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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참변(3)]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단 말인가?”
“절대로! 대체 제가 왜 그런 명령을 내린단 말입니까? 저는 누구보다 바라를, 할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그런 그를 제가 죽일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러나 막시무스는 현장에서 잡혔다. 그가 평소 그대와 가까이 지내온 것을 모르는 이는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도끼만 해도 서재에 늘 있는 것이므로 그가 아닌 누구라도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날 막시무스는 술에 취해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티르는 나이 지긋한 심문관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벌써 반나절이 넘도록 진행되고 있는 심문회에 그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대체 이 인간들은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일까?
같은 얘기를 아무리 반복해도 그들은 곧이듣지를 않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막시무스와 그를 살인범으로 엮어 넣으려고 작심을 사람들처럼 자꾸만 그의 말을 왜곡하고 있다. 덕분에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화가 머리끝까지 나고 있었지만 그나마 지금은 좀 나은 편이었다.
저택, 자신의 방에 갇혀 있었던 오전까지만 해도 티르는 바라가 정말로 죽어버린 줄만 알았었다. 그래서 심문회 초반까지만 해도 거의 반 미쳐서 난리를 쳤었다. 당장 다시 조사를 해 진짜 범인을 잡아내라고 소리치면서.
다행히 바라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했다. 물론 안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사경을 헤매고 있다니까.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자신이 가야 했다.
“막시무스의 범행을 직접 목격한 목격자가 있다!”
“뭐? 그게…… 누굽니까?”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막시무스와 카비아니 가의 당주는 당시 언성을 높이며 다투고 있었다고 한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대질 심문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막시무스와 목격자를 모두 불러 대면하게 해주십시오.”
“흥! 원한다면.”
감옥에 갇혀있는 막시무스와 증인을 부르기 위해 잠시 심문회가 중단되었다. 그 틈을 타 티르는 시의 서기관인 아버지를 몰래 따라 들어온 다니무스를 찾았다. 그라면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심문회가 열리고 있는 원형 건물의 회랑에서 만났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기둥의 그림자에 숨어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큰일 났다, 티르. 상황이 좋지 않아.”
“무슨 말이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젠장! 나도 방금 전에야 알았어.”
“무슨 일이냐니까?”
“……밖에 나리만이 와있다.”
“뭐? 그놈이 왜?”
낯익지만 이 일과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이름 앞에서 티르는 잠시 당황했다. 그놈이 왜 여길 온단 말인가? 심문과도 목격자도 아닌 주제에. 어리둥절해서 바라보자 다니무스는 창백한 얼굴에 근심까지 잔뜩 달고 숨 죽여 속삭였다.
“아버지께 들었다. 나리만, 그놈이 심문관들을 전부 매수했대.”
“……!”
“그랬다더라. 일곱 명의 심문관이 전부 그의 사람이야. 어떻게 하냐. 승산이 없다, 티르.”
“제길!”
그 새끼를 진즉에 죽여 버리는 건데!
난데없이 왜 끼어들어서 그의 발목을 붙잡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판크라티온 경기장에서 난동을 좀 부린 일 때문에 억하심정이 맺혀서? 아니면 선물로 보낸 역겨운 동상을 난도질했기 때문에?
“대체 속셈이 뭐야?”
“휴우, 난 말이다, 티르. 아무래도 나칼이 의심스럽다.”
“뭐?”
“나칼이 먼저 발견했다며?”
“응. 내가 달려갔을 땐 벌써 도착해서 놈의 수하들이 바라를 살피고 있었어. 그게 왜?”
“어떻게 먼저 도착할 수 있었을까? 나칼의 방은 네 방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을 텐데. 비명소리를 듣고 달렸다면 너보다 늦어야 정상이야. 더구나 그 사냥꾼들도 그래. 밤이면 밖으로 나간다고 알고 있는데 그날은 새벽까지 왜 저택에 머물러 있었지?”
“……!”
불시에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니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티르를 향해 망설임 없이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수상하잖아. 목격자의 말을 들어봐야 하지만 아무래도 그게 걸려. 아무 관련 없는 나리만이 갑자기 개입한 것도 수상하고. 무언가 거래가 있었을 수도 있어.”
“거래?”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뭣 때문에 심문관들을 매수하느냔 말이야. 입을 막았다는 것은 곧 불리한 것이 있다는 소리 아니냐고.”
