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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의기양양했던 뱀파이어는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뭐에 놀랐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빛이 들어오는 골목 앞을 노려보았다.

“…….”

이를 들썩이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마치 뭔가에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뱀파이어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장미를 두고 순식간에 골목 뒤로 사라져 버렸다. 장미는 벽에 붙은 그대로 굳어 있다가 한참 만에야 겨우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헉! 헉……! 주, 죽는 줄 알았네!”

장미는 놀란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며 어느새 떨어뜨린 노트북과 휴대폰을 챙겨 들고 급하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보복당할까 봐 차마 직접 신고는 할 수 없었던 장미는 봉봉 비어 직원에게 가게 근처에 누가 쓰러져 있다고 알린 뒤 사무실로 도망치듯 돌아갔다.

대리는 왠지 경직되어 돌아온 장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장미가 노트북을 켜 장부 정리를 시작하자 이내 걱정스러운 기색을 지우고 호기심을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대리는 아무렇지 않게 장미의 옆으로 다가와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끊임없이 감탄하고 감동했다.

“와, 진짜 장미 씨 잘 왔네! 잘 왔어! 대체 그동안 어디 있다 이제야 온 거야!”

별거 아닌 일에도 수선을 떠는 대리의 모습에도 장미는 여전히 미세하게 굳은 얼굴을 한 채 묵묵히 자판만 두드렸다.

팀장은 오후 5시쯤이 되어서 돌아왔다. 대리는 팀장에게 오늘 하루 장미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고 도움이 되었는지를 한 5배쯤 부풀려서 칭찬했다.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요. 이렇게 도움 되는 직원은 처음이에요. 저 완전 감동했잖아요. 그 많은 걸 벌써 다 끝내 놨어요. 정말 대단해요! 대단해!”

팀장의 반응은 심드렁했지만 대리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결국, 대리는 장미의 환영 인사도 할 겸 오늘을 기념하기 위하여 간식을 사 오겠다면서 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대리가 빠져나간 사무실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팀장은 이제야 살겠다는 듯 의자에 털썩 앉더니 책상에 다리를 올리며 늘어졌다. 그와 둘만 남아 있는 상황이 약간 불편했던 장미는 덮은 노트북 위로 올린 손가락만 어색하게 꼼지락거렸다. 오늘 할 일을 다 마쳐서 마음 편히 붙잡고 있을 만한 것이 더 없었다.

“야.”

그가 문득 장미를 부르며 한껏 젖히고 있던 머리를 세웠다. 장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 그는 약간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너 뭐 하고 다녔기에 몸에 피 냄새가 뱄냐?”

“네?”

장미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되물었다. 이어서 그는 싸늘한 얼굴로 무척이나 실례되는 질문을 했다.

“생리해?”

‘우와, 성희롱.’

하지만 팀장 본인은 전혀 자각이 없어 보였다.

장미는 저도 모르게 꽉 쥐어 버린 주먹을 책상 아래로 내려서 숨겼다.

‘난 인간이 아니다. 난 인간이 아니다. 인간처럼 반응할 거 없다고.’

사실 인간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불쾌한 상황임엔 틀림없지만 장미는 어차피 이런 상황에 자신이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녀는 뱀파이어 사회를 등지고 인간 사회에 더 가깝게 스며들어 인간처럼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모든 제도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란 늘 그런 거고 불합리한 상황을 이미 수도 없이 겪어 왔던 장미는 이 상황에 굳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억지로 자가 세뇌를 했다.

“아니요.”

“흠.”

애써 담담하게 대꾸하는 장미를 향해 팀장은 여전히 뭔가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비음을 흘렸다.

“너 말이야.”

팀장은 가늘어진 눈빛을 장미에게 고정한 채 책상 위에 올렸던 두 다리를 내렸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을 벗어난 그는 장미가 앉은 책상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장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왜인지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나 섬뜩했다.

‘나한테 피 냄새 어쩌고 자시고 할 군번이 아닌데.’

그는 마치 연쇄살인범 같은 분위기가 나니까 말이다. 장미가 겁에 질려 의자째로 슬금슬금 몸을 뒤로 뺄 무렵 마침 사무실 문이 활짝 열리며 대리가 돌아왔다.

“다녀왔……! 헉!”

활기차게 입을 열었던 대리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경악한 얼굴로 헛숨을 크게 들이켰다. 대리는 재빨리 안으로 달려 들어와 장미의 앞을 지키듯 막아서며 팀장에게 따지듯 외쳤다.

“뭐 하시는 거예요!”

“내가 뭘?”

“아, 진짜. 팀장님!”

“아씨 뭐! 왜!”

대리는 손에 든 봉투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팀장의 팔을 잡아끌어 사무실 옆에 있는 비품실로 들어갔다. 자기들끼리만 나눌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지만 사무실이 작은 데다 컨테이너 건물이라서 기본 방음 자체가 형편없었다. 하물며 장미는 보통 사람보다 감각이 조금 더 뛰어난 뱀파이어였기에 본의 아니게 그들의 얘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대리의 한숨 소리로 시작되었다.

“아, 팀장님 진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뭘?”

“모처럼 괜찮은 직원이 들어왔는데 왜 또 건들지를 못해서 안달이세요.”

“내가 뭘 어쨌다고 지랄이야!”

“위협하셨잖아요.”

“아닌데?”

“제 눈이 옹이구멍이라고 착각하시면 아주 곤란합니다.”

“뭔 개소리야.”

떫은 말투의 팀장에게 대리는 굴하지 않고 간절하게 부탁하듯 말했다.

“제발. 제에발. 얌전히 두세요. 손끝 하나 건들지 마시고 곱게. 그냥 곱게곱게 놔두세요. 네? 아니, 왜 애꿎은 직원을 자꾸 괴롭히려고 하냐고요. 제발 이러지 맙시다. 팀장님.”

