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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참변(4)]


이젠 아주 습관이 된 듯 나리만은 나가다 말고 티르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눈으로 훑어 내리고 있었다. 그 집요한 시선에 티르는 발작적으로 눈을 부라렸다.
“크하하하하!”
“미친놈!”
“끌고 가 가둬라!”
씩씩대는 티르를 탄탄이 턱 끝으로 가리키며 명령했다. 그러자 당장 사냥꾼들이 들이닥쳐 그를 끌어냈다. 티르의 눈엔 나칼이 아니라 바로 그가 새로운 카비아니 가의 주인이 된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멍청한 놈!”
나칼이 있는 방 쪽을 돌아보며 탄탄은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생각보다 더 멍청하고 우유부단한 놈이었다. 물론 그것에 대해 불만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다.
“대장, 이제 어쩌실 겁니까?”
부하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계속 저 어린놈의 뒤나 닦아주며 지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흥! 당연히 그럴 수는 없지. 흐흐, 걱정마라. 이제 티르메네스 놈만 치우면 카비아니 가는 우리 것이 될 테니.”
“영감이 아직 죽지 않았지 않습니까?”
“시체나 다름없는 영감이다. 깨어난다고 해도 한동안은 움직이지 못해. 그리고 그땐 이미 늦었을 거다. 우린 나칼 놈을 앞에 두고 뒤로 카비아니 가의 재산을 빼돌려 멀리 달아나있을 테니까.”
“푸흐흐흐. 역시!”
숨죽인 웃음소리가 가볍게 머리 위를 떠돌았다.
“그러자면 저 티르메네스 놈을 빨리 처리해야 한다.”
“나리만은요?”
“우리 일을 다 알고 있는데 살려두면 골치 아파지지 않을까요?”
“티르메네스를 안겨주면 당분간은 조용할 거다. 적당히 비위를 맞추다 모든 일을 마치고 떠나기 직전에 해치우자.”
“알겠습니다.”
유쾌한 합의. 기분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아덴부르크가 큰 도시인 것은 사실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카비아니 가의 재산을 빼먹으며 적당히 즐기면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 머무는 한 그들은 영원히 노예사냥꾼으로 불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탄탄은 그것이 싫었다.
“더 큰 도시로 가는 거다. 그곳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흐흐흐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기분은 더 유쾌해졌다. 벌써 카비아니 가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도 된 듯 배가 불러왔다. 탄탄은 더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가 진짜 승리자였다.
티르는 또다시 방에 갇혔다.
감옥이라거나 노예들의 처소가 아닌 이제껏 내내 써오던 제 방이었다. 아직은 그의 태생에 대해 밝힌 것이 없기 때문에 모두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사실은, 나리만이 ‘잘 간수하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간 탓인지도 모르고.
“젠장! 바라, 나칼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응? 아니지?”
혼자 남겨지자 잠시 미루어두었던 충격의 후폭풍이 그제야 파도가 되어 와락 밀려들었다. 고작 이틀. 그 이틀 사이에 티르는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정말이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게 되고 말았다.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어.”
힘없이 늘어져서 눈물이나 흘리고 있는 걸 바라가 알면 또 지랄을 해댈 것이 분명하다. 이 새끼야, 처먹은 밥 도로 뱉어내라. 고래고래 소리치며 등짝을 후려치겠지.
“걱정 마, 바라. 난 바라가 키운 티르메네스야. 무슨 수를 써서든 도망쳐 보이고 말겠어! 설명 따윈 나중에 듣겠다고. 막시무스도 구해낼 거야. 꼭!”
나리만, 그 돼지 같은 놈에게 팔리는 상상을 하면 가만히 있다가도 저절로 발작이 일 정도였다. 하도 쌓인 감정이 많아 이젠 그 불친절한 낯짝을 보기만 해도 손이 먼저 무기로 간다.
“이러다 살인을 내도 내지. 그러고 보면 나리만 그 미친놈은 죽고 싶어 환장한 게 분명해.”