불리한 것? 설마 나칼이? 아니, 아니다.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칼이 바라를 어쩌지는 않았을 거다. 누가 뭐래도 그는 카비아니 가의 자손이요 바라의 손자가 아닌가.
“하지만 만일…….”
만에 하나라도 나칼이 개입했다면? 티르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절대 용서하지 않아!”
서슬 퍼런 다짐을 하는 순간 안쪽에서 누군가가 달려 나와 심문회가 곧 재개됨을 알려주었다. 티르는 다니무스와 눈빛을 교환한 후 재빨리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막시무스!”
초췌한 몰골에 피를 뒤집어쓴 흔적이 역력한 막시무스가 족쇄를 찬 모습으로 끌려나와 있었다.
“여어~ 꼴이 좀 사납지?”
“그래. 엄청나다. 바보 같잖아.”
눈물이 날 것 같아 티르는 막시무스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기운은 없어보였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맑았다. 직접 그 모습을 마주하고서야 티르는 비로소 그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다 죽어가는 몰골을 하고서도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그가 측은했다.
“증인은 들어오라!”
심문관의 외침에 잠시 후 창백한 얼굴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은 여자 하나가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티르는 단박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키아?
“자, 작은 도련님…….”
키아가 맞았다. 종종 그를 상대로 누나 노릇을 즐기던 그의 시녀, 키아. 그녀가 왜? 짧은 순간, 그날 정신을 잃은 막시무스의 곁에 서있던 그녀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황망중이라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현장에서의 기억. 그녀가 왜 거기에?
“어떻게 네가?”
“조용! 증인은 묻는 말에 진실만을 답하라.”
“……예.”
“먼저 그날 본 일을 자세히 말하라.”
심문관의 명령에 키아는 잠시 티르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곤 빠르게 떠벌렸다.
“두 분께서는 다투고 계셨습니다.”
“무슨 헛소리냐?”
“시끄럽다! 증인은 계속하라.”
“워낙 큰소리로 다투고 계셔서 굳이 엿듣지 않아도 밖에까지 소리가 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로 다투고 있었는지 기억나느냐?”
“저어, 그게…….”
키아가 잠시 망설였다. 당연히 심문관이 목소리를 높여 그녀를 재촉했다. 그 모습에 막시무스는 퍼뜩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설마 그때 엿들은 자가 바로 저 계집? 큰일이다. 그 일이 알려지면 티르는……!’
모든 것이 끝장이다. 티르는 설 자리를 잃고 카비아니 가에서 쫓겨나고 말 것이다. 아니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막시무스는 이를 악물었다. 바라에겐 운명이고 그에겐 책임이다. 이렇게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자, 작은 도련님을 주…….”
“내가 했다!”
“헉!”
“막시무스!”
갑작스런 선언에 장내엔 경악이 일었다. 누구보다 티르의 충격이 컸다. 그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이유를 티르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인정을 하다니. 인정을 하다니!
“내가 혼자 했다. 작은 도련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분은 그저 피해자일 뿐이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아직 말하고 싶지 않다. 당주께서 아직 숨을 거두신 것은 아니니 그분께서 깨어나면 모든 진실을 말하겠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아덴부르크의 명예로운 자유 시민으로서 나는 모든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가겠다. 진실은 언젠가 신께서 밝혀주실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막시무스는 돌아섰다. 티르를 향해 시선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감옥이 있는 쪽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끝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
티르는 절망과 마주 선 느낌이었다.
유일한 보호자인 바라는 사경을 헤매고 있고 의지처였던 막시무스는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으로 들어갔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무엇 때문에? 나칼에게 가야했다. 그에게 얘기를 들어야 한다. 티르는 밀려드는 현기증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그럼 이만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작은 도련님.”
“네놈은?”
언제 나타난 건지 나칼의 수하인 탄탄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더니 한 팔을 그의 어깨에 두르고 부축하듯 바짝 잡아당겼다. 그리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대로 조용히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잃고 싶지 않다면.”
“협박하는 것이냐?”
“아마도.”
태연하게 인정하며 그는 히죽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바라는 나칼이 거느리고 있는 사냥꾼들을 싫어했다.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티르도 그들을 싫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이놈들이다. 틀림없이 이놈들이 바라를 찌르고 막시무스에게 뒤집어씌운 거야. 나칼과 함께!’
섬뜩한 깨달음이 뒤늦게 가슴을 쳤다.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면서도 티르는 아무 말 없이 고분고분 그를 따라나섰다. 나칼을 만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행동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티르! 티르메네스!”