“아. 잔소리 진짜. 짜증 나게.”

“네? 네?”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고 얼마 후 팀장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비품실을 나왔다. 그 뒤를 따라 나온 대리가 장미를 향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분식 먹자―!”

그리고 그날 대리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장미를 공략해 근무한 지 하루 만에 그녀의 호칭을 장미 씨가 아닌 장미로 부르게 되었다.



거지 같은 인성이라고 예상되는 팀장의 존재가 거슬리긴 했지만, 장미는 글로벌 앤티크 주식회사에 금세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었다. 대리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외국 무역 회사 계열의 유통 사무소로 본사의 허가를 받아 들여온 물건들을 중개자에게 파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규모가 작아 그런가 팀장과 대리는 이곳을 회사가 아닌 ‘가게’라고 칭했다. 물론 부르는 거야 본인들 마음이니 장미는 별생각 없이 그러려니 했다.

1층 창고에 들이는 물품들은 오로지 대리만 확인했고 장미는 볼 수가 없었다. 장미가 하는 일은 대리가 물건들을 팔고 들이며 작성된 영수증들을 주면 그것들을 장부에 기록하는 것과 팀장이 창고에서 가져다 쓴 물품들을 대리가 정리해 주면 또 그것들을 비용으로 처리하는 일이었다.

본 적 없는 물품들은 이름도 죄 암호 같은 형식이었다. 장미는 이미지 암기가 되지 않아 초반엔 많이 헷갈렸었지만 여러 번 하다 보니 금방 적응되었다. 장미가 간혹 실수해도 상냥하게 알려 주고 고쳐 주는 대리의 도움이 컸다.

대리는 웃음이 많고 친절하며 늘 정중하게 장미를 대했으므로 일하는 내내 함께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물론 팀장이 사무실에 있을 땐 곧잘 불편해졌지만 대리가 유들유들하게 팀장을 잘 다루는 편이라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연상이라지만 소년처럼 앳되고 뽀송뽀송한 대리는 장미가 여태까지 알바하며 겪어 봤던 상사 중에 가장 괜찮은 사람이었다.

성격 더러워 보이는 팀장이 그럭저럭 대리의 말을 따라 주는 것도 늘 상대와 당당하게 마주 보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예의 바름 때문인 것 같았다. 대리는 팀장에게 소리 높여 잔소리를 하더라도 그 표정과 눈빛엔 늘 존경심을 담고 있었다.

장미가 보기엔 솔직히 좀 특이했다. 대체 저 남자의 어느 부분을 존경하는 건지 장미로선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사람이란 입체적인 거니까……. 대리님의 눈에만 보이는 저 남자의 좋은 면이라는 것도 있을 수 있겠지.’

장미는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므로 대리의 태도에 대해선 별로 따지고 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장미 개인적인 감상으로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그야 사무실의 팀장이란 직함을 달고 있긴 하나 그 남자는 장미가 보기에 그냥 성격 나쁜 놈팡이 혹은 백수 같았다. 사무실에서 본 그의 모습은 대체로 책상에 발을 올린 채 맥없이 졸거나, 소파에서 졸거나, 비품실에서 졸거나, 또는 지루한 얼굴로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가 사무실 안에서 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정말로 단 하나도.

대신 그는 출장과 외근이 무척이나 잦았는데 그렇다고 그가 무슨 업무를 보는 건지는 장미로선 알 수 없었다. 대리에게 물어봐도 웃으며 얼버무릴 뿐이라 그저 의심스럽다고만 여기고 넘겨야 했다.

그는 한 번 나가면 기본 대여섯 시간 정도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갔다 들어오면 자주 여자 향수와 화장품 냄새를 풍겼다. 근무 첫날부터 여자 끼고 시시덕거리는 그를 목격했던 장미는 그 기억을 바탕으로 어쩌면 그가 호스트나 노래방 청년 일을 겸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니까.’

장미는 문득 자기도 모르게 떠오른 그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슥슥 지우며 오늘의 업무를 마무리했다. 프린트한 종이들을 책상에 탁탁 쳐서 가지런히 정리한 뒤 노트북을 닫고 기지개를 켜 뻐근한 어깨를 당겨 풀었다.

그러던 중 장미는 문득 사무실 바깥에서 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와 자기도 모르게 귀를 쫑긋 기울였다. 대리는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고 정말로 중요한 비밀 이야기인지 평소보다도 훨씬 더 작게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제법 밝은 장미의 귀에도 그저 웅얼거리는 소리로만 들렸다.

그러다 문득 ‘소탕’이라는 단어와 ‘팀장님’이라는 말이 희미하게 들렸다. 장미는 쭉 폈던 팔을 내리고 의식적으로 그쪽에 관심을 끊었다. 어차피 여기서 평생 일할 것도 아니고 고작 알바생이 많이 알아 봤자 뭐 하겠나 싶었기 때문이다. 장미는 제가 맡은 업무 외로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맡겨진 업무가 끝나 장미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대리가 비로소 긴 통화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대리는 가방을 든 장미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집에 가려고?”

“네. 내일 뵐게요.”

“그래. 조심히 가고 내일 보자.”

“안녕히 계세요.”

“응. 수고했어.”

장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들자 대리는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장미가 집에 거의 도착할 때 즈음 휴대폰이 울렸다. 이내 전화를 받자 수화기 안쪽에서 미진의 목소리가 약간 다급하게 들려왔다.

― 너 알바 끝났지?

인사도 없이 대뜸 묻는 미진에게 장미는 여상히 답했다.

“응. 지금 집에 거의 다 왔어.”

― 잘됐다. 너 나랑 파티 갈래?