어떤 방법으로 길들이는 지에 대한 것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함께 사흘만 있어도 분명히 살인이 날 거라는 사실이다. 놈의 미친 짓으로 인해 시시때때로 치미는 살인충동은 절대로 길들여질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닐 테니까.
나리만의 화려한 저택에서 살고 있는 미녀, 미동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지만 뭐 그다지 좋은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이런 걸 가르친다, 저런 걸 가르친다. 어떤 아이가 아무개 대신의 집에 보내졌다더라, 이런저런 미녀를 어떤 장군에게 선물로 바쳤다더라…… 기타 등등. 소문이 늘 무성했기 때문이다.
“역시 도망쳐야해. 일단 튀고 보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일단 카비아니 가의 저택 내에서는 불가능했다. 어느 쪽으로 어떻게 움직이든 반드시 한번 이상은 누군가의 눈에 뜨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택을 나가서 해결을 봐야 한다. 예를 들면, 카비아니 가에서 나리만의 저택으로 옮겨지는 도중에 살짝 틈을 만들어 탈출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다음은…….
“어디로 가지?”
탈출에 성공하려면 절대로 아덴부르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여느 집 노예라면 까짓 별 문제가 아니겠으나 상대는 나리만이었다. 이 아덴부르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노예상인. 그런 그의 눈을 피하려면 가능한 빨리 아덴부르크를 벗어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아덴부르크를 벗어나 본 적이 없잖아? 새삼 충격이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구나.
어쩐지 안타까워져 티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찌감치 바라를 따라 멀리까지 나가보는 건데…….
“멀리라……. 아! 맞다, 카도니아!”
깜빡 잊고 있던 곳이 떠올랐다. 카도니아! 슈라 어쩌고 하던, 그 멀쩡하게 생긴 청년 아니 황태자가 있는 곳. 그곳이라면 충분히 멀다. 그리고 안전할 것이다. 비록 적국이긴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분명히 도움이 필요하면 오라고 했겠다?”
다행히도 티르는 도움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절실히.
“어? 가만, 그러고 보니…….”
약간의 희망에 부풀어 팔뚝에 고이 잘 채워진 팔찌를 매만지다 퍼뜩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사유물‘에 대한 권리. 노예는 사유물을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노예 자체가 이미 누군가의 사유물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노예의 것은 곧 주인의 것‘이라는 공식이 성립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 빼앗기겠네. 어쩐다?”
그냥 팔찌도 아니고 보석이 박힌 황금팔찌다. 그런 것을 어느 주인이 눈독 들이지 않을까. 더구나 나리만처럼 욕심 많은 인간이. 아니 어쩌면 카비아니 가에서 나가기도 전에 빼앗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칼의 사냥꾼들도 만만치 않게 탐욕스러워 보였으니까.
“아차! 샤나메도 있었지?”
샤나메. 그날 새벽, 방안에 두고 나간 뒤 까맣게 잊고 있었다.
티르는 황급히 방안을 뒤져 샤나메를 찾아냈다. 다행히 탁자 위에 얌전히 잘 있었다. 그것 또한 다른 이에게 넘길 수 없는 물건이었다. 바라의 말처럼 무언가 특별한 힘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쩌면 바라의 유품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바라가 깨어나지 못한다거나 혹은 이것이 마지막이 되어 영영 만나지 못한다면…… 역시 샤나메가 바라의 마지막 흔적이 될 것이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가기 전에 딱 한번만 보게 해달라고 해야겠다.”
샤나메를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까? 팔찌는 몰라도 샤나메는 정말로 빼앗기고 싶지 않아졌다. 따라서 티르는 그것을 안전하게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에, 이 정도라면 그리 부담스러운 크기는 아니야.”
그가 생각해낸 방법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어차피 철저한 몸수색 후 달랑 맨몸으로 나가야 할 테니 몸속 어딘가에 숨겨야 했다. 몸속에 숨기는 방법 중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편리한 것은 바로…… 삼키는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며칠간은 안전하게 소유할 수 있다. 물론 건강하다면 단 하루가 될 수도 있고.
