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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하 투란(上)(2)]
단호한 말보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내용에 티르는 조금 당혹감을 느꼈다. 아무도 없었다? 늘 혼자였다는, 갑자기 생겨난 형이란 존재를 향한 당혹감.
‘설령 그렇다 해도 미안해하지는 않겠다.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문제가 아니니까. 그건 누구의 죄도 아니지. ……그래도 나처럼 멍청히 굴다 노예로 팔리는 지경에 처한 것이 아니라 다행이네. 그렇지?’
그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적어도 티르 자신보다는 영리할 거라는 사실. 그리고 힘도 더 셀지 모르겠다. 하라 같은 자를 수족으로 데리고 있을 정도라면 말이다.
“어이, 둘이 사이좋게 방구석에 처박혀 뭐하고 있는 거지?”
언제 나타난 건지 슬쩍 열린 문 사이로 심술 맞은 슈라의 얼굴이 빼꼼 나타났다. 대강 봐도 아까의 일로 맺힌 억하심정이 다 풀리지 않은 얼굴이다.
“보다시피 차이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야.”
“흐응, 취향 한번 노인네 같기는……. 심심하지 않아?”
“으음, 조금. 왜?”
“여기 주인한테 들으니 며칠 뒤에 기우제인지 뭔지를 한다고 축제준비가 한창이라더군. 장도 서고 이야기꾼들이랑 무희며 악사들도 왔다지? 아무튼 떠들썩하게 판이 벌어졌나보더라. 우리도 구경 한번 가보자.”
“좋…… 어어, 가도 되려나?”
아무 생각 없이 선뜻 따라나서려다 티르는 퍼뜩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사정이야 어쨌든 일단은 노예다. 한두 푼짜리도 아니고 거금 5탈란톤에 팔려온 비싸신 몸이 바로 자신인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형을 팔아 모르는 척 생 까기엔 안타깝게도 너무 고가에 팔려버렸다.
“후우, 생각해 보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
“나를 산 사람이 노예취급을 안 해주고 있으니 노예로서의 자각이 안 생기잖아. 이봐, 주인. 나랑 거래하자.”
“거래라고 하시면?”
“어차피 나를 노예로 부릴 생각으로 산 건 아니잖아?”
“아, 구해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뿐입니다. 문서도 이미 없애버렸으니 그 일은 신경 쓰실 필요가…….”
“아니, 아니지. 그러면 너무 허탈해. 유야무야 없었던 일로 해버리면 내 기분도 너무 안 좋을 것 같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한테 5탈란톤을 빌려준 셈 치고 그걸 내가 언젠가 갚는 방식으로 계산해주면 안 될까?”
“꼭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시다면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개의치 않겠습니다.”
어허, 이 사람이 돈 부족해 본 적이 없는 게로군.
아덴부르크 제일의 부자인 바라는 그에게 항상 단 1드라크마도 낭비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전에 절대로 남에게 빚을 지거나 돈을 빌리지 말라는 말을 먼저하곤 했다. 어쩔 수 없이 빌렸을 경우에는 굶더라도 가장 먼저 갚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신뢰를 잃지 않는다는 사실도 가르쳐 주었다.
그런 철저한 가르침 덕에 티르는 지난해부터 종종 ‘작은 바라‘라고 불리고 있었다. 물론 그조차도 이젠 쓸모없는 추억속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계산한다면 내가 돈을 빌린 것이 되니까 차용증을 써줄게.”
“흐응, 근데 5탈란톤을 갚으려면 대체 얼마나 걸릴까?”
“그게 궁금한 거야, 슈라?”
흥미롭다는 듯 건성으로 호기심을 드러내는 슈라를 티르는 눈을 반쯤 내리깐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러면 안 되지만 어쩐지 괴롭혀주고 싶다. 기겁하는 얼굴을 봐야 기분이 좀 나아질 듯도 하다. 작은 슈라를 괴롭힌 일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은 건 절대로 아니다.