등 뒤에서 다니무스가 부르고 있었지만 티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으므로.
밖으로 나오자 말을 탄 탄탄의 일행 셋이 기다리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나리만의 마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쪽을 흘깃 봐준 다음 티르는 탄탄이 내주는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들은 말 한마디 없이 말을 달려 저택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나칼은 하늘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일을 벌이고 방으로 돌아온 뒤부터 그는 그렇게 꼼짝을 하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엔 통쾌했다. 경악으로 물든 바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미친놈처럼 웃기까지 했을 정도다. 그런데 바라가 정신을 잃은 직후부터는 겁이 나기 시작하더니 덜덜 손이 떨리고 심장이 떨리고 마침내는 온몸이 떨려왔다.
“괜찮아. 아직 죽은 건 아니야.”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자위하며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술병을 낚아챘다. 벌컥벌컥. 급하게 들이키고 다시 병을 내동댕이쳤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젠장! 사람 처음 찔러봤어? 노예사냥까지 해치운 나야.”
벌떡 일어나 몇 번인가 제자리를 왔다 갔다 하다 다시 털썩 주저앉아 한탄했다.
“내 잘못이 아니야. 바라, 이게 다 바라 탓이다. 아니 티르 놈이 문제야. 그놈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다. 괘씸한 놈! 가짜 주제에 감히!”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문제에 대해 떠올리자 저절로 이가 갈렸다. 탄탄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른 채 당연히 자신의 것이 되었어야 할 것들을 빼앗기고 비참하게 내쫓겼으리라.
“죽일 놈!”
쾅! 나칼은 주먹으로 탁자를 후려갈겼다.
“도련님, 작은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흥!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들여보내라!”
의기양양하게 소리쳐놓고 그는 바라를 흉내 내듯 오만한 자세로 앉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곧 탄탄의 손에 잡힌 티르가 사납게 끌려 들어왔다.
“……!”
살기 가득한 티르의 눈과 마주치자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슬며시 죄책감이 몰려오려 하고 있었다. 더 끔찍한 생각이 들기 전에 나칼은 티르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말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철썩!
“건방진 놈!”
“윽!”
불시에 얻어맞은 뺨이 당장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티르는 아픈 것도 모르고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다시 나칼을 노려보았다.
“네놈이냐, 나칼?”
“무슨 소리냐?”
“네놈이 바라를 찔렀냐고 물었다. 아니면 저 사냥꾼들중 하나인가? 사냥꾼 놈들과 작당해 바라를 찌르고 막시무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 다 알아.”
“헛소리! 미친놈, 어디서 감히 헛소리를 지껄여? 죽고 싶은 거냐, 티르메네스?”
“나도 죽이려고? 이번엔 누구한테 뒤집어씌울 건데?”
싸늘하게 되받아치자 나칼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여유로운 동작으로 소파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지. 네놈 같은 바르바로이(이국인, 노예) 따위.”
“뭐?”
“못 들었나? 넌 우리 카비아니 가의 자식이 아니란 말이다! 그 얼굴로 지금까지 잘도 나를 속였던 거야!”
“그,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수작이야?”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티르는 당황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고 속이 울렁거렸다. 티르는 흔들리는 눈으로 나칼을 보다 홱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탄탄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못 믿겠지? 그럴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근데 어쩌나, 사실인걸. 바라와 막시무스도 알고 있는 사실. 당연히 알고 있겠지. 다름 아닌 그들이 널 주워왔으니까.”
“아니야…….”
“흥! 죽어버린 아버지들 대신 바라는 널 주워왔어. 그리곤 친손자인 나보다 더 애지중지 키워냈지.”
“아니야!”
“더 웃긴 게 뭔지 알아? 바라, 그 늙은이가 전 재산을 네게 주겠단다. 내가 아닌 네게! 나쁜 놈, 네가 바라를 현혹시켰어!”
“아니야아!”
“내가 왜 그 자리에서 널 끝장내지 않고 도로 끌고 왔는지 알아? 네놈을 용서해서가 아니야.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숨도 못 쉬게 퍼부어대는 독설에 티르는 숨이 막혔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나칼은 바라를 찌르고도 모자라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티르는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김질을 했다. 그러나 가슴속에선 이미 알 수 없는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니야! 바라, 아니라고 해. 막시무스, 아니라고 해!’
