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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하 투란(上)(3)]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티르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뜨끔해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나칼은 그를 향해 엘룬인이라고 했었다. 엘룬인. 엘룬. 간혹 들어본 적은 있어도 가본 적은 물론이고 엘룬인이라는 소리를 들은 이후에도 어떤 곳인지 궁금해 해본 적도 없는 곳이다. 어쩌면 고향…… 일지도 모르는.
“무, 물을 다루는 술사들이 사는 곳이라는 소리는 나도 들었어.”
“단순히 물을 다루는 술사들만 있는 건 아니다. 바람, 불, 물……. 술사들의 능력은 각각 다르지. 다만, 엘룬의 왕족이라 할 수 있는 샤(shah) 가(家)의 직계에 물을 다루는 술사들이 많아 그렇게 여겨지고 있는 거다.”
“샤(shah)?”
“응. 성 자체가 왕이라는 뜻이다. 재밌지? 엘룬은 신의 은총을 받은 신지라 나라를 불문하고 불가침의 관례를 따르게 되어있다. 그런 관례가 없었다면 진즉부터 짓밟혀도 수십 번은 짓밟혔을 텐데…… 운이 좋았지 뭐냐.”
“운인가?”
“운이지. 뭐, 그 운도 지금은 꽤 아슬아슬하게 되었지만 말이야.”
“……?”
“물이 부족한 곳에서 엘룬 출신 물의 술사들을 닥치는 대로 초빙하고 있거든. 하지만 말이 초빙이지 거의 납치나 다름없고 노예처럼 거래되는 경우도 종종 봤다.”
“나처럼?”
반사적으로 중얼거리다 제풀에 놀라 티르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순간 쌍둥이 형에 대해서 떠올렸다.
‘가족도 없이 늘 혼자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혹시……?’
혹시 그도 물의 술사나 뭐 그런 것이어서 일찍이 납치를 당해 감금되어 있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닐까?
“아닙니다.”
그의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하라가 가볍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리곤 남몰래 귓가에 속삭이는 말.
“아닙니다, 그런 것은. 그분은 약하지 않습니다.”
“아아…….”
“당신께서는 샤 가의 핏줄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혈통을 타고 나셨습니다. 명심하십시오.”
“무슨 뜻이지? 내가 엘룬인이 아니라는 건가?”
“엘룬인입니다. 그러나 아니기도 합니다.”
“……?”
“그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기회에 해드리겠습니다. 곧.”
아리송한 말에 티르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엘룬인인데 아니기도 하다? 뭐 그런 복잡한 표현이 다 있는 건가.
“어? 이라즈가 어딜 가는 거지?”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 아닌 고민에 빠지려는데 문득 곁에 있던 이라즈가 헤라나므의 무희들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뭘 하려는 거지?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 사이를 삐쭉 키가 큰 그는 슥슥 잘도 빠져나갔다. 망설이는 기색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는 큰 걸음으로 척척 나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무녀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옷 한번 죽이는구나.”
이라즈의 뒤꽁무니를 좇던 슈라가 낮게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은 이라즈의 등짝에서 무녀들의 옷으로 이동했다.
무녀들이 입고 있는, 하늘거리는 푸른색의 옷은 디자인이 제법 독특해서 옷의 거의 모든 부분이 길었다. 치마는 바닥에 끌릴 정도이며 상의의 소매는 손가락 끝이 안 보일정도다. 그러나 단 한군데 유난히 짧은 곳이 있었다. 그건 바로…… 허리.
“배꼽 보인다.”
“저게 바로 진짜 섹시한 옷이란 거다. 저 날렵한 허리선에 반할 것 같지 않으냐?”
“그, 글쎄. 잘 모르겠는 걸? 크흠.”
“크크큭, 자슥 순진하기는.”
“수, 순진하기는 누가! 헛소리 말고 저기 가고 있는 당신 오른팔이나 신경 쓰시지.”
이라즈는 어느새 무녀들 근처에 바짝 다가가 있었다.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무녀들을 홀린 듯 바라본다. 그러더니 춤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녀중 하나에게 척 달라붙어 뭐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아니 이라즈가 감히 지을 수 있다고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는, 황홀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저, 저 사람 저렇게 웃는 법도 아는 사람이었어?”
“아아, 물론이지. 단, 여자 앞에서만.”
“엥?”
“여자를 위해서만. 그 이유가 아니라면 저렇게 웃을 리가 없는 놈이다, 이라즈는.”
“왜?”
“묻지 마라. 다친다, 꼬마. 그냥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엄청 슬픈 사연이 있다고만 알아둬.”
