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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에게 바치는 델피니움



1화



1회차



‘여기가 어디지?’

익숙한 천장. 아주 새하얗고 호화로운 방에서 한 여자가 눈을 떴다. 익숙하다. 정말 아주 익숙한 장면. 그러나 이 풍경은 지금 볼 수 있을 리가 없는 광경일 텐데? 말도 안 되는 풍경이 보인다고 생각한 여자는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 방을 살폈다.

“내 방이잖아?”

아주 긴 꿈을 꾸었다. 정말 너무 생생하고 끔찍한 꿈을 꾸었어.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녀의 방에 있는 커다란 거울 앞으로 달려가 찬찬히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거울 속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은발을 늘어뜨린 천사처럼 눈부신 여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을 보고 있다. 불안한 듯 흔들리는 혼란스러운 호박색 눈동자가 위로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안쓰럽다. 그리고 거울 속의 여자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따라 그녀의 목을 만져 보았다.

“멀쩡하잖아?”

그럴 리가 없다. 틀림없이 자국이 남을 만큼 세게 쥐었는데 이렇게 멀쩡하다니? 그리고 거울을 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어딘가 살짝 어려 보이는 듯한 기분. 무엇보다 이 장소, 과거 그녀가 성녀라 불리던 시절 이용하던 이 방이 이상하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주위를 둘러본 여자는 지나치게 익숙한 풍경의 방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너무 똑같아서. 기억하고 있던 그 방과 너무 똑같아서. 성스럽고 고귀하게 느껴지는 분위기와 반대로 여자는 불안함, 두려움, 초조함, 그런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모습으로 자신의 팔을 끌어안았다.

‘다시는 올 일이 없다고 들었는데? 아니면 돈을 써서 몰래 들여보냈나? 자살 시도를 했다고 알려지면 곤란하니까? 하지만 숨길 거라면 왜 일부러 여기로?’

그리고 불안에 떨던 그녀는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깜짝 놀라 화들짝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나 곧이어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당황했다.

“아르모니아 님. 깨어나셨으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오늘은 봄의 세례식이 있을 예정이니 바쁘게 움직여야 합니다.”

“어?”

여자는 깜짝 놀라서 잠깐 멍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봄의 세례식?”

그리고 자연스럽게 방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아주 익숙한 얼굴임을 깨닫는다. 모두 똑같은 모양의 새하얀 옷을 입은 여자들. 그녀들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거울 앞에 서 있는 여성의 얼굴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간단한 식사를 가져다주며 머리를 빗겨 주었다.

“이번 세례식은 특히 왕족 출신 아이들이 많아 평소보다 화려하다고 하더군요. 아마 연회도 훨씬 길어질 겁니다.”

‘뭐지?’

아르모니아라 불린 여자는 이들의 행동, 이들의 대화가 신경 쓰여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대화를 알고 있다. 이 상황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그러나 꿈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한 감각. 그래서 그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는 여자를 향해 물었다.

“저기, 제가 지금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런데……. 올해가 몇 주기였죠?”

“비스타리아 171주기입니다.”

“그리고 봄?”

“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무리 그래도 봄인 걸 잊으시다니?”

아르모니아는 말도 안 되는 현실의 상황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 버렸다.

‘171주기? 봄?’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틀림없이 무더운 늦여름 속에서 뜨겁고 기분 나쁜 비를 맞으며 제 목을 졸랐으니까. 끝나 가는 여름은 지나치게 더웠으며 그 비는 숨이 막힐 듯이 갑갑했다.

“오늘은 바쁘니 서두르셔야 해요.”

“미안해요. 아무래도 제가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라.”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치장을 끝내자마자 익숙한 방을 나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그녀는 새하얀 천사의 분신처럼 보인다. 새하얀 베일, 새하얀 드레스, 새하얀 햇살을 받으며 빛나는 아름다운 이 여인은 바로.

“성녀님. 이리로.”

이 나라, 비스타리아의 성녀 아르모니아.

‘이건 대체 뭐지?’

기억에 있는 한순간을 지나가며 그녀는 아무도 모르는 혼란 속에 빠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내가 꿈을 꾸었나? 아니면 이게 꿈인가? 죽어 가면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있는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나는 왜 이 상황을 기억하고 있지?’

사람들의 재촉과 함께 웅장한 발코니에 선 그녀는 기억에 있던 영광스러운 순간을 맞이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백성이 그녀를 찬양하며 우러러보는 광경을.

“성녀님!”

“부디 저희에게 축복을!”

“아르모니아 성녀님!”

세례식을 맞이하며 들뜬 백성의 환호. 그녀는 이 광경을 기억한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보았던 장면이니까. 그러나 다시는 이 자리에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장면.

“이게 대체…….”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꿈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 왜냐하면 그녀는 이제 성녀가 아니니까. 아니었을 거다. 이미 그녀는 성녀의 자리에서 물러나 인간이 되었을 텐데.

