파헤쳐낼 생각이었다. 그것이 비록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게 될지라도…
“으음, 꼭 그 방법밖에 없단 말이냐?”
“그래. 말했다시피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야. 더 필요한 것은 없어. 하지만 나기는 아니지. 이 녀석에겐 필요한 것이 너무 많아. 하릴없이 허세나 부리자고 요구하는 것 아니야. 어쩌면… 이 녀석의 종이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야.”
“목숨? 하! 꼬맹이가 전쟁이라도 할 건가 보지?”
“…어쩌면.”
“…!”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시바를 흠칫 놀라서 나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래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녀석도 무슨 일인지 까맣게 모르고 있는 형편이니까. 자신이 셀리온 왕가의 핏줄이라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는 상태인 것을…
나기의 정체를 깨달은 나는 내일 아침 상단으로 떠나기 전에 잠시 티란 스승을 만나 보기로 했다. 그에게 물을 말이 정말로 많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그만 돌아가.”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겠다. 그때 내 결론을 말해주지.”
벌써부터 고뇌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시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창가로 다가갔다. 이번에도 내가 내려준 시트를 잡고 올라왔기 때문에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야 했던 것이다.
“휴우,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
그가 창밖으로 사라지자마자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제대로 정체를 알지도 못하고 있는데 덜컥 종으로 삼아도 되려는지… 쿵!!!
“어라? 이게 무슨 소리지?”
휑하니 열린 창밖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떨어진 듯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시바가 떨어진 것인가? 조금 놀라서 나는 냉큼 창가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랬더니 하얀 눈밭에 개구리처럼 대자로 뻗어있는 시커먼 시바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괘, 괜찮아?”
조심스럽게 묻자 시바는 말없이 스윽 일어나더니 나를 돌아보며 괜찮다는 듯 히죽 웃어보였다. 근데… 코피가 흐르고 있는데… 정말 괜찮은 건가? 소리만 해도 장난이 아니었는데.
“대단한 사람이다아…!”
나란히 고개를 내밀고 있던 나기가 뜻 모를 감탄성을 터뜨렸다. 나기야, 저건 절대 대단한 것이 아니야. 내려가다 떨어져서 쌍코피가 터지는 건 매우 쪽팔리고 추한 모습이라고. 헤죽 웃는 녀석과 어설프게 웃으면서 사라지는 시바를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잘 어울리는 주종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전쟁은 발전의 지름길이요 동시에 멸망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도 하지요.”
티란 스승은 졸음이 달라붙은 얼굴로 서서 그렇게 대답했다. 이른 아침부터 반 강제로 불러 ‘크샤인 제국은 어떻게 멸망했지요?’라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하품을 하면서 그렇게 대답을 꺼내놓은 것이다.
“어떤 전쟁이었나요?”
“..음, 얘기가 길어질 것 같군요. 우선 먼저 차나 한잔 주세요.”
“아, 예. …죄송합니다.”
아아, 맙소사. 급한 마음에 세워놓고 질문을 던지고 있었잖아?
쬐금 민망해져서 나는 서둘러 그에게 자리를 내주고 시종을 불러 차를 내오도록 했다. 그리고 그가 찻잔을 기울여 막 한 모금을 삼켰을 때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제국끼리의 전쟁이었나요?”
“쿨럭. 크흠,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앙숙인 바드니 왕국과의 전쟁이 시작이었습니다. 십칠년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제국 전쟁이후 크샤인은 약 백여 년간 최대의 성세를 이루었습니다. 믿어지지는 않습니다만 나라는 평안하고 귀족간의 다툼이나 전쟁 또한 없었으며 황제는 현명하여 백성들은 늘 웃음을 달고 살았다고 전해지지요.”
“그래, 그랬었지. 늘 축제가 벌어졌었어.”
“네? 지금 뭐라고…”
“아, 아니요. 정말 그렇다면 만날 축제를 벌이고 싶었을 거라는 말이었어요. 헤헤…”
윽, 실수했다. 제국 전쟁이 끝나고 양아빠와 함께 평화롭게 지내던 시절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바람에 나는 꼼짝없이 눈치 빠른 티란 스승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뭐, 내 변명이 통한 덕분에 그냥 넘어가긴 했지만.
“크흠, 어쨌든 그들은 오랜 시간의 평화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지요. 그리고 어느덧 그 땅에 전쟁이란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갔습니다.”