아니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뭐냐니까?
다칠 땐 다치더라도 그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다는 사연을 꼭 듣고 싶은 티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슬금슬금 다가갔다가 실수로 듣고만 이라즈의 말에 그런 생각은 싹 사라지고 말았다.
“……꽃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하찮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여신도 당신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지지 못했을 겁니다.”
“아! 그런…….”
“쉿! 의심하지 마십시오. 저는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싶을 뿐이랍니다. 당신은 이미 저를 사로잡으셨습니다. 이 약한 남자는 첫눈에 심장을 빼앗기고 말았답니다. 들리십니까, 당신을 향해 뛰고 있는 이 심장소리가?”
홀딱 드러난 여자의 허리에 팔을 감고 온갖 느끼한 대사를 읊어대고 있는 저 남자가 과연 무뚝뚝하고 표정 없기로 유명한 그 이라즈가 맞는 건가? 이라즈의 탈을 쓴 슈라라거나 알려지지 않은 제3의 인물이 아니고?
티르는 눈을 비비고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이라즈는 여전히 닭살이 튀고 기름이 줄줄 흘러내리다 못해 살인적이기까지 한 언어를 유유히 남발하고 있었고 덕분에 본의 아니게 그의 주변에 있던 남자들은 무참하게 역류하는 위를 부여잡고 서서히 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 한두 번 보는 일도 아니지만 볼 때마다 죽여 없애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구나.”
“망설일 것 없어. 죽여 버려.”
“그럴까?”
“우리를 위해 눈 딱 감고 한번만 결심을 해주길 바래, 슈라. 내가 이라즈보다 기름기 없는 담백한 오른팔을 구해줄게.”
티르의 말에 슈라는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들려온 말에 그런 기미는 싹 사라지고 말았으니…….
“슈라님, 이분께서 아름다운 친구 분을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하시는군요.”
“엇,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어, 슈라!”
“아, 먼저 들어가라, 꼬마. 우린 갑자기 볼 일이 생겨서…… 크흠.”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주고 여자와 이라즈를 따라 냉큼 사라지는 슈라의 등짝을 보며 티르는 절래절래 고개를 저어버렸다. 설마 했는데 저들은 정말로 ‘끔찍이도‘ 여자를 좋아하는 거였다.
“난 왜 빼놓고 가는 거야? 나도 남자인데.”
“따라가고 싶으신 거였습니까?”
“헛!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였어.”
이럴 줄 알았으면 바라가 생일 선물로 여자 노예들을 잔뜩 안겨줄 때 얌전히 성에 눈 뜰 걸 그랬다. 남자 나이 열여섯. 아직도 여자를 모른다는 건 어쨌거나 조금 창피한 일이긴 했으니까.
“더 돌아보시겠습니까?”
“응? 아, 시장은 다 봤으니까 신전 쪽으로 가볼까?”
“그러시죠.”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하라는 피곤하지도 않은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쩐지 하 투란에 들어선 이후 더 생생해진 것만 같은 그였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티르는 문득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하라, 피곤하지 않아?”
“전혀. 괜찮습니다. 피곤하시면 그만 여관으로 돌아가 쉬시지요.”
“아니, 나도 괜찮아. 근데…… 크흠, 내 형이란 사람의 이름은 뭐지?”
“……루칸 님이십니다.”
“성은?”
“샤 루칸 카이 가르시바즈. 그리고 머잖아 시야마크 아리만이라는 성을 얻게 되실 겁니다.”
“쿨럭!”
생각보다 긴 풀네임에 놀란 건지 아니면 앞에 떡하니 달라붙어 있는 샤(shah)라는 단어에 놀란 건지 잠시 구분이 가질 않았다. 티르는 마른기침을 몇 번 토해내다 벌건 얼굴을 하고 물었다.
“샤(shah)?”
“예.”
“엘룬의 왕가라는 그 샤(shah)?”
“그 샤입니다.”
“……!”
쌍둥이니 자신이라고 성이 다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그도 샤(shah)가 된단 말인가? 기가 팍 죽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나도?”
“정확히는, 샤 티르메네스 스피타마 가르시바즈. 그리고 시야마크 아리만이라는 성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십니다.”
“스피타마?”
“티르메네스님께 허락된 권위의 이름입니다.”
“권위?”
“……스피타마 일족을 휘하에 두실 수 있습니다. 루칸 님께서 티르메네스님을 보호하기 위해 내리신 선물입니다.”
보호인지 보호를 빙자한 감시인지는 나중에 판단할 일이다.