“사실은 나도 그게 궁금하긴 해.”
아직도 팔뚝께에 잘 매달려있는 문제의 팔찌를 만지며 티르는 마치 보란 듯이 떠들기 시작했다.
“이 팔찌를 팔면 갚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대체 이건 얼마를 받고 팔아야 하려나?”
“어라라?”
“얼마에 사줄 수 있는 거지, 슈라?”
“헛!”
“바라가 그랬는데 이 하 투란의 금시장이 꽤 유명하다더라. 적당한 보석상을 찾아 가서 팔아도 될까나?”
“젠장! 영악한 꼬마 놈 같으니라고. 팔기만 해봐. 모르는 모양인데 거기 안쪽에 내 이름 적어놨거든? 그거 들키면 우린 사이좋게 간첩으로 몰려 토막처형 당한 다음 도시 입구에 내걸리게 될 거다. 신선한 경험이 되겠지?”
“제길! 그놈의 낙서. 유치하게 이름은 왜 적어 넣은 거야?”
“너 좋으라고. 조심해라, 꼬마. 아무리 독립한 지 이백년이라지만 이곳 하 투란은 아직도 동부 투란 제국에 기대 살고 있는 곳이다. 즉, 카도니아에서 온 우리나 우리와 친분이 있는 너는 애초부터 적국 사람으로 분류된단 말이다. 알아들어?”
“확실히!”
아, 똥 밟았다.
순간 그런 생각이 고개를 끄덕이는 티르의 머리를 스치고 있었다. 어쩌다 슈라 일행과 안면을 터서 가는 곳마다 간첩으로 엮이게 될 상황을 만들게 된 건가, 그래. 사뭇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걱정마라. 설마하니 내 왼팔을 빚쟁이 상태로 오래 두기야 하겠냐?”
“왼팔?”
“어, 왼팔은 싫으냐? 좋아, 그럼 왼쪽 날개라고 하지 뭐.”
“날개? 에, 그 조류에게나 있는 물건이랑 나를 연결 짓는 건 어쩐지 기분 나빠. 차라리 그냥 왼팔로 해. 별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빚 갚는 일이라고 생각할게. 그런데 오른팔은 누구지?”
“누굴 것 같으냐?”
“……볼 것도 없이 이라즈군.”
슈라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라본다. 그거야 간단한 일이었다. 찰떡처럼 그와 붙어 다니는 두 사람 중 하나가 문제의 오른팔일 것은 자명한 일. 오른팔이라면 적어도 알 것 다 알고 볼 것도 이미 다 본 사이나 다름없을 거였다.
“약점을 잡히기도 쉬울 거란 말이지. 생각해 보니 당신은 유난히 이라즈에게 약했거든?”
“약점 같은 거 잡힌 적 없어!”
“흥! 그거야 모르는 일이고. 어쨌거나 뭘 믿고 나를 왼팔로 삼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단돈 5탈란톤에 이 새파란 인생을 저당 잡히고 싶지 않으니까…… 계약을 하자.”
“계, 계약?”
“그래, 계약. 내용은, 앞으로 일을 해서 5탈란톤을 벌어 갚거나 혹은 앞으로 5년간 당신을 위해 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빚을 탕감한다는 것으로 하겠어. 물론 이건 내가 하라에게 빌린 돈을 당신이 대신 갚아주었을 때나 가능한 얘기겠지?”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나 되는 것처럼 막힘없이 혼자 다다다 떠들어놓은 티르는 멍하니 선 슈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먼저 방을 나서면서 말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줘 봐.”
“쳇! 그렇게 쉬울 것 같았으면 여기까지 따라오지도 않았겠다. 고집인지 뭔지, 양보하라고 해도 흥! 팔라고 해도 흥! 비도 안 내리는 동네까지 뭐 하러 기어 들어와서는…….”
