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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하 투란(上)(1)]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잃어버렸던 운명과 조우했다. 나는 조금 아팠던 것 같다.
-위대한 샤 티르의 수줍은 고백 中-
-왔다!
죽음 같은 고요를 꿰뚫고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드디어 왔다. 그 아이가 왔다. 루칸은 기뻤다. 이렇게 순수한 기쁨으로 전율해본 적이 과연 있었나 싶을 정도로.
“축하드립니다, 루칸님. 드디어 만나시겠군요.”
-아아, 곧.
걸걸한 목소리 하나가 그를 향해 경하의 말을 던져온다. 루칸은 그마저도 기쁘게 받아들였다. 실로 오랜 시간이지 않았던가. 헤어져 있었던 시간은 길었다. 기다림으로 채워진 시간이었기에 더 길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이제 그 고통의 시간도 끝나게 되리라.
-돌아온다. 내 아우가.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선명한 기운 하나. 그 기운을 좇으며 루칸은 진심으로 기쁨이 가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헉!
숨죽인 신음성이 잠깐 어둠을 울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늘은 기쁜 날이었으므로.
“이건 사기다!”
티르는 버럭 소리쳤다. 이럴 수는 없었다. 어떤 마음으로 달려왔는데 이런단 말인가. 이건 배신이었다.
“아니 없는 건 없는 건데…….”
“그러니까 왜 없냐는 거잖아?”
“휴우, 그거야 지난 15년간 단 한 번도 비가 내린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헛! 그, 그게 말이 돼?”
“말이 되든 말든 어쨌거나 사실이 그렇답니다. 의심되시면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 확인을 하시던지.”
“……!”
아니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나.
티르는 좌절했다. 바싹 마른 흙먼지를 죄다 뒤집어쓰면서까지 달려온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물! 시원한 물로 몸을 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 희망이 방금 쨍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정말로 물이 없다는 건가?”
차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슈라가 여관의 종업원에게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그러자 아까 묻고 또 묻고 자꾸 묻는 그들에게 진즉부터 질려있었던 종업원은 화다닥 물러서며 창백한 얼굴로 경기를 하듯 소리쳤다.
“아, 글쎄 몸을 담글 수 있을 만큼 많은 물은 없다니까요! 더구나 이 하 투란에서 물을 버리는 건 죄악이란 말입니다. 그냥 수건을 적셔 적당히 닦으세요. 다들 그렇게 살아요.”
“다들?”
“누구나! 모두!”
빼도 박도 못하게 아예 못질을 해버리는 말에 일행은 순간 아득한 절망을 맛보았다.
“하라, 나 여기서 그냥 돌려보내주면 안 될까?”
“……죄송합니다.”
“이라즈, 오아시스로 다시 돌아가자.”
“움직일 힘도 없습니다.”
“아악 아악! 이봐, 이런 곳이라고 왜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거지?”
“알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싫으시면 이쯤에서 그냥 돌아가십시오. 어차피 초대한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하라는 차분한 어조로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그렇다. 하라가 거금 들여 사온(?) 티르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곳까지 올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라의 말처럼 애초에 그들을 초대한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반기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었다.
“흥! 돌아가는 건 어렵지 않아. 꼬맹이만 내준다면 당장이라도 돌아가 주지. 어때?”
“꿈 깨십시오. 순간의 탐욕이 죽음을 부른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호! 내게 덤비고도 무사할 자신이 있다는 소리인가?”
“이곳에서라면.”
하라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투란은 주인의 땅이다. 구석구석 그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주인의 존재로 인해 어둠의 힘을 사용하는 자들은 하 투란에서 몇 배나 더 강해진다. 그렇다보니 아직 능력을 시험해 본 적 없는 슈라를 상대로도 하라는 당당할 수 있었다.
각성의 시기를 코앞에 두고 있는 주인의 힘은 어느 때보다도 강렬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완전한 각성을 끝낸 후의 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작은 왕자가 무언가 힘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주인을 따라갈 순 없을 것이다.’
그것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밤마다 그에게 기척을 들키지 않고 사라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티르에게도 어떤 종류의 힘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에겐 결투의 의무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힘의 크기를 떠나 그는 주인과 함께 왕좌를 향해 도전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힘이 개방되는 때가 바로 도전의 밤이다. 도전자들은 이성을 잃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싸우게 된다. 그 와중에 패배한 자가 살아남을 확률은…… 없다.’
최후에 왕좌를 차지한 단 한명을 제외하고 이제껏 도전에 참여했던 모든 후계자가 죽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하라는 굳은 얼굴로 목욕을 할 수 없다며 투덜대는 티르를 바라보았다.
오는 동안 정이 조금 들긴 했다. 그러나 단지 그뿐. 처음부터, 세상 천지에 단 하나뿐인 핏줄을 그리워하는 주인을 위해 나선 길이었으니 사사로운 감정은 이쯤에서 접어야 한다. 주인은 이미 아우의 존재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곧 사자를 보내 그를 찾으리라.
“말하다 말고 왜 그렇게 느끼한 시선으로 우리 꼬마를 바라보는 거냐, 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흐응, 그래? 그나저나 자신 있는 모양인데 한판 붙을까?”
“훗! 지금은 사양하겠습니다.”
“왜? 두려운가?”