그렇게 기억 속에서 전쟁이라는 단어를 잊어가고 있을 때 그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세력을 키운 바드니 왕국에게 무참한 패배를 당한 이후 약 백여 년에 걸쳐 급속도록 힘을 잃어가더니 드디어는 멸망해 여러 개의 왕국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쉽게… 화이트 문이 있었는데, 모두스가의 마법사들이 있었는데…”
“응? 그들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네? 아, 그게… 채, 책에서 봤어요. 옛날 크샤인 제국에는 마법사들이 많았다고…”
“허허, 그러셨습니까? 공부를 많이 하셨군요? 기특하십니다. 맞습니다. 옛 크샤인 제국에는 마법사들이 많았지요. 그러나 당시의 전쟁에 그들은 전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록에 그렇게 나와 있지요. 게다가 제국 전쟁 당시 용맹을 떨쳤던 모두스 백작가의 기사들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답니다. 학자들의 의견은 그들이 그 전에 이미 멸문을 당했을 거라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습니다만 그것마저도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니지요.”
나는 그의 말을 들을수록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두 번째 전쟁 전에 이미 멸문을 당했다니… 가장 강한 기사단과 마법사들을 거느린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을 대체 누가 멸문으로 이끌 수 있었단 말인가?
“믿어지지가 않아…”
“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당시 어느 누구도 제국이 패배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니까요. 바드니 왕국이 기록한 자료에서 보면 그 부분을 ‘루센 산맥의 기적’이라고 칭해 놓았더군요. 허허…”
“루센 산맥의 기적?”
“그것은 바드니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산맥중 하나인데 그곳에서 결전이 있었지요. 지리적 이점을 살린 공격 덕분에 대승을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평원에서의 싸움에 익숙해있던 제국의 기사들은 아무래도 험한 지형에서의 싸움에 약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더욱이 마법사들의 도움도 없었으니…”
티란 스승은 안타깝다는 듯 나직하게 혀를 찼다. 그러나 까맣게 타고 있는 내 속만 할까?
‘그럴 리가 없다. 멸문을 했다곤 해도 완전히 사라졌을 리가 없어. 단시 사람들의 시선 밖으로 물러났을 뿐일 거야.’
이미 멸망해버린 제국은 둘째 치고 모두스 가의 행방만이라도 정확하게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게리온에 있는 저택은 위기시 탈출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했으므로 그곳을 확인한다면 그들의 존재 여부를 확실하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래, 옛 크샤인 영토로 들어가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이때부터 나는 그곳으로의 여행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근데… 책에서 보면 크샤인 제국과 셀리온 왕국은 오랜 동맹국이라고 나와 있던데 사실인가요?”
왠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묻자 티란 스승은 가볍게 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기록에 보면 셀리온의 초대 국왕이 건국을 할 때 크샤인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운 일로 둘도 없는 동맹국이 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허허, 정말 공부를 많이 하셨군요?”
“네, 조금. 근데 정말 이상하네요. 크샤인은 전쟁으로 멸망했는데 동맹국인 셀리온은 아직도 건재하잖아요?”
“허허, 글쎄요… 자세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확실히 그때 셀리온이 동맹국인 크샤인을 돕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쪽의 사신도 만나지 않았지요. 그리고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스스로를 지켜냈습니다.”
스스로를 지켜냈다? 확실히 셀리온은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곳은 다름 아닌 용병왕국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힘이 강해도 크샤인 제국을 능가할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제국은 멸망하고 셀리온은 건재하다. 이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나는 약간의 배신감과 그보다 더 큰 의심을 품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국은 직접 그 땅을 밝고 내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로 제국과 나의 믿음을 배신한 것이라면… 그리하여 제국과 가문을 멸망의 길로 이끈 것이라면…
‘셀리온은 반드시 내 손으로 멸망시켜 줄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에시 형과의 오랜 우정을 깨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어머,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아들아.”
티란 스승과의 말이 길어지는 바람에 가장 늦게 식당으로 나온 나를 보고 스칼라는 유난을 떨었다. 그녀는 식사 후 나와 함께 상단으로 갈 생각에 연신 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보나마나 상단에서 무언가 비싼 물건들을 집어올 생각에 기분이 들떠있는 것이겠지만…
“티란 스승을 불렀다더니 안 좋은 소리라도 들은 거니?”
“아니요. 그런 건 없었어요. 좋은 시간이었어요.”
“흐응, 그런 것 치고는 어째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솔직히 말해봐.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얘기를 들은 게지?”