티르는 당장 난감함을 느꼈다. 아직 엘룬의 샤라는 단어가 가져온 충격도 극복하지 못했는데 스피타마 일족이니 뭐니 해서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모든 것은 그를 만나고 난 뒤에 판단하겠어. 하라, 그는 어디에 있지?”
“수도인 자불리스탄입니다. 하루정도 말을 달리면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알았어. 그때까지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줘.”
“명이시라면.”
순간 목을 죄어오는 불안하고 답답한 기분을 떨쳐버리려는 듯 티르는 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기분 탓인지 오늘따라 더 버석버석 메마른 느낌이 아주 싫었다.
‘여신의 신전으로 가면 조금이라도 물이 있겠지.’
여신이 사라졌는지 혹은 잠들었는지 알길 없다지만 그래도 그녀를 섬기는 신전이니 샘 정도는 있으려니 기대했다. 당장이라도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뿐이라 티르의 걸음은 당연히 서두른다는 기색이 느껴질 정도로 빨라지고 있었다.
‘시야마크 아리만이라는 이름엔 관심이 없으십니까?’
티르의 작은 등을 바라보는 하라의 시선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당장 주어지지 않고 두 형제를 향해 그 권리만 먼저 들이밀어진 성은 쟁취를 위한 혈투의 상징이다. 그것을 작은 왕자는 알아채지 못했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주인은 작은 왕자를 끔찍이도 그리워하며 아끼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혈투 때는 모든 이성이 사라지게 되므로. 결국 왕좌 대신 주인은 아끼던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아는 만큼 그의 마음은 끝을 모르고 점점 더 찹찹해지기만 했다. 그때였다. 흔들리는 하라의 눈에 저만치 앞서 가는 티르의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다가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것은?’
한눈에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본 하라는 고민하던 것도 잊고 한걸음에 서둘러 달려갔다.
“위대하고 존귀하신 분이시여, 이 미천한 것이 당신의 발에 입 맞출 수 있도록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에?”
“아름다고 전능하신 어둠의 군주께 경하를 올릴 수 있도록…….”
“그만!”
갑자기 다가와 얼굴도 들지 못하고 넙죽 오체복지를 하는 사내 때문에 티르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전신에 검은 기운을 옷처럼 휘휘 감고 있다거나 길게 올라간 이상한 귀를 가졌다는 건 둘째 문제였다.
문제의 사내는 방금 전까지 너덜너덜한 산양의 시체 하나에 이빨을 박고 게걸스럽게 뜯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얼굴과 앞섶은 온통 피투성이다. 길게 삐져나온 송곳니가 햇볕을 받아 하얗게 번뜩이는 것을 티르는 분명히 목격한 것이다.
“저, 저, 저…….”
“진정하십시오, 티르메네스님.”
“하라, 저 사람은 아무래도 정상이…….”
“미천한 존재일 뿐입니다. 주제를 모르고 감히 다가서다니요. 티르메네스님을 대신해 제가 벌을 내리겠습니다.”
채 말을 잇기도 전에 하라는 땅에 얼굴을 박고 있는 사내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더니 시린 얼굴로 한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감싸 쥔다.
“네 죄를 알겠느냐?”
“사, 살려주십시오. 저는 단지…….”
“닥쳐라! 마물에서 간신히 벗어난 주제에 감히 군주께 무례를 범하다니. 소멸하라!”
파삭!
냉정하게 흘러나온 낮은 말 만큼이나 시린 빛이 사내의 몸을 순식간에 할퀴고 지나갔다. 섬광처럼 지나간 날카로운 빛의 궤적을 티르는 놓치지 않았다.
-끄아아아아…….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사내의 형상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가 있던 자리엔 시체 대신 시커먼 재 한줌만이 소복이 남아 있었다.
“하, 하라?”
“잊으십시오, 티르메네스님. 그저 생각할 줄을 모르는 미천한 마물이었을 뿐입니다.”
“나에게 어둠의 군주라고 했다.”
“…….”
“그게 무슨 뜻이지?”
“그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자가 나를 아는 것처럼 군주라고 불렀어. 말해봐라, 하라. 나는 누구지?”
충격어린 물음에 이번에는 하라도 입을 다물었다.
다각!
낮게 일다 가라앉는 모래먼지를 따라 메마른 바람이 불었다. 말발굽에서 시작된, 어두운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거리를 한바탕 휘돌고 사라진다.
-티르메네스…….
그때까지 조각처럼 굳어있는 둘의 모습을 멀리서 자하크가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