“음, 그럼…… 잘 먹겠습니다.”
호두알보다 조금 더 큰 구슬을 날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크기도 크기지만 여느 보석처럼 꽤 단단하기에 넘기기가 역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가볍게 넘어갔다. 어쩐지 조금 부드러웠던 것도 같고.
“꺼억. 맛은 없네.”
이물감 하나 없는 것이 신기해 배를 툭툭 두드려보고 괜히 히죽 웃었다. 이렇게 해서, 샤나메는 무사히 가지고 나갈 수 있으리라. 근데 팔찌가 아깝다. 크기가 있으니 삼킬 수도 없고 양보하자니 도주하는 길에 막대한 지장이 있을 것 같다.
“치사하지만 죽어도 못 내놓겠다고 버텨볼까? 그럼 설마하니 팔뚝을 끊어내기야…… 어?”
중얼거리다 말고 티르는 갑자기 배로 손을 가져갔다. 아프다? 아니…… 뜨겁다! 부작용인지 아니면 식중독 증상인지 갑자기 배가 타는 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못 먹을 걸 먹긴 했지만 이건 아파도 너무 아팠다. 설마 그 안에 독이 들어 있었나?
“헉! 어억…….”
뱃속에서 시작된 열기가 빠르게 전신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만큼 통증도 커졌다. 티르는 배를 움켜쥐고 바닥으로 엎어졌다. 몸속을 휘도는 격렬한 기운 때문에 온몸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서, 설마 이대로 죽는 거야?’
팔다리가 제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까지 이르자 불현듯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비명이라도 크게 질러 누군가를 부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통증 때문에 끙끙대는 신음소리조차도 잘 나오지 않았다.
“커억!”
몸이 저절로 튕겨 올라갔다.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고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뜨여지더니 이윽고 우드득 우드득 뼈마디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끔찍한 통증에 티르는 그만 정신을 잃고 힘없이 늘어지고 말았다.
티르가 정신을 잃거나 말거나 몸 깊은 곳에서 나직하게 뚝딱대는 소리는 한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그 안에 잠든 무언가를 깨우듯 탁탁 두드리다 몸 속 어딘가에 숨어있는 보물을 찾듯 기운이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화악 황금빛 불꽃을 일으켰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되어 위로 치달리다 드디어 터져 나오는 빛. 그것은 오래전 초원에서 바라가 발견한 바로 그 빛이기도 했다.
빛은 흡사 감추어진 것을 꺼내고 녹아든 것을 모으며 잠든 것을 깨우듯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고요한 변화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한낮이 지나고 해가 기울고 어둠이 내릴 때까지.
그리고 드디어 달이 뜨자 빛도 정점에 이르렀다. 희미하던 것이 점점 진해지면서 한 점을 중심으로 서서히 모여든다. 전신을 뒤덮고 있던 빛이 차츰차츰 크기를 줄이면서 진해지다 마침내 미간에서 폭발했다. 파밧!
말끔하던 미간에 황금빛의 불꽃모양을 한 문양 세 개가 앙증맞게 생겨났다. 동시에 꾹 감겨있던 티르의 눈이 서서히 열리면서 어느새 황금색으로 변해버린 눈동자가 드러난다. 시푸른 코발트빛은 간데없고 오직 순수한 황금색만이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은!”
한밤중. 어둠속을 유영하던 하라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이 힘의 파장을 기억하고 있다. 따스하면서도 시리고 거대하면서도 섬세하며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힘. 어둠을 비추는 달처럼 한없이 아름다운 지배자의 포효.
“샤나메가…… 깨어났다?”
어떻게 아니 왜?
작은 왕자, 티르메네스는 아무런 힘도 타고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 주인이 우연을 가장해 그에게 샤나메를 선물로 보냈을 때만 해도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나 다름없을 거라며 모두들 비웃지 않았던가.