눈물이 제 마음대로 넘쳐흐르려 하고 있었다.
“호오, 안타까운 모습이군.”
그때,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왔다. 돌아보지 않고도 티르는 그가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나리만! 역시 그도 이 일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네놈이!”
“흥,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걱정마라. 노예를 교육시키는 일엔 누구보다 자신이 있단다. 으하하하!”
“노예?”
티르의 안색이 순식간에 시퍼렇게 질려버렸다. 설마, 설마 자신을 나리만 놈에게 넘길 생각이란 말인가! 그것도 노예로?
“난 노예가 아니다!”
“하! 그럼 네가 카비아니 가의 손자인가? 정식으로 양자로 입적했다는 증거서류는 어디에도 없다. 또한 넌 아덴부르크의 자유 시민도 아니다.”
“그, 그건…….”
“넌 단지 엘룬인 꼬마일 뿐이다. 엘룬 출신 노예는 꽤 비싸게 거래되고 있지. 크크크.”
마치 다 된 밥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처럼 나리만은 득의만만하게 웃어젖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티르는 그 자리에서 딱 혀를 깨물고만 싶었다. 저 돼지 같은 놈에게 팔려 가느니 차라리 그렇게 하고야 말리라.
으드득. 모질게 이를 갈았다. 그리곤 애써 어깨를 펴고 멍청하게 앉아있는 나칼을 바라보았다. 나리만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티르의 출신을 밝힌다면 그의 신분은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소유를 증명할만한 서류가 없으므로 티르는 카비아니 가의 소유도 아니게 된다. 우연의 산물인 ‘습득물(주워서 얻은 물건)‘ 개념을 적용하면 티르는 카비아니 가가 아닌 아덴부르크 시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날 저자에게 팔 거냐?”
티르가 물었다.
“그게 너희들의 거래 조건이었나?”
“닥치지 못해?”
“가문의 명예를 생각한다는 네가 나를 노예로 팔겠다고? 거짓말! 넌 명예가 뭔지도 모르는 놈이야. 그냥 처음부터 이러기로 약속해둔 일이었겠지. 안 그래?”
“닥쳐!”
궁지에 몰린 나칼이 티르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워낙 세게 얻어맞은 터라 티르는 뒤로 몇 걸음이나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나리만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저런! 그만하지. 난 물건에 흠집이 나는 것이 싫다네.”
“흥! 누가 네놈 물건이야? 난 아덴부르크시의 소유물이다. 시 소유의 노예는 공식적인 매매를 통해 거래하는 게 법일 텐데?”
“큭큭, 그렇지. 그래서 시장거래를 통해 매매되고 싶으시다? 못할 것도 없지. 그럼 카비아니 가의 새 당주가 시의 대리인 자격으로 매매를 진행하면 되겠군.”
“……!”
“어차피 크든 작든 시장을 통해 매매했다는 증거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매입 후보자가 나 하나뿐이라도 상관은 없겠지? 큭큭, 크하하하하!”
티르는 좌절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더 이상은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나칼이 모든 일을 비밀로 묻어두고 그를 그냥 카비아니 가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거나 더 나은 조건을 거는 다른 매입자에게 넘기겠다고 선언하지 않는 이상 그는 꼼짝없이 나리만에게 팔려갈 수밖에 없다.
“그래,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나?”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당당하게 흔들어 보이며 그가 나칼에게 물었다. 그때까지도 나칼은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티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30무나 어떤가?”
나리만의 물음에 그는 잠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곧 이렇게 말했다.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응? 무슨 뜻이지?”
혹시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 가득한 시선이 당장 날아들었다. 그러자 탄탄이 나서서 황급히 변명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막시무스가 죄를 시인한 이상 사람들은 티르메네스에겐 아무 죄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그래서?”
“사람들은 당주께서 평소 티르메네스를 후계자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주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사이 큰 도련님이 나서서 갑자기 녀석을 노예로 팔아버렸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모르긴 해도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죄 없는 어린 녀석을 내쫓았다고 생각할 겁니다.”
“……!”
“그런 오해가 싫으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녀석의 신분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정당하게 거래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이틀이면 됩니다.”
미리 생각해 둔 것처럼 매끄러운 변명. 탄탄의 말에 나리만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뒤에 시장을 열겠습니다. 물론 매입 후보자는 나리 한분으로 하지요.”
“흥, 당연한 것을. 크흠, 그럼 이틀 뒤에 보세.”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단 말인가?”