“구경 안 나가실 겁니까?”
궁시렁 거리는 그를 스쳐지나가며 하라가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다시 보니 역시 찔러도 피한방울 안 새어 나오게 생긴 얼굴이다.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며시 떠보았다.
“그만 양보하지?”
“일 없습니다.”
“너도 어지간히 인정머리 없는 놈이다.”
“감사합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고개를 까딱인 다음 하라는 냉큼 티르의 뒤를 따랐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혼자 남은 슈라는 퍽퍽 답답한 가슴만 쳐대야 했다.
“그렇게 탐이 나시는 겁니까?”
언제 올라온 건지 등 뒤에서 나타난 이라즈가 불쑥 물었다.
“그저 어린 꼬마일 뿐입니다. 더구나 만만치 않은 적을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굳이 탐내시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넌 모른다, 이라즈. 녀석에겐 힘이 있어. 내 힘이 녀석의 힘을 느끼고 있다. 확실하게. 티르메네스는 아직 부화하지 않은 드래곤과 같다. 알은 언젠가는 부화하게 마련이지. 단언하건대, 녀석을 가지는 자가 세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상대가 만만치 않을 듯 합니다만.”
“형이라고 했던가?”
“쌍둥이라더군요.”
“걱정할 것 없다, 이라즈. 너도 느끼고 있지 않나? 상대는 틀림없이 어둠에 속한 자다. 그러나 티르메네스의 힘은 너무 밝지. 어울릴 수 없을 거다. 결국 대륙을 가지는 자는 나다!”
“지당하신 말씀.”
지배자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 그는 위대한 신의 혈통을 이은 존재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렇게 배워왔다. 그리고 머잖아 그렇게 될 것이다. 한껏 미소를 머금은 슈라의 한손엔 어느새 푸른빛을 띤 맑은 바람이 맴돌고 있었다.
로무네스는 이상한 의뢰를 받았다.
말하자면, 의뢰인부터가 이상한 편이다.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애라니……. 확실히 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 어린 의뢰인은 단단히 분위기를 잡던 것과 달리 조금 생뚱맞은 의뢰를 하고 휑하니 돌아갔다.
“아칸과 잘 놀아달라니…… 장난하나?”
차라리 장난이었으면 이렇게 골치가 아프지 않았을 거다. 어이없지만 의뢰인은 진심이었고 딴에는 의뢰 내용도 심각했다.
-아칸을 자주 방문해 그쪽의 사정을 알아봐 주십시오.
“다니무스라면 노예로 팔렸다는 작은 도령과 절친한 사이였을 텐데……. 역시 카비아니 가의 사정이 궁금한 건가? 왜지?”
카비아니 가의 사정을 알아봤자 이미 팔려버린 티르메네스가 돌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알고 봤더니 친 혈육이 아니었다고 하잖은가. 곰곰이 생각하다 로무네스는 바라를 떠올렸다.
“그래도 친구였다고 바라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는 건가보군? 혹시 모르지. 티르메네스가 떠나기 전에 바라를 부탁하고 간 건지도.”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왜 하필 아칸을 지목한 것이냐 하는 것. 아칸은 큰 도령인 나칼의 수족으로 있다. 티르메네스와는 딱히 친분이라는 것을 쌓은 적이 없는 사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나는 그저 아칸이 떠드는 소리를 잘 듣고 전해주기만 하면 되니까.”
떠들고 보니 내용이 참 간단했다. 그러나 별로 힘 들 것까지도 없는 그 간단한 의뢰가 심각해 진건 의뢰비로 건네진 돈의 액수 때문이다. 1탈란톤! 한 달은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 이 큰 돈이 계약금이란 말이지?”
세상물정을 모른다고 보기엔 서기관의 아들이라는 자리가 가시처럼 턱 걸린다. 서기관이라면 시의 물정에 빠삭하고도 남는 자리. 그렇다면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는 뜻일 게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고 혼자서만 은밀히 집으로 직접 찾아와서 보고해 달라는 걸 보니 문제가 있긴 있어. 대체 그게 뭘까?”