“그런데 깨어났단 말인가? 어떻게?”
사실, 샤나메 자체에는 별다른 힘이 없었다. 그것은 단지 오래전에 그들이 잃어버린, 전설의 무기가 숨겨져 있는 위치를 찾을 수 있는 물건이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깨어나면서 소유자에게 잠재되어 있는 힘도 함께 깨운다.
즉, 티르메네스가 소문처럼 아무런 능력을 타고 나지 못했다면 절대로 깨어날 수 없는 것이 바로 샤나메인 것이다. 더구나 샤나메는 생성 이후 이제껏 단 한 번도 깨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이 깨어났다. 바로 지금!
“그렇다면 작은 왕자 또한 소문과는 달리 무언가 힘을 타고 태어났단 말인가? 설마…….”
하라는 하 투란에 있는 주인을 떠올렸다.
주인이 가진 힘은 깊고 거대하며 어둡고 순수하다. 이대로 무사히 각성의 시기를 맞이한다면 역대의 왕들 중 최고가 될 수 있으리라. 진정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힘을 타고난 거지?”
하라는 그것을 알아야 했다.
주인에게 데려가는 것과 힘을 확인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따지자면 작은 왕자 또한 후계자였다. 힘을 가진 아니, 문제가 없는 후계자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에게도 권리가 생긴다. 왕좌를 향해 도전할 수 있는 권리!”
하라의 초록빛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그를 반드시 데려가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같은 시각.
카비아니 가의 저택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 흑단처럼 검은 말 한 마리가 나타났다.
-드디어…….
검은 천 밖으로 드러난 황금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사내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마침내 샤나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깨어난 순간부터 그것의 존재를 느끼고 쫓아온 그에게 이것은 모든 것의 ‘시작‘을 의미했다. 더 이상 지루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무의미하게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기뻤다.
처음으로 지루함 이외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젠 샤나메를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곧 알게 되리라. 자신이 계속 존재하고 있는 이유를.
“당주가?”
슈라는 놀랐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그날 함께 보았던 막시무스란 자가 암습을 했다는 소문입니다만 그가 심문회에서 했다는 말을 들어보니 알려지지 않은 다른 진실이 있는 것도 같았습니다.”
“꼬마는?”
“그가 혼자 다 뒤집어 쓴 덕분에 아직은 안전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뒷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막 아덴부르크를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 온 도시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누가 누구를 암습했다더라……. 뭐, 이렇게 시작되는 소문이야 흔한 것이라 처음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모르긴 해도, 그 뒤에 ‘티르메네스‘ 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는 어제 아침 두말없이 도시를 떠났을 것이다.
“하필이면 그날 일이 벌어질 건 또 뭐였나, 그래?”
근사한 생일을 보내자마자 피를 봤겠구나 싶어 조금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열여섯, 아직은 어린 나이다. 이대로 두면 녀석은 그의 한쪽 날개가 되기도 전에 꺾여버릴 지 모른다.
아직은 안전하다는 자일로스의 보고를 받고도 슈라는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미처 알아채지 못한, 다른 무언가가 있는 듯 내내 속이 불편했다. 그가 지금까지 속 시원히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어쩐다?”
“솔직히 저는 조금 걱정이 됩니다, 전하.”
“뭐가?”
“그날 일로 그 아이는 전하의 신분을 눈치 챘을 겁니다. 더구나 선물로 주신 것도 있고…….”
“흐음, 걱정마라, 자일로스. 아직 조용한 걸 보면 다른 사람에게 떠벌린 건 아니야. 그럴 만큼 멍청한 녀석도 아니고.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다. 만약에 아이가 이번에 발생한 예기치 못한 사건 덕분에 선물로 받은 것을 지키지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거나 잃어버렸다면? 그래서 그것이 혹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아아, 그건 싫은 걸.”
“그…… 뿐이십니까?”
“그럼 뭐가 더 있어야 하나?”