“절대로! 대체 제가 왜 그런 명령을 내린단 말입니까? 저는 누구보다 바라를, 할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그런 그를 제가 죽일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러나 막시무스는 현장에서 잡혔다. 그가 평소 그대와 가까이 지내온 것을 모르는 이는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도끼만 해도 서재에 늘 있는 것이므로 그가 아닌 누구라도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날 막시무스는 술에 취해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티르는 나이 지긋한 심문관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벌써 반나절이 넘도록 진행되고 있는 심문회에 그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대체 이 인간들은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일까?
같은 얘기를 아무리 반복해도 그들은 곧이듣지를 않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막시무스와 그를 살인범으로 엮어 넣으려고 작심을 사람들처럼 자꾸만 그의 말을 왜곡하고 있다. 덕분에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화가 머리끝까지 나고 있었지만 그나마 지금은 좀 나은 편이었다.
저택, 자신의 방에 갇혀 있었던 오전까지만 해도 티르는 바라가 정말로 죽어버린 줄만 알았었다. 그래서 심문회 초반까지만 해도 거의 반 미쳐서 난리를 쳤었다. 당장 다시 조사를 해 진짜 범인을 잡아내라고 소리치면서.
다행히 바라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했다. 물론 안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사경을 헤매고 있다니까.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자신이 가야 했다.
“막시무스의 범행을 직접 목격한 목격자가 있다!”
“뭐? 그게…… 누굽니까?”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막시무스와 카비아니 가의 당주는 당시 언성을 높이며 다투고 있었다고 한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대질 심문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막시무스와 목격자를 모두 불러 대면하게 해주십시오.”
“흥! 원한다면.”
감옥에 갇혀있는 막시무스와 증인을 부르기 위해 잠시 심문회가 중단되었다. 그 틈을 타 티르는 시의 서기관인 아버지를 몰래 따라 들어온 다니무스를 찾았다. 그라면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심문회가 열리고 있는 원형 건물의 회랑에서 만났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기둥의 그림자에 숨어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큰일 났다, 티르. 상황이 좋지 않아.”
“무슨 말이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젠장! 나도 방금 전에야 알았어.”
“무슨 일이냐니까?”
“……밖에 나리만이 와있다.”
“뭐? 그놈이 왜?”
낯익지만 이 일과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이름 앞에서 티르는 잠시 당황했다. 그놈이 왜 여길 온단 말인가? 심문과도 목격자도 아닌 주제에. 어리둥절해서 바라보자 다니무스는 창백한 얼굴에 근심까지 잔뜩 달고 숨 죽여 속삭였다.
“아버지께 들었다. 나리만, 그놈이 심문관들을 전부 매수했대.”
“……!”
“그랬다더라. 일곱 명의 심문관이 전부 그의 사람이야. 어떻게 하냐. 승산이 없다, 티르.”
“제길!”
그 새끼를 진즉에 죽여 버리는 건데!
난데없이 왜 끼어들어서 그의 발목을 붙잡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판크라티온 경기장에서 난동을 좀 부린 일 때문에 억하심정이 맺혀서? 아니면 선물로 보낸 역겨운 동상을 난도질했기 때문에?
“대체 속셈이 뭐야?”
“휴우, 난 말이다, 티르. 아무래도 나칼이 의심스럽다.”
“뭐?”
“나칼이 먼저 발견했다며?”
“응. 내가 달려갔을 땐 벌써 도착해서 놈의 수하들이 바라를 살피고 있었어. 그게 왜?”
“어떻게 먼저 도착할 수 있었을까? 나칼의 방은 네 방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을 텐데. 비명소리를 듣고 달렸다면 너보다 늦어야 정상이야. 더구나 그 사냥꾼들도 그래. 밤이면 밖으로 나간다고 알고 있는데 그날은 새벽까지 왜 저택에 머물러 있었지?”
“……!”
불시에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니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티르를 향해 망설임 없이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수상하잖아. 목격자의 말을 들어봐야 하지만 아무래도 그게 걸려. 아무 관련 없는 나리만이 갑자기 개입한 것도 수상하고. 무언가 거래가 있었을 수도 있어.”
“거래?”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뭣 때문에 심문관들을 매수하느냔 말이야. 입을 막았다는 것은 곧 불리한 것이 있다는 소리 아니냐고.”