처음부터 선뜻 받아들이기가 꺼려지더니 갈수록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재게 만든다.
“에잇, 모르겠다. 그냥 하라는 대로 해주지 뭐. 현상금 사냥이나 하려 했는데 이쪽도 나쁘진 않잖아.”
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는 탁자위의 종이를 와락 구겨버렸다. 방금 전까지 그가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던 종이 위에는 삐뚤삐뚤한 그림과 함께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막시무스. 26세. 전 카비아니 가의 일급 무사.
죄명: 살인미수. 탈옥.
현상금 2탈란톤. 제보자에게도 사례하겠음.
이상 아덴부르크 시장 백.
구겨진 종이가 로무네스의 손에 의해 쓰레기통으로 멋지게 골인하는 순간이었다.
“싸요, 싸! 단돈 5드라크마. 맛있는 빠에야에 고기를 듬뿍 넣어 드립니다.”
“싱싱한 야채 있어요. 1무나에 가져가세요.”
“헤라나므의 무녀들이다!”
“어디 어디……!”
안 그래도 소란스럽던 시장 한복판이 무녀들의 등장으로 한꺼번에 ‘왁‘하고 달아올랐다. 사람들 틈에 섞여 길거리음식을 구경하고 있던 티르 일행도 귀가 솔깃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헤라나므의 무녀들?”
“아아, 물의 여신인 아나히타를 섬기는 무녀들이다. 그녀들의 신전을 여기서는 헤라나므라고 부르고 있더라.”
아르드비 수라 아나히타. 물의 여신은 어딜 가나 인기가 많다. 물을 상징하는 푸른 달에도 아나히타라는 이름을 붙인 걸 보면 그 애정도가 보통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왜 안 그렇겠는가. 물이 귀한 곳에서 물의 여신만큼 필요한 신은 결코 없을 것인데.
아르드비 수라 아나히타는 땅 위 모든 물의 여신이자 우주 대양의 수원이다. 그녀는 바람, 비, 구름 그리고 진눈깨비의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를 몰고 다닌다고 알려져 있다. 모든 어머니들의 어머니. 정결한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 때문에 전장에서 전사들은 그녀에게 생존과 승리를 염원하는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그러면 뭐하냐고. 이 땅엔 자그마치 15년간이나 비가 안 왔다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
사람들의 머리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무녀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하라가 속삭였다.
“여신은 사라졌습니다.”
“엥? 사라져?”
“예.”
순간 잘못 들었나싶어 귀를 의심해 보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하라를 보고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여신이 사라지다니? 가출이라도 했다는 소리야?”
“훗,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저 여신이 주관하고 있던 모든 일들이 드물어졌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퍼진 것이랍니다. 백여 년 전에 비해 비나 눈이 내리는 일이 드물어진데다 이 하 투란은 극단적으로 15년간이나 비가 내리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아덴부르크에는 강이 있는데다 바다와 면해 있어서 물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거든.”
“여신이 혹 소멸한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나 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신을 섬기는 신관들은 그분이 그저 잠시 잠든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흐응, 신도 잠을 자는 거야?”
“그런 모양입니다.”
믿어지지 않기는 하라도 마찬가지인지 그저 어깨만 슬쩍 올려 보이고 만다. 그러자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는지 슈라가 냉큼 끼어들어 덧붙였다.
“여신이 사라졌네 뭐네 해도 물이 풍부하게 넘치는 곳이 딱 한군데 있긴 있다.”
“카도니아?”
“그랬으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아니다. 카도니아에는 일 년에 두세 번 큰 비가 내리고 말거든. 그래서 강보다 샘이 더 많다.”
“그럼 어디를 말하는 거지?”
“엘룬이다.”