전혀 긴장감 없는 대답에 자일로스는 난색을 하고 곁을 돌아보았다. 내내 말 한마디 없이 기둥처럼 무심한 얼굴로 서있는 이라즈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던 것이다. 전혀 관심 없는 얼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는 주군의 오랜 친구이자 오른팔이 아닌가.
애원이 담긴 시선을 진하게 보내주자 한참만에야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슈라를 향해 특유의 낮고도 느린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응? 왜 싫으냐고? 그거야 일단은 귀찮아질 테고…….”
“당장 시민병으로 구성된 수색대가 움직일 테니 귀찮을 뿐만 아니라 이 타국에서 깔끔하게 비명횡사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모처럼 탐나는 녀석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는데다…….”
“간첩으로 몰려 사이좋게 처형되겠군요.”
“결정적으로 내 앞길에 방해가 될 테니까.”
“잘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늘 그렇듯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내뱉은 무덤덤한 대답이긴 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정답이었다. 슈라는 사뭇 감동 맞은 얼굴로 이라즈를 돌아보았다.
“이라즈, 가끔 하는 생각이지만 넌 정말 인정머리 없는 놈이야.”
“오해십니다.”
“좀 더 다정하게 대꾸해줄 수도 있잖아?”
“여자로 태어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래, 우린 또 여자를 좋아하지. 젠장, 우리의 유일한 공통점이 그거라고 생각하니까 어쩐지 슬프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정한 놈!”
여자에게만 친절한 이라즈 따위를 친구로도 모자라 오른팔로까지 삼은 것이 슈라는 오늘따라 유난히 후회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역시 그 유일한 공통점 때문에 참는다, 이라즈. 슈라는 결심을 굳혔다.
“좋아. 일단 가보자고. 그 녀석이 어쩌고 있는지 정도는 봐두어도 나쁘지 않겠지.”
그의 발길이 다시 카비아니 가의 저택 쪽으로 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 시각.
티르는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반듯하게 누운 채 눈부신 한낮의 햇살을 받고 있었다. 죽을 듯이 아프던 것이 죄다 꿈속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야말로 허탈하다할 만큼 말짱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반짝 눈을 뜬 참이다.
“사, 살았나?”
낯익은 천장의 무늬를 눈으로 확인하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의심스러운 마음에 그는 멍하니 손을 들어 한쪽 뺨을 꼬집어봤다. 아프다. 정말로 살았나보다. 아아, 이 삼 줄기처럼 질긴 목숨이여. 복 받을 것이야!
“휴우, 큰 일 날 뻔 했잖아? 역시 아무거나 주워 먹는 게 아니라더니…….”
주워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사실 이렇게까지 아플 줄 알았다면 어렵더라도 무언가 다른 방법을 찾았을 지도 몰랐다. 정말로 숨이 딱 넘어가는 줄만 알았다. 죽을 때까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다.
살아난 것에 안도하고 아직 완전히 잊혀 지지 않은 고통에 다시 신음하다 꼼지락꼼지락 몸을 일으켰다. 살았으면 됐다. 무사히 살아났으니 이젠 무사히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반드시 탈출해 주마.”
움직이는데 지장이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팔다리를 휘휘 저으며 티르는 다시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뿐하지? 오늘따라 유난히 가볍게 느껴지는 몸이 어쩐지 조금 어색했다.
“잘 자서 그런가?”
손을 내려다보며 무심히 중얼거리다 순간 고개를 들었다. 저벅저벅. 누군가가 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힘 있고 묵직한 발소리. 덩치가 큰 사람이다. 당연히 나칼은 아니었다. 놈보다 훨씬 더 덩치가 큰 사람이리라.
티르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 단 한 번의 딸깍거림 뒤에 벌컥 문이 열렸다.
“여어~ 기다리고 있었나?”
탄탄이었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나타난 놈은 긴장한 얼굴로 서있는 티르를 스윽 훑어보더니 손가락으로 볼 위의 오래된 흉터를 긁으며 다가왔다.