킬은 나이프를 손에 든 채 오른쪽 아래에 앉은 나에게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 슬슬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흥, 그렇게 물으면 누가 순순히 대답해줄 줄 알고? 내 결심을 털어놓았다간 당장 방해를 하고 나설 것이 틀림없는 그였다. 아니면 주책스럽게 따라나서서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르고 오히려 더 크게 부풀릴 가능성도 많다. 한마디로, 말해봤자 도무지 도움이 안돼는 도마뱀이라고나 할까?
‘어쩔 수 없어. 되든 안 되든 나 혼자 힘으로 해보는 거야. 설마하니 죽기야 하겠어?’
결국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남몰래 혼자 해보기로 결심하는 나였다. 근데 이런 것도 가출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왠지 기분이 찝찝했다.
“콜록, 마음에 안 드는 건 없었어요. 단지 이링카를 제대로 얻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될 뿐이죠.”
“어머, 그건 걱정하지 말렴. 그걸 만든 사람이 지금 상단에 와 있다지 않니? 이링카가 없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다시 만들어 내게 하고 말테니까 너는 아무 걱정할 것 없단다. 오호호호…”
“안되면 놈의 눈물이라도 쥐어짤 기세로구먼?”
“훗, 안된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죠. 다 아들내미 위하자고 하는 일인데 까짓 못할 건 또 뭐겠어요?”
스칼라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무시무시한 말을 잘도 해놓았다. 덕분에 아직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이 어찌나 불쌍해지던지… 만나면 무조건 잘 대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그 꼬맹이는 어쩔 셈이냐? 이링카를 찾아주면 약속도 끝나는 건데… 계속 데리고 있을 테냐?”
“보고 들어서 잘 알고 있잖아요? 나기는 갈 데가 없다는 것을… 우선은 데리고 있으면서 사정을 알아볼 거예요. 그리고 신분을 정확히 알아낸 다음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에요.”
“흐응, 만약 녀석이 복수라거나 혹은 제 신분을 되찾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해주겠다는 뜻이냐?”
“물론이에요. 하지만… 그건 과거가 모두 밝혀진 다음의 일이 될 거예요.”
이제와 지나간 과거를 들춘다는 것이 어쩌면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찾아보았자 이젠 어느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도 충분히 짐작 가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가문의 누군가가 살아있다면 다시 잃었던 것을 찾게 하기 위해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면 나라도 그들을 기억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휴우,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내 얘기를 들은 킬은 나이프를 도로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측은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속삭이는 말.
“언제까지 흘러간 시간에만 집착을 할 거냐? 그들을 찾는다고 해도 과거의 사람들은 다시 네 곁으로 돌아오지 않아.”
“…!”
그 순간, 나는 마치 화상을 입은 듯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에 모두 죽었으니까. 그래,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 그래도 이렇게 찾으면, 정말 간절하게 찾으면 누군가 한사람쯤은 이런 내 맘을 알고 내 곁으로 다시…
“돌아올지도 몰라.”
“…”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중얼거려놓고 나는 하얀 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빵은 예전처럼 그렇게 달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나기를 데리고 서둘러 상단으로 움직였다.
킬은 상단에서 이링카를 얻은 후 다시 저녁 파티에 참석하고 내일 아침쯤에 저택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어쨌든 파티도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계획이 알려지자 영지로 돌아가야 하는 왕야들이 앞 다투어 내게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상단에서 돌아오는 대로 나는 사왕야와 검술 대련을 하고 그 뒤에 바로 이왕야와 체스를 두어야 했다. 물론 삼왕야와의 사냥 약속은 저택으로 돌아간 직후에나 가기로 합의를 보았고.
“폐하께서도 말을 타러 나가자고 연락을 해오셨다만… 선물로 준 망아지가 쓸쓸해서 울고 있다고 하시더라?”
줄곧 마차 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내게 킬이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망아지가 쓸쓸해서 운다고? 헹! 잘도 그러겠다. 미친 듯이 마구 날뛰던 망아지를 떠올리며 나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다는 뜻으로 콧바람을 날렸다.
“그래도 소용없어. 절대 안 타.”
“…파비안, 내가 역적으로 몰려 성루에 갇히길 바라고 있는 거냐?”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그래. 널 안 보내면 정말로 누명을 씌워 성루에 가두어 버리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뒤엔 목이 잘려서 효수를 당하겠지? 그리고 몸은 까마귀들의 먹이로 던져질 것이고…”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아무리 황제가 정신이 나갔다고 해도 설마하니 친자식(?)을 죽이기야 할까? 게다가 죽인다고 해서 순순히 죽어줄 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런 헛소리를 늘어놓는 건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나는 도끼눈을 뜨고 뻔뻔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를 진하게 노려보아 주었던 것이다.
“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