“엘룬?”
단호한 말보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내용에 티르는 조금 당혹감을 느꼈다. 아무도 없었다? 늘 혼자였다는, 갑자기 생겨난 형이란 존재를 향한 당혹감.
‘설령 그렇다 해도 미안해하지는 않겠다.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문제가 아니니까. 그건 누구의 죄도 아니지. ……그래도 나처럼 멍청히 굴다 노예로 팔리는 지경에 처한 것이 아니라 다행이네. 그렇지?’
그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적어도 티르 자신보다는 영리할 거라는 사실. 그리고 힘도 더 셀지 모르겠다. 하라 같은 자를 수족으로 데리고 있을 정도라면 말이다.
“어이, 둘이 사이좋게 방구석에 처박혀 뭐하고 있는 거지?”
언제 나타난 건지 슬쩍 열린 문 사이로 심술 맞은 슈라의 얼굴이 빼꼼 나타났다. 대강 봐도 아까의 일로 맺힌 억하심정이 다 풀리지 않은 얼굴이다.
“보다시피 차이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야.”
“흐응, 취향 한번 노인네 같기는……. 심심하지 않아?”
“으음, 조금. 왜?”
“여기 주인한테 들으니 며칠 뒤에 기우제인지 뭔지를 한다고 축제준비가 한창이라더군. 장도 서고 이야기꾼들이랑 무희며 악사들도 왔다지? 아무튼 떠들썩하게 판이 벌어졌나보더라. 우리도 구경 한번 가보자.”
“좋…… 어어, 가도 되려나?”
아무 생각 없이 선뜻 따라나서려다 티르는 퍼뜩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사정이야 어쨌든 일단은 노예다. 한두 푼짜리도 아니고 거금 5탈란톤에 팔려온 비싸신 몸이 바로 자신인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형을 팔아 모르는 척 생 까기엔 안타깝게도 너무 고가에 팔려버렸다.
“후우, 생각해 보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
“나를 산 사람이 노예취급을 안 해주고 있으니 노예로서의 자각이 안 생기잖아. 이봐, 주인. 나랑 거래하자.”
“거래라고 하시면?”
“어차피 나를 노예로 부릴 생각으로 산 건 아니잖아?”
“아, 구해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뿐입니다. 문서도 이미 없애버렸으니 그 일은 신경 쓰실 필요가…….”
“아니, 아니지. 그러면 너무 허탈해. 유야무야 없었던 일로 해버리면 내 기분도 너무 안 좋을 것 같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한테 5탈란톤을 빌려준 셈 치고 그걸 내가 언젠가 갚는 방식으로 계산해주면 안 될까?”
“꼭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시다면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개의치 않겠습니다.”
어허, 이 사람이 돈 부족해 본 적이 없는 게로군.
아덴부르크 제일의 부자인 바라는 그에게 항상 단 1드라크마도 낭비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전에 절대로 남에게 빚을 지거나 돈을 빌리지 말라는 말을 먼저하곤 했다. 어쩔 수 없이 빌렸을 경우에는 굶더라도 가장 먼저 갚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신뢰를 잃지 않는다는 사실도 가르쳐 주었다.
그런 철저한 가르침 덕에 티르는 지난해부터 종종 ‘작은 바라‘라고 불리고 있었다. 물론 그조차도 이젠 쓸모없는 추억속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계산한다면 내가 돈을 빌린 것이 되니까 차용증을 써줄게.”
“흐응, 근데 5탈란톤을 갚으려면 대체 얼마나 걸릴까?”
“그게 궁금한 거야, 슈라?”
흥미롭다는 듯 건성으로 호기심을 드러내는 슈라를 티르는 눈을 반쯤 내리깐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러면 안 되지만 어쩐지 괴롭혀주고 싶다. 기겁하는 얼굴을 봐야 기분이 좀 나아질 듯도 하다. 작은 슈라를 괴롭힌 일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은 건 절대로 아니다.