“천만에.”
“그럼?”
“……작은 슈라가 당신 발에 오줌을 싸고 있습니다.”
“……!”
순간, 모두의 시선이 슈라의 발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쪼매난 녀석 하나가 슈라의 발등에 궁뎅이를 대고 앉아 쉬를 싸고 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 하. 하아…….”
“으음.”
그들은 이미 당황하고 있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녀석이 졸졸졸 시원하게 오줌을 지리고 나서 쾌감에 젖어 바르르 몸을 떨 때까지도 모두들 동작을 멈춘 채 숨 쉬는 것마저 잊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다.
“너, 너, 너어……!”
볼 일을 다 마치고 슬쩍 고개를 드는 놈과 슈라의 눈이 공중에서 딱 마주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실룩실룩 엉덩이를 흔들며 티르에게 달려가는 녀석의 모습에 슈라는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이 새끼, 죽여 버리겠어!”
“어어, 이 쪼매난 녀석이 뭘 안다고 그랬겠어. 아직 어리니까 몰라서 그런 거지.”
“시끄러! 너, 그 똥개 이리 안 내놔!”
“어미로도 모자라 이 녀석까지 죽이려고? 절대 못 줘.”
“내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 으아아악!”
미치고 펄쩍 뛴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듯 슈라는 분을 이기지 못해 악을 쓰며 펄펄 날뛰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행들은 그런 그를 외면하고 간신히 잡은 각자의 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바빴다.
“어, 어딜 가?”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냄새납니다.”
“이라즈!”
“후우, 물도 없는데…….”
횅하니 돌아서는 이라즈를 뒤따르며 자일로스가 동정의 빛이 가득담긴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왔다.
“계속 그렇게 계실 겁니까?”
“뭐?”
“다행히 발 닦을 물은 있습니다만.”
그렇게 한쪽발이 젖은 슈라만 혼자 덜렁 남아 날 선 종업원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하 투란에 도착한 첫날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하 투란 사람들이 그러듯, 최소한의 물을 가지고 얼굴과 몸을 닦은 후 티르는 모처럼 밥다운 밥을 먹었다. 그것은 시원한 스프와 갓 구운 얇은 빵에 구운 고기를 넣어 싸먹는 독특한 음식이었지만 사막을 건너 하 투란을 찾은 다른 지역 사람들도 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을 만큼 담백하고 맛있었다.
그래서 티르는 모처럼 배가 부르도록 먹은 다음 여관의 자랑이라는, 차가운 차이를 마시면서 뜨거운 낮 시간을 보냈다.
“어떤 사람이지?”
이라즈가 집어주는 야채를 배가 부르도록 답삭답삭 받아먹은 새끼 흙도깨비들이 한데 엉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티르가 물었다.
“내 형이라는 사람 말이야.”
“강하고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흐응, 그리고?”
“그리고 외로운 분이시기도 합니다.”
“왜?”
“늘 혼자였으니까요.”
“혼자? 어째서 혼자지? 다른 가족은 없는 건가?”
그동안 애써 모른 척 했던 사람의 일이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한 건 역시나 그와의 만남이 코앞의 현실로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원치 않아도 만나야 한다면 최대한의 정보를 가지고 만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분의 가족은 티르메네스님 당신이 유일하십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죽었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그럼?”
“그건…… 그분을 만나시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실 겁니다.”
그 부분에서 티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다른 문제로 골몰하기 시작했다. 계속 고민해봐야 하라는 끝내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고 결국 그의 머리만 아플 게 뻔했기 때문에. 그래, 그런 사연쯤이야 까짓 만나면 다 알게 되겠지.
“우리 쌍둥이라고 했지?”
“예.”
“……닮았어?”
“잘 모르겠습니다.”
“안 닮은 건가?”
“외모는 닮으셨지만 기질은…… 다르신 듯 합니다.”
“얼마나?”
“아주 많이.”
많이. 아니 사실은 정반대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그들은 다르다. 그런 사실을 작은 왕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하라는 그것이 조금 궁금했다.
“왜 헤어지게 된 걸까?”
“…….”
“함께 자라지 못한 이유가 있을 거야. 그렇지?”
“그 또한…….”
“아아, 만나서 물어볼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그런데 그 전에 꼭 알고 싶은 게 하나 있어.”
“……?”
“그는, 왜 지금에서야 나를 찾는 거지?”
형이라고는 하지만 고작해야 열여섯. 자신과 동갑이다. 어른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리고 아이라고 하기엔 제법 머리가 굵은 나이. 설령 일찍 찾고 싶었다 해도 어린 나이에 뭘 할 수 있었을까. 듣자하니, 보호자라고 할 만한 다른 가족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따지자면 나도 고아로 자랐어. 하지만 다행히 할아버지인 바라가 있었지. 괘씸한 사촌도 하나 있었고. 나는 그저…… 같은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뿐이야.”
“행복하셨습니까?”
“글쎄. 다 가졌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역시 행복했었던 것 같아.”
“다행이군요. 그분께는, 처음부터 가족이라고 부를만한 존재가 없었습니다.”
“……!”
“일찍부터 당신이 당연스레 누려온 모든 것들 중 단 하나도 그분께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왜 지금에서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까? 그분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눈으로 이유를 확인하십시오.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은 그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