불리한 것? 설마 나칼이? 아니, 아니다.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칼이 바라를 어쩌지는 않았을 거다. 누가 뭐래도 그는 카비아니 가의 자손이요 바라의 손자가 아닌가.
“하지만 만일…….”
만에 하나라도 나칼이 개입했다면? 티르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절대 용서하지 않아!”
서슬 퍼런 다짐을 하는 순간 안쪽에서 누군가가 달려 나와 심문회가 곧 재개됨을 알려주었다. 티르는 다니무스와 눈빛을 교환한 후 재빨리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막시무스!”
초췌한 몰골에 피를 뒤집어쓴 흔적이 역력한 막시무스가 족쇄를 찬 모습으로 끌려나와 있었다.
“여어~ 꼴이 좀 사납지?”
“그래. 엄청나다. 바보 같잖아.”
눈물이 날 것 같아 티르는 막시무스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기운은 없어보였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맑았다. 직접 그 모습을 마주하고서야 티르는 비로소 그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다 죽어가는 몰골을 하고서도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그가 측은했다.
“증인은 들어오라!”
심문관의 외침에 잠시 후 창백한 얼굴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은 여자 하나가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티르는 단박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키아?
“자, 작은 도련님…….”
키아가 맞았다. 종종 그를 상대로 누나 노릇을 즐기던 그의 시녀, 키아. 그녀가 왜? 짧은 순간, 그날 정신을 잃은 막시무스의 곁에 서있던 그녀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황망중이라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현장에서의 기억. 그녀가 왜 거기에?
“어떻게 네가?”
“조용! 증인은 묻는 말에 진실만을 답하라.”
“……예.”
“먼저 그날 본 일을 자세히 말하라.”
심문관의 명령에 키아는 잠시 티르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곤 빠르게 떠벌렸다.
“두 분께서는 다투고 계셨습니다.”
“무슨 헛소리냐?”
“시끄럽다! 증인은 계속하라.”
“워낙 큰소리로 다투고 계셔서 굳이 엿듣지 않아도 밖에까지 소리가 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로 다투고 있었는지 기억나느냐?”
“저어, 그게…….”
키아가 잠시 망설였다. 당연히 심문관이 목소리를 높여 그녀를 재촉했다. 그 모습에 막시무스는 퍼뜩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설마 그때 엿들은 자가 바로 저 계집? 큰일이다. 그 일이 알려지면 티르는……!’
모든 것이 끝장이다. 티르는 설 자리를 잃고 카비아니 가에서 쫓겨나고 말 것이다. 아니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막시무스는 이를 악물었다. 바라에겐 운명이고 그에겐 책임이다. 이렇게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자, 작은 도련님을 주…….”
“내가 했다!”
“헉!”
“막시무스!”
갑작스런 선언에 장내엔 경악이 일었다. 누구보다 티르의 충격이 컸다. 그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이유를 티르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인정을 하다니. 인정을 하다니!
“내가 혼자 했다. 작은 도련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분은 그저 피해자일 뿐이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아직 말하고 싶지 않다. 당주께서 아직 숨을 거두신 것은 아니니 그분께서 깨어나면 모든 진실을 말하겠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아덴부르크의 명예로운 자유 시민으로서 나는 모든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가겠다. 진실은 언젠가 신께서 밝혀주실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막시무스는 돌아섰다. 티르를 향해 시선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감옥이 있는 쪽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끝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
티르는 절망과 마주 선 느낌이었다.
유일한 보호자인 바라는 사경을 헤매고 있고 의지처였던 막시무스는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으로 들어갔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무엇 때문에? 나칼에게 가야했다. 그에게 얘기를 들어야 한다. 티르는 밀려드는 현기증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그럼 이만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작은 도련님.”
“네놈은?”
언제 나타난 건지 나칼의 수하인 탄탄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더니 한 팔을 그의 어깨에 두르고 부축하듯 바짝 잡아당겼다. 그리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대로 조용히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잃고 싶지 않다면.”
“협박하는 것이냐?”
“아마도.”
태연하게 인정하며 그는 히죽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바라는 나칼이 거느리고 있는 사냥꾼들을 싫어했다.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티르도 그들을 싫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이놈들이다. 틀림없이 이놈들이 바라를 찌르고 막시무스에게 뒤집어씌운 거야. 나칼과 함께!’
섬뜩한 깨달음이 뒤늦게 가슴을 쳤다.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면서도 티르는 아무 말 없이 고분고분 그를 따라나섰다. 나칼을 만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행동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티르! 티르메네스!”