“사실은 나도 그게 궁금하긴 해.”
아직도 팔뚝께에 잘 매달려있는 문제의 팔찌를 만지며 티르는 마치 보란 듯이 떠들기 시작했다.
“이 팔찌를 팔면 갚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대체 이건 얼마를 받고 팔아야 하려나?”
“어라라?”
“얼마에 사줄 수 있는 거지, 슈라?”
“헛!”
“바라가 그랬는데 이 하 투란의 금시장이 꽤 유명하다더라. 적당한 보석상을 찾아 가서 팔아도 될까나?”
“젠장! 영악한 꼬마 놈 같으니라고. 팔기만 해봐. 모르는 모양인데 거기 안쪽에 내 이름 적어놨거든? 그거 들키면 우린 사이좋게 간첩으로 몰려 토막처형 당한 다음 도시 입구에 내걸리게 될 거다. 신선한 경험이 되겠지?”
“제길! 그놈의 낙서. 유치하게 이름은 왜 적어 넣은 거야?”
“너 좋으라고. 조심해라, 꼬마. 아무리 독립한 지 이백년이라지만 이곳 하 투란은 아직도 동부 투란 제국에 기대 살고 있는 곳이다. 즉, 카도니아에서 온 우리나 우리와 친분이 있는 너는 애초부터 적국 사람으로 분류된단 말이다. 알아들어?”
“확실히!”
아, 똥 밟았다.
순간 그런 생각이 고개를 끄덕이는 티르의 머리를 스치고 있었다. 어쩌다 슈라 일행과 안면을 터서 가는 곳마다 간첩으로 엮이게 될 상황을 만들게 된 건가, 그래. 사뭇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걱정마라. 설마하니 내 왼팔을 빚쟁이 상태로 오래 두기야 하겠냐?”
“왼팔?”
“어, 왼팔은 싫으냐? 좋아, 그럼 왼쪽 날개라고 하지 뭐.”
“날개? 에, 그 조류에게나 있는 물건이랑 나를 연결 짓는 건 어쩐지 기분 나빠. 차라리 그냥 왼팔로 해. 별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빚 갚는 일이라고 생각할게. 그런데 오른팔은 누구지?”
“누굴 것 같으냐?”
“……볼 것도 없이 이라즈군.”
슈라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라본다. 그거야 간단한 일이었다. 찰떡처럼 그와 붙어 다니는 두 사람 중 하나가 문제의 오른팔일 것은 자명한 일. 오른팔이라면 적어도 알 것 다 알고 볼 것도 이미 다 본 사이나 다름없을 거였다.
“약점을 잡히기도 쉬울 거란 말이지. 생각해 보니 당신은 유난히 이라즈에게 약했거든?”
“약점 같은 거 잡힌 적 없어!”
“흥! 그거야 모르는 일이고. 어쨌거나 뭘 믿고 나를 왼팔로 삼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단돈 5탈란톤에 이 새파란 인생을 저당 잡히고 싶지 않으니까…… 계약을 하자.”
“계, 계약?”
“그래, 계약. 내용은, 앞으로 일을 해서 5탈란톤을 벌어 갚거나 혹은 앞으로 5년간 당신을 위해 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빚을 탕감한다는 것으로 하겠어. 물론 이건 내가 하라에게 빌린 돈을 당신이 대신 갚아주었을 때나 가능한 얘기겠지?”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나 되는 것처럼 막힘없이 혼자 다다다 떠들어놓은 티르는 멍하니 선 슈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먼저 방을 나서면서 말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줘 봐.”
“쳇! 그렇게 쉬울 것 같았으면 여기까지 따라오지도 않았겠다. 고집인지 뭔지, 양보하라고 해도 흥! 팔라고 해도 흥! 비도 안 내리는 동네까지 뭐 하러 기어 들어와서는…….”