“바라의 상태는 어떻지?”
애써 긴장을 감추며 티르가 물었다. 어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을 끝으로 더 이상 바라에 대한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아무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이 경우엔 절대로 해당이 안 된다.
‘그러고 보니 이상해. 왜 죽이지 않은 거지?’
나칼과 사냥꾼들이 벌인 일이라는 확신이 들자 이제는 그 점이 의심스러웠다. 왜 놈들은 바라를 완전히 죽이지 않은 걸까? 상태가 호전되기라도 하면 저들에게 불리해 질 텐데 말이다.
“무슨 속셈이지?”
“속셈이라니?”
“바라를 공격해놓고도 완전히 죽이지 않은 이유.”
“이런! 영감을 공격한 건 막시무스가 아닌가? 이유는 그가 알고 있겠지. 그 스스로 범행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티르메네스. 크크크.”
이미 다 들통 난 일이라는 것을 놈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한 점의 틈도 주지 않으려는 듯 그는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며 죄 없는 막시무스를 끌어다 붙이고 있었다. 덕분에 티르는 더더욱 화가 나고 말았다.
“죽일 놈! 언제까지 사실이 감춰질 거라고 생각하나? 내 반드시 모두에게 이번 일의 진실을 알리고 말겠다.”
“흥! 무슨 수로? 넌 곧 노예로 팔리게 된다. 노예의 말에 누가 귀를 기울이지?”
“그건…….”
“멍청한 놈.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놈들은 이래서 귀찮아. 이봐, 세상은 힘 있는 자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인다. 승리자의 기록만이 역사에 남는 거야.”
음침하게 대꾸하며 탄탄은 크게 한발 다가와 한손으로 티르의 머리를 꾹 잡아 눌렀다. 그리곤 입을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완전히 숨을 끊어놓지 않았냐고? 그거야 저 어리석은 나칼과 널 끝까지 위협할 수 있으니까. 이른바, 훌륭한 인질이라는 거지. 그리고…… 한 가지 궁금한 것도 있군.”
“……?”
“노인네가 뭘 구해왔다지?”
순간 번쩍 고개가 들렸다. 덜컥 의심도 들었다. 설마 이 자가 샤나메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어떻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짙은 의심의 빛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탄탄은 놓치지 않았다. 별채의 탑에서 쑥덕거릴 때 키아로 하여금 엿듣게 한 내용은 오직 그만이 전해 들었다. 그때 분명히 ‘엄청난‘ 선물을 구해왔다고 했었다. 어쩌면 그를 왕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을만한.
“그게 뭐지?”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고개를 뒤로 꺾으며 물었다.
“영감의 처소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그렇게 엄청나 보이는 것은 없었다. 어디에 숨겼지? 누가 가지고 있나? 응?”
“무, 무슨 헛소리야?”
“좋은 말로 할 때 대답하는 것이 좋을 거다, 티르메네스. 대답이 마음에 든다면 널 나리만에게 넘기지 않을 수도 있어. 잘 생각해라. 내일 노예시장이 열릴 때까지 기회를 주마.”
그 말과 함께 탄탄은 그를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그리곤 크게 웃으며 방을 나가버렸다. 쓰디쓴 미끼 하나를 던져놓고 사라지는 그의 등을 티르는 오래도록 노려보고 있었다.
탁!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탄탄은 가만히 숨을 골랐다. 어차피 놈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어린 녀석이 버텨보았자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나리만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놈이니 매질이라도 하면서 기다리면 틀림없이 사실을 털어놓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군.”
문득 나오면서 보았던 놈의 눈동자가 낯설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푸르던 눈동자가 순간 황금색으로 보였던 것이다.
“잘못 보았나?”
어차피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눈동자 색이야 변하든 말든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나저나 그 노예 계집도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군. 나중에라도 골칫거리가 될 수 있어.”
허리춤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탄탄은 다시 섬뜩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