“171주기라면 3년 전이잖아?”

거대한 함성에 파묻혀 그녀의 중얼거림은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백성을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 짓는 대신 그녀가 기억하는 미래를 떠올렸다. 3년 뒤의 미래. 그녀가 인간이 되었던 순간부터 죽기 전까지의 미래. 성녀의 자리에서 물러나던 날 왕은 그녀를 불러 새롭게 시작하는 인간의 삶을 축복했다.



“아르모니아 님. 오늘로 당신은 성녀의 자리에서 물러나 인간으로 돌아갑니다.”

비스타리아 왕국에는 왕과 동등한 권력을 지닌 성녀가 존재한다. 왕권을 상징하는 왕과 반대로 종교를 대표하는 존재. 정치나 경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으나 성녀의 존재는 절대적이며 굳건한 백성의 믿음이 함께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치는 않다.

“네, 알고 있어요. 이제 저는 성녀가 아닌 평범한 인간. 다음 성녀가 저를 대신해 모두의 마음을 지탱해 줄 테니 저는 아무 걱정 없이 물러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그녀는 천사처럼 새하얗게 웃으며 그리 대답했다. 성녀로 존재할 수 있는 기간은 20살이 될 때까지. 새롭게 선택받은 어린 성녀를 데려오게 되면 그전의 성녀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고 성녀로서 자란 그녀도 그것을 받아들이니 문제가 있을 리 없다.

다만 이렇게 성녀의 자리에서 물러난 여자들은 실로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데 왕이나 왕자, 혹은 귀족 출신의 자제와 결혼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평범한 생활을 선택하겠다며 마을로 나가 사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는 나라를 떠돌며 여행을 하는 모험가가 된 자가 있는가 하면 성욕에 눈을 떠 여러 남자를 끌어들이는 창부가 된 자도 있었으며 정말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사는 자, 계속 신께 충성을 맹세하여 홀로 기도를 올리며 살아가는 자 등 실로 다양한 성녀가 존재했다. 그리고 아르모니아는 경우는.

“당신을 제파스 가문의 자제와 맺어 드리고 싶습니다. 마침 당신과 같은 나이에 아주 준수한 외모의 아름다운 청년이죠. 틀림없이 성녀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당신께 어울리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성녀의 자리에서 물러난 여인은 더 이상 왕과 같은 권력이 없다. 그러니 왕의 명은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아르모니아는 성녀의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성녀로서 자라 온 그녀는 그것이 이치에 맞는 도리라고 생각하였으니까. 그렇게 만난 제파스 가문의 자제는 들은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그녀와 같은 나이의 아주 준수한 외모의 청년이었다. 틀림없이 그녀도 몇 번 얼굴을 보아 기억하고 있는 사람.

“아르모니아 님. 당신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어 실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제 소개를 하지요.”

청년은 성녀의 은발과 아주 잘 어울리는 금발과, 천사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와 아주 잘 어울리는 녹색 눈동자를 지녔으며, 새하얀 미소가 눈부신 그녀처럼 화사하게 웃을 줄 아는 호쾌한 인상의 남자였다.

“아인즈 제파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르모니아는 회상을 멈췄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는 무리 속에서 기억하기도 싫은 녹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기에.

‘아인즈!’

기억 속의 녹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은 그녀는 얼어붙은 몸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신이 장난이라도 친 게 아닌 이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이게 정말 현실이라면 난 꿈을 꾼 건가? 아니면 과거로 돌아온 건가?’

꿈을 꾼 게 아니라면 그녀는 틀림없이 몇 시간 전까지 3년 뒤의 늦여름에 존재했을 거다. 그런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어떻게 사람이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로 올 수 있단 말인가? 성녀로서 살아온 세월이 10년을 훌쩍 넘지만 그녀는 자신이 동화에 나오는 마법사처럼 특별한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다. 모든 성녀가 그러했다. 선택받은 성녀의 공통점이라고는 인간답지 않은 아름다움과 순결한 여자아이라는 것. 신이 선택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말이 있기는 하나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른다.

‘정말 돌아온 건가? 정말 내가 과거로 돌아온 건가?’

아르모니아는 시끄러운 함성 속에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것이 나의 성녀로서의 힘이라면?’

억울한 죽음을 불쌍히 여긴 신께서 그녀를 과거로 돌려보내 주신 걸까?

‘하지만 왜 지금 이 순간으로?’

영광스러웠던 날. 그러나 특별하지 않은 순간. 다시 태어난 순간으로 돌아간 것도 아닌 어정쩡한 3년 전의 어느 날이다. 정확히 딱 3년 전의 날도 아니고 그냥 시간을 되돌리다 아무 구간에서 딱 멈춘 그런 느낌이라고 말하면 될까?

“성녀님 왜 그러십니까?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