“구경 안 나가실 겁니까?”
궁시렁 거리는 그를 스쳐지나가며 하라가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다시 보니 역시 찔러도 피한방울 안 새어 나오게 생긴 얼굴이다.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며시 떠보았다.
“그만 양보하지?”
“일 없습니다.”
“너도 어지간히 인정머리 없는 놈이다.”
“감사합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고개를 까딱인 다음 하라는 냉큼 티르의 뒤를 따랐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혼자 남은 슈라는 퍽퍽 답답한 가슴만 쳐대야 했다.
“그렇게 탐이 나시는 겁니까?”
언제 올라온 건지 등 뒤에서 나타난 이라즈가 불쑥 물었다.
“그저 어린 꼬마일 뿐입니다. 더구나 만만치 않은 적을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굳이 탐내시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넌 모른다, 이라즈. 녀석에겐 힘이 있어. 내 힘이 녀석의 힘을 느끼고 있다. 확실하게. 티르메네스는 아직 부화하지 않은 드래곤과 같다. 알은 언젠가는 부화하게 마련이지. 단언하건대, 녀석을 가지는 자가 세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상대가 만만치 않을 듯 합니다만.”
“형이라고 했던가?”
“쌍둥이라더군요.”
“걱정할 것 없다, 이라즈. 너도 느끼고 있지 않나? 상대는 틀림없이 어둠에 속한 자다. 그러나 티르메네스의 힘은 너무 밝지. 어울릴 수 없을 거다. 결국 대륙을 가지는 자는 나다!”
“지당하신 말씀.”
지배자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 그는 위대한 신의 혈통을 이은 존재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렇게 배워왔다. 그리고 머잖아 그렇게 될 것이다. 한껏 미소를 머금은 슈라의 한손엔 어느새 푸른빛을 띤 맑은 바람이 맴돌고 있었다.
로무네스는 이상한 의뢰를 받았다.
말하자면, 의뢰인부터가 이상한 편이다.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애라니……. 확실히 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 어린 의뢰인은 단단히 분위기를 잡던 것과 달리 조금 생뚱맞은 의뢰를 하고 휑하니 돌아갔다.
“아칸과 잘 놀아달라니…… 장난하나?”
차라리 장난이었으면 이렇게 골치가 아프지 않았을 거다. 어이없지만 의뢰인은 진심이었고 딴에는 의뢰 내용도 심각했다.
-아칸을 자주 방문해 그쪽의 사정을 알아봐 주십시오.
“다니무스라면 노예로 팔렸다는 작은 도령과 절친한 사이였을 텐데……. 역시 카비아니 가의 사정이 궁금한 건가? 왜지?”
카비아니 가의 사정을 알아봤자 이미 팔려버린 티르메네스가 돌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알고 봤더니 친 혈육이 아니었다고 하잖은가. 곰곰이 생각하다 로무네스는 바라를 떠올렸다.
“그래도 친구였다고 바라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는 건가보군? 혹시 모르지. 티르메네스가 떠나기 전에 바라를 부탁하고 간 건지도.”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왜 하필 아칸을 지목한 것이냐 하는 것. 아칸은 큰 도령인 나칼의 수족으로 있다. 티르메네스와는 딱히 친분이라는 것을 쌓은 적이 없는 사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나는 그저 아칸이 떠드는 소리를 잘 듣고 전해주기만 하면 되니까.”
떠들고 보니 내용이 참 간단했다. 그러나 별로 힘 들 것까지도 없는 그 간단한 의뢰가 심각해 진건 의뢰비로 건네진 돈의 액수 때문이다. 1탈란톤! 한 달은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 이 큰 돈이 계약금이란 말이지?”
세상물정을 모른다고 보기엔 서기관의 아들이라는 자리가 가시처럼 턱 걸린다. 서기관이라면 시의 물정에 빠삭하고도 남는 자리. 그렇다면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는 뜻일 게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고 혼자서만 은밀히 집으로 직접 찾아와서 보고해 달라는 걸 보니 문제가 있긴 있어. 대체 그게 뭘까?”