등 뒤에서 다니무스가 부르고 있었지만 티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으므로.
밖으로 나오자 말을 탄 탄탄의 일행 셋이 기다리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나리만의 마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쪽을 흘깃 봐준 다음 티르는 탄탄이 내주는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들은 말 한마디 없이 말을 달려 저택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나칼은 하늘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일을 벌이고 방으로 돌아온 뒤부터 그는 그렇게 꼼짝을 하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엔 통쾌했다. 경악으로 물든 바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미친놈처럼 웃기까지 했을 정도다. 그런데 바라가 정신을 잃은 직후부터는 겁이 나기 시작하더니 덜덜 손이 떨리고 심장이 떨리고 마침내는 온몸이 떨려왔다.
“괜찮아. 아직 죽은 건 아니야.”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자위하며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술병을 낚아챘다. 벌컥벌컥. 급하게 들이키고 다시 병을 내동댕이쳤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젠장! 사람 처음 찔러봤어? 노예사냥까지 해치운 나야.”
벌떡 일어나 몇 번인가 제자리를 왔다 갔다 하다 다시 털썩 주저앉아 한탄했다.
“내 잘못이 아니야. 바라, 이게 다 바라 탓이다. 아니 티르 놈이 문제야. 그놈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다. 괘씸한 놈! 가짜 주제에 감히!”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문제에 대해 떠올리자 저절로 이가 갈렸다. 탄탄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른 채 당연히 자신의 것이 되었어야 할 것들을 빼앗기고 비참하게 내쫓겼으리라.
“죽일 놈!”
쾅! 나칼은 주먹으로 탁자를 후려갈겼다.
“도련님, 작은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흥!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들여보내라!”
의기양양하게 소리쳐놓고 그는 바라를 흉내 내듯 오만한 자세로 앉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곧 탄탄의 손에 잡힌 티르가 사납게 끌려 들어왔다.
“……!”
살기 가득한 티르의 눈과 마주치자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슬며시 죄책감이 몰려오려 하고 있었다. 더 끔찍한 생각이 들기 전에 나칼은 티르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말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철썩!
“건방진 놈!”
“윽!”
불시에 얻어맞은 뺨이 당장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티르는 아픈 것도 모르고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다시 나칼을 노려보았다.
“네놈이냐, 나칼?”
“무슨 소리냐?”
“네놈이 바라를 찔렀냐고 물었다. 아니면 저 사냥꾼들중 하나인가? 사냥꾼 놈들과 작당해 바라를 찌르고 막시무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 다 알아.”
“헛소리! 미친놈, 어디서 감히 헛소리를 지껄여? 죽고 싶은 거냐, 티르메네스?”
“나도 죽이려고? 이번엔 누구한테 뒤집어씌울 건데?”
싸늘하게 되받아치자 나칼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여유로운 동작으로 소파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지. 네놈 같은 바르바로이(이국인, 노예) 따위.”
“뭐?”
“못 들었나? 넌 우리 카비아니 가의 자식이 아니란 말이다! 그 얼굴로 지금까지 잘도 나를 속였던 거야!”
“그,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수작이야?”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티르는 당황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고 속이 울렁거렸다. 티르는 흔들리는 눈으로 나칼을 보다 홱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탄탄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못 믿겠지? 그럴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근데 어쩌나, 사실인걸. 바라와 막시무스도 알고 있는 사실. 당연히 알고 있겠지. 다름 아닌 그들이 널 주워왔으니까.”
“아니야…….”
“흥! 죽어버린 아버지들 대신 바라는 널 주워왔어. 그리곤 친손자인 나보다 더 애지중지 키워냈지.”
“아니야!”
“더 웃긴 게 뭔지 알아? 바라, 그 늙은이가 전 재산을 네게 주겠단다. 내가 아닌 네게! 나쁜 놈, 네가 바라를 현혹시켰어!”
“아니야아!”
“내가 왜 그 자리에서 널 끝장내지 않고 도로 끌고 왔는지 알아? 네놈을 용서해서가 아니야.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숨도 못 쉬게 퍼부어대는 독설에 티르는 숨이 막혔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나칼은 바라를 찌르고도 모자라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티르는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김질을 했다. 그러나 가슴속에선 이미 알 수 없는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니야! 바라, 아니라고 해. 막시무스, 아니라고 해!’