처음부터 선뜻 받아들이기가 꺼려지더니 갈수록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재게 만든다.
“에잇, 모르겠다. 그냥 하라는 대로 해주지 뭐. 현상금 사냥이나 하려 했는데 이쪽도 나쁘진 않잖아.”
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는 탁자위의 종이를 와락 구겨버렸다. 방금 전까지 그가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던 종이 위에는 삐뚤삐뚤한 그림과 함께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막시무스. 26세. 전 카비아니 가의 일급 무사.
죄명: 살인미수. 탈옥.
현상금 2탈란톤. 제보자에게도 사례하겠음.
이상 아덴부르크 시장 백.
구겨진 종이가 로무네스의 손에 의해 쓰레기통으로 멋지게 골인하는 순간이었다.
“싸요, 싸! 단돈 5드라크마. 맛있는 빠에야에 고기를 듬뿍 넣어 드립니다.”
“싱싱한 야채 있어요. 1무나에 가져가세요.”
“헤라나므의 무녀들이다!”
“어디 어디……!”
안 그래도 소란스럽던 시장 한복판이 무녀들의 등장으로 한꺼번에 ‘왁‘하고 달아올랐다. 사람들 틈에 섞여 길거리음식을 구경하고 있던 티르 일행도 귀가 솔깃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헤라나므의 무녀들?”
“아아, 물의 여신인 아나히타를 섬기는 무녀들이다. 그녀들의 신전을 여기서는 헤라나므라고 부르고 있더라.”
아르드비 수라 아나히타. 물의 여신은 어딜 가나 인기가 많다. 물을 상징하는 푸른 달에도 아나히타라는 이름을 붙인 걸 보면 그 애정도가 보통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왜 안 그렇겠는가. 물이 귀한 곳에서 물의 여신만큼 필요한 신은 결코 없을 것인데.
아르드비 수라 아나히타는 땅 위 모든 물의 여신이자 우주 대양의 수원이다. 그녀는 바람, 비, 구름 그리고 진눈깨비의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를 몰고 다닌다고 알려져 있다. 모든 어머니들의 어머니. 정결한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 때문에 전장에서 전사들은 그녀에게 생존과 승리를 염원하는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그러면 뭐하냐고. 이 땅엔 자그마치 15년간이나 비가 안 왔다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
사람들의 머리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무녀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하라가 속삭였다.
“여신은 사라졌습니다.”
“엥? 사라져?”
“예.”
순간 잘못 들었나싶어 귀를 의심해 보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하라를 보고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여신이 사라지다니? 가출이라도 했다는 소리야?”
“훗,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저 여신이 주관하고 있던 모든 일들이 드물어졌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퍼진 것이랍니다. 백여 년 전에 비해 비나 눈이 내리는 일이 드물어진데다 이 하 투란은 극단적으로 15년간이나 비가 내리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아덴부르크에는 강이 있는데다 바다와 면해 있어서 물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거든.”
“여신이 혹 소멸한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나 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신을 섬기는 신관들은 그분이 그저 잠시 잠든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흐응, 신도 잠을 자는 거야?”
“그런 모양입니다.”
믿어지지 않기는 하라도 마찬가지인지 그저 어깨만 슬쩍 올려 보이고 만다. 그러자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는지 슈라가 냉큼 끼어들어 덧붙였다.
“여신이 사라졌네 뭐네 해도 물이 풍부하게 넘치는 곳이 딱 한군데 있긴 있다.”
“카도니아?”
“그랬으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아니다. 카도니아에는 일 년에 두세 번 큰 비가 내리고 말거든. 그래서 강보다 샘이 더 많다.”
“그럼 어디를 말하는 거지?”
“엘룬이다.”
“엘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