눈물이 제 마음대로 넘쳐흐르려 하고 있었다.
“호오, 안타까운 모습이군.”
그때,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왔다. 돌아보지 않고도 티르는 그가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나리만! 역시 그도 이 일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네놈이!”
“흥,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걱정마라. 노예를 교육시키는 일엔 누구보다 자신이 있단다. 으하하하!”
“노예?”
티르의 안색이 순식간에 시퍼렇게 질려버렸다. 설마, 설마 자신을 나리만 놈에게 넘길 생각이란 말인가! 그것도 노예로?
“난 노예가 아니다!”
“하! 그럼 네가 카비아니 가의 손자인가? 정식으로 양자로 입적했다는 증거서류는 어디에도 없다. 또한 넌 아덴부르크의 자유 시민도 아니다.”
“그, 그건…….”
“넌 단지 엘룬인 꼬마일 뿐이다. 엘룬 출신 노예는 꽤 비싸게 거래되고 있지. 크크크.”
마치 다 된 밥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처럼 나리만은 득의만만하게 웃어젖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티르는 그 자리에서 딱 혀를 깨물고만 싶었다. 저 돼지 같은 놈에게 팔려 가느니 차라리 그렇게 하고야 말리라.
으드득. 모질게 이를 갈았다. 그리곤 애써 어깨를 펴고 멍청하게 앉아있는 나칼을 바라보았다. 나리만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티르의 출신을 밝힌다면 그의 신분은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소유를 증명할만한 서류가 없으므로 티르는 카비아니 가의 소유도 아니게 된다. 우연의 산물인 ‘습득물(주워서 얻은 물건)‘ 개념을 적용하면 티르는 카비아니 가가 아닌 아덴부르크 시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날 저자에게 팔 거냐?”
티르가 물었다.
“그게 너희들의 거래 조건이었나?”
“닥치지 못해?”
“가문의 명예를 생각한다는 네가 나를 노예로 팔겠다고? 거짓말! 넌 명예가 뭔지도 모르는 놈이야. 그냥 처음부터 이러기로 약속해둔 일이었겠지. 안 그래?”
“닥쳐!”
궁지에 몰린 나칼이 티르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워낙 세게 얻어맞은 터라 티르는 뒤로 몇 걸음이나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나리만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저런! 그만하지. 난 물건에 흠집이 나는 것이 싫다네.”
“흥! 누가 네놈 물건이야? 난 아덴부르크시의 소유물이다. 시 소유의 노예는 공식적인 매매를 통해 거래하는 게 법일 텐데?”
“큭큭, 그렇지. 그래서 시장거래를 통해 매매되고 싶으시다? 못할 것도 없지. 그럼 카비아니 가의 새 당주가 시의 대리인 자격으로 매매를 진행하면 되겠군.”
“……!”
“어차피 크든 작든 시장을 통해 매매했다는 증거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매입 후보자가 나 하나뿐이라도 상관은 없겠지? 큭큭, 크하하하하!”
티르는 좌절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더 이상은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나칼이 모든 일을 비밀로 묻어두고 그를 그냥 카비아니 가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거나 더 나은 조건을 거는 다른 매입자에게 넘기겠다고 선언하지 않는 이상 그는 꼼짝없이 나리만에게 팔려갈 수밖에 없다.
“그래,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나?”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당당하게 흔들어 보이며 그가 나칼에게 물었다. 그때까지도 나칼은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티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30무나 어떤가?”
나리만의 물음에 그는 잠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곧 이렇게 말했다.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응? 무슨 뜻이지?”
혹시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 가득한 시선이 당장 날아들었다. 그러자 탄탄이 나서서 황급히 변명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막시무스가 죄를 시인한 이상 사람들은 티르메네스에겐 아무 죄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그래서?”
“사람들은 당주께서 평소 티르메네스를 후계자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주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사이 큰 도련님이 나서서 갑자기 녀석을 노예로 팔아버렸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모르긴 해도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죄 없는 어린 녀석을 내쫓았다고 생각할 겁니다.”
“……!”
“그런 오해가 싫으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녀석의 신분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정당하게 거래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이틀이면 됩니다.”
미리 생각해 둔 것처럼 매끄러운 변명. 탄탄의 말에 나리만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뒤에 시장을 열겠습니다. 물론 매입 후보자는 나리 한분으로 하지요.”
“흥, 당연한 것을. 크흠, 그럼 이틀